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존 던] 꿈과 시간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글을 썼던 아일랜드 작가 존 던(John William Dunne, 1875-1949)을 논하는 글입니다. 참고로 보르헤스가 과거에 ⟪수르⟫ 제63호에 게재했다고 하는 글은 일전에 ⟪영원성의 역사⟫ 1부에서 다뤘던 ⟨거북의 변모⟩를 말합니다. 이전 모임에서 다뤘으니 참고 바랍니다. 해당 글에 보르헤스는 '제논의 역설'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었는지 살피면서 "무한퇴행(regresión infinita)"이라는 개념을 소개하였는데요, 보르헤스는 ⟨거북의 변모⟩을 쓸 당시 의도적으로 존 던을 언급하지 않았노라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존 던이 제시한 인간과 시간에 대한 관점은 참으로 놀랍기에 따로 글 한 편을 할애할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오롯이 존 던에게 할애됩니다. 한편, ⟨거북의 변모⟩에서는 '무한 퇴행'이라고 옮겨져 있지 않고 '무한 소급'이라고 옮겨져 있으나, 같은 개념이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 더, 이 글에서는 오역이 있습니다. 번역자는 "무한퇴행(regresión infinita)"을 니체의 "영겁회귀"로 잘못 옮겼습니다. "영겁회귀"라고 쓰여 있는 부분은 전부 "무한퇴행"으로 고쳐 읽어야 합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무한퇴행'이란 어떤 사건이나 설명을 정당화하려고 할 때, 그 설명이 거듭해서 설명을 요구받는 식의 연쇄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일컫습니다. A라는 결과를 설명하려면 B가 필요하고, B를 설명하려면 C가 필요해지는 식으로 무한히 인식이 원인을 찾아 후퇴하는 것입니다. 이 무한퇴행은 고대 그리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제1원인'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훗날 제논이 이러한 퇴행을 바탕으로 여러 역설을 제시하였습니다. 중세 스콜라 철학에 이르러서는 "제1존재"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을 위해서 동원되기도 하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거북의 변모⟩를 참고 바랍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만, 존 던이 말하고 있는 이 무한퇴행은 역사가 유구합니다. ⟪인도 철학사⟫를 쓴 파울 도이센은 고대 인도 철학에서 비슷한 것을 발견합니다. 고대 인도 철학에서는 '자아'를 즉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영혼은 그 영혼을 인식하는 다른 영혼을 거듭해서 요구한다고 말합니다. 비슷한 관점에서, 헤르바르트라는 철학자는 자아가 무한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 존 던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이 무한히 퇴행하는 의식 하나하나가 존재할 뿐 아니라, 그 각각의 의식은 3차원의 유한한 공간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시간이라는 무한한 차원에는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보르헤스는 이런 존 던의 주장을 곰곰이 곱씹어보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존 던의 시간관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간파합니다. 바로 무한퇴행이 기실 '현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인간의 언어가 만들어낸 '착시 효과'라는 것입니다. 영국 유명론의 계승자인 헉슬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과 "고통을 느낀다는 것을 아는 것"은 단지 언어적 구분에 불과하며 본디 하나의 현상일 따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별개의 행위가 아니라, 생각의 산물이자 생각의 도구인 언어를 활용하는 인간된 착오라는 겁니다. 만일 '생각하는 나'와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생각하는 나 (...)'처럼 거듭해서 생각하는 주체를 퇴행적으로 좇아 간다면, 생각 자체는 무한히 지연되고 불가능해질 겁니다. 마치 아킬레우스의 거북이처럼요. 그런데 그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현실의 우리는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는 것을 목도하고, 아무런 무리 없이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므로, 그런 구분 자체가 허상임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분절된 언어의 특성이 현실의 특성이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흔히 시인들은 "붉게 떠오르는 둥근 달"이 분할할 수 없는 시각적 이미지임에도 그것을 언어로 표현할 때, 주어와 동사와 보어로 된 문장으로 분절해서 쓰기에 현실의 둥근 달 역시 분절된 것이라고 오인하게 된다고요. 어떤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을 해부학적이고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뜯어서 설명할 때, 우리는 아주 단순한 동작도 매우 복잡한 매커니즘을 통해서 이뤄진다고 믿어버리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의 움직임은 그렇게 분절돼 있지 않고, 한순간, 한동작으로 이뤄집니다. 언젠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만연한 수다체로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포핸드 드라이브샷을 묘사하면서, 우리가 목격하는 그 영웅적인 찰나의 움직임을 로저 페더러는 머릿속에서 아무런 계산도 없이 수행하고 있음을 역설한 적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생각없음', '텅 비어 있는 내면'이야말로 그의 천재성을 증거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언어적 분석과 현실을 곧장 등치시키고 마는데, 이는 존 던의 무한퇴행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오류입니다. 존 던 역시 서구 철학과 과학이 저질러 온 오류를 답습합니다. 바로 시간을 공간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시간은 분할 불가능한 '한 덩어리'임에도 그것을 마치 공간처럼 분할 가능한 것처럼 상상하고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보르헤스는 '공간'과 '시간'이 대등하지 않기에 "시공간"처럼 표현하는 것은 오류이며, "공간이야말로 시간의 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적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르헤스는 존 던의 시간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놀라우며, 그것에 비하면 앞선 오류는 사소하다고까지 말합니다. 존 던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미래가 모든 세부사항과 함께 이미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놀라움을 보여줍니다. 그 미래로부터 거듭 퇴행해 오는 각각의 시간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이 이미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우리가 매일 밤 꾸는 꿈이 바로 그 증거라는 놀라운 생각의 높이에 도달했던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씁니다. "꿈속에는 즉각적 과거와 즉각적 미래가 공존한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같은 속도로 흐르는 순차적 시간만을 경험하게 되지만, 꿈속에서는 무한대로 이어지는 광활한 영역을 바라보게 된다."(50쪽) 존 던은 사람들이 죽음을 통해서 영원을 다루는 법을 알게 되고, 그 영원 속에서 모든 사람이 모든 인생의 순간을 되찾아서, 원하는 대로 조화롭게 배치하게 되리라고 보았습니다. 보르헤스는 존 던이 제시한 이 아름다운 구상이 너무 아름다웠기에, 언어의 착시 효과로 인한 무한퇴행이라는 현학적인 오류나, 시간과 공간을 혼동하는 유의 오류는 매우 사소하다고 말합니다. 박수 치고 싶을 정도로 탁월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보다 더 훌륭히 한 인물의 논의를 면밀히 비판함과 동시에 그의 성취를 칭송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영원성의 역사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994년에 첫 출간된 보르헤스 전집이 픽션 모음집이었다면 이번 전집은 보르헤스가 발표했던 논픽션을 모았다. 픽션과는 다른 매력의, 인간적인 보르헤스를 만날 수 있다.

끈이론 - 강박적이고 우울한 사람을 끌어당기는 가장 고독한 경기, 테니스미국 현대문학의 가장 담대한 작가이자 빼어난 스타일리스트인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선보이는 산문의 정수이다. 주니어 테니스 선수이기도 했던 작가는 테니스 치는 순간들과 테니스 경기를 둘러싼 모든 철학적, 정치사회적, 심지어 수학적 맥락들을 깊이 쑤시고 건드려 미국 스포츠 산문의 고전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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