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집 읽기 시즌 3

D-29
돼지다, 도무지 밖을 본 적 없는 돼지다,내내 돼지다, 우울한 돼지다 (...) 뒈지는 돼지는 돼지라고 생각하는 뒈지는 돼지다 (...) qqqq 무엇보다 제가 돼지인 줄 모르는 우리나라 돼지들의 교성
피어라 돼지 <뒈지는 돼지>, 김혜순 지음
<뒈지는 돼지>라는 제목은 우리 사회와 인간이 생명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너무나 잘 보여줍니다. 국립국어원 온라인가나다에 따르면, ‘뒈지다’는 ‘죽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에 의해 살처분된 돼지들의 죽음은 생명으로서 존중받은 죽음이 아니라 “뒈지는” 죽음이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존중받지 못하거나 “뒈지는”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합니다. 전쟁, 학살, 혐오범죄로 인해 죽임을 당하는 수많은 생명, 소모품으로 취급받는 노동자들, 이동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장애인들, 공부하는 기계로 전락한 학생들, 생명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동물들 ... 이 시는 “돼지다”, “돼지”, “qqqq”를 반복함으로써(그래서 시의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함부로 다루고 죽이는, 그 수많은 돼지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돼지더러 돼지를 버리라 닦달하시니 대단하시네요 (...) 몸 바깥이 아파요 (...) 도대체 넌 누구야? 글은 왜 쓰는 거야? (...) 타인의 고통을 먹고 사는 년아
피어라 돼지 <철근 콘크리트 황제 폐하!>, 김혜순 지음
참여합니다!
@레몬나 반갑습니다!! 무더위와 습기, 모두, 잘 이겨내시길요!
여자들의 머리칼이 수세미처럼 흩어지고 아이들의 송곳니 아래서 살찐 암소들이 누운 벌판이 뼈를 발리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여자는 굴 껍데기 속에 굴처럼 미끈거리는 집을 지었습니다 집은 굴처럼 쉽게 상하고 입속에서 미끈미끈 씹혔습니다 (...) 엄마는 입속에다 아기를 길렀습니다 아기는 엄마를 아껴서 파먹었습니다 아기가 여물어갔습니다 (...) 엄마의 가슴이 아이스크림처럼 폭폭 떠 먹히고 실밥이 풀린 손들이 너덜너덜 국냄비 속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곳 이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피어라 돼지 <키친 컨피덴셜>, 김혜순 지음
이 시에서 부엌은 생명을 죽이고 잡아먹는 잔혹한 행위가 일어나는 곳. 자기 아이 먹이느라 (생명을 죽이는) 여자의 생명도 닳는 곳. 이 시를 읽으면서 심란해집니다. 우리는 부엌에서 생명을 죽이고 잡아먹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면서도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데...
돼지9 길러서 먹어주세요 돼지9 먹고 울어주세요 돼지9 새끼도 낳아 드릴게요 돼지9 슬픈 인생이었다고 한 번만 말해주세요 (...) 맛있는 걸 당신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 당신은 돼지를 사랑했다 익숙하게 살집을 가르고 신문지에 싸서 검은 봉지에 담아 주었다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 돼지들이 걸어온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배가 불러 죽겠는데 또 걸어온다
피어라 돼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당신>, 김혜순 지음
돼지 축산에 종사하거나 돼지를 기르는 마을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살아 숨쉬는 돼지를 만날 기회를 갖기 힘들 겁니다. 주로 책이나 사진, 그림, 영상으로 돼지의 이미지를 접하겠지요. 살아있는 돼지는 우리의 일상과 거리가 먼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돼지'라는 단어는 일상에서 매우 자주 사용됩니다. '돼지고기'라는 단어로. '돼지'라는 단어는 '생명체'라는 기의보다 '고깃덩이'라는 기의로 더 강하게 남아 있는 듯합니다. 고기를 얻기 위해 수많은 돼지를 사육하는 인간에게는 반드시 '이 돼지'를 고수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돼지'가 없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돼지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요. "돼지들이 걸어온다 다 먹어 치웠는데 또 걸어온다". 인간에게 돼지는 "모두 이름이 같은 돼지". 그런데 시인은 돼지를 "당신"이라 부름으로써 돼지가 생명을 지닌 타자임을 깨닫게 합니다. "맛있는 걸 당신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여태까지 "당신"을 맛있게 먹어왔음을 불현듯 깨닫고, "당신"을 맛있게 먹는 행위에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당신"이라 부르며 어떻게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요? 돼지의 살처분이나 도축에 참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신"을 맛있게 먹는 우리 모두 생명을 죽이는 데 가담한 자들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듯합니다.
나는 돼지 노출증 환자 돼지 나는 내 오물을 나의 독자들에게 나눈다 (...) 내가 쓴 것을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아주세요 (...) 죽은 사람이 죽인 사람을 요리할 차례가 온다 (...) 나는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 도마 위에 칼을 올려놓고 두 눈을 가린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나를 먹을 차례가 온다
피어라 돼지 <요리의 순서>, 김혜순 지음
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 당신은 끝없이 부품을 교체하여 죽지 않는다. (...) 나는 당신의 슬픔, 당신의 눈물, 당신의 불안, 당신의 공포, 당신의 장애가 되려고 길러진다. (...) 당신은 내 간, 당신은 내 콩팥, 당신은 내 심장, 당신은 내 눈알, 당신은 내 피부, 간절히 울부짖어도 당신은 내가 당신인 줄도 모르고 나를 끌고 간다. 곤봉으로 가끔 쑤셔대면서 간다.
피어라 돼지 <돼지에게 돼지가>, 김혜순 지음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 (..)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 (...) 구름과 땅 사이 펼쳐진 거대한 검은 봉지 어둠이 우리를 담아 들고 출렁출렁 춤추는 밤 이 세상 사람들의 고백은 왜 끝끝내 모두 똑같은지 더러워요 더러워요 죽음만 싸지르는 엄마아빠 돼지를 싣고 가는 트럭 짐칸처럼 더러워요
피어라 돼지 <어두운 깔깔 클럽>, 김혜순 지음
어째서 나한테는 떠난 사람의 그림자만 남았을까요 어째서 나한테서 돼지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그렇지만 세숫물에 얼굴 쏟으면 일단 돼지가 보이죠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선생이에요 매일 칠판에 구정물만 그리죠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예요 그러고도 사람들 몸 안에 좌정한 돼지만 보여요
피어라 돼지 <돼지禪>, 김혜순 지음
우리는 돼지로 돌아온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다 (...) 그리하여 최후의 배역에 철컥 달라붙는다 내가 싼 것 위에 몸을 철퍼덕 싸는 배역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 쇠갈고리에 걸리는 배역 뭉개지면서 내가 내 혀 맛을 볼 수 있게 되는 배역
피어라 돼지 <마릴린 먼로>, 김혜순 지음
오 한 여자가 돼지를 나가려고 한다 (...)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려 간다
피어라 돼지 <지뢰에 붙은 입술>, 김혜순 지음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피어라 돼지 김혜순 지음
떠나면서 돌아본다 구름 같은 나를 담은 자루를 변덕 많은 그림자를 기수처럼 태우고 검은 땀 흘리다가 이제야 다리를 꺾는 돼지 한 마리를 (...) 그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
피어라 돼지 <구천무곡>, 김혜순 지음
몸 버리고 가라는데 몸 데리고 간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 간다 (...) 돼지가 따라온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배 속에 가득 망각이 들어찬 저 여자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 든 여자
피어라 돼지 <산문을 나서며>, 김혜순 지음
천수관음님 그 많은 부끄러움 어떻게 참고 계실까. 이 밤, 내 천 개의 손을 당신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밤. 팔이 없으면 부끄러움도 없네. 제 맘대로 푸드덕거리는 팔을 열 개 백 개 천 개 끌어안고 웅크린 밤. 젖은 팔 잠시 접고 비 오는 날 처마 밑의 처량한 미친 여자, 천수관음님처럼. 나는 내 팔이 부끄러워, 천번째의 눈꺼풀을 마저 내리네.
피어라 돼지 <연어는 좋겠다>, 김혜순 지음
여기는 누구의 마지막 숨이 펼친 풍경인가요? 새는 누구의 마지막 숨에서 튕겨져 나왔나요? 침묵이 가득 든 얼음 속에 웅크리고 숨었는데 누가 망치를 들고 오네요. 이름, 이름 하면서 이름을 대라 하네요 이 삶이 나한테서 나갔어요 원피스는 벗겨지고 새장만 남았어요
피어라 돼지 <날아가는 새의 가녀린 겨드랑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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