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4. <소련 붕괴의 순간>

D-29
글로벌 금융 기구들은 국가 주권과 자존심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이전 초강국의 엘리트와 국민은 갑자기 세계 먹이사슬의 밑바닥 언저리에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결론, 596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아닌 게 아니라 CIS는 연방의 해산을 가리는 위장에 불과했다. 국내적, 국제적 시장 세력들과 지정학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통합이 아닌 경쟁으로 몰아갔다. 그리고 옛 로마 경구 ‘바이 빅티스(Vae Victis)’, 즉 “패자는 비참하도다”라는 말은 변함없이 진실한 예언으로 들어났다. 약하고 가난하고 패배한 자들의 운명은 여전히, 강하고 부유하고 승리한 자들의 전차를 쫓아가 결국 받아들여지거나 거부당하는 것이었다. 유럽연합과 NATO는 권력과 부, 안보의 구조들을 규정했다. “유럽으로 복귀”하겠다는 한결같은 결의를 보인 발트 3국만이 포스트소비에트 공화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성공했다.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그루지야도 그토록 원하는 서방의 꿈나라 밖에 남았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결론, 598~599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러시아의 역사는 소련이 무너지고 고작 9년 만인 1999년에 또다시 방향을 틀었다. 그해에 건강과 권위가 완전히 망가진 옐친은 1991년에 훈타를 물리치는 것을 도왔던 젊은 전직 KGB 장교 블라디미르 푸틴을 후계자로 골랐다. 단 몇 년 만에 푸틴은 소련 붕괴가 낳은 방대하고 깊은 환멸과 민심 이반을 활용했다. 구소련 국가가 해체된 것을 무심하게 혹은 공감하며 지켜봤던 사람들이 이제는 경제적, 사회적 안정을 보장할 강력한 러시아 국가 건설을 원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결론, 599~600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러시아인들은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라 말하곤 한다. 그 말은 일어난 일은 일어나버렸다는 뜻이다. (…)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없었다면 소련은 10년을 더 버티다가 훨씬 더 폭력적으로 붕괴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련이 안드로포프가 구상했던 대로 더 보수적인 방식으로 개혁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도 있다. 심지어 당 노멘클라투라와 MIC도 포함해 소련 엘리트 내부에는 변화를 위한 상당한 잠재력이 있었다. 소련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돈의 힘은 소련 엘리트의 행동에 중심적이고 결정적이었다. 크렘린 통치자가 다른 선택들을 내렸더라면, 이 돈의 힘을 이용해 기존의 엘리트를 소외시키는 대신 이행의 이해당사자들로 변신시켰더라면 KGB 장교들조차도 국가자본주의와 민영화를 지지했을 것이다. 나중에 옐친과 푸틴 치하에서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소련은 노멘클라투라 스타일 국가 자본주의로, 그리고 확실히 그 권력 기관들을 보존한 채 시행착오를 거쳐 점진적으로 세계 경제에 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결론, 600~601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대다수는 소련의 붕괴와 서방에서 최근에 전개된 사태 간의 병렬 관계에 분연히 반박할 것이다. 하지만 일부 구소련 사람들은 불현듯 소름 끼치는 기시감을 경험했다. 2008년에 서구 정부들은 1988~1991년 소련의 파괴적인 정책들과 유사하게 국민의 세금과 심지어 저축을 이용해 기업들을 긴급 구제해야 했다. 고고한 레토릭으로 둘러싸인 노벨 평화상 수상자 버락 오바마가 아프가니스탄과 중동에서 수렁에 빠졌을 때 고르바초프와 비교하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2016년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는 해법으로 여겨진 것이 오히려 커다란 문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일부 관찰자들에게 1991년 3월 고르바초프의 국민투표를 상기시켰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라는 구호는 소련 ‘제국’에 의한 ‘러시아’의 희생을 운운하던 옐친의 수사법을 아득하게 일깨웠다. 심지어 구소련의 일부 나이 많은 시민은 냉전기에 그토록 신중했던 서방 엘리트들이 더 이상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브레즈네프와 체르넨코, 고르바초프 후반 시대들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결국엔 소련 수수께끼가 우리 시대에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가 자유와 민주주의의 필연적 승리에 관한 도덕극이었던 적은 없다. 그 대신 세계는 항상 그래 왔던 대로, 이상주의와 권력, 훌륭한 통치와 부패, 자유의 고조와 위기와 비상시에 자유를 제한해야 할 필요 사이의 투쟁의 장이다. 사라져버린 소련의 유령은 유럽과 아시아, 세계를 떠돌고 있지 않다. 그러나 소련의 갑작스러운 소멸에 대한 수수께끼는 우리 시대 사람들의 상상 속을 여전히 떠돌고 있다. 전에 승승장구하던 서구 자유주의적 질서의 확실성이 우리 발아래서 흔들리고 깎여 나가는 모습을 목도하는 지금 특히 그렇다. 소련의 종식은 거대한 역사적 의미와 어마어마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인간 드라마였다. 그것은 냉전 종식과 탈식민화,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지구적 서사에서 하나의 각주로 축소될 수 없다. 이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속성의 외관상 확실성을 믿지 말라고 가르쳐주며 미래의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비할 수 있게 도와주리라.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결론, 602~603쪽, 끝,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향팔 @롱기누스 @aida 님 모두 '결론'의 마지막 단락에 주목해 주셨죠. 저자 주보크가 망국의 몰락 순간에 이토록 집착했던 이유가 저 한 단락을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상적이었어요. "이 놀라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속성의 외관상 확실성을 믿지 말라고 가르쳐주며 미래의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비할 수 있게 도와주리라." 저는 요새 1년 6개월 동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에 공장이 휘말리고, 저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하고 있는 상황이라서 더욱더 이 책의 서사와 이 결론에 마음이 끌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고, 문제가 아직도 해결이 안 나셨나 보네요. 어쩌나요? 그래도 언젠가는 해결이 나겠죠. 힘든 중에도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네요. YG님 배려와 덕분으로 잘 배우고 갑니다. 8월도 벽돌 책 잘 이끌어 가시고 좋은 시간되기 바랍니다. 종종 들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아무튼 오늘 8월 1일 자정이면 7월 벽돌 책 함께 읽기 모임은 마무리합니다. 1994년 7월을 연상시킬 정도로 후텁지근했던 2025년 7월 싸늘한 소련 몰락의 서사를 여러분과 함께 읽어서 행복했습니다. 우리 8월에 또 함께 벽돌 책 읽어요!
@향팔 @연해 님, 제가 좋아하는 '부케' 활동('YG와 JYP의 책걸상')을 즐겁게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어쩌다 보니, 9년째 방송하고 있는데 이렇게 소수지만 재미있게 들어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그럴 수 있었던 듯해요. :) 두 분 7월에도 고생하셨고, 8월에는 조금 쉬엄쉬엄 새로운 벽돌 책도 같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지요. 책걸상과 벽돌 책 모임 덕분에 삶이 더 풍성해지고 있거든요. 힘든 시기를 지나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정성스럽게 모임 이끌어주셔서 늘 정말 감사합니다. 8월에 나눌 이야기도 벌써부터 기대되고 있어요. 무더운 여름이지만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무탈하시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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