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아홉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네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또 다른 심문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1부의 읽겠습니다. 두세 쪽 분량의 산문들이고 36편 정도 됩니다. 하루에 산문 한두 개를 읽습니다. 목차는 이렇습니다.
[1부, 또 다른 심문들]
⏤만리장성과 책들 19
⏤파스칼의 구(球) 24
⏤콜리지의 꽃 30
⏤콜리지의 꿈 37
⏤시간과 J. W. 던 44
⏤창조와 P. H. 고스 51
⏤아메리코 카스트로 박사가 우려하는 것들 57
⏤서글픈 우리의 개인주의 68
⏤케베도 73
⏤『돈키호테』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술성 86
⏤너새니얼 호손 93
⏤상징으로서의 발레리 128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관한 수수께끼 132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 139
⏤체스터턴에 대하여 146
⏤맨 처음의 웰스 153
⏤『비아타나토스』 159
⏤파스칼 167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174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 181
⏤도서 예찬에 대하여 186
⏤키츠의 나이팅게일 195
⏤수수께끼들의 거울 202
⏤두 권의 책 209
⏤1944년 8월 23일 자 기사 217
⏤윌리엄 벡퍼드의 『바테크』에 관하여 221
⏤『보랏빛 대지』에 대하여 229
⏤누구인가로부터 아무도 아닌 것으로 237
⏤어느 전설의 형상들 243
⏤알레고리에서 소설로 252
⏤버나드 쇼에 관한(를 지향하는) 주석 259
⏤한 이름이 일으킨 반향의 역사 266
⏤수치스러운 역사 273
⏤시간에 대한 새로운 논증 280
⏤고전에 관하여 310
⏤에필로그 316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 참여 인원이 없어도 25/7/30에 시작하겠습니다.
(15) [보르헤스 읽기] 『또 다른 심문들』 1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모임지기의 말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만리장성과 책들(La muralla y los libros)] 천천히 읽겠습니다. 하루에 한 편이라고 말해두기는 했지만, 좀더 길게 시간을 두고 번역도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읽겠습니다. 되도록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만 읽으려고 합니다. 원문은 다음 사이트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s://borgestodoelanio.blogspot.com/
인간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불가능한 과업에 매달리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작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하느님의 권능을 흉내내어 누가 천국과 지옥과 연옥으로 떨어질지 감히 상상하고 묘사한 단테가 그러했고, 제국의 시공간을 통제하기 위해서 과거의 상징인 책들을 불태우고 파묻었을 뿐 아니라, 만리장성이라는 허황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 시황제가 그러했습니다.
시황제는 ‘시(始)’는 ‘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 이전의 과거를 남김없이 말소함으로써 유일무이한 현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분서갱유는 과거를 말소하려는 기획이었고,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으로부터 시작(始)되는 유일무이한 역사를 꿈꿨습니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그 계획의 일환인 동시에, 자신에게도 언젠가 도래할 죽음을 가로막는 현재의 방파제였습니다. 단순히 죽음을 가로막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는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서 신하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먼 물로 나아가 불로초를 구해오게 만듭니다. 생각해보면 시황제는 과거만큼 미래를 두려워했으며, 과거-현재-미래로 끊임없이 흘러갈 시간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지연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전설 속의 황제(黃帝)를 모사하고자 했던 한낱 인간 황제(皇帝)일 따름이었고, 인간의 계획은 실패하게 마련이었습니다. 시황제는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의 축조라는 두 계획이 서로를 기묘하게 상쇄하게 될 것임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황제는 파괴한 뒤에 창조했고, 창조한 뒤에 파괴하는 식으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렸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굴러갔습니다.
이 에세이의 말미에 이르러서 보르헤스가 시황제의 시도를 미학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대목은 놀랍습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시황제는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의 형식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유의미하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시황제는 책을 불태움으로써 후대에 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증명하였고, 제국에 장벽을 둘러침으로써 제국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증명하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시황제가 행한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의 축조라는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논하고 있습니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바로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All art constantly aspires towards the condition of music)"는 것이며, 음악은 형식 그 자체일 따름이라는 주장입니다. 보르헤스가 주장하는 바도 비슷합니다. 애당초 지향했던 의미보다는 형식에 본질이 있다는 겁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미학이란, 다름 아닌 '무언가 알 것도 같은 상태'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 그 계시가 임박한 느낌 자체입니다. 이 임박함은 결코 완전히 오는 법이 없고 무한히 지연될 따름입니다. 시황제의 실패한 시도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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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russist님의 대화: [만리장성과 책들(La muralla y los libros)] 천천히 읽겠습니다. 하루에 한 편이라고 말해두기는 했지만, 좀더 길게 시간을 두고 번역도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읽겠습니다. 되도록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만 읽으려고 합니다. 원문은 다음 사이트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https://borgestodoelanio.blogspot.com/
인간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불가능한 과업에 매달리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작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요. 하느님의 권능을 흉내내어 누가 천국과 지옥과 연옥으로 떨어질지 감히 상상하고 묘사한 단테가 그러했고, 제국의 시공간을 통제하기 위해서 과거의 상징인 책들을 불태우고 파묻었을 뿐 아니라, 만리장성이라는 허황한 계획을 실행에 옮긴 시황제가 그러했습니다.
시황제는 ‘시(始)’는 ‘처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 이전의 과거를 남김없이 말소함으로써 유일무이한 현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에게 분서갱유는 과거를 말소하려는 기획이었고, 그럼으로써 현재 자신으로부터 시작(始)되는 유일무이한 역사를 꿈꿨습니다. 만리장성의 축조는 그 계획의 일환인 동시에, 자신에게도 언젠가 도래할 죽음을 가로막는 현재의 방파제였습니다. 단순히 죽음을 가로막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는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기 위해서 신하들로 하여금 배를 타고 먼 물로 나아가 불로초를 구해오게 만듭니다. 생각해보면 시황제는 과거만큼 미래를 두려워했으며, 과거-현재-미래로 끊임없이 흘러갈 시간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지연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조차 전설 속의 황제(黃帝)를 모사하고자 했던 한낱 인간 황제(皇帝)일 따름이었고, 인간의 계획은 실패하게 마련이었습니다. 시황제는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의 축조라는 두 계획이 서로를 기묘하게 상쇄하게 될 것임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시황제는 파괴한 뒤에 창조했고, 창조한 뒤에 파괴하는 식으로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렸고,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굴러갔습니다.
이 에세이의 말미에 이르러서 보르헤스가 시황제의 시도를 미학적인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대목은 놀랍습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시황제는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그 실패의 형식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유의미하다고 말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시황제는 책을 불태움으로써 후대에 책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증명하였고, 제국에 장벽을 둘러침으로써 제국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증명하였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시황제가 행한 분서갱유와 만리장성의 축조라는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을 논하고 있습니다. 베네데토 크로체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바로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All art constantly aspires towards the condition of music)"는 것이며, 음악은 형식 그 자체일 따름이라는 주장입니다. 보르헤스가 주장하는 바도 비슷합니다. 애당초 지향했던 의미보다는 형식에 본질이 있다는 겁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미학이란, 다름 아닌 '무언가 알 것도 같은 상태'가 영원히 이어지는 것, 그 계시가 임박한 느낌 자체입니다. 이 임박함은 결코 완전히 오는 법이 없고 무한히 지연될 따름입니다. 시황제의 실패한 시도들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 아마도 만리장성은 하나의 은유로써, 시황제는 과거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과거만큼이나 방대하고 우둔하며 쓸모없는 노역에 처했으리라는 것이다. 아마도 만리장성은 일종의 도전이었을 것이고, 시황제는 이런 생각을 했으리라. "사람들은 과거에 애착을 느낀다. 나나 내 수하의 형 집행관들이 그들의 애착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언젠가는 누군가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할 것이고, 그 사람은 내가 책을 불살라 없앤 것처럼 내가 세운 장성을 허물고, 나에 대한 기억을 지워 버릴 것이다. 그런 그는 곧 나의 그림자이자 나의 거울일 테지만, 그 자신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시황제는 자신의 제국이 덧없다느 것을 알았기에 그 제국에 장벽을 둘러치려 했고, 책이 성스럽다는 것을 알았기에, 즉 책이 우주 또는 개개인의 의식이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없애려 했을 것이다. 장서를 불태우는 것과 만리장성을 축조하는 것은 비밀리에 서로를 무효화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
『또 다른 심문들』 22-2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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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파스칼의 구] 역사적으로 ‘구(球)’의 은유가 유구한 내력을 가지고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살펴봅니다. 기원전 6세기 경의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구'란 가장 완벽하고 가장 균일한 도형이기에 신성을 표현하기에 참 좋은 형태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12세기 말, 프랑스 신학자 알랭 드릴 역시 비슷한 것을 확인합니다. 그는 헤르메스 총서 가운데 한 권에서 "신은 모든 곳의 중심에 있고 그 어느 곳에도 원주가 존재하지 않는, 지적인 구체"라는 구절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16세기에도 마찬가지여서, ⟪팡타그뤼엘⟫의 마지막 권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모든 곳에 중심이 있고 그 어느 곳에도 원주가 없는 지적 구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는 신의 속성을 드러냈습니다. 즉 신은 모든 피조물에 깃들지만, 그 각각의 피조물을 보아서는 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는 형태적인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신이 모든 곳에 편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었습니다.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충실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지구는 부동의 구체로서 중심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당당히 신의 권능과 그런 신을 받드는 인간의 쓸모를 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 '구'의 은유는 성격을 점차 달리하게 되었다고 보르헤스는 설명합니다. '구'는 모든 곳에 임재하신 신의 속성을 대변함과 동시에 거기에 인간된 관점을 투영할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의 '구'라는 은유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은 느낌을 받습니다. 단적으로 16세기 브루노에게 '구'는 일종의 해방이었지만, 17세기 파스칼에 이르러서 '구'는 끝없는 물리 세계에 대한 중압감이며, 현기증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16세기 브루노는 환희에 차서 말합니다. "우리는 우주 자체가 완전한 중심이라고, 즉 우주의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17세기 파스칼은 암울하게 말합니다. "자연은 하나의 무한 구체이다.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그런 구체." 외견상 두 사람의 발언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만, 고작 7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서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품게 되었습니다. 해방은 절망으로 뒤바뀝니다. 이러한 파스칼의 좌절감은 나중에 발견된 초고에서도 발견됩니다. 파스칼은 '구'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가공할(effrotable)’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입니다. 한편, 공교롭게도 신의 속성으로서 '구'는 언젠가 발자크가 말했던 천재의 정의와 부합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재는 모두와 닮았지만, 그와 닮은 이는 아무도 없다." 신은 만물에 임재하지만, 우리는 피조물 어디서도 신의 현현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언젠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에게 헌정한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천재는 재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며 그 여파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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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russist님의 대화: [파스칼의 구] 역사적으로 ‘구(球)’의 은유가 유구한 내력을 가지고서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살펴봅니다. 기원전 6세기 경의 고대 그리스에서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구'란 가장 완벽하고 가장 균일한 도형이기에 신성을 표현하기에 참 좋은 형태라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12세기 말, 프랑스 신학자 알랭 드릴 역시 비슷한 것을 확인합니다. 그는 헤르메스 총서 가운데 한 권에서 "신은 모든 곳의 중심에 있고 그 어느 곳에도 원주가 존재하지 않는, 지적인 구체"라는 구절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16세기에도 마찬가지여서, ⟪팡타그뤼엘⟫의 마지막 권 마지막 장에서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모든 곳에 중심이 있고 그 어느 곳에도 원주가 없는 지적 구체"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는 신의 속성을 드러냈습니다. 즉 신은 모든 피조물에 깃들지만, 그 각각의 피조물을 보아서는 신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는 형태적인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신이 모든 곳에 편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해주는 것이었습니다. 16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충실했습니다. 사람들은 우주의 중심이 지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지구는 부동의 구체로서 중심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당당히 신의 권능과 그런 신을 받드는 인간의 쓸모를 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7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이 '구'의 은유는 성격을 점차 달리하게 되었다고 보르헤스는 설명합니다. '구'는 모든 곳에 임재하신 신의 속성을 대변함과 동시에 거기에 인간된 관점을 투영할 수 있는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이후의 '구'라는 은유 속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은 느낌을 받습니다. 단적으로 16세기 브루노에게 '구'는 일종의 해방이었지만, 17세기 파스칼에 이르러서 '구'는 끝없는 물리 세계에 대한 중압감이며, 현기증이자 두려움이었습니다.
16세기 브루노는 환희에 차서 말합니다. "우리는 우주 자체가 완전한 중심이라고, 즉 우주의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그 어느 곳에도 없다고 장담할 수 있다." 17세기 파스칼은 암울하게 말합니다. "자연은 하나의 무한 구체이다. 중심이 도처에 있으며 원주는 그 어느 곳에도 없는 그런 구체." 외견상 두 사람의 발언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만, 고작 70년이라는 시차를 두고서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품게 되었습니다. 해방은 절망으로 뒤바뀝니다. 이러한 파스칼의 좌절감은 나중에 발견된 초고에서도 발견됩니다. 파스칼은 '구'를 수식하는 형용사로 ‘가공할(effrotable)’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입니다. 한편, 공교롭게도 신의 속성으로서 '구'는 언젠가 발자크가 말했던 천재의 정의와 부합하는 면이 있습니다. "천재는 모두와 닮았지만, 그와 닮은 이는 아무도 없다." 신은 만물에 임재하지만, 우리는 피조물 어디서도 신의 현현을 찾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언젠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도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테니스 선수 로저 페더러에게 헌정한 한 에세이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천재는 재현되지 않는다. 하지만 영감은 전염되며 그 여파가 다양하다."
우주의 역사는 어쩌면 몇 가지 은유에 대한 다양한 음조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또 다른 심문들』 2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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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콜리지의 꽃] 보르헤스는 '콜리지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아주 짧은 이야기 하나를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 속에서 에덴동산에 갔었다는 증거로 꽃 한 송이를 받았는데, 꿈에서 깨었더니 손에 여전히 꽃이 쥐어져 있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는 간단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일까요? 바로 '콜리지의 꽃'이 꿈에 관한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배반하는 탓입니다. 흔히들 꿈은 '헛것'이며, 현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껏해야 현실의 불완전한 그림자이거나 뒤죽박죽인 모자이크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사안이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우리에게 설득하고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꿈을 온전히 헛것이라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면 꿈은 이미 그 꿈을 가능하게 했던 현실의 일부인 탓입니다. 현실과 꿈이 무관하다는 주장은 한때 관념론자들이 저질렀던 오류와 유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한때 관념론자들은 외부 세계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외부 세계란 그저 우리의 감각 기관이 만들어낸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곧 반론에 맞닥뜨리고 말았는데요,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 기관 자체가 외부 세계의 일부가 아니더냐는 반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꿈을 동떨어진 두 가지로 보는 관념에도 비슷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현실과 꿈의 관계를 묻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문학이 꾸는 '단 하나의 꿈'을 논합니다. 바로 모든 문학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성령'을 다시금 논합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문학의 역사는 서로 다른 개인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실 '성령'이라는 유일무이한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보르헤스는 허버트 조지 웰스와 헨리 제임스를 필두로, 조이 무어와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까지 살펴본 끝에, 이들이 반복적으로 다른 작가의 단락이나 문장을 가져와서 자신의 글에 실었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전주의적 문학'의 개념을 복권시키면서, 이때 문학은 결코 개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문학의 역사란, 시대를 초월하여 작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작가들이 기실 단 하나의 작가이며 "만국적이고 무인칭적인 의미"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꿈속에서 천국에 다녀왔다는 징표로 받은 '콜리지의 꽃'을 보게 됩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도 손에 쥐어져 있던 그 꽃 말입니다. 언젠가 보르헤스는 한 일화를 들려주면서,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세상을 더 분명하고 진실되게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화에서 한 아이는 꿈 속에서 자신이 아는 어른이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 아이는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서 그 어른을 만나자,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근데 그 집에서 뭐 하셨어요?"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가 말하는 현실의 넉넉함이자 준엄함이 아닐까 합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 보아도, 우리는 도처에 콜리지의 꽃이 피어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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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russist님의 대화: [콜리지의 꽃] 보르헤스는 '콜리지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아주 짧은 이야기 하나를 제시합니다. 어떤 사람이 꿈 속에서 에덴동산에 갔었다는 증거로 꽃 한 송이를 받았는데, 꿈에서 깨었더니 손에 여전히 꽃이 쥐어져 있는 것을 새삼 발견했다는 간단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일까요? 바로 '콜리지의 꽃'이 꿈에 관한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배반하는 탓입니다. 흔히들 꿈은 '헛것'이며, 현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껏해야 현실의 불완전한 그림자이거나 뒤죽박죽인 모자이크 이미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사안이 그리 간단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우리에게 설득하고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꿈을 온전히 헛것이라고,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왜냐면 꿈은 이미 그 꿈을 가능하게 했던 현실의 일부인 탓입니다. 현실과 꿈이 무관하다는 주장은 한때 관념론자들이 저질렀던 오류와 유사한 구석이 있습니다. 한때 관념론자들은 외부 세계라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외부 세계란 그저 우리의 감각 기관이 만들어낸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곧 반론에 맞닥뜨리고 말았는데요,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 기관 자체가 외부 세계의 일부가 아니더냐는 반론이 제기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꿈을 동떨어진 두 가지로 보는 관념에도 비슷한 반론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현실과 꿈의 관계를 묻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모든 문학이 꾸는 '단 하나의 꿈'을 논합니다. 바로 모든 문학의 생산자이자 소비자로서의 '성령'을 다시금 논합니다. 보르헤스에 따르면, 문학의 역사는 서로 다른 개인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기실 '성령'이라는 유일무이한 작가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보르헤스는 허버트 조지 웰스와 헨리 제임스를 필두로, 조이 무어와 제임스 조이스, 오스카 와일드까지 살펴본 끝에, 이들이 반복적으로 다른 작가의 단락이나 문장을 가져와서 자신의 글에 실었다는 것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전주의적 문학'의 개념을 복권시키면서, 이때 문학은 결코 개별적인 것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하여 문학의 역사란, 시대를 초월하여 작가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식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작가들이 기실 단 하나의 작가이며 "만국적이고 무인칭적인 의미"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다시, 우리는 꿈속에서 천국에 다녀왔다는 징표로 받은 '콜리지의 꽃'을 보게 됩니다. 꿈에서 깨어났을 때도 손에 쥐어져 있던 그 꽃 말입니다. 언젠가 보르헤스는 한 일화를 들려주면서,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세상을 더 분명하고 진실되게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일화에서 한 아이는 꿈 속에서 자신이 아는 어른이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 아이는 이튿날 잠에서 깨어나서 그 어른을 만나자, 간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곧장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근데 그 집에서 뭐 하셨어요?" 이것이 바로 보르헤스가 말하는 현실의 넉넉함이자 준엄함이 아닐까 합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 보아도, 우리는 도처에 콜리지의 꽃이 피어나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꿈속에 에덴동산에 갔다가 그곳에 갔었다는 증거로 꽃을 한 송이 받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꿈에서 깨어나 보니 그 꽃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심문들』 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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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지의 꿈] 앞서 '콜리지의 꽃'에서도 보았듯, 콜리지는 꿈과 현실을 역동적으로 왕복 운동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자체는 복잡할 게 없습니다. 1797년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엑스무어 근처의 한 농장에서 칩거 중이었습니다. 그는 잠들기 직전, 13세기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 세운 궁전을 묘사한 퍼처스의 글을 읽었고, 그 때문인지 꿈에서 어떤 시를 착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콜리지는 자신이 300행에 달하는 시를 지었다고 믿었고, 그중 일부를 떠올려내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오늘날 50여 개의 행으로 이뤄진 서정시 ⟨쿠블라 칸(kubla khan)⟩입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20년 뒤에 벌어집니다. 1816년, 14세기에 쓰인 한 역사서가 발간되었던 것인데,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가 꿈 속에서 본 뒤 잘 기억하고 있던 설계도에 따라 샹투의 동쪽에 궁전을 건설했다." 이것은 꿈이 단발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유구한 내력을 지닌 역사일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이 꿈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궁전을 이루었고, 수 세기 후에 전혀 다른 대륙에서 한 사람이 그 궁전을 다시 한번 꿈 속에서 조우하고 영감을 받아서 시를 쓴 끝에 비록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그것을 현실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꿈이 한차례 현실이 되자, 그 현실이 다시 꿈 속에서 또 다른 현실을 짓도록 했던 것입니다.
⟨콜리지의 구⟩에서도 말했듯 꿈과 현실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며, 둘 사이의 위계가 명료하지도 않습니다. 둘은 마치 같은 직물의 앞면과 뒷면처럼 맞붙어 있을 따름이어서, 서로 지탱해줄 뿐 아니라 그 존재의 배면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직물에 실을 꿴 바늘을 통과시켜 아래위를 오가며 한 줄 바늘땀을 만드는 풍경을 상상해보세요. 실은 꿈과 현실이 펼쳐진 직물을 한 땀씩 자맥질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지을텐데, 앞면의 바늘땀과 뒷면의 바늘땀은 닮은 듯 다르며 그리하여 서로 존재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화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현실과 꿈이 그토록 닮았음에도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꿈에서 본 것을 현실에 온전히 재현하기란 불가능해집니다. 어떤 식으로든 '꿈의 것'은 현실로 가져오는 순간 미완인 것이 되거나, 상당 부분 소실되고 맙니다. 쿠빌라이 칸이 꾸었던 꿈 속의 궁전은 완벽했지만 오늘날 현실에서 궁전은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콜리지가 꿈에서 암송했다는 300행의 시는 현실로 건너오면서 50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소실은 수 세기에 걸쳐서 꿈과 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는 그 흐름이, 그 계보가 결코 완료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콜리지의 꿈은 문학의 역사를 환기하게 합니다. 상상해보세요. 한 작가가 다른 작가 속에서 자신을 보면서 작품 하나를 씁니다. 그 작품 안에는 잘 표현된 부분도 있고, 미처 작가가 (저도 모르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훗날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 작품을 보면서, 그 안에서 미처 틔워내지 못한 어떤 싹을 봅니다. 그는 그 싹을 발견하고서 조용히 가져가서 제 나름으로 키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그는 그 과정에서 일부 성공하고, 일부 실패합니다. 그리고 다시 먼 훗날 누군가가 나타나 그 성공과 실패 양쪽을 모두 본 다음, 이상하게도 '실패' 쪽에서 어떤 의지를 이어받아가기로 합니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찌 보면 문학의 계보도 이런 식으로 계속 되어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계보에는 아무런 혈통도, 가문도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 명에서 또 다른 한 명으로 무언가가 계승될 때, 어떤 목격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목격은 중구난방이고 종횡무진한 시선에 불과할 겁니다. 이 시선에 '적통'이라는 것은 없으며, 차라리 그때 그 순간의 시선에 따라 이리저리 뻗치고 우연히 전염되는 꿈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계보는 자신보다 앞서 있던 어떤 이가 꾸었던 꿈을, 그러나 미진한 채로 깨어나야 했던 그 꿈을 이어받아서 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꿈의 바톤 넘겨받기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알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이 꿈의 계보에 누구든 동참할 수 있으며,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럴지도 모르고요. 누차 말하지만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간다는 것은 개인의 과업을 달성하고 뽐내는 행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다만 거대한 기획의 일부이며, 유일무이한 한 권의 한 책 장 귀퉁이의 한 획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사사키 아타루는 우스개처럼 말한 적 있습니다. 타인의 글은 기본적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라고요.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글을 쓴 작가의 꿈을 대신 꾸는 행위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말했습니다. 완전한 이해는 완전한 오해이며,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미쳐버릴 거라고도 말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 부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꿈을 이해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을 내 미진한 꿈으로 데려오려는 욕망을 발휘한다고요. 그렇게 꿈은 거듭해서 이어지게 될 것이며,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셉션타인의 꿈에 들어가 생각을 훔치는 특수 보안요원 코브. 그를 이용해 라이벌 기업의 정보를 빼내고자 하는 사이토는 코브에게 생각을 훔치는 것이 아닌, 생각을 심는 ‘인셉션’ 작전을 제안한다. 성공 조건으로 국제적인 수배자가 되어있는 코브의 신분을 바꿔주겠다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고,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위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최강의 팀을 구성, 표적인 피셔에게 접근해서 ‘인셉션’ 작전을 실행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들과 마주하게 되는데… 꿈 VS 현실! 시간, 규칙, 타이밍 모든 것이 완벽해야만 하는, 단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는 ‘인셉션’ 작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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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콜리지의 꿈] 앞서 '콜리지의 꽃'에서도 보았듯, 콜리지는 꿈과 현실을 역동적으로 왕복 운동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자체는 복잡할 게 없습니다. 1797년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엑스무어 근처의 한 농장에서 칩거 중이었습니다. 그는 잠들기 직전, 13세기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 세운 궁전을 묘사한 퍼처스의 글을 읽었고, 그 때문인지 꿈에서 어떤 시를 착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콜리지는 자신이 300행에 달하는 시를 지었다고 믿었고, 그중 일부를 떠올려내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오늘날 50여 개의 행으로 이뤄진 서정시 ⟨쿠블라 칸(kubla khan)⟩입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20년 뒤에 벌어집니다. 1816년, 14세기에 쓰인 한 역사서가 발간되었던 것인데,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가 꿈 속에서 본 뒤 잘 기억하고 있던 설계도에 따라 샹투의 동쪽에 궁전을 건설했다." 이것은 꿈이 단발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유구한 내력을 지닌 역사일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이 꿈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궁전을 이루었고, 수 세기 후에 전혀 다른 대륙에서 한 사람이 그 궁전을 다시 한번 꿈 속에서 조우하고 영감을 받아서 시를 쓴 끝에 비록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그것을 현실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꿈이 한차례 현실이 되자, 그 현실이 다시 꿈 속에서 또 다른 현실을 짓도록 했던 것입니다.
⟨콜리지의 구⟩에서도 말했듯 꿈과 현실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며, 둘 사이의 위계가 명료하지도 않습니다. 둘은 마치 같은 직물의 앞면과 뒷면처럼 맞붙어 있을 따름이어서, 서로 지탱해줄 뿐 아니라 그 존재의 배면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직물에 실을 꿴 바늘을 통과시켜 아래위를 오가며 한 줄 바늘땀을 만드는 풍경을 상상해보세요. 실은 꿈과 현실이 펼쳐진 직물을 한 땀씩 자맥질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지을텐데, 앞면의 바늘땀과 뒷면의 바늘땀은 닮은 듯 다르며 그리하여 서로 존재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화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현실과 꿈이 그토록 닮았음에도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꿈에서 본 것을 현실에 온전히 재현하기란 불가능해집니다. 어떤 식으로든 '꿈의 것'은 현실로 가져오는 순간 미완인 것이 되거나, 상당 부분 소실되고 맙니다. 쿠빌라이 칸이 꾸었던 꿈 속의 궁전은 완벽했지만 오늘날 현실에서 궁전은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콜리지가 꿈에서 암송했다는 300행의 시는 현실로 건너오면서 50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소실은 수 세기에 걸쳐서 꿈과 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는 그 흐름이, 그 계보가 결코 완료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콜리지의 꿈은 문학의 역사를 환기하게 합니다. 상상해보세요. 한 작가가 다른 작가 속에서 자신을 보면서 작품 하나를 씁니다. 그 작품 안에는 잘 표현된 부분도 있고, 미처 작가가 (저도 모르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훗날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 작품을 보면서, 그 안에서 미처 틔워내지 못한 어떤 싹을 봅니다. 그는 그 싹을 발견하고서 조용히 가져가서 제 나름으로 키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그는 그 과정에서 일부 성공하고, 일부 실패합니다. 그리고 다시 먼 훗날 누군가가 나타나 그 성공과 실패 양쪽을 모두 본 다음, 이상하게도 '실패' 쪽에서 어떤 의지를 이어받아가기로 합니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찌 보면 문학의 계보도 이런 식으로 계속 되어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계보에는 아무런 혈통도, 가문도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 명에서 또 다른 한 명으로 무언가가 계승될 때, 어떤 목격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목격은 중구난방이고 종횡무진한 시선에 불과할 겁니다. 이 시선에 '적통'이라는 것은 없으며, 차라리 그때 그 순간의 시선에 따라 이리저리 뻗치고 우연히 전염되는 꿈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계보는 자신보다 앞서 있던 어떤 이가 꾸었던 꿈을, 그러나 미진한 채로 깨어나야 했던 그 꿈을 이어받아서 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꿈의 바톤 넘겨받기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알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이 꿈의 계보에 누구든 동참할 수 있으며,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럴지도 모르고요. 누차 말하지만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간다는 것은 개인의 과업을 달성하고 뽐내는 행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다만 거대한 기획의 일부이며, 유일무이한 한 권의 한 책 장 귀퉁이의 한 획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사사키 아타루는 우스개처럼 말한 적 있습니다. 타인의 글은 기본적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라고요.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글을 쓴 작가의 꿈을 대신 꾸는 행위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말했습니다. 완전한 이해는 완전한 오해이며,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미쳐버릴 거라고도 말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 부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꿈을 이해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을 내 미진한 꿈으로 데려오려는 욕망을 발휘한다고요. 그렇게 꿈은 거듭해서 이어지게 될 것이며,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1691년, 예수회 소속 P. 제르비용 신부는 쿠빌라이 칸의 궁전은 폐허로 남아 있을 뿐임을 확인했으며, 우리는 콜리지의 시 역시 겨우 50행 정도만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꿈과 과업들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업은 아직 종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꿈을 꾼 주인공은 꿈속에서 궁전을 보고 그 궁전을 지었으며, 두 번째 꿈을 꾼 주인공은 첫 번째 사람의 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 바로 그 궁전에 대한 시를 지었다. 이러한 틀이 계속 유지된다면, 수백 년 후의 어느 날, 누군가가 같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는 예전에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도 못한 채, 그 꿈에 대리석이나 음악의 형상을 덧입힐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꿈들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바로 전의 꿈은 다음번 꿈을 위한 열쇠를 내포하게 될 것이다. ”
『또 다른 심문들』 42-4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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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존 던] 꿈과 시간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글을 썼던 아일랜드 작가 존 던(John William Dunne, 1875-1949)을 논하는 글입니다. 참고로 보르헤스가 과거에 ⟪수르⟫ 제63호에 게재했다고 하는 글은 일전에 ⟪영원성의 역사⟫ 1부에서 다뤘던 ⟨거북의 변모⟩를 말합니다. 이전 모임에서 다뤘으니 참고 바랍니다. 해당 글에 보르헤스는 '제논의 역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살피면서 "무한퇴행(regresión infinita)"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는데요, 보르헤스는 ⟨거북의 변모⟩을 쓸 당시 의도적으로 존 던을 언급하지 않았노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 던이 제시한 인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은 참으로 놀랍기에 따로 글 한 편을 할애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오롯이 존 던에게 할애됩니다. 한편, ⟨거북의 변모⟩에서는 '무한 퇴행'이라고 옮겨져 있지 않고 '무한 소급'이라고 옮겨져 있으나,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 더, 이 글에서는 오역이 있습니다. 번역자는 "무한퇴행(regresión infinita)"을 니체의 "영겁회귀"로 잘못 옮겼습니다. "영겁회귀"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전부 "무한퇴행"으로 고쳐 읽어야 합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한퇴행'이란 어떤 사건이나 설명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그 설명이 거듭해서 설명을 요구받는 식의 연쇄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일컫습니다. A라는 결과를 설명하려면 B가 필요하고, B를 설명하려면 C가 필요해지는 식으로 무한히 인식이 원인을 찾아 후퇴하는 것입니다. 이 무한퇴행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1원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훗날 제논이 이러한 퇴행을 바탕으로 여러 역설을 제시하였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 이르러서는 "제1존재"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위해서 동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거북의 변모⟩를 참고 바랍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만, 존 던이 말하고 있는 이 무한퇴행은 역사가 유구합니다. ⟪인도 철학사⟫를 쓴 파울 도이센은 고대 인도 철학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합니다. 고대 인도 철학에서는 '자아'를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영혼은 그 영혼을 인식하는 다른 영혼을 거듭해서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헤르바르트라는 철학자는 자아가 무한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존 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무한히 퇴행하는 의식 하나하나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 각각의 의식은 3차원의 유한한 공간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시간이라는 무한한 차원에는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존 던의 주장을 곰곰이 곱씹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존 던의 시간관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간파합니다. 바로 무한퇴행이 기실 '현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낸 '착시 효과'라는 것입니다. 영국 유명론의 계승자인 헉슬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단지 언어적 구분에 불과하며 본디 하나의 현상일 따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행위가 아니라, 생각의 산물이자 생각의 도구인 언어를 활용하는 인간된 착오라는 겁니다. 만일 '생각하는 나'와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 (...)'처럼 거듭해서 생각하는 주체를 퇴행적으로 좇아 간다면, 생각 자체는 무한히 지연되고 불가능해질 겁니다. 마치 아킬레우스의 거북이처럼요. 그런데 그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현실의 우리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을 목도하고, 아무런 무리 없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런 구분 자체가 허상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분절된 언어의 특성이 현실의 특성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흔히 시인들은 "붉게 떠오르는 둥근 달"이 분할할 수 없는 시각적 이미지임에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 주어와 동사와 보어로 된 문장으로 분절해서 쓰기에 현실의 둥근 달 역시 분절된 것이라고 오인하게 된다고요.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을 해부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뜯어서 설명할 때, 우리는 아주 단순한 동작도 매우 복잡한 매커니즘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움직임은 그렇게 분절돼 있지 않고, 한순간, 한동작으로 이뤄집니다. 언젠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만연한 수다체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포핸드 드라이브샷을 묘사하면서, 우리가 목격하는 그 영웅적인 찰나의 움직임을 로저 페더러는 머릿속에서 아무런 계산도 없이 수행하고 있음을 역설한 적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생각없음', '텅 비어 있는 내면'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을 증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어적 분석과 현실을 곧장 등치시키고 마는데, 이는 존 던의 무한퇴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오류입니다. 존 던 역시 서구 철학과 과학이 저질러 온 오류를 답습합니다. 바로 시간을 공간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분할 불가능한 '한 덩어리'임에도 그것을 마치 공간처럼 분할 가능한 것처럼 상상하고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보르헤스는 '공간'과 '시간'이 대등하지 않기에 "시공간"처럼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며, "공간이야말로 시간의 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존 던의 시간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라우며, 그것에 비하면 앞선 오류는 사소하다고까지 말합니다. 존 던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가 모든 세부사항과 함께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놀라움을 보여줍니다. 그 미래로부터 거듭 퇴행해 오는 각각의 시간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 이미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가 매일 밤 꾸는 꿈이 바로 그 증거라는 놀라운 생각의 높이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씁니다. "꿈속에는 즉각적 과거와 즉각적 미래가 공존한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같은 속도로 흐르는 순차적 시간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꿈속에서는 무한대로 이어지는 광활한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50쪽) 존 던은 사람들이 죽음을 통해서 영원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되고, 그 영원 속에서 모든 사람이 모든 인생의 순간을 되찾아서, 원하는 대로 조화롭게 배치하게 되리라고 보았습니다. 보르헤스는 존 던이 제시한 이 아름다운 구상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언어의 착시 효과로 인한 무한퇴행이라는 현학적인 오류나, 시간과 공간을 혼동하는 유의 오류는 매우 사소하다고 말합니다. 박수 치고 싶을 정도로 탁월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히 한 인물의 논의를 면밀히 비판함과 동시에 그의 성취를 칭송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영원성의 역사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994년에 첫 출간된 보르헤스 전집이 픽션 모음집이었다면 이번 전집은 보르헤스가 발표했던 논픽션을 모았다. 픽션과는 다른 매력의, 인간적인 보르헤스를 만날 수 있다.

끈이론 -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미국 현대문학의 가장 담대한 작가이자 빼어난 스타일리스트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선보이는 산문의 정수이다. 주니어 테니스 선수이기도 했던 작가는 테니스 치는 순간들과 테니스 경기를 둘러싼 모든 철학적, 정치사회적, 심지어 수학적 맥락들을 깊이 쑤시고 건드려 미국 스포츠 산문의 고전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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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학자들은 모든 찰나에 대한 동시적이고 순간적인 점유를 일컬어 영원이라 규정하면서, 그 영원은 다름 아닌 신성(神性)의 속성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던은 놀랍게도 영원이 이미 우리 인간의 속성이 되었다면서 매일 밤 꾸는 꿈을 통해 이 논지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고 한다. 던에 따르면 꿈속에는 즉각적 과거와 즉각적 미래가 공존한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같은 속도로 흐르는 순차적 시간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꿈속에서는 무한대로 이어지는 광활한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그렇게 보게 된 모든 것들의 배열이며, 그것들로 만들어 낸 한 편의 역사이거나 많은 역사들의 무더기이다. (···) (쇼펜하우어는 이미 실제의 삶과 꿈은 동일한 한 권의 책 속 서로 다른 책장에 불과하다며, 그 책을 순서대로 읽는 것은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이고, 여기저기 건너뛰며 읽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라고 했다.) ”
『또 다른 심문들』 5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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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P.H. 고스] '창조'와 '인과 관계'가 어떻게 양립이 가능한지를 논의하는 짧고 강력한 글입니다. 세상은 원인-결과로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안이 인과 관계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며, 외려 인과가 지배적인 효용을 미치는 세상이기에 인과를 넘어서는 창조의 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여지도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역사적으로 인과에 누구보다 몰두했던 이들이 현재의 인과 관계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창조해내기에 이릅니다. 먼저 말하자면, 창조란 인과의 사슬을 끊어내는 도끼질인 동시에, 앞뒤로 무한히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을 창조해내는 땜질인 셈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자연학자이자 과학자인 필리프 헨리 고스는 ⟪옴팔로스(Omphalos)⟫(1857)라는 책에서 자신만의 우주발생론(혹은 우주진화론, cosmogony)을 전개하면서 앞서 말한 '창조'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보르헤스는 해당 책을 구할 수 없없기에, 20세기 에드먼드 고스(Edmund Gosse)와 H.G. 웰스의 축약본을 경유하여, 19세기 고스가 '창조'와 '인과'를 어떻게 모순없이 한데 결합하였는지를 이 글에서 추적합니다.
인과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형이상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 즉 '시간'의 문제"(51쪽)를 다룬다는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일의 선후를 따져본다는 것입니다. 고스는 로마서 5: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와 고린도전서 15: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를 바탕으로, '아담'과 '예수' 사이에서 모종의 대등함을, 그 대칭된 운명을 읽어냅니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으로서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온 존재이며, 예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인류의 죄를 대속한 존재이기에, 이 두 사람은 신학적인 거울상이며 대등하다는 것입니다. 대담한 주장이며, 곱씹어 볼수록 의미심장합니다. 아담은 처음 태어났을 당시부터 33살이었고 예수는 33살에 죽었으며,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는 에덴동산에 심긴 금단의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고스는 주장합니다. 나아가, 존 스튜어트 밀이 ⟪논리학⟫에서 주장한 바가 고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탐구합니다. 밀은 현재의 한 순간을 완벽히 이해하기만 하면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역사를 모두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일찍이 라플라스가 주장한 바를 조금 완화한 버전에 불과한데, 그는 우주의 현 상태에서 공식을 도출하여 그로부터 모든 과거와 미래를 연역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 → q → r → s → t → ···’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인과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그 각 단계 사이에 '창조적 사건(종말적 사건)'이 끼어들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이 말인즉, "신은 시간의 틈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발생할 신의 어떤 행위에 의해 단절될 수도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인과성 시간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스는 이와는 다른 시간을 상상합니다. 밀에게 있어서 '신의 개입'이란, 앞도 뒤도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현재의 인과 사슬 속에 장차 벌어질 사건, 하지만 미처 벌어지지 않은 사건으로 인식됩니다. 반면 고스에게는 이런 '신의 개입'이 벌써 일어났습니다. '창조'라는 인과의 사슬을 끊는 사건("천지 창조")은 특정할 수 없는 과거의 한 순간에 이미 일어났지만, 일어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 역시 함께 만들어졌기에, 원인-결과가 끝없이 이어지는 현 세상의 원리를 겉보기에 전혀 훼손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아담이 33살의 남성으로 창조될 당시부터 성인의 치아와 골격을 지녔고, 탯줄의 흔적인 '배꼽'마저 갖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스에게 창조와 인과는 충돌하지 않고 공존합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창조란 의심의 여지 없이 '첫 순간'이지만, 그 첫 번째 순간에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역시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전제하는 '창조'를 넘어서며, 훨씬 크고 넓고 싶은 범위에서 벌어집니다. 탈무드 선집의 첫머리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밤이기는 하지만, 세월은 이 밤을 수세기라는 세월 저 앞쪽에 포진시켰다."
고스의 '창조'는 단순히 이전까지 지속되어오던 것을 '단절'하고 처음부터 시작하려는 '리셋'이 아닙니다. 오래된 창조 개념에서는 과거를 깡그리 덜어내고, 자신이 처음이 됨으로써 현재와 미래만 남겨두려고 합니다. 오직 자신만을 현재에 우뚝 세우고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를 야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처음이 되려는 시(始)황제의 야심에 다름 아닙니다(시황제는 '과거의 상징'인 모든 서책을 불태우고 땅에 파묻은 뒤에 거대한 장벽으로 제국을 둘러쳤습니다). 고스는 현재와 미래만큼 '과거'로도 시선을 돌립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창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란, 부득이 오래된 종교적 먼지가 뒤덮인 단어를 경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의 창조입니다. 자기 비대한 자아를 세계의 처음과 끝에 두는 세카이계와는 다르고, 종말론을 애호하는 나른한 세태와도 다르며, 리셋 증후군에 빠진 염세적 세계관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에 이르러 더욱 유의미하며, 앞뒤로 무한히 펼쳐진 시간, 영원을 상정합니다. 덕분에 고스의 창조론에 따르면 우리는 다소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담에게 탯줄의 흔적인 배꼽은 있으되 그에게 어머니가 없다고 주장했듯, 멸종한 클립토돈의 뼛조각은 얼마든 있으되 클립토돈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스는 영원을 승인하며, 앞뒤로 무한히 뻗어 있는 시간 속에서, 전통적 창조 개념을 귀류법적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과거도 창조한다는 이 개념이 왜 혁신적인지 제 나름으로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오늘날 빈티지 시장이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것을 떠올려보세요. 비단 와인뿐만 아니라 의류 업계에서도 '빈티지'는 거스를 수 없는 화두입니다. 빈티지는 과거도 미래만큼 활짝 열려 있음을 전제하고 나서, 과거를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의류 디렉터 나카무라 히로키 상은 VISVIM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미래의 빈티지(Future Vintage)'라는 기치를 내세웁니다. (웃기게도 VISVIM의 옷은 LVMH 산하의 명품 브랜드만큼 비싸면서도, 놀랍도록 낡아 있습니다.) VISVIM에서 신품은 이미 빈티지이며 착용흔이 남아 있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면, 시즌마다 의류를 전개해서 고객에게 내세울 때, 그것에 미리 세월의 흔적이 남은 가공을 하여서 '신품'으로 제공한다는 얘깁니다. VISVIM은 20세기의 빈티지 의류를 입수해서 그것을 현대의 기술로 재현합니다(이를 '복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의류를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과거의 의복사를 소개하는 동시에, 고객의 시간을 의류 속에 새겨넣을 것을 주문하는 한편, 그 옷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온 적 없는 과거를 향한 노스텔지어를 선사합니다. 여느 신품 의류가 구매하는 그 순간부터 감가상각되는 공산품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VISVIM의 의류는 이미 20세기의 의복 문화사와 착용흔이 묻어 있는 '과거를 품은 현재'에서 출발하기에 시간과 함께 그 가치를 더해갑니다. 빈티지 리바이스 데님과 빈티지 락밴드 티셔츠, 가먼트 다잉된 의류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오늘날, 우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를 창조하는 고스의 관념에 올라타 있습니다. 이는 신이 노쇠함조차 창조했노라는 샤토브리앙의 주장을 고스란히 좇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는 '창조된 과거'라는 개념을 별천지의 공상이 아닌, 눈앞의 현실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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