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순 시집 읽기 시즌 3

D-29
나는 돼지 노출증 환자 돼지 나는 내 오물을 나의 독자들에게 나눈다 (...) 내가 쓴 것을 돼지처럼 공중에 매달아주세요 (...) 죽은 사람이 죽인 사람을 요리할 차례가 온다 (...) 나는 집에서 요리하는 사람 도마 위에 칼을 올려놓고 두 눈을 가린다 삼가 명복을 빕니다 나를 먹을 차례가 온다
피어라 돼지 <요리의 순서>, 김혜순 지음
나는 당신의 염통이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폐가 되려고 길러진다. 나는 당신의 피부가 되려고 길러진다. (...) 당신은 끝없이 부품을 교체하여 죽지 않는다. (...) 나는 당신의 슬픔, 당신의 눈물, 당신의 불안, 당신의 공포, 당신의 장애가 되려고 길러진다. (...) 당신은 내 간, 당신은 내 콩팥, 당신은 내 심장, 당신은 내 눈알, 당신은 내 피부, 간절히 울부짖어도 당신은 내가 당신인 줄도 모르고 나를 끌고 간다. 곤봉으로 가끔 쑤셔대면서 간다.
피어라 돼지 <돼지에게 돼지가>, 김혜순 지음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건 엄마 되고 싶은 애새끼들 아빠 되고 싶어 훌쩍거리는 애새끼들 아빠는 아빠 만들려고 나를 기르고요 엄마는 엄마 만들려고 나를 길러요 (..) 나 나 나 나는 죽지만 엄마아빠 영원히 살아요 (...) 구름과 땅 사이 펼쳐진 거대한 검은 봉지 어둠이 우리를 담아 들고 출렁출렁 춤추는 밤 이 세상 사람들의 고백은 왜 끝끝내 모두 똑같은지 더러워요 더러워요 죽음만 싸지르는 엄마아빠 돼지를 싣고 가는 트럭 짐칸처럼 더러워요
피어라 돼지 <어두운 깔깔 클럽>, 김혜순 지음
어째서 나한테는 떠난 사람의 그림자만 남았을까요 어째서 나한테서 돼지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을까요 (...)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돼지예요 그렇지만 세숫물에 얼굴 쏟으면 일단 돼지가 보이죠 나는 돼지인 줄 모르는 선생이에요 매일 칠판에 구정물만 그리죠 나는 몸 안의 돼지를 달래야 하는 환자예요 그러고도 사람들 몸 안에 좌정한 돼지만 보여요
피어라 돼지 <돼지禪>, 김혜순 지음
우리는 돼지로 돌아온다 먹고 싸는 이 돼지 자석에 철컥 달라붙는다 (...) 그리하여 최후의 배역에 철컥 달라붙는다 내가 싼 것 위에 몸을 철퍼덕 싸는 배역 영혼이 빠져나간 다음 쇠갈고리에 걸리는 배역 뭉개지면서 내가 내 혀 맛을 볼 수 있게 되는 배역
피어라 돼지 <마릴린 먼로>, 김혜순 지음
오 한 여자가 돼지를 나가려고 한다 (...) 반토막난 흑돼지 그림자가 그녀에게 매달려 간다
피어라 돼지 <지뢰에 붙은 입술>, 김혜순 지음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 부활이다! 창자는 살아 있다! 뱀처럼 살아 있다! 피어라 돼지! 날아라 돼지! (...) 파란 하늘에서 내장들이 흘러내리는 밤! 머리 잘린 돼지들이 번개치는 밤! 죽어도 죽어도 돼지가 버려지지 않는 무서운 밤! 천지에 돼지 울음소리 가득한 밤! 내가 돼지! 돼지! 울부짖는 밤!
피어라 돼지 김혜순 지음
떠나면서 돌아본다 구름 같은 나를 담은 자루를 변덕 많은 그림자를 기수처럼 태우고 검은 땀 흘리다가 이제야 다리를 꺾는 돼지 한 마리를 (...) 그 창문 뒤에서 내다보는 한 사람
피어라 돼지 <구천무곡>, 김혜순 지음
몸 버리고 가라는데 몸 데리고 간다 돼지 버리고 가라는데 돼지 데리고 간다 (...) 돼지가 따라온다 내가 바로 저 여자야 못생기고 더러운 저 여자 배 속에 가득 망각이 들어찬 저 여자 머릿속에 토사물만 가득 든 여자
피어라 돼지 <산문을 나서며>, 김혜순 지음
천수관음님 그 많은 부끄러움 어떻게 참고 계실까. 이 밤, 내 천 개의 손을 당신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밤. 팔이 없으면 부끄러움도 없네. 제 맘대로 푸드덕거리는 팔을 열 개 백 개 천 개 끌어안고 웅크린 밤. 젖은 팔 잠시 접고 비 오는 날 처마 밑의 처량한 미친 여자, 천수관음님처럼. 나는 내 팔이 부끄러워, 천번째의 눈꺼풀을 마저 내리네.
피어라 돼지 <연어는 좋겠다>, 김혜순 지음
여기는 누구의 마지막 숨이 펼친 풍경인가요? 새는 누구의 마지막 숨에서 튕겨져 나왔나요? 침묵이 가득 든 얼음 속에 웅크리고 숨었는데 누가 망치를 들고 오네요. 이름, 이름 하면서 이름을 대라 하네요 이 삶이 나한테서 나갔어요 원피스는 벗겨지고 새장만 남았어요
피어라 돼지 <날아가는 새의 가녀린 겨드랑이>, 김혜순 지음
일제히 한 발짝 내디디면 아직 이 세상 머무는 내 얼굴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면 이미 이 세상 사라진 내 얼굴들이
피어라 돼지 <망각의 광채>, 김혜순 지음
저절로 힘이 몰려와. 광활한 벌판에서 힘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다 나한테로 오는 거, 그러나 파도처럼 영영 끝에 닿지는 않는 거, 공중이 공중을 낳겠다고 힘주는 거 같은 거, (...) 주먹 쥔 하늘이 붉은 황혼을 싸지르려고 하는 거.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산맥을 넘던 철새가 다시 비상할 때 목구멍으로 마저 힘주는 거 같은 거. 먹지도 자지도 않고 번개가 친 다음 번개의 목이 쉬어버리는 거 같은 거. 꽃을 밑으로 낳으려고, 힘을 주는데 꽃이 피질 않아. 다리를 벌리고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데, 넋이 빠지고, 죽음이 닥쳐오고, 그러니 꽃아 꽃아 예쁜 꽃아 그러지 마!
피어라 돼지 <꽃아 꽃아> , 김혜순 지음
은유적인 표현으로서의 '꽃 피우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실제 꽃을 볼 땐 늘 꽃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곤 합니다. 이 시를 읽고 난 뒤 꽃을 달리 바라보게 될 것 같아요. 꽃을 피우는 건 죽을 것 같은 산고를 경험하는 것. 꽃에는 산고의 경험이 들어있다는 것.
아이들의 몸이 흩어져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는 것 서로 닿으면 눈물이 쏟아져버릴까 봐 멀리멀리 손을 흔들며 흩어져가는 것 (...) 나는 신비한 어둠 속에 두 손을 넣어 흩어져가는 눈발들 만져보리
피어라 돼지 <슬픔이 울러 퍼진다>, 김혜순 지음
창문은 내 환각의 바깥에서 우두커니 기다려주었습니다. 한밤중 내가 고통의 박자들을 내뿜는 연못처럼 흐느낄 때 창문은 밤에 쓰는 가면처럼 밖으로 추락하는 얼굴들을 맨손으로 받아 공중에 걸어주었습니다
피어라 돼지 <유리 가면>, 김혜순 지음
@숨쉬는초록 열심히 읽어주시고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줌. 온라인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많이 못올렸네요.
땅에 떨어진 새처럼 결국 땅속에 묻히는 새처럼 그 발걸음으로 쏟아지는 눈발들의 레이스를 짜보세요 두 팔로 공중에 흰 박쥐의 집을 지어보세요 저런 저런 당신의 지붕이 쏟아지네요 (...) 이 춤을 다 추면 얼음이 녹고요 그리고 당신은 죽어요
피어라 돼지 <춤이란 춤>, 김혜순 지음
기다리지 않아도 꼭 돌아오는 아래아. 사랑해 아래아 하면 벌써 가버리고 없는 아래아. 그래서 진짜로는 도착해본 적도 없는 아래아
피어라 돼지 <was it a cat I saw?>, 김혜순 지음
만지면 안 될까 한 달에 한 번씩 이 시간 달빛이 수억 년간 지나간 저곳 살짝 아주 살짝 만지면 안 될까 지상을 박차고 떠오르는 저 들판만큼 거대한 파란 나비의 파닥거리는 날개의 질감 그 위에 또르르 구르는 이슬 한 방울 만지면 안 될까
피어라 돼지 <파랑 쥐의 산보>, 김혜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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