[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4. <소련 붕괴의 순간>

D-29
8월 18일, 라이사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 신문들을 훑어본 뒤, 수첩에다가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연방 조약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관료적인 통일 국가가 되살아나고 있다고 울부짖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라가 모너지고 있고 산산조각나고 있다고, 조약의 토대들이 모호하고 막연하다고 말한다. 그런 연방 조약이 왜 필요하겠는가?” 라이사의 서술은 통찰력이 있었다. 민주러시아의 자유주의적 반공주의자들은 연방 조약에 대해 가장 목소리를 높인 비판가들이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72~373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고르바초프는 “비상 통치 도입은 파멸, 즉 내전으로 가는 길”이라고 결론 내렸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75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고르바초프는 정부 인사나 측근이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자신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했다. 이 점에서 그는 돌이킬 수 없이 착각했다. (…) 고르바초프가 크림반도로 떠나던 날(1991년 8월 4일), 나중의 수사에서 드러났듯이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수립하고 국가의 비상사태를 선포할 결정에 관한 모든 서류가 구비되어 있었다.” 이 서류 작업은 1990년 봄에 리투아니아에 대한 제재 이후로 준비해왔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도 그에 관해 알고 있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75~376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그(크류치코프)는 권력에 굶주린 모험가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관료였다. KGB 의장은 고르바초프의 혼성적 연방이 안정적 국가와 경제의 기반이 되리라고는 여길 수 없었을 뿐이다. 그가 아는 모든 상황이 정반대를 가리켰으며, 옐친의 러시아는 한때 소련이었던 것을 집어삼키려 했다. 크류치코프는 ‘외국의 개입’에 대해 편집증적이긴 했지만, 중앙 계획 경제의 혼란스러운 해체에 관해서는 옳았다. 이러한 상황 인식으로 인해 그는 연방 조약 서명은 소련 국가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일은 막아야 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76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1991년 8월 18일) 나라 최고의 권력자이자 핵무기 ‘버튼’을 통제하는 소련군 통수권자가 크류치코프의 명령으로 모든 연락이 차단된 것이다. 고르바초프가 아내에게 헐레벌떡 달려갔더니 그녀는 혼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뭔가 나쁜 일이, 어쩌면 끔찍한 일이 일어났어”라고 고르바초프가 말했다. “그들이 나와 만남을 요구하고 있어……. 모든 전화선이 끊겼어. 알겠어? 이건 격리야! 음모일까? 억류인가?” 고르바초프는 충격을 받은 라이사를 침실로 데려갔다. 그는 그곳이 도청에서 안전하여 밀담을 나누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생각했다. “난 어떤 책략이나 거래에도 동의하지 않을 거야. 협박이나 위협은 통하지 않아.”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덧붙였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가족 전체가 큰 대가를 치러야 할 수도 있어…….” 라이사는 “이건 당신 결정이야.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난 당신 편이야”라고 대답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82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고르바초프가 고대하던 휴가는 느닷없이 중단되었다. 그리고 그날 훨씬 중요한 그 무엇이 툭 끊어졌다. 떨어지지 않고 중간에서 균형을 잡으며 위태로운 줄타기를 할 줄 알던 정치적 마법사 고르바초프가 끝났다. 그는 몰랐지만, 그것은 또한 그가 미국과 맺은 모든 국제적 합의와 위대한 민주적인 유럽 공동의 집에 대한 환상의 끝이기도 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84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그들은 ‘핵가방(nuclear briefcase)’을 맡고 있는 KGB 장교 두 명도 함께 데려갔다. 이 순간부터 사흘 동안 소련 전략 핵전력의 지휘 통제권은 야조프와 크류치코프의 수중에 있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84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그보다 중요한 것은 대대적인 군사력 과시였다. 난생처음으로, 모스크바 시민들은 겁주기용으로 시가지에 줄줄이 늘어선 탱크를 목격했다. 이는 충격이지 않을 수 없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0장 음모, 387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뒤따라오시는 분들 얼른 10장과 11장 '훈타'로 따라오셔야 합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내일 7월 21일 화요일도 11장 '훈타'를 마저 읽습니다. 저는 소련의 8월 쿠데타와 한국의 12.12 쿠데타 그리고 12.3 계엄을 자꾸 비교해보게 되더라고요. 이 책의 핵심은 몰락과 파국이 그렇게 멀리 있지 않다는 감각을 일깨우는 것이랍니다. 주보크는 묻는 거죠. 평온해 보이는 당신이 딛고 선 체제는 그렇게 안정적일 것 같아? 그는 역사가 현재를 정당화하는 일이 아니라, 불온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역사학자랍니다.
연구를 위해 모스크바에 방문하고 있던 미국 학자 빅토리아 보널(Victoria Bonnell)은 다음과 같은 회상했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들, 즉 신중함과 대범함, 희망과 절망, 현장에 있다는 흥분과 자신과 가족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은 지나치게 모순되어 결정적인 행동을 할 수 없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1장 훈타, 390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호소문은 고르바초프의 복귀를 요구했다. “쿠데타는 …… 전 세계 앞에 소련의 신임을 떨어트리며, 세계 사회에서 우리의 위신을 무너트리고, 냉전과 고립의 시대로 되돌아가게 한다.” 옐친의 딸 타티아나가 낡은 타자기를 가져와 독수리 타법으로 초안을 타이핑했다. 그러고 나서 가정용 팩스기로 서방 기자와 대사관, 국제 단체에 보냈다. 모든 메시지가 탈 없이 전송되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1장 훈타, 392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그때 옐친의 두 번째 위대한 순간이 찾아왔다. 안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부르불리스와 다른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그는 의회 건물 앞 광장에서 고르자코프와 경호원들만 대동한 채 차에서 내렸다. 그는 부대 지휘관과 말을 주고받은 뒤 탱크 위로 올라갔다. 이 단상에서,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읽었다. 그는 “우익, 반동, 반헌법 쿠데타”에 맞서 총파업을 호소했다. 군중 가운데 누군가가 내전이 벌어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옐친이 대답했다. “군은 인민에 맞서지 않을 것이다!” 엄청난 허세였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1장 훈타, 393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기억하시나요? 지난 달(2024년 6월)에 읽었던 『냉전』에서 베스타가 "옐친의 유일했던 위대한(멋진!) 순간"이라고 비아냥거렸던 그 장면입니다. :)
월요일(8월 19일) 오전 5시 30분에 잠에서 깼을 때, 부시는 후세를 위해 그의 생각을 녹음하기로 했다. (…) 그다음에는 고르바초프로 넘어갔다. 친구 미하일이 음모에 연루되었을 수도 있다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유머 감각, 그의 용기를 생각한다. …… 당신을 지지한 것이 자랑스러우며 TV에서 온갖 전문가란 사람들이 나와서 뭐가 문제였는지 이러쿵저러쿵하겠지만, 당신은 당신의 나라를 위해 옳은 일을 했고 강하고 훌륭했다.” 이것은 작별 인사처럼 들렸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11장 훈타, 394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부시는 혼자서 고르바초프에게 작별 인사를 한 것이죠;
1991년 8월 쿠데타를 보면, 다행히 해프닝(역사는 한 번은 비극, 한 번은 희극)으로 끝나긴 했지만, 고르바초프는 자기의 무능과 방만 때문에 자기와 가족의 생명은 물론이고 소련 전체를 끔찍한 유혈 사태로 몰고 갈 뻔했죠. 물론, 그 자신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 정말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겠지만요. 그래도, 마지막까지 쿠데타 세력에게 저항한 결기는 인정합니다. 그는 항상 진심이긴 했었나 봐요;
4장을 읽고 있지만 제가 계속 느끼는 것은 고르바초프의 과제가 너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고르바초프는 민주적인 사회주의를 추구했죠. 하지만 그 비전을 지지하는 기반이 너무 약해보입니다. 소련인들은 사회주의를 내던진 서구적인 민주주의를 원하는 이들과 구체제를 지키고자 하는 이들로 나뉘었고 민주적인 사회주의의 비전을 믿는 이는 소수인 것 같아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제가 제대로 되는 개혁이 가능했을까요? 안드로포프의 개혁은 성공했으리라는 것에 객관적 근거가 충분한가요? 많은 사람들은 소련의 개혁이 좌절되면 과거의 체제로 회귀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개혁이 혁명과 체제 전복으로 이어지거나 개혁을 폭력으로 억압하고 구체제로 후퇴하는 것 외에 제3의 길이 가능했을지 계속 의문이 듭니다. 진도를 맞추지 못하고 앞부분을 읽으면서 의견을 얘기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문외한에 가까워 어떤 확신이 있는 건 아니고 주관적 감상에 가까운 의견들이니 그냥 참고로 보아 넘겨 주셨으면 합니다.
제 의견에 대해 하나의 근거를 얘기해보자면 동유럽 국가들에선 소련의 통제가 사라지자 공산주의 정권이 다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련 역시 분리되고 체제가 전복될 운명이었다는 방증 아닐까요? 공산당 서기장 직위를 물려받은 고르바초프는 체제 수호를 위해 자유화, 민주화의 움직임을 억압하거나, 자기 부정을 하며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대안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쪽 다 고르바초프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민주적인 사회주의의 비전을 추구한 것이고, 지나고 나서 보면 현실에서 통할 수 없는 이상의 가능성을 믿고 추구한 것이 고르바초프의 실패의 근본 원인이지 않을까 합니다.
@오도니안 님과 비슷한 논평이 15장 '청산'에서 나와요. 1991년 12월에 소련이 해체되고 나서 고르바초프가 권력자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상황에서 미국 국무부 장관 제임스 베이커가 현지 상황을 직접 확인하러 방문합니다. 이때 베이커가 고르바초프와 함께 페레스트로이카를 기획하고 추진했고, 그 과정에서 자기와 우정을 쌓게 된 전 소련 외무부 장관 셰바르드나제과 대화를 나눕니다. 고르바초프의 최측근이었고 오도니안 님께서 고르바초프에게 호감을 가지는 그 모든 일을 함께 했던 셰바르드나제의 회한과 후회를 베이커가 위로하는데요. 그런 평가가 오도니안 님과 아주 흡사해서 옮겨 봅니다. 나중에 직접 읽으시면서 확인해 보세요. 그리고 참고로 15장 뒷 부분에 나오는 베이커와 함께 소련 측 미국 파트너였던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스코크로프트의 회고록의 한 문장(속내를 드러낸)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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