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sist님의 대화: [콜리지의 꿈] 앞서 '콜리지의 꽃'에서도 보았듯, 콜리지는 꿈과 현실을 역동적으로 왕복 운동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야기 자체는 복잡할 게 없습니다. 1797년 영국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엑스무어 근처의 한 농장에서 칩거 중이었습니다. 그는 잠들기 직전, 13세기 몽골의 황제 쿠빌라이 칸이 세운 궁전을 묘사한 퍼처스의 글을 읽었고, 그 때문인지 꿈에서 어떤 시를 착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잠에서 깨어난 콜리지는 자신이 300행에 달하는 시를 지었다고 믿었고, 그중 일부를 떠올려내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오늘날 50여 개의 행으로 이뤄진 서정시 ⟨쿠블라 칸(kubla khan)⟩입니다. 그런데 진짜 놀라운 일은 20년 뒤에 벌어집니다. 1816년, 14세기에 쓰인 한 역사서가 발간되었던 것인데,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그가 꿈 속에서 본 뒤 잘 기억하고 있던 설계도에 따라 샹투의 동쪽에 궁전을 건설했다." 이것은 꿈이 단발적인 에피소드가 아니라 유구한 내력을 지닌 역사일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이 사건을 시간순으로 서술하면, 한 사람이 꿈에서 본 것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궁전을 이루었고, 수 세기 후에 전혀 다른 대륙에서 한 사람이 그 궁전을 다시 한번 꿈 속에서 조우하고 영감을 받아서 시를 쓴 끝에 비록 불완전한 형태로나마 그것을 현실로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꿈이 한차례 현실이 되자, 그 현실이 다시 꿈 속에서 또 다른 현실을 짓도록 했던 것입니다.
⟨콜리지의 구⟩에서도 말했듯 꿈과 현실은 동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며, 둘 사이의 위계가 명료하지도 않습니다. 둘은 마치 같은 직물의 앞면과 뒷면처럼 맞붙어 있을 따름이어서, 서로 지탱해줄 뿐 아니라 그 존재의 배면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직물에 실을 꿴 바늘을 통과시켜 아래위를 오가며 한 줄 바늘땀을 만드는 풍경을 상상해보세요. 실은 꿈과 현실이 펼쳐진 직물을 한 땀씩 자맥질하면서 하나의 풍경을 지을텐데, 앞면의 바늘땀과 뒷면의 바늘땀은 닮은 듯 다르며 그리하여 서로 존재의 근거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일화에서 가장 유념해야 할 점은, 현실과 꿈이 그토록 닮았음에도 근원적으로 다르다는 겁니다. 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꿈에서 본 것을 현실에 온전히 재현하기란 불가능해집니다. 어떤 식으로든 '꿈의 것'은 현실로 가져오는 순간 미완인 것이 되거나, 상당 부분 소실되고 맙니다. 쿠빌라이 칸이 꾸었던 꿈 속의 궁전은 완벽했지만 오늘날 현실에서 궁전은 폐허가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콜리지가 꿈에서 암송했다는 300행의 시는 현실로 건너오면서 50행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소실은 수 세기에 걸쳐서 꿈과 현실을 끊임없이 오가는 그 흐름이, 그 계보가 결코 완료되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콜리지의 꿈은 문학의 역사를 환기하게 합니다. 상상해보세요. 한 작가가 다른 작가 속에서 자신을 보면서 작품 하나를 씁니다. 그 작품 안에는 잘 표현된 부분도 있고, 미처 작가가 (저도 모르게)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게 훗날 또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 작품을 보면서, 그 안에서 미처 틔워내지 못한 어떤 싹을 봅니다. 그는 그 싹을 발견하고서 조용히 가져가서 제 나름으로 키우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그는 그 과정에서 일부 성공하고, 일부 실패합니다. 그리고 다시 먼 훗날 누군가가 나타나 그 성공과 실패 양쪽을 모두 본 다음, 이상하게도 '실패' 쪽에서 어떤 의지를 이어받아가기로 합니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해보세요. 어찌 보면 문학의 계보도 이런 식으로 계속 되어온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계보에는 아무런 혈통도, 가문도 끼어들지 않을 겁니다. 다만 한 명에서 또 다른 한 명으로 무언가가 계승될 때, 어떤 목격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 목격은 중구난방이고 종횡무진한 시선에 불과할 겁니다. 이 시선에 '적통'이라는 것은 없으며, 차라리 그때 그 순간의 시선에 따라 이리저리 뻗치고 우연히 전염되는 꿈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 계보는 자신보다 앞서 있던 어떤 이가 꾸었던 꿈을, 그러나 미진한 채로 깨어나야 했던 그 꿈을 이어받아서 꾸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꿈의 바톤 넘겨받기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무언가를 알아 볼 수 있는 눈만 있다면' 이 꿈의 계보에 누구든 동참할 수 있으며,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가는 데 일조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럴지도 모르고요. 누차 말하지만 거대한 하나의 꿈을 이뤄나간다는 것은 개인의 과업을 달성하고 뽐내는 행위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위입니다. 자신이 다만 거대한 기획의 일부이며, 유일무이한 한 권의 한 책 장 귀퉁이의 한 획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언젠가 사사키 아타루는 우스개처럼 말한 적 있습니다. 타인의 글은 기본적으로 이해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환상이라고요. 그리하여 한 편의 글을 읽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글을 쓴 작가의 꿈을 대신 꾸는 행위만큼이나 터무니없다고 말했습니다. 완전한 이해는 완전한 오해이며, 이해하게 되면 오히려 미쳐버릴 거라고도 말했습니다.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면서 한 가지 부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꿈을 이해할 수 없으며, 바로 그렇기에 그것을 내 미진한 꿈으로 데려오려는 욕망을 발휘한다고요. 그렇게 꿈은 거듭해서 이어지게 될 것이며,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 1691년, 예수회 소속 P. 제르비용 신부는 쿠빌라이 칸의 궁전은 폐허로 남아 있을 뿐임을 확인했으며, 우리는 콜리지의 시 역시 겨우 50행 정도만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꿈과 과업들로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업은 아직 종결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꿈을 꾼 주인공은 꿈속에서 궁전을 보고 그 궁전을 지었으며, 두 번째 꿈을 꾼 주인공은 첫 번째 사람의 꿈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 바로 그 궁전에 대한 시를 지었다. 이러한 틀이 계속 유지된다면, 수백 년 후의 어느 날, 누군가가 같은 꿈을 꾸게 될 것이다. 그는 예전에 다른 사람들 역시 같은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보지도 못한 채, 그 꿈에 대리석이나 음악의 형상을 덧입힐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꿈들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바로 전의 꿈은 다음번 꿈을 위한 열쇠를 내포하게 될 것이다. ”
『또 다른 심문들』 42-4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문장모음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