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4. <소련 붕괴의 순간>

D-29
어제 함께 읽었던 6장 메모해둔 대목도 공유합니다.
고르바초프는 체르냐예프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했다. “[당 기구의] 망할 미친개들을 목줄에서 풀어줄 수는 없어. 그러면 이 거대 조직이 전부 내게 등을 돌릴 거야.” 대단히 솔직하게 인정했다! 소련이 붕괴한 지 몇 년 후, 러시아의 역사학자 루볼프 피호이아(Rudolf Pikhoia)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당 조직의 내부에서 시작해 정점에 오른 고르바초프가 왜 공산당 노멘클라투라의 권력을 줄곧 파괴하기만 했을까? 그는 새로운 권력 기반을 만들지 않고 자신의 오래된 권력 기반을 훼손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고르바초프가 차마 인정할 수 없는 사연이 더 있었다. 변화를 실시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적 수단을 이용할 줄 모르는 이 개혁의 설계자는, 당 없이 통치하는 법도 역시 배우지 못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23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고양이 당은 폭력적인 갈등을 벌일 생각이 없다고 야로셴코는 결론 내렸다. 대신, “그들은 민주 진영에 암묵적인 사회계약을 요구한다. 우리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무사히 물러나게 해주면 …… 너희를 감옥에 처넣고 총살하지 않을 것이다.” 10년 뒤에 이 ‘계약’ 은유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된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26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그들 중 다수는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끌어내리고, 민주적 실험 없이 국가 자본주의로 나아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총회와 당대회에서 여러 차례 드러났듯이, 고르바초프는 노멘클라투라의 쿠데타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분노와 좌절을 느껴도, 누구도 감히 서기장에 대항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투표로 고르바초프를 몰아내더라도, 여전히 그가 헌법상 군 통수권자이며 KGB를 통제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과 KGB야말로 고르바초프 권력의 핵심이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27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저는 이 대목 읽으면서 1979년 10월 26일 이후에 당시 KCIA 수장이었던 김재규의 선택이 생각이 났어요. 그때 KCIA가 KGB와 비슷했거든요. 군대와 지방까지 풀뿌리처럼 연결된 방대한 조직이었고, 무력 동원도 가능했고. 그때 김재규가 육군본부가 아니라 KCIA로 가서 사태를 수습했더라면 19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의 방향은 상당히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를 많이 하죠.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도 KGB와 같은 막대한 권력을 선용(?)할 수 있었던 기회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는지 안타깝습니다.
소련군에 관한 미국 최고의 전문가인 윌리엄 오둠(William Odom)은 당시 소련군이 겪어야 했던 일에 감정을 이입하며 나중에 이렇게 썼다. “가령 [1968년에] 베트남에서 격전을 치른 미군 연대가 적절한 주거와 지원 시설도 없는 군사기지로 막 귀환했는데, 그러고 나서 그 연대가 다시 대학 교정의 반전 시위자들을 진압하러 파견됐다고 상상해 보라. 폭력이 발생할 가능성이 컸을 것이라고 말하는 건 지독하게 절제된 표현이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31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고르바초프는 늘 그렇듯 소련의 위대한 잠재력과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래퍼포트는 점점 조바심을 내며 듣다가 말을 잘랐다. “대통령님, 제가 유대인 농담을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유대인이 아내의 장례를 지낸 뒤 랍비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랍비는 ‘1~2년 정도 시간을 두게. 적응하고 위원도 찾을 거야’라고 말했지요. 유대인이 대꾸했습니다. ‘1년, 2년……. 그럼, 오늘 밤은 어쩌죠?’” 마지막 문장은 MIC가 처한 어려움과 고르바초프 개혁의 본질을 요약했다. 소련 최고의 산업 부문과 관리자는 시장과 개혁을 적극적으로 포용했지만,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시간, 전문성, 국가 지원이 필요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없었으로, 그들은 힘든 처지였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42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1990년 12월) 체르냐예프는 자신 앞에 ‘두 명의 고르바초프’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명은 매력적인 비전을 가진 세계적인 인물이었고, 또 한 명은 “탄약이 바닥나서” 막대한 집행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는 임기 말의 국내 정치인이었다. (…) “나에게 독재를 강요하지는 못한다. 독재를 하느니 차라리 사임하겠다. …… 이것은 확고한 신념, 일생의 원칙이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45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1990년 11월 말 즈음) 고르바초프 측근들의 수준이 떨어진 와중에 53세의 정력적이고 고등 교육을 받은 재무부 장관 발렌틴 파블로프만은 예외인 듯했다. 파블로프는 (…) 스스로를 ‘순전한 재정 전문가’라고 여겼다. 그는 소련 통화 체계 작동 방식과 그 위기의 진짜 원인을 아는 극소수 중 하나였다. 파블로프는 500일 계획이 소련 경제에는 처참한 계획이라며 거부했다. 그는 싱가포르, 한국, 대만의 경우와 현재 중국공산당 지도부 하에서 그렇듯, 시장 경제로의 이행이 권위적인 국가 통제 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확신했다. IMF와 세계은행에 소련이 가입하는 것은 찬성했지만, 외국 자본을 유치하려면 특별한 국가 정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 그는 모든 국영 기업에 20퍼센트의 의무 과세를 제안했다. 이 돈은 연방 안정화 기금으로 들어갈 예정이었다. (…) 특히 러시아연방에 지나치게 양보하면 “소비에트연방이 연방 국가로서 기능하기 위한 경제적 기반을 사실상 해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49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저는 파블로프가 좀 더 일찍 발탁되어 활약했더라면 소련의 운명은 또 달라졌을 텐데, 이런 생각도 해봅니다. 앞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
저두요.. 고르바초프는 소련의 무너져가는 경제를 개혁시키기에는 너무나도 경제적인 배경이 부족하고.. 다른 경제 관련 인텔리젠시아는 자기 주머니 채우기 급급하거나 무기력했는데.. 그나마 욕먹더라도 확실한 액션을 취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 늦었지만요..
소련으로서는 쇠퇴하고 무너져가는 국가의 여러 정파 간의 불화라는 불길한 전망으로 그해(1990년)가 마무리되었다. 모스크바의 자유주의적 친구들에게서 분위기를 감지한 서방 외교관들과 언론인들은 곧 피가 흐르고 소련군이 개입할 것이라고 확신하다시피 했다. 새로운 연방이 생겨날까? 아니면 혼란만 커지고 어쩌면 유혈 사태가 발생할 것인가? 답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도 소련이 199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53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이 시점에도 소련이 1991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역설이었다. 모스크바의 러시아 지도부는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사실 원치 않은 우크라이나 독립을 요구한 것이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6장 리바이어던, 247~248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연방으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양쪽 다 이득이었겠죠. 특히 우크라이나에게. 그리고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없었을 테고. 제가 보기엔 이 책의 최고 빌런은 옐친입니다;
아직 5장까지밖에 못 읽었지만, 올려주시는 문장들을 보니 다음 내용이 더욱 흥미진진… 얼렁얼렁 읽고 싶어지는데요? 그리고 옐친은 정말… 지난주말 동네 도서관 강연에서도 선생님이 “옐친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물어보셨는데 나오는 대답들이 “또라이”, “술주정뱅이”, “알콜중독자” …… 저도 고르바초프에 대해서는 뭔지 모를 안타까움과 아쉬운 마음이 있는 반면, 옐친에 대해서는 그냥 고개만 절레절레 젓게 됩니다.
나중에 읽으실 8장에 옐친 관련해서 이런 대목도 나옵니다. 아, 시대를 초월해서 비슷한 모습이 많네요. 하하하!
(1991년 6월 6일) (TV 프로그램) 사회자인 이고르 피수넨코(Igor Fisunenko)는 서구식 인터뷰 기법을 구사해 후보자들을 닦아세웠다. 이런 접근법은 옐친과 특히 그를 지지하던 TV 시청자들에게는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이 편향된 심문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여겼다. 많은 시청자가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피수넨코에게 ‘무도한 행태’를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결국에는 무려 세 자루 분량에 달하는 항의 편지가 방송국에 도착했다. 피수넨코는 나중에 옐친과 지지자들의 행태가 정치적 불관용을 드러냈다고 논평했다. 그들은 대화와 타협에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소련 붕괴의 순간 - 오늘의 러시아를 탄생시킨 '정치적 사고'의 파노라마 8장 이양, 308쪽, 블라디슬라프 M. 주보크 지음, 최파일 옮김
"세 자루 분량에 달하는 항의 편지"가 요즘에는 메일, 댓글, 항의 전화 등으로 바뀌었네요.
네, 그러네요 하하.. 시대를 초월해서 느껴지는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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