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8월, 순수의 시대

D-29
보퍼트는 이 모든 걸 알고 예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토록 작은 대가를 바라고 그 먼 길을 왔다는 것은 그의 조바심이 얼마나 큰지를 말해 주었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좇고 있었다. 보퍼트가 예쁜 여자를 좇는 목적은 하나였다. 지루하고 아이도 없는 집에는 진작에 관심을 잃은 뒤, 그는 안정적인 위안 대상에 만족하지 않고 언제나 뉴욕 사교계에서 모험적 연애 상대를 찾았다. 이 사람이 바로 마담 올렌스카를 도망치게 만든 사람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피한 게 그가 이렇게 집요하게 구는 게 싫어서였는지 아니면 그에게 저항하기가 어려워서였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도망을 쳤다는 말도 구실이고 이런 잠적도 다 교묘한 술수였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었다.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은이),고정아 (옮긴이) | 부커스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보퍼트에 대한 이야기가 격하게 공감 가네요
그날 저녁 그는 런던에서 온 책을 풀었다. 상자에는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물건이 가득했다. 허버트 스펜서[3]의 새 책, 왕성한 필력을 과시하는 알퐁스 도데[4]의 빛나는 새 단편 모음집, 최근 흥미로운 비평이 많이 나온 〈미들마치〉라는 제목의 소설이었다.[5]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은이),고정아 (옮긴이) | 부커스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여기서 미들마치가 ㅋㅋㅋㅋ
1870년에 나왔는데 당시 흥미로운 비평이 많이 나온 신간이군요. ㅋㅋㅋ
뉴랜드 아처라는 인물이 <미들마치> 에 나오는 세 커플 중 하나인 의사 Lydgate 와 참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와 결혼하는 여자 캐릭터도 메이 웰랸드와 비슷하고요. 그런데 과연 <미들마치> 가 책 속에서 언급되는군요. 미들마치가 1871년에 나왔고 제일 처음 등장하는 오페라 파우스트의 여기수가 1888에 은퇴했다니 순수의 시대는 대략 1870년대 뉴욕시 이야기이군요.
15-6장서 갑자기 발췌하고 싶은 문장이 쏟아지네요.
일생 동안 사소한 것들을 연마하여 인위적인 권위를 얻은 확고하고도 평온한 이목구비가 일시에 흔들릴 것은 분명했다. 그 이목구비에는 아직도 자신의 딸과 같은 생기 있는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다. 그는 메이도 그와 같이 절대 순수의 얼굴로 중년을 맞이할 운명인가 자문해 보았다. 안 돼. 그는 메이가 그런 순수함을 갖는 게 싫었다. 상상력이 봉쇄된 정신과 다양한 경험을 느껴 보지 못하는 마음을 만드는 그런 순수함은!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은이),고정아 (옮긴이) | 부커스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알고 싶은 거예요, 뉴랜드. 내가 알아야 하는 거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 부당한 일을 당하게 하면서까지 내 행복을 구할 수는 없어요.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믿고 싶어요. 그런 토대에서 시작한다면 우리가 그 위에 어떤 삶을 꾸릴 수 있겠어요?」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은이),고정아 (옮긴이) | 부커스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그녀는 기쁨으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는 그 얼굴을 향해 몸을 굽히다가 그녀의 눈에 행복의 눈물이 가득한 걸 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여성다운 당당함을 잃고 다시 연약하고 소심한 소녀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는 그녀의 용기와 주체성은 모두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훈련받은 차분한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 이상으로 힘겨운 일이었고, 그녀는 안전을 확인해 주는 첫마디에 지나치게 모험심이 강한 아이가 어머니의 품속으로 대피하듯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처는 그녀에게 계속 간청할 기운이 없었다. 투명한 눈으로 그를 향해 그토록 깊은 시선을 던지던 새로운 존재가 사라진 것이 너무도 실망스러웠다. 메이도 그의 실망을 눈치챈 것 같았지만, 그것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몰랐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말없이 집으로 걸어갔다.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은이),고정아 (옮긴이) | 부커스 |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1부 완독했습니다. 마지막에 피바람(?)의 징조가 보이네요
“알아요. 하지만 저는 아쉬운 사람이니까 잠시라도 행복하면 돼요.” 그 말은 유혹처럼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아처는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난로 앞을 떠나 창가로 걸어간 다음, 눈밭에 선 까만 나무둥치들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힘없이 미소를 지으며 난롯불을 들여다보는 부인의 모습이 자신과 나무들 사이로 보였다. 아처의 가슴이 두방망이질했다. 부인이 자기 때문에 달아난 것이고, 그 말을 하려고 이 비밀스러운 방에서 단둘이 얘기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거라면?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마음속으로 생각한 말을 실제로 입 밖에 낸다면 부인이 뭐라고 할지 궁금했다. 평생 사소한 것들을 완벽하게 관리해오면서 얻게 된 헛된 권위가 깃든, 팽팽하고 평온해 보이는 그 얼굴이 충격으로 일그러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부인의 얼굴에는 메이가 지닌 싱그러운 미모의 자취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아처는 메이의 얼굴 역시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순수함을 간직한 이 통통한 중년 부인의 얼굴로 변해갈 운명인지 궁금했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아, 안 돼, 아처는 메이만은 그런 순수함을 갖지 않기를 바랐다! 상상력을 거부하는 정신과 경험을 배척하는 마음이 만드는 그런 순수함 말이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순수의 시대"라는 제목이 여기서 나온 거군요. 좋은 의미가 아니었네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 <순수의 시대> 2부 27장까지 ■■■■ ● 함께 읽기 기간: 8월 15일(금) ~ 8월 21일(목) 무더운 8월, 독서에 집중하기 쉽지 않으실 텐데 꾸준히 함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주에는 드디어 2부로 들어갑니다. 뉴랜드와 메이의 결혼 생활, 그리고 그가 올렌스카 백작부인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못하고 이어가려는 노력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특히, 결혼 후에도 변하지 않는 뉴랜드의 내면과 '순수'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메이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나는 대목들에 주목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광복절인데요, 이를 포함하면 제법 긴 주말의 시작입니다. 모쪼록 이 기간 동안 슬기로운 독서 시간 보내시기를 바라며 저 클럽지기는 다음 주 금요일에 찾아올게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C-1. 어떤 점이 인상 깊으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들려 주세요. 책 내용과 상관은 없지만 연관되어 떠오른 다른 생각들도 좋습니다.
병렬 독서하고 있는 책 3권 중 제일 재미있어서 거의 다 읽어갑니다. 이따 저녁에는 영화를 다시 한 번 봐볼까 싶어요.
두 번째 읽어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처음에 안 보이던게 많이 보여서 좀 씁쓸합니다. 원래도 주인공은 엘렌이라고 생각하고 읽긴해서 뉴랜드가 참 찌질해보였는데 두번째 보니 찌질한 점이 더 많이 보여서 읽는 재미가 좀 떨어지네요. 뉴랜드에게는 엘렌이 더할나위없이 사랑에 빠질만한 존재였던 것 같아요. 엘렌은 애초부터 자기가 돌아올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뉴욕의 모든 인간관계를 포기하면서까지 뉴랜드를 선택한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엘렌과 뉴랜드의 끝은 정해져있다고 봤던 것 같아요. 결혼을 한번 하고 유럽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엘렌 눈에는 뉴욕에서 더 큰 세계와 자유로운 삶을 동경만하는 뉴랜드는 도와주고 아껴주는 건 고맙지만, 엘렌의 속마음을 다 이해하기에는 좀 그릇이 작은 애송이로 보일 수 밖에 없고요. 이 와중에 뉴랜드가 줄곧 무시하고 인형같은 존재로 치부하는 메이의 대응이 더 흥미로와집니다. 뉴랜드는 메이의 순수함을 답답하고 우둔한 인형같은 마음으로 자꾸 그리는데, 2부에 접어들어서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쫓으면서도 실제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뉴랜드가 오히려 메이보다 더 철없는 순진무구한 애같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이디스 와튼이 실제로 인테리어 책도 쓸만큼 전문가였다고 해서 책에 묘사되는 디테일의 묘미가 쏠쏠해요. 1870년대 복장, 실내장식, 식기 등등 사진이 같이 실린 버전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며 부족한 상상력을 펼쳐봅니다. 세계대전을 겪기 전, 낭만주의가 휩쓸고 문화가 한창 꽃필때의 유럽같고 싶지만 유럽같을 수 없었던 미국 상류층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재미는 처음 읽을때나 지금이나 여전하고요.
책을 다 읽고 내친 김에 영화도 다시 보고 싶어서 찾아봤는데 쿠팡플레이에 유료로 있더라고요. 1,320원 (1,200 + 부가세)으로 결재를 하고 영화를 틀었습니다. 예전에 책을 읽기 전에 영화를 먼저 봤을 때는 몰랐는데 영화가 정말 책을 그대로 옮겨 놓았더군요. 거의 삭제된 씬이 없을 정도로요. 그래도 상상만 했던 뉴욕의 집안 인테리어와 하인들, 길 거리 등을 보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특히 바닷가에서 파도가 반짝이는 모습과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뒤돌아 웃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더군요. 영화 마지막엔 다시 눈물도 흘렸어요.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정말 올렌스카 백작부인과 메이인 것 같아요. 하지만 뉴랜드도 불쌍하고 안타까웠습니다.
글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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