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집 읽기 시즌 3

D-29
천수관음님 그 많은 부끄러움 어떻게 참고 계실까. 이 밤, 내 천 개의 손을 당신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밤. 팔이 없으면 부끄러움도 없네. 제 맘대로 푸드덕거리는 팔을 열 개 백 개 천 개 끌어안고 웅크린 밤. 젖은 팔 잠시 접고 비 오는 날 처마 밑의 처량한 미친 여자, 천수관음님처럼. 나는 내 팔이 부끄러워, 천번째의 눈꺼풀을 마저 내리네.
피어라 돼지 <연어는 좋겠다>, 김혜순 지음
여기는 누구의 마지막 숨이 펼친 풍경인가요? 새는 누구의 마지막 숨에서 튕겨져 나왔나요? 침묵이 가득 든 얼음 속에 웅크리고 숨었는데 누가 망치를 들고 오네요. 이름, 이름 하면서 이름을 대라 하네요 이 삶이 나한테서 나갔어요 원피스는 벗겨지고 새장만 남았어요
피어라 돼지 <날아가는 새의 가녀린 겨드랑이>, 김혜순 지음
일제히 한 발짝 내디디면 아직 이 세상 머무는 내 얼굴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면 이미 이 세상 사라진 내 얼굴들이
피어라 돼지 <망각의 광채>, 김혜순 지음
저절로 힘이 몰려와. 광활한 벌판에서 힘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나한테로 오는 거, 그러나 파도처럼 영영 끝에 닿지는 않는 거, 공중이 공중을 낳겠다고 힘주는 거 같은 거, (...) 주먹 쥔 하늘이 붉은 황혼을 싸지르려고 하는 거.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산맥을 넘던 철새가 다시 비상할 때 목구멍으로 마저 힘주는 거 같은 거.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번개가 친 다음 번개의 목이 쉬어버리는 거 같은 거. 꽃을 밑으로 낳으려고, 힘을 주는데 꽃이 피질 않아. 다리를 벌리고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넋이 빠지고, 죽음이 닥쳐오고, 그러니 꽃아 꽃아 예쁜 꽃아 그러지 마!
피어라 돼지 <꽃아 꽃아> , 김혜순 지음
은유적인 표현으로서의 '꽃 피우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실제 꽃을 볼 땐 늘 꽃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곤 합니다. 이 시를 읽고 난 뒤 꽃을 달리 바라보게 될 것 같아요. 꽃을 피우는 건 죽을 것 같은 산고를 경험하는 것. 꽃에는 산고의 경험이 들어있다는 것.
아이들의 몸이 흩어져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 서로 닿으면 눈물이 쏟아져버릴까 봐 멀리멀리 손을 흔들며 흩어져가는 것 (...) 나는 신비한 어둠 속에 두 손을 넣어 흩어져가는 눈발들 만져보리
피어라 돼지 <슬픔이 울러 퍼진다>, 김혜순 지음
창문은 내 환각의 바깥에서 우두커니 기다려주었습니다. 한밤중 내가 고통의 박자들을 내뿜는 연못처럼 흐느낄 때 창문은 밤에 쓰는 가면처럼 밖으로 추락하는 얼굴들을 맨손으로 받아 공중에 걸어주었습니다
피어라 돼지 <유리 가면>, 김혜순 지음
@숨쉬는초록 열심히 읽어주시고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줌. 온라인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많이 못올렸네요.
땅에 떨어진 새처럼 결국 땅속에 묻히는 새처럼 그 발걸음으로 쏟아지는 눈발들의 레이스를 짜보세요 두 팔로 공중에 흰 박쥐의 집을 지어보세요 저런 저런 당신의 지붕이 쏟아지네요 (...) 이 춤을 다 추면 얼음이 녹고요 그리고 당신은 죽어요
피어라 돼지 <춤이란 춤>, 김혜순 지음
기다리지 않아도 꼭 돌아오는 아래아. 사랑해 아래아 하면 벌써 가버리고 없는 아래아. 그래서 진짜로는 도착해본 적도 없는 아래아
피어라 돼지 <was it a cat I saw?>, 김혜순 지음
만지면 안 될까 한 달에 한 번씩 이 시간 달빛이 수억 년간 지나간 저곳 살짝 아주 살짝 만지면 안 될까 지상을 박차고 떠오르는 저 들판만큼 거대한 파란 나비의 파닥거리는 날개의 질감 그 위에 또르르 구르는 이슬 한 방울 만지면 안 될까
피어라 돼지 <파랑 쥐의 산보>, 김혜순 지음
목젖을 다해 말하고 싶다 글자가 종이의 손을 뿌리친다고
피어라 돼지 <벙어리 둥우리 얼굴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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