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8월, 순수의 시대

D-29
두 사람은 밀려드는 대화 사이에 이따금 침묵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명상하듯 점심을 먹었다. 마법이 풀리면서 두 사람 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말이라는 것이 긴 무언의 대화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처는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그런 게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를 한마디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탁자에 몸을 기대고 깍지 낀 손에 턱을 얹은 채, 그들이 만나지 않은 1년 반 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은이),고정아 (옮긴이) | 부커스 |
순수의 시대 24장,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그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서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 시간은 아주 짧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녀의 침묵이 그에게 해야 할 모든 말을 전하고, 중요한 건 하나뿐이라는 걸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이 만남을 마지막 만남으로 만들어 버릴 일을 하지 말아야 했다. 자신들의 미래를 그녀의 손에 맡겨 두고, 그녀에게 그것을 꼭 붙들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순수의 시대 | 이디스 워튼 (지은이),고정아 (옮긴이) | 부커스 |
순수의 시대 24장,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그녀는 불안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할머니 별장에 간 날, 왜 해변으로 날 데리러 오지 않았어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이 돌아보지 않아서요. 내가 온 걸 모르는 것 같아서 그랬어요. 당신이 안 돌아보면 절대 데리러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거든요.” 그런데 말해놓고 보니 너무 어린애 같아서 아처는 웃음을 터뜨렸다. “일부러 안 돌아본 건데.”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일부러?” “당신이 온 거 알고 있었어요. 마당으로 들어올 때 말들을 알아봤거든요. 그래서 해변으로 내려간 거예요.” “나한테서 가능한 한 멀리 가고 싶어서요?” 그녀는 낮은 소리로 대답했다. “당신한테서 가능한 한 멀리 가고 싶어서요.”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뉴랜드 아처 부부는 메이가 친구들에게 쓴 편지에서 ‘더없이 행복하다’라는 한마디로 모호하게 요약한 3개월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순수의 시대 2부 20장 중에서,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무려 3개월 동안 신혼여행을 다녀오다니 엄청 나네요.
그녀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더니 그에게서 떨어져 벽난로 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나한테 육체적인 관계를 바라지 말아요!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녀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낯빛이 변하면서 아처도 일어났다.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혹독한 질책이었다. “당신에게 육체적인 관계를 바란 적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우리 둘에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내가 결혼했을 여자는 당신입니다.” - <순수의 시대-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4>, 이디스 워튼 - 밀리의서재 https://millie.page.link/gwTHJAAKRE7qtU938 내가 불가능하게 했다고요?” “당신이요, 당신, 당신이라고요!” 그녀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아이처럼 입술을 떨면서 소리쳤다. “이혼을 포기하게 한 건 당신 아닌가요? 이혼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쁜 짓인지, 결혼의 고결성을 지키려고… 그리고 가족이 험담과 추문에 시달리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 희생해야 하는지 알려줘서 이혼을 포기하게 만든 게 당신 아닌가요? 게다가 우리 가족이 당신과 친척이 될 거라서, 메이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 당신이 시킨 대로, 마땅한 행동이라고 일러준 대로 했어요. 아.”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난 당신 때문에 그렇게 한 걸 숨기지도 않았다고요!”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두 손에서 얼굴을 들지도 않았다. 두 손에 가려진 눈알이 칠흑 같은 어둠을 계속 응시했다. “적어도 난 당신을 사랑했어요….” 그가 불쑥 말했다. 벽난로 저편 그녀가 아직 움츠리고 앉아 있을 소파 구석에서 아이의 숨죽인 울음소리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가 놀라서 벌떡 일어나 그녀 쪽으로 갔다. “엘런! 무슨 일이에요! 왜 우는 거예요?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하나도 벌어지지 않았어요. 난 여전히 자유로운 몸이고 당신도 그렇게 될 거예요.”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젖은 꽃송이 같은 그녀의 얼굴에 입술을 댔다. 그러자 그들의 헛된 두려움이 동틀 녘 귀신처럼 모두 쪼그라들었다. 그녀와 닿기만 해도 만사가 쉬워지는데 5분 동안이나 응접실 저쪽 끝과 이쪽 끝에 서로 떨어진 채 말다툼을 하고 서 있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입맞춤을 되돌려 주었지만 잠시 후 그는 품 안의 그녀가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옆으로 밀고 일어섰다.
아처는 대대로 물려받은 결혼에 대한 케케묵은 생각으로 돌아갔다. 전통을 따르고 그의 모든 친구들이 아내를 대하듯이 메이를 대하는 것이 족쇄를 차지 않은 총각 시절에 막연히 그리던 이론을 실천하는 것보다 덜 골치 아팠다. 본인이 자유롭지 않다는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는 아내를 해방시키려고 애쓰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그는 메이 자신이 가졌다고 여기는 자유의 유일한 쓰임은 아내로서의 경배의 제단에 바치는 것뿐임을 오래전에 알아차렸다
옷은 그들의 갑옷이야.’ 그는 생각했다. ‘미지의 것에 대한 방어이고 저항이야.’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머리에 리본을 다는 시도조차 할 줄 모르는 메이가 많은 옷가지를 고르고 주문하는 엄숙한 의식을 거치면서 보인 열의를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녀는 그가 기대한 것에 모두 부응했기에 그 자신의 선택이 실수였다고 할 수 없었다. 뉴욕에서 내로라하는 아름답고 인기 많은 젊은 부인의 남편으로 사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만족스러웠다. 특히 그녀는 둘째가라면 서럽게 마음씨가 곱고 사리를 아는 부인이기도 했다. 아처는 예전부터 그런 장점을 잘 알았다. 결혼 전날 밤에 그를 덮친 순간적인 광기는 폐기한 실험의 마지막으로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하긴 난 항상 대조적으로 살았어! 나에게 유일한 죽음은 단조로움이야. 늘 엘런에게 이렇게 말해. ‘단조로움을 조심해라. 그건 모든 죄악의 어머니야.’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아처는 그렇게 뉴욕이 변해간다고 생각했다. 변화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서로 힘을 모아서 변화를 무시하다가 막상 변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이미 선대에 일어난 일이라고 진심으로 여겼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그리고 나무 아래 놓인 첫번째 벤치에 앉아 있는 엘렌을 발견했다.
순수의 시대 2부 23장 중에서, 이디스 워튼 지음, 김영옥 옮김
“뉴런드, 저도 진실을 알고 싶고, 알아야만 해요. 누군가를 부당하게 희생시키면서 제 행복을 일구고 싶지는 않거든요. 당신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면 우리 미래가 어떻게 되겠어요?” 메이의 얼굴이 하도 비장해서 아처는 그녀의 발밑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1부 막 마치고 2부에 들어섰습니다. 아처와 엘런이 사랑에 빠지는 게 다소 갑작스럽다고 느껴져 함께 독서 중인 김새섬 대표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명언을 해주시네요. 김새섬 대표 왈, "그 남자가 진짜 잘생긴 거지. 엘런이 아마 보자마자 반했을 걸?"
김새섬 대표의 말을 듣고 바로 납득했습니다.
지금까지 그의 나날을 채웠던 많은 것들이 이제 아이들 소꿉장난이나,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중세 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논쟁처럼 느껴졌다. 바로 몇 시간 전, 결혼 선물의 ‘공개’ 여부를 둘러싸고 치열한 언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아처로서는 다 큰 어른들이 그렇게 사소한 문제를 놓고 그토록 흥분했다는 것도 이해가 안 갔고, 격분한 웰런드 부인이 눈물바람을 하며 “그러느니 차라리 집으로 기자들을 부르겠다”며 선물 공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해서 공개하지 않는 쪽으로 결판이 난 것도 이상하게 느껴졌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극에 달한 ‘조신함’이 그저 무일 뿐이라면, 공허를 가린 커튼에 불과하다면 어찌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과녁을 명중시키고 차분하면서도 붉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오는 메이를 보며 아처는 자신이 아직 그 커튼을 열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당신이 원하면 무슨 말이든지 할게요. 아니면 아무 말도 안 하든지. 당신이 말하라고 할 때까지 가만히 있을게요. 그런다고 누가 피해보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는 그냥 당신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그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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