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보르헤스 읽기] 『또 다른 심문들』 1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님의 대화: [콜리지의 꿈] 앞서 '콜리지의 꽃'에서도 보았듯, 콜리지는 꿈과 현실을 역동적으로 왕복 운동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자체는 복잡할 게 없습니다. 1797년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엑스무어 근처의 한 농장에서 칩거 중이었습니다. 그는 잠들기 직전, 13세기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 세운 궁전을 묘사한 퍼처스의 글을 읽었고, 그 때문인지 꿈에서 어떤 시를 착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콜리지는 자신이 300행에 달하는 시를 지었다고 믿었고, 그중 일부를 떠올려내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오늘날 50여 개의 행으로 이뤄진 서정시 ⟨쿠블라 칸(kubla khan)⟩입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20년 뒤에 벌어집니다. 1816년, 14세기에 쓰인 한 역사서가 발간되었던 것인데,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가 꿈 속에서 본 뒤 잘 기억하고 있던 설계도에 따라 샹투의 동쪽에 궁전을 건설했다." 이것은 꿈이 단발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유구한 내력을 지닌 역사일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이 꿈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궁전을 이루었고, 수 세기 후에 전혀 다른 대륙에서 한 사람이 그 궁전을 다시 한번 꿈 속에서 조우하고 영감을 받아서 시를 쓴 끝에 비록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그것을 현실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꿈이 한차례 현실이 되자, 그 현실이 다시 꿈 속에서 또 다른 현실을 짓도록 했던 것입니다. ⟨콜리지의 구⟩에서도 말했듯 꿈과 현실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며, 둘 사이의 위계가 명료하지도 않습니다. 둘은 마치 같은 직물의 앞면과 뒷면처럼 맞붙어 있을 따름이어서, 서로 지탱해줄 뿐 아니라 그 존재의 배면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직물에 실을 꿴 바늘을 통과시켜 아래위를 오가며 한 줄 바늘땀을 만드는 풍경을 상상해보세요. 실은 꿈과 현실이 펼쳐진 직물을 한 땀씩 자맥질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지을텐데, 앞면의 바늘땀과 뒷면의 바늘땀은 닮은 듯 다르며 그리하여 서로 존재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화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현실과 꿈이 그토록 닮았음에도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꿈에서 본 것을 현실에 온전히 재현하기란 불가능해집니다. 어떤 식으로든 '꿈의 것'은 현실로 가져오는 순간 미완인 것이 되거나, 상당 부분 소실되고 맙니다. 쿠빌라이 칸이 꾸었던 꿈 속의 궁전은 완벽했지만 오늘날 현실에서 궁전은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콜리지가 꿈에서 암송했다는 300행의 시는 현실로 건너오면서 50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소실은 수 세기에 걸쳐서 꿈과 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는 그 흐름이, 그 계보가 결코 완료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콜리지의 꿈은 문학의 역사를 환기하게 합니다. 상상해보세요. 한 작가가 다른 작가 속에서 자신을 보면서 작품 하나를 씁니다. 그 작품 안에는 잘 표현된 부분도 있고, 미처 작가가 (저도 모르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훗날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 작품을 보면서, 그 안에서 미처 틔워내지 못한 어떤 싹을 봅니다. 그는 그 싹을 발견하고서 조용히 가져가서 제 나름으로 키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그는 그 과정에서 일부 성공하고, 일부 실패합니다. 그리고 다시 먼 훗날 누군가가 나타나 그 성공과 실패 양쪽을 모두 본 다음, 이상하게도 '실패' 쪽에서 어떤 의지를 이어받아가기로 합니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찌 보면 문학의 계보도 이런 식으로 계속 되어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계보에는 아무런 혈통도, 가문도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 명에서 또 다른 한 명으로 무언가가 계승될 때, 어떤 목격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목격은 중구난방이고 종횡무진한 시선에 불과할 겁니다. 이 시선에 '적통'이라는 것은 없으며, 차라리 그때 그 순간의 시선에 따라 이리저리 뻗치고 우연히 전염되는 꿈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계보는 자신보다 앞서 있던 어떤 이가 꾸었던 꿈을, 그러나 미진한 채로 깨어나야 했던 그 꿈을 이어받아서 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꿈의 바톤 넘겨받기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알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이 꿈의 계보에 누구든 동참할 수 있으며,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럴지도 모르고요. 누차 말하지만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간다는 것은 개인의 과업을 달성하고 뽐내는 행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다만 거대한 기획의 일부이며, 유일무이한 한 권의 한 책 장 귀퉁이의 한 획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사사키 아타루는 우스개처럼 말한 적 있습니다. 타인의 글은 기본적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라고요.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글을 쓴 작가의 꿈을 대신 꾸는 행위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말했습니다. 완전한 이해는 완전한 오해이며,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미쳐버릴 거라고도 말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 부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꿈을 이해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을 내 미진한 꿈으로 데려오려는 욕망을 발휘한다고요. 그렇게 꿈은 거듭해서 이어지게 될 것이며,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1691년, 예수회 소속 P. 제르비용 신부는 쿠빌라이 칸의 궁전은 폐허로 남아 있을 뿐임을 확인했으며, 우리는 콜리지의 시 역시 겨우 50행 정도만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꿈과 과업들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업은 아직 종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꿈을 꾼 주인공은 꿈속에서 궁전을 보고 그 궁전을 지었으며, 두 번째 꿈을 꾼 주인공은 첫 번째 사람의 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 바로 그 궁전에 대한 시를 지었다. 이러한 틀이 계속 유지된다면, 수백 년 후의 어느 날, 누군가가 같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는 예전에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도 못한 채, 그 꿈에 대리석이나 음악의 형상을 덧입힐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꿈들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바로 전의 꿈은 다음번 꿈을 위한 열쇠를 내포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심문들 42-4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시간과 존 던] 꿈과 시간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글을 썼던 아일랜드 작가 존 던(John William Dunne, 1875-1949)을 논하는 글입니다. 참고로 보르헤스가 과거에 ⟪수르⟫ 제63호에 게재했다고 하는 글은 일전에 ⟪영원성의 역사⟫ 1부에서 다뤘던 ⟨거북의 변모⟩를 말합니다. 이전 모임에서 다뤘으니 참고 바랍니다. 해당 글에 보르헤스는 '제논의 역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살피면서 "무한퇴행(regresión infinita)"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는데요, 보르헤스는 ⟨거북의 변모⟩을 쓸 당시 의도적으로 존 던을 언급하지 않았노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 던이 제시한 인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은 참으로 놀랍기에 따로 글 한 편을 할애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오롯이 존 던에게 할애됩니다. 한편, ⟨거북의 변모⟩에서는 '무한 퇴행'이라고 옮겨져 있지 않고 '무한 소급'이라고 옮겨져 있으나,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 더, 이 글에서는 오역이 있습니다. 번역자는 "무한퇴행(regresión infinita)"을 니체의 "영겁회귀"로 잘못 옮겼습니다. "영겁회귀"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전부 "무한퇴행"으로 고쳐 읽어야 합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한퇴행'이란 어떤 사건이나 설명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그 설명이 거듭해서 설명을 요구받는 식의 연쇄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일컫습니다. A라는 결과를 설명하려면 B가 필요하고, B를 설명하려면 C가 필요해지는 식으로 무한히 인식이 원인을 찾아 후퇴하는 것입니다. 이 무한퇴행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1원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훗날 제논이 이러한 퇴행을 바탕으로 여러 역설을 제시하였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 이르러서는 "제1존재"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위해서 동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거북의 변모⟩를 참고 바랍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만, 존 던이 말하고 있는 이 무한퇴행은 역사가 유구합니다. ⟪인도 철학사⟫를 쓴 파울 도이센은 고대 인도 철학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합니다. 고대 인도 철학에서는 '자아'를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영혼은 그 영혼을 인식하는 다른 영혼을 거듭해서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헤르바르트라는 철학자는 자아가 무한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존 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무한히 퇴행하는 의식 하나하나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 각각의 의식은 3차원의 유한한 공간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시간이라는 무한한 차원에는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존 던의 주장을 곰곰이 곱씹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존 던의 시간관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간파합니다. 바로 무한퇴행이 기실 '현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낸 '착시 효과'라는 것입니다. 영국 유명론의 계승자인 헉슬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단지 언어적 구분에 불과하며 본디 하나의 현상일 따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행위가 아니라, 생각의 산물이자 생각의 도구인 언어를 활용하는 인간된 착오라는 겁니다. 만일 '생각하는 나'와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 (...)'처럼 거듭해서 생각하는 주체를 퇴행적으로 좇아 간다면, 생각 자체는 무한히 지연되고 불가능해질 겁니다. 마치 아킬레우스의 거북이처럼요. 그런데 그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현실의 우리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을 목도하고, 아무런 무리 없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런 구분 자체가 허상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분절된 언어의 특성이 현실의 특성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흔히 시인들은 "붉게 떠오르는 둥근 달"이 분할할 수 없는 시각적 이미지임에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 주어와 동사와 보어로 된 문장으로 분절해서 쓰기에 현실의 둥근 달 역시 분절된 것이라고 오인하게 된다고요.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을 해부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뜯어서 설명할 때, 우리는 아주 단순한 동작도 매우 복잡한 매커니즘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움직임은 그렇게 분절돼 있지 않고, 한순간, 한동작으로 이뤄집니다. 언젠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만연한 수다체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포핸드 드라이브샷을 묘사하면서, 우리가 목격하는 그 영웅적인 찰나의 움직임을 로저 페더러는 머릿속에서 아무런 계산도 없이 수행하고 있음을 역설한 적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생각없음', '텅 비어 있는 내면'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을 증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어적 분석과 현실을 곧장 등치시키고 마는데, 이는 존 던의 무한퇴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오류입니다. 존 던 역시 서구 철학과 과학이 저질러 온 오류를 답습합니다. 바로 시간을 공간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분할 불가능한 '한 덩어리'임에도 그것을 마치 공간처럼 분할 가능한 것처럼 상상하고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보르헤스는 '공간'과 '시간'이 대등하지 않기에 "시공간"처럼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며, "공간이야말로 시간의 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존 던의 시간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라우며, 그것에 비하면 앞선 오류는 사소하다고까지 말합니다. 존 던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가 모든 세부사항과 함께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놀라움을 보여줍니다. 그 미래로부터 거듭 퇴행해 오는 각각의 시간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 이미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가 매일 밤 꾸는 꿈이 바로 그 증거라는 놀라운 생각의 높이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씁니다. "꿈속에는 즉각적 과거와 즉각적 미래가 공존한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같은 속도로 흐르는 순차적 시간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꿈속에서는 무한대로 이어지는 광활한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50쪽) 존 던은 사람들이 죽음을 통해서 영원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되고, 그 영원 속에서 모든 사람이 모든 인생의 순간을 되찾아서, 원하는 대로 조화롭게 배치하게 되리라고 보았습니다. 보르헤스는 존 던이 제시한 이 아름다운 구상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언어의 착시 효과로 인한 무한퇴행이라는 현학적인 오류나, 시간과 공간을 혼동하는 유의 오류는 매우 사소하다고 말합니다. 박수 치고 싶을 정도로 탁월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히 한 인물의 논의를 면밀히 비판함과 동시에 그의 성취를 칭송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영원성의 역사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994년에 첫 출간된 보르헤스 전집이 픽션 모음집이었다면 이번 전집은 보르헤스가 발표했던 논픽션을 모았다. 픽션과는 다른 매력의, 인간적인 보르헤스를 만날 수 있다.
끈이론 -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미국 현대문학의 가장 담대한 작가이자 빼어난 스타일리스트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선보이는 산문의 정수이다. 주니어 테니스 선수이기도 했던 작가는 테니스 치는 순간들과 테니스 경기를 둘러싼 모든 철학적, 정치사회적, 심지어 수학적 맥락들을 깊이 쑤시고 건드려 미국 스포츠 산문의 고전을 완성했다.
신학자들은 모든 찰나에 대한 동시적이고 순간적인 점유를 일컬어 영원이라 규정하면서, 그 영원은 다름 아닌 신성(神性)의 속성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한다. 그런데 던은 놀랍게도 영원이 이미 우리 인간의 속성이 되었다면서 매일 밤 꾸는 꿈을 통해 이 논지가 더욱 공고해지고 있다고 한다. 던에 따르면 꿈속에는 즉각적 과거와 즉각적 미래가 공존한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같은 속도로 흐르는 순차적 시간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꿈속에서는 무한대로 이어지는 광활한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꿈을 꾼다는 것은 그렇게 보게 된 모든 것들의 배열이며, 그것들로 만들어 낸 한 편의 역사이거나 많은 역사들의 무더기이다. (···) (쇼펜하우어는 이미 실제의 삶과 꿈은 동일한 한 권의 책 속 서로 다른 책장에 불과하다며, 그 책을 순서대로 읽는 것은 실제의 삶을 사는 것이고, 여기저기 건너뛰며 읽는 것은 꿈을 꾸는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심문들 5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창조와 P.H. 고스] '창조'와 '인과 관계'가 어떻게 양립이 가능한지를 논의하는 짧고 강력한 글입니다. 세상은 원인-결과로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안이 인과 관계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며, 외려 인과가 지배적인 효용을 미치는 세상이기에 인과를 넘어서는 창조의 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여지도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역사적으로 인과에 누구보다 몰두했던 이들이 현재의 인과 관계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창조해내기에 이릅니다. 먼저 말하자면, 창조란 인과의 사슬을 끊어내는 도끼질인 동시에, 앞뒤로 무한히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을 창조해내는 땜질인 셈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자연학자이자 과학자인 필리프 헨리 고스는 ⟪옴팔로스(Omphalos)⟫(1857)라는 책에서 자신만의 우주발생론(혹은 우주진화론, cosmogony)을 전개하면서 앞서 말한 '창조'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보르헤스는 해당 책을 구할 수 없없기에, 20세기 에드먼드 고스(Edmund Gosse)와 H.G. 웰스의 축약본을 경유하여, 19세기 고스가 '창조'와 '인과'를 어떻게 모순없이 한데 결합하였는지를 이 글에서 추적합니다. 인과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형이상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 즉 '시간'의 문제"(51쪽)를 다룬다는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일의 선후를 따져본다는 것입니다. 고스는 로마서 5: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와 고린도전서 15: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를 바탕으로, '아담'과 '예수' 사이에서 모종의 대등함을, 그 대칭된 운명을 읽어냅니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으로서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온 존재이며, 예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인류의 죄를 대속한 존재이기에, 이 두 사람은 신학적인 거울상이며 대등하다는 것입니다. 대담한 주장이며, 곱씹어 볼수록 의미심장합니다. 아담은 처음 태어났을 당시부터 33살이었고 예수는 33살에 죽었으며,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는 에덴동산에 심긴 금단의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고스는 주장합니다. 나아가, 존 스튜어트 밀이 ⟪논리학⟫에서 주장한 바가 고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탐구합니다. 밀은 현재의 한 순간을 완벽히 이해하기만 하면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역사를 모두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일찍이 라플라스가 주장한 바를 조금 완화한 버전에 불과한데, 그는 우주의 현 상태에서 공식을 도출하여 그로부터 모든 과거와 미래를 연역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 → q → r → s → t → ···’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인과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그 각 단계 사이에 '창조적 사건(종말적 사건)'이 끼어들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이 말인즉, "신은 시간의 틈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발생할 신의 어떤 행위에 의해 단절될 수도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인과성 시간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스는 이와는 다른 시간을 상상합니다. 밀에게 있어서 '신의 개입'이란, 앞도 뒤도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현재의 인과 사슬 속에 장차 벌어질 사건, 하지만 미처 벌어지지 않은 사건으로 인식됩니다. 반면 고스에게는 이런 '신의 개입'이 벌써 일어났습니다. '창조'라는 인과의 사슬을 끊는 사건("천지 창조")은 특정할 수 없는 과거의 한 순간에 이미 일어났지만, 일어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 역시 함께 만들어졌기에, 원인-결과가 끝없이 이어지는 현 세상의 원리를 겉보기에 전혀 훼손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아담이 33살의 남성으로 창조될 당시부터 성인의 치아와 골격을 지녔고, 탯줄의 흔적인 '배꼽'마저 갖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스에게 창조와 인과는 충돌하지 않고 공존합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창조란 의심의 여지 없이 '첫 순간'이지만, 그 첫 번째 순간에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역시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전제하는 '창조'를 넘어서며, 훨씬 크고 넓고 싶은 범위에서 벌어집니다. 탈무드 선집의 첫머리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밤이기는 하지만, 세월은 이 밤을 수세기라는 세월 저 앞쪽에 포진시켰다." 고스의 '창조'는 단순히 이전까지 지속되어오던 것을 '단절'하고 처음부터 시작하려는 '리셋'이 아닙니다. 오래된 창조 개념에서는 과거를 깡그리 덜어내고, 자신이 처음이 됨으로써 현재와 미래만 남겨두려고 합니다. 오직 자신만을 현재에 우뚝 세우고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를 야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처음이 되려는 시(始)황제의 야심에 다름 아닙니다(시황제는 '과거의 상징'인 모든 서책을 불태우고 땅에 파묻은 뒤에 거대한 장벽으로 제국을 둘러쳤습니다). 고스는 현재와 미래만큼 '과거'로도 시선을 돌립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창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란, 부득이 오래된 종교적 먼지가 뒤덮인 단어를 경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의 창조입니다. 자기 비대한 자아를 세계의 처음과 끝에 두는 세카이계와는 다르고, 종말론을 애호하는 나른한 세태와도 다르며, 리셋 증후군에 빠진 염세적 세계관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에 이르러 더욱 유의미하며, 앞뒤로 무한히 펼쳐진 시간, 영원을 상정합니다. 덕분에 고스의 창조론에 따르면 우리는 다소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담에게 탯줄의 흔적인 배꼽은 있으되 그에게 어머니가 없다고 주장했듯, 멸종한 클립토돈의 뼛조각은 얼마든 있으되 클립토돈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스는 영원을 승인하며, 앞뒤로 무한히 뻗어 있는 시간 속에서, 전통적 창조 개념을 귀류법적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과거도 창조한다는 이 개념이 왜 혁신적인지 제 나름으로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오늘날 빈티지 시장이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것을 떠올려보세요. 비단 와인뿐만 아니라 의류 업계에서도 '빈티지'는 거스를 수 없는 화두입니다. 빈티지는 과거도 미래만큼 활짝 열려 있음을 전제하고 나서, 과거를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의류 디렉터 나카무라 히로키 상은 VISVIM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미래의 빈티지(Future Vintage)'라는 기치를 내세웁니다. (웃기게도 VISVIM의 옷은 LVMH 산하의 명품 브랜드만큼 비싸면서도, 놀랍도록 낡아 있습니다.) VISVIM에서 신품은 이미 빈티지이며 착용흔이 남아 있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면, 시즌마다 의류를 전개해서 고객에게 내세울 때, 그것에 미리 세월의 흔적이 남은 가공을 하여서 '신품'으로 제공한다는 얘깁니다. VISVIM은 20세기의 빈티지 의류를 입수해서 그것을 현대의 기술로 재현합니다(이를 '복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의류를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과거의 의복사를 소개하는 동시에, 고객의 시간을 의류 속에 새겨넣을 것을 주문하는 한편, 그 옷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온 적 없는 과거를 향한 노스텔지어를 선사합니다. 여느 신품 의류가 구매하는 그 순간부터 감가상각되는 공산품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VISVIM의 의류는 이미 20세기의 의복 문화사와 착용흔이 묻어 있는 '과거를 품은 현재'에서 출발하기에 시간과 함께 그 가치를 더해갑니다. 빈티지 리바이스 데님과 빈티지 락밴드 티셔츠, 가먼트 다잉된 의류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오늘날, 우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를 창조하는 고스의 관념에 올라타 있습니다. 이는 신이 노쇠함조차 창조했노라는 샤토브리앙의 주장을 고스란히 좇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는 '창조된 과거'라는 개념을 별천지의 공상이 아닌, 눈앞의 현실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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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창조와 P.H. 고스] '창조'와 '인과 관계'가 어떻게 양립이 가능한지를 논의하는 짧고 강력한 글입니다. 세상은 원인-결과로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사안이 인과 관계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며, 외려 인과가 지배적인 효용을 미치는 세상이기에 인과를 넘어서는 창조의 순간이 필요하다고 말할 여지도 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역사적으로 인과에 누구보다 몰두했던 이들이 현재의 인과 관계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창조해내기에 이릅니다. 먼저 말하자면, 창조란 인과의 사슬을 끊어내는 도끼질인 동시에, 앞뒤로 무한히 이어지는 인과의 사슬을 창조해내는 땜질인 셈입니다. 19세기 영국의 자연학자이자 과학자인 필리프 헨리 고스는 ⟪옴팔로스(Omphalos)⟫(1857)라는 책에서 자신만의 우주발생론(혹은 우주진화론, cosmogony)을 전개하면서 앞서 말한 '창조'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보르헤스는 해당 책을 구할 수 없없기에, 20세기 에드먼드 고스(Edmund Gosse)와 H.G. 웰스의 축약본을 경유하여, 19세기 고스가 '창조'와 '인과'를 어떻게 모순없이 한데 결합하였는지를 이 글에서 추적합니다. 인과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형이상학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 즉 '시간'의 문제"(51쪽)를 다룬다는 말입니다. 원인과 결과의 사슬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일의 선후를 따져본다는 것입니다. 고스는 로마서 5:12("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와 고린도전서 15: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를 바탕으로, '아담'과 '예수' 사이에서 모종의 대등함을, 그 대칭된 운명을 읽어냅니다. 아담은 '최초의 인간'으로서 인류에게 죄와 죽음을 가져온 존재이며, 예수는 '마지막 아담'으로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 인류의 죄를 대속한 존재이기에, 이 두 사람은 신학적인 거울상이며 대등하다는 것입니다. 대담한 주장이며, 곱씹어 볼수록 의미심장합니다. 아담은 처음 태어났을 당시부터 33살이었고 예수는 33살에 죽었으며, 예수가 매달린 십자가는 에덴동산에 심긴 금단의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고스는 주장합니다. 나아가, 존 스튜어트 밀이 ⟪논리학⟫에서 주장한 바가 고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탐구합니다. 밀은 현재의 한 순간을 완벽히 이해하기만 하면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역사를 모두 알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일찍이 라플라스가 주장한 바를 조금 완화한 버전에 불과한데, 그는 우주의 현 상태에서 공식을 도출하여 그로부터 모든 과거와 미래를 연역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존 스튜어트 밀은 ‘··· → q → r → s → t → ···’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인과 관계를 전제하면서도, 그 각 단계 사이에 '창조적 사건(종말적 사건)'이 끼어들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이 말인즉, "신은 시간의 틈새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에 발생할 신의 어떤 행위에 의해 단절될 수도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인과성 시간을 상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스는 이와는 다른 시간을 상상합니다. 밀에게 있어서 '신의 개입'이란, 앞도 뒤도 없이 무한히 펼쳐지는 현재의 인과 사슬 속에 장차 벌어질 사건, 하지만 미처 벌어지지 않은 사건으로 인식됩니다. 반면 고스에게는 이런 '신의 개입'이 벌써 일어났습니다. '창조'라는 인과의 사슬을 끊는 사건("천지 창조")은 특정할 수 없는 과거의 한 순간에 이미 일어났지만, 일어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 역시 함께 만들어졌기에, 원인-결과가 끝없이 이어지는 현 세상의 원리를 겉보기에 전혀 훼손하지 않습니다. 최초의 아담이 33살의 남성으로 창조될 당시부터 성인의 치아와 골격을 지녔고, 탯줄의 흔적인 '배꼽'마저 갖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고스에게 창조와 인과는 충돌하지 않고 공존합니다. 반복하겠습니다. 창조란 의심의 여지 없이 '첫 순간'이지만, 그 첫 번째 순간에 무한한 과거와 무한한 미래 역시 창조되었습니다.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 전제하는 '창조'를 넘어서며, 훨씬 크고 넓고 싶은 범위에서 벌어집니다. 탈무드 선집의 첫머리에서도 비슷한 개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밤이기는 하지만, 세월은 이 밤을 수세기라는 세월 저 앞쪽에 포진시켰다." 고스의 '창조'는 단순히 이전까지 지속되어오던 것을 '단절'하고 처음부터 시작하려는 '리셋'이 아닙니다. 오래된 창조 개념에서는 과거를 깡그리 덜어내고, 자신이 처음이 됨으로써 현재와 미래만 남겨두려고 합니다. 오직 자신만을 현재에 우뚝 세우고 거기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를 야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의 처음이 되려는 시(始)황제의 야심에 다름 아닙니다(시황제는 '과거의 상징'인 모든 서책을 불태우고 땅에 파묻은 뒤에 거대한 장벽으로 제국을 둘러쳤습니다). 고스는 현재와 미래만큼 '과거'로도 시선을 돌립니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창조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창조'란, 부득이 오래된 종교적 먼지가 뒤덮인 단어를 경유하고 있기는 하지만, 완전히 다른 의미의 창조입니다. 자기 비대한 자아를 세계의 처음과 끝에 두는 세카이계와는 다르고, 종말론을 애호하는 나른한 세태와도 다르며, 리셋 증후군에 빠진 염세적 세계관과도 확연히 구분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에 이르러 더욱 유의미하며, 앞뒤로 무한히 펼쳐진 시간, 영원을 상정합니다. 덕분에 고스의 창조론에 따르면 우리는 다소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아담에게 탯줄의 흔적인 배꼽은 있으되 그에게 어머니가 없다고 주장했듯, 멸종한 클립토돈의 뼛조각은 얼마든 있으되 클립토돈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스는 영원을 승인하며, 앞뒤로 무한히 뻗어 있는 시간 속에서, 전통적 창조 개념을 귀류법적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과거도 창조한다는 이 개념이 왜 혁신적인지 제 나름으로 쉽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오늘날 빈티지 시장이 전세계적으로 각광받는 것을 떠올려보세요. 비단 와인뿐만 아니라 의류 업계에서도 '빈티지'는 거스를 수 없는 화두입니다. 빈티지는 과거도 미래만큼 활짝 열려 있음을 전제하고 나서, 과거를 발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의류 디렉터 나카무라 히로키 상은 VISVIM이라는 브랜드를 운영하면서, '미래의 빈티지(Future Vintage)'라는 기치를 내세웁니다. (웃기게도 VISVIM의 옷은 LVMH 산하의 명품 브랜드만큼 비싸면서도, 놀랍도록 낡아 있습니다.) VISVIM에서 신품은 이미 빈티지이며 착용흔이 남아 있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소리냐면, 시즌마다 의류를 전개해서 고객에게 내세울 때, 그것에 미리 세월의 흔적이 남은 가공을 하여서 '신품'으로 제공한다는 얘깁니다. VISVIM은 20세기의 빈티지 의류를 입수해서 그것을 현대의 기술로 재현합니다(이를 '복각'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의류를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과거의 의복사를 소개하는 동시에, 고객의 시간을 의류 속에 새겨넣을 것을 주문하는 한편, 그 옷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온 적 없는 과거를 향한 노스텔지어를 선사합니다. 여느 신품 의류가 구매하는 그 순간부터 감가상각되는 공산품의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VISVIM의 의류는 이미 20세기의 의복 문화사와 착용흔이 묻어 있는 '과거를 품은 현재'에서 출발하기에 시간과 함께 그 가치를 더해갑니다. 빈티지 리바이스 데님과 빈티지 락밴드 티셔츠, 가먼트 다잉된 의류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오늘날, 우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를 창조하는 고스의 관념에 올라타 있습니다. 이는 신이 노쇠함조차 창조했노라는 샤토브리앙의 주장을 고스란히 좇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우리는 '창조된 과거'라는 개념을 별천지의 공상이 아닌, 눈앞의 현실로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잊혀 버린 고스의 이론을 위하여 그 이론의 두 가지 특성을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는, 약간 기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우아함이고, 둘째는 본의 아니게 '무로부터의 창조'를 의도하지 않게 귀류법적으로 환원시켜버렸다는 사실, 즉 베단타와 헤라클레이토스, 스피노자, 기타 원자론자들이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주가 무한하다는 견해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버틀런트 러셀은 그의 이론은 현실화시켰다. 저서 ⟪심리 분석⟫(1921) 제9장에서 그는 몽환적 과거를 '기억'하고 있는 인류로 가득 찬 이 세상은 불과 몇 분 전에 창조되었다고 썼다.
또 다른 심문들 5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카스트로 박사가 우려하는 것들] 이 짧은 에세이 안에 오역이 너무 많습니다. 출판사 이름에 걸맞은 감수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실상 보르헤스 논픽션 시리즈 전체에 걸쳐 계속 반복되는 문제이기는 한데, 지적하는 자리는 아니니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이 에세이는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문화 역사가인 아메리코 카스트로 박사의 논의를 보르헤스가 비판하는 글입니다. 아메리코 카스트로 박사는 스페인 '본토' 사람으로서 변방이자 신대륙의 라플라타 유역 인근 국가에서 스페인어가 타락하고 있는 현실을 '문제시'하는 글을 썼습니다. 보르헤스는 어떤 사안에 '문제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자체에 커다란 의문을 표합니다. '문제'라는 단어 자체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안에 일단 문제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그때부터 비로소 문제적으로 보이게 되는 진짜 '문제'를 보르헤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선결문제의 요구란, 증명해야 할 내용을 이미 참이라고 가정하고 그 위에서 논증을 전개하는 논리학적 오류입니다. 보르헤스는 카스트로 박사가 저지른 오류가 소위 인종 청소를 자행했던 나치의 논리와 같다고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모든 유대인은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혼혈'이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린 뒤, 그런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말살하려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고관은 대표적인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기반합니다. 보르헤스는 본격적으로 카스트로 박사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카스트로 박사가 타락한 스페인어의 사례로 꼽은 예시들 자체가 오류로 점철돼 있다는 것입니다. 카스트로 박사는 문화 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아르헨티나를 '제국의 변방'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르헨티나 하층민이 쓰던 은어("룬파르도")와 가우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언어 용례를 타락의 증거로 채집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그런 사례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로서 대표성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든 존재하는 방언과 하층민의 언어, 심지어 커리커처인 패러디 텍스트를 모아서 분석한 뒤, 그것이 그 나라의 언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겁니다. 마치 어느 곳에든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유저들의 언어 습관을 학술적으로 분석한 뒤, "그 나라의 언어는 [저열한 방언으로써] 타락했다"고 주장하는 격입니다. 무엇보다 '스페인어가 타락한 사례'를 지적하는 카스트로 박사의 문장부터가 이미 타락한 스페인어의 한 면을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신대륙은 스페인어 방언으로 고통받지 않으며, 오히려 '가짜 방언'의 사례집을 만들어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저지르는 본토의 방언 연구가들 때문에 고통받는 처지입니다. 그렇기에 보르헤스는 씁니다. "그들은 자신이 발명한 일련의 횡설수설을 비난하며 먹고 산다." 평소 보르헤스는 겸손하고 점잖고 온건한 톤으로 글을 쓰기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이 도드라지는데, '자아의 거대한 서재'가 아닌 익명의 군중이 드나드는 '모두의 도서관'이라고 할 법한 스타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겸손한 보르헤스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랄한 풍자와 강도 높은 비판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보르헤스가 이 글에서 주력하는 비판의 상당수는 '타락한 스페인어 방언의 사례'를 수집하는 카스트로 박사의 문체에 이상할 정도로 집중돼 있습니다(그 이유는 말미에서 드러납니다). 보르헤스는 카스트로 박사의 글에 담긴 생각이 극히 진부하고 빈약하며,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장은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표현으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박사의 글은 "상업용 문체"의 전형이라는 겁니다. 이를테면 카스트로 박사는 다음처럼 씁니다. “그때 유일한 가능성으로 폭군이 등장한다. 그 자신은 막무가내로 뿜어 나오는 대중 에너지의 응축이었음에도, 그 에너지의 분출을 용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목동이 아니라 은근한 억압자이고 뿔뿔이 흩어진 가축 떼를 기계적으로, 난폭하게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거대한 외과 수술 도구이기 때문이다.” ⏤64쪽. 박사는 '독재자가 나타났다'는 간단한 내용을 그냥 쓰지 못합니다. "거대한 외과 수술 장치"나, "에너지의 응축" 같은 괴상한 은유를 동원하여 별 내용도 없으면서 현학적인 수사를 남발합니다. 비유컨대 오늘 비가 왔으면 '비가 왔다'라고 쓰는 게 아니라 “천상의 수분 입자들이 중력의 부름에 응답하여 지표면을 향한 수직 낙하 운동을 개시했다”라는 식의 화려하게 텅 빈 수사를 남발하는 식입니다. 심지어, 카스트로 박사는 이미 자신부터도 은유를 효과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은유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카스트로 박사는 작가 '라스트 리즌'이 경마의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진부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 '안테나'와 '축구'의 은유를 한 문장 안에 뒤섞어 쓰는 엉망진창의 오류를 저지릅니다. 또한 카스트로 박사는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의 마지막 연들을 베껴쓰면서 문체가 수준 미달임을 비꼽니다. 보르헤스는 그런 카스트로 박사의 비꼼을 되받아줍니다. 다시 한번 ⟪마르틴 피에로⟫의 마지막 연들을 인용하면서, 과연 에르난데스와 카스트로 박사 둘 중에 누가 더 일관성이 없고 스페인어 방언에 경도되어 있는지를 묻습니다. 언젠가 카스트로 박사는 신대륙의 작가 중 문체가 모범적인 몇몇 작가 목록을 나열하면서, 보르헤스의 이름을 시혜적으로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카스트로 박사가 시혜적으로 "정당한 문체"를 지녔다고 평가한 대목을 고스란히 비판으로 되받아줍니다. 이렇듯 탁월한 아이러니야말로 문학으로써 가능한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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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카스트로 박사가 우려하는 것들] 이 짧은 에세이 안에 오역이 너무 많습니다. 출판사 이름에 걸맞은 감수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실상 보르헤스 논픽션 시리즈 전체에 걸쳐 계속 반복되는 문제이기는 한데, 지적하는 자리는 아니니 따로 정리하겠습니다. 이 에세이는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문화 역사가인 아메리코 카스트로 박사의 논의를 보르헤스가 비판하는 글입니다. 아메리코 카스트로 박사는 스페인 '본토' 사람으로서 변방이자 신대륙의 라플라타 유역 인근 국가에서 스페인어가 타락하고 있는 현실을 '문제시'하는 글을 썼습니다. 보르헤스는 어떤 사안에 '문제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자체에 커다란 의문을 표합니다. '문제'라는 단어 자체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안에 일단 문제라는 꼬리표를 붙이면, 그때부터 비로소 문제적으로 보이게 되는 진짜 '문제'를 보르헤스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선결문제의 요구란, 증명해야 할 내용을 이미 참이라고 가정하고 그 위에서 논증을 전개하는 논리학적 오류입니다. 보르헤스는 카스트로 박사가 저지른 오류가 소위 인종 청소를 자행했던 나치의 논리와 같다고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모든 유대인은 교활하고 탐욕스러운 혼혈'이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린 뒤, 그런 유대인을 인종적으로 말살하려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고관은 대표적인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에 기반합니다. 보르헤스는 본격적으로 카스트로 박사의 오류를 지적합니다. 카스트로 박사가 타락한 스페인어의 사례로 꼽은 예시들 자체가 오류로 점철돼 있다는 것입니다. 카스트로 박사는 문화 제국주의적인 시각에서 아르헨티나를 '제국의 변방'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르헨티나 하층민이 쓰던 은어("룬파르도")와 가우초 문화의 영향을 받은 언어 용례를 타락의 증거로 채집합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그런 사례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로서 대표성이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든 존재하는 방언과 하층민의 언어, 심지어 커리커처인 패러디 텍스트를 모아서 분석한 뒤, 그것이 그 나라의 언어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겁니다. 마치 어느 곳에든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 유저들의 언어 습관을 학술적으로 분석한 뒤, "그 나라의 언어는 [저열한 방언으로써] 타락했다"고 주장하는 격입니다. 무엇보다 '스페인어가 타락한 사례'를 지적하는 카스트로 박사의 문장부터가 이미 타락한 스페인어의 한 면을 보여줍니다. 그뿐 아니라 신대륙은 스페인어 방언으로 고통받지 않으며, 오히려 '가짜 방언'의 사례집을 만들어서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저지르는 본토의 방언 연구가들 때문에 고통받는 처지입니다. 그렇기에 보르헤스는 씁니다. "그들은 자신이 발명한 일련의 횡설수설을 비난하며 먹고 산다." 평소 보르헤스는 겸손하고 점잖고 온건한 톤으로 글을 쓰기로도 유명합니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이 도드라지는데, '자아의 거대한 서재'가 아닌 익명의 군중이 드나드는 '모두의 도서관'이라고 할 법한 스타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글은 겸손한 보르헤스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신랄한 풍자와 강도 높은 비판으로 가득합니다. 특히 보르헤스가 이 글에서 주력하는 비판의 상당수는 '타락한 스페인어 방언의 사례'를 수집하는 카스트로 박사의 문체에 이상할 정도로 집중돼 있습니다(그 이유는 말미에서 드러납니다). 보르헤스는 카스트로 박사의 글에 담긴 생각이 극히 진부하고 빈약하며, 그것을 감싸고 있는 문장은 실속 없이 겉만 화려한 표현으로 가득하다고 말합니다. 박사의 글은 "상업용 문체"의 전형이라는 겁니다. 이를테면 카스트로 박사는 다음처럼 씁니다. “그때 유일한 가능성으로 폭군이 등장한다. 그 자신은 막무가내로 뿜어 나오는 대중 에너지의 응축이었음에도, 그 에너지의 분출을 용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목동이 아니라 은근한 억압자이고 뿔뿔이 흩어진 가축 떼를 기계적으로, 난폭하게 우리 안으로 몰아넣는 거대한 외과 수술 도구이기 때문이다.” ⏤64쪽. 박사는 '독재자가 나타났다'는 간단한 내용을 그냥 쓰지 못합니다. "거대한 외과 수술 장치"나, "에너지의 응축" 같은 괴상한 은유를 동원하여 별 내용도 없으면서 현학적인 수사를 남발합니다. 비유컨대 오늘 비가 왔으면 '비가 왔다'라고 쓰는 게 아니라 “천상의 수분 입자들이 중력의 부름에 응답하여 지표면을 향한 수직 낙하 운동을 개시했다”라는 식의 화려하게 텅 빈 수사를 남발하는 식입니다. 심지어, 카스트로 박사는 이미 자신부터도 은유를 효과적으로 쓰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타인의 은유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우스꽝스럽기까지 합니다. 카스트로 박사는 작가 '라스트 리즌'이 경마의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진부하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 '안테나'와 '축구'의 은유를 한 문장 안에 뒤섞어 쓰는 엉망진창의 오류를 저지릅니다. 또한 카스트로 박사는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의 마지막 연들을 베껴쓰면서 문체가 수준 미달임을 비꼽니다. 보르헤스는 그런 카스트로 박사의 비꼼을 되받아줍니다. 다시 한번 ⟪마르틴 피에로⟫의 마지막 연들을 인용하면서, 과연 에르난데스와 카스트로 박사 둘 중에 누가 더 일관성이 없고 스페인어 방언에 경도되어 있는지를 묻습니다. 언젠가 카스트로 박사는 신대륙의 작가 중 문체가 모범적인 몇몇 작가 목록을 나열하면서, 보르헤스의 이름을 시혜적으로 포함시킨 적이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카스트로 박사가 시혜적으로 "정당한 문체"를 지녔다고 평가한 대목을 고스란히 비판으로 되받아줍니다. 이렇듯 탁월한 아이러니야말로 문학으로써 가능한 최고의 복수가 아닐까 합니다.
방언을 연구하는 연구소들이야 다르겠지만, 우리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방언 때문에 고통받지 않는다. 단지 방언을 연구하는 연구소들 때문에 고통받을 따름이다. 이 연구소들은 자신들이 발명한 일련의 횡설수설을 비난하며 먹고 산다. (···) 그들은 이런 찌꺼기에 의존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그것을 유산으로 물려받는 처지에 놓여 있고,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 다른 심문들 6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서글픈 우리의 개인주의] 반(反)국가적이라고 할 정도로 독특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개인주의적 특성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국가를 불신할 뿐 아니라, 모든 관계란 개인 간의 관계일 따름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이는 미국인이나 유럽인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면인데, 국가를 비롯한 일체의 '질서'를 근원적으로 회의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흔히 '유럽적'이라고 불리우는 세계관에서는 "영웅"이라는 고독한 개인을 내세워 집단과 맞서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유럽적 영웅은 기실 집단과 제도에 반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집단과 제도를 교묘히 재승인합니다. 외견상 영웅은 집단에 맞선 개인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종내에 새로 만들어질 제도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스토리텔링에 가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영웅이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집단에 대립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또 다른 자신만의 '질서'를 내세우고 전파하고 뿌리내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영웅전'의 형태를 빌려 널리 구전되어서 명성을 얻고, 또 자기만의 틀 하나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이렇듯 영웅 서사는 지난 수세기 동안 교묘하게 우리 사회의 제도와 집단을 재승인하는 수단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반면, 보르헤스가 제시하는 아르헨티나의 영웅관은 독특합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집단' 자체를 배면으로 삼아 자신의 영웅적 선택을 부각하려는 야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할 때도 철저한 개인으로 남아 있으며, 이때도 선과 악이라는 '틀'을 염두에 두지 않기에 고귀하면서도 천박한 모습을 종종 보입니다. 때론 악하고 또 때론 선한데, 흔히들 말하는 다층적인 캐릭터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의 일환이라고 보기도 애매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선악이라는 가치 판단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문입니다.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가 대표적입니다. 보르헤스의 표현에 따르면, 유럽식 영웅관이 질서∙조화∙아름다운 배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를 대변하는 존재라면, 아르헨티나의 영웅은 무질서∙혼돈∙예측 불가능성으로서 ‘카오스’에 가깝습니다. 가우초의 정신을 물려받은 그들은 정처없이 움직이며, 특별히 통일된 의미나 목적으로 수렴하려하지 않기에, 아무런 제도나 권위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명성이 없기에 아무런 제도나 권위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보르헤스는 유럽의 두 작가 키플링과 카프카를 예시로 들며,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질서'를 상정하고 있음을 간파합니다. 키플링이 질서를 안에서부터 옹호한다면, 카프카는 끝없이 질서 바깥을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비하면 에르난데스가 내세운 '마르틴 피에로'는 전에 없던 인물이며, 질서의 안팎이 아닌 그 너머로 나아갑니다. 그는 차라리 무정부적인 존재를 지향하며, 유명한 존재가 아니라 철저한 익명의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반영웅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독특한 영웅관은 ‘라메드 우프닉스(Lamed Wufniks)’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메드 우프닉스는 유대교 카발라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히브리어로 "36명의 의인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카발라에 따르면, 이들은 세상을 지탱하는 36명의 존재로서 모든 세대마다 정확히 36명의 정족수로 구성되며, 이들로 인하여 세상은 파괴되지 않고 유지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자신이 '36명의 의인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며, 서로 누구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을 파괴되지 않게 유지시키는, 완벽한 익명의 영웅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라메드 우프닉스에 관한 전설이 아르헨티나의 정신과 공명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무명의 가치를 칭송하는 것이며, 권위에 반하는 것이자, 평범해보이는 일개 개인조차 세계를 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단 점에서 감동적이며 교훈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 한국이 자연히 연상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탈을 숱하게 겪으며 크고 작은 국난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민초들이 들고 일어서서 몇 번이고 나라를 구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조금 특별한 역사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2016년과 2025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평화롭게 탄핵해서 정권을 바꾼,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도 갖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권위는 불신하지만, 공동체적인 가치는 높이 사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 사례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에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고 일어서서 게릴라전을 펼친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런 서사적 DNA가 뼛속에 새겨져 있은 탓인지, 대중콘텐츠에서도 극명히 드러납니다. 예컨대 옆나라 일본에서 흥행한 ⟪신고질라⟫(2016)에서는 괴수에 대응하기 위해서 정부와 각료 차원의 대응이 강조됩니다. 아무리 그들이 우왕좌왕하더라도, 결국 집단 차원의 대응으로 해결됩니다. 반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떠올려 보세요. 부패한 공권력을 배면으로 깔고서, 개인들은 크고작은 집단을 이루어 문제를 헤쳐나갑니다. 보르헤스가 말한 아르헨티나인들의 특성, 즉 외부의 권위를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을 불신하는" 특성을 연상케 합니다. 공교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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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님의 대화: [서글픈 우리의 개인주의] 반(反)국가적이라고 할 정도로 독특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개인주의적 특성을 설명하는 글입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국가를 불신할 뿐 아니라, 모든 관계란 개인 간의 관계일 따름이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이죠. 이는 미국인이나 유럽인들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면인데, 국가를 비롯한 일체의 '질서'를 근원적으로 회의하는 사고방식이기도 합니다. 흔히 '유럽적'이라고 불리우는 세계관에서는 "영웅"이라는 고독한 개인을 내세워 집단과 맞서게 만듭니다. 그런데 이 유럽적 영웅은 기실 집단과 제도에 반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집단과 제도를 교묘히 재승인합니다. 외견상 영웅은 집단에 맞선 개인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종내에 새로 만들어질 제도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하는 스토리텔링에 가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영웅이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집단에 대립하는 근원적인 이유는, 또 다른 자신만의 '질서'를 내세우고 전파하고 뿌리내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들은 '영웅전'의 형태를 빌려 널리 구전되어서 명성을 얻고, 또 자기만의 틀 하나를 세우기에 이릅니다. 이렇듯 영웅 서사는 지난 수세기 동안 교묘하게 우리 사회의 제도와 집단을 재승인하는 수단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반면, 보르헤스가 제시하는 아르헨티나의 영웅관은 독특합니다. 그들에게는 애초에 '집단' 자체를 배면으로 삼아 자신의 영웅적 선택을 부각하려는 야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할 때도 철저한 개인으로 남아 있으며, 이때도 선과 악이라는 '틀'을 염두에 두지 않기에 고귀하면서도 천박한 모습을 종종 보입니다. 때론 악하고 또 때론 선한데, 흔히들 말하는 다층적인 캐릭터성을 부각하기 위한 장치의 일환이라고 보기도 애매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선악이라는 가치 판단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때문입니다. 에르난데스의 ⟪마르틴 피에로⟫가 대표적입니다. 보르헤스의 표현에 따르면, 유럽식 영웅관이 질서∙조화∙아름다운 배열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코스모스'를 대변하는 존재라면, 아르헨티나의 영웅은 무질서∙혼돈∙예측 불가능성으로서 ‘카오스’에 가깝습니다. 가우초의 정신을 물려받은 그들은 정처없이 움직이며, 특별히 통일된 의미나 목적으로 수렴하려하지 않기에, 아무런 제도나 권위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명성이 없기에 아무런 제도나 권위도 보장하지 않습니다. 보르헤스는 유럽의 두 작가 키플링과 카프카를 예시로 들며,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질서'를 상정하고 있음을 간파합니다. 키플링이 질서를 안에서부터 옹호한다면, 카프카는 끝없이 질서 바깥을 상상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 비하면 에르난데스가 내세운 '마르틴 피에로'는 전에 없던 인물이며, 질서의 안팎이 아닌 그 너머로 나아갑니다. 그는 차라리 무정부적인 존재를 지향하며, 유명한 존재가 아니라 철저한 익명의 존재가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 반영웅적이기까지 합니다. 이 독특한 영웅관은 ‘라메드 우프닉스(Lamed Wufniks)’에서 그 원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라메드 우프닉스는 유대교 카발라에서 나온 개념으로서, 히브리어로 "36명의 의인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카발라에 따르면, 이들은 세상을 지탱하는 36명의 존재로서 모든 세대마다 정확히 36명의 정족수로 구성되며, 이들로 인하여 세상은 파괴되지 않고 유지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자신이 '36명의 의인들' 중 한 명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며, 서로 누구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들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을 파괴되지 않게 유지시키는, 완벽한 익명의 영웅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라메드 우프닉스에 관한 전설이 아르헨티나의 정신과 공명한다고 믿습니다. 이는 무명의 가치를 칭송하는 것이며, 권위에 반하는 것이자, 평범해보이는 일개 개인조차 세계를 구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단 점에서 감동적이며 교훈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 한국이 자연히 연상됩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탈을 숱하게 겪으며 크고 작은 국난을 거쳤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민초들이 들고 일어서서 몇 번이고 나라를 구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만 조금 특별한 역사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2016년과 2025년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평화롭게 탄핵해서 정권을 바꾼,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도 갖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권위는 불신하지만, 공동체적인 가치는 높이 사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 사례는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한양 도성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에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고 일어서서 게릴라전을 펼친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런 서사적 DNA가 뼛속에 새겨져 있은 탓인지, 대중콘텐츠에서도 극명히 드러납니다. 예컨대 옆나라 일본에서 흥행한 ⟪신고질라⟫(2016)에서는 괴수에 대응하기 위해서 정부와 각료 차원의 대응이 강조됩니다. 아무리 그들이 우왕좌왕하더라도, 결국 집단 차원의 대응으로 해결됩니다. 반면 봉준호 감독의 ⟪괴물⟫을 떠올려 보세요. 부패한 공권력을 배면으로 깔고서, 개인들은 크고작은 집단을 이루어 문제를 헤쳐나갑니다. 보르헤스가 말한 아르헨티나인들의 특성, 즉 외부의 권위를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고 "상황을 불신하는" 특성을 연상케 합니다. 공교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세상은 구성원 하나하나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코스모스'인 반면, 우리 아르헨티나인들에게 있어 세상은 '카오스'일 뿐이다. 유럽인들과 미국인들은 어떤 문학 작품이 상을 받게 되는 경우 그 책은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데 비해, 우리 아르헨티나인들은 제아무리 상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저 나쁜 책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정도로 받아들인다. 통상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상황을 불신한다.
또 다른 심문들 70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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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베도] 스페인의 시인이었던 위대한 케베도를 향한 보르헤스의 복잡다단한 심경이 드러나는 글입니다. 케베도는 스페인어권에서나 유명한 작가였음에도, 문인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문인들의 작가'라고 보르헤스는 평합니다. 그는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할 작가였지만 실력에 걸맞은 명성을 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인즉, 케베도는 작품으로써 사람들의 파토스를 건드리려고 하는 데 별 관심이 없었고(그것이 중요함에도요), 더욱이 그의 작품에서는 이렇다 할 상징을 떠올리기도 어려웠던 탓입니다. 케베도는 언어적으로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경직된 전통성을 신봉했기에, 윤회설이나 그노시즘 같은 매력적인 상상력을 거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언어적으로는 뛰어났지만 사상적으로는 빈곤했고, 문학적으로는 위대했으나 철학적으로는 무감각했다는 것이 보르헤스의 냉철한 평가입니다. 케베도의 시에 대한 평가 역시 냉정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보르헤스는 돈 호세 데 살라스에게 써 보낸 소네트에서는 그나마 개인적인 슬픔과 분노, 환멸 따위가 감지되기는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케베도의 '기지주의(conceptismo)’적 특유의 기교 때문에 가려지고 있습니다. 이 말인즉, 케베도의 시가 그 유명한 기지주의 덕분에 유의미해졌다기보다는 "기지주의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냉정한 비판임과 동시에 냉정한 칭송입니다. 무수한 케베도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에서는 예술성이 비어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보르헤스는 케베도의 예술적 진실성은 의심치 않습니다. 케베도 워즈워스를 예고하는 사색적 소네트를 썼고, 그의 시에서 느껴지는 종교적 깊이는 탁월할 뿐 아니라 고전적 교양마저 듬뿍 담겨있습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케베도는 "칼이나 은반지처럼 언어로 형상화될 수 있는 순수하고 독자적인 대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케베도라는 시인 자체가 "하나의 광대하고 복잡한 문학"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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