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8월, 순수의 시대

D-29
엘렌을 위해 싸워달라는 캐서린 노부인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는 아처의 모습에 오만정이 다 떨어집니다. 정말 정말 잘생기지 않으면 매력이 전혀 없는 캐릭터예요.
모든 사람이 그토록 치밀하게 서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아처는 뉴욕 사교계가 자기를 올렌스카 부인의 연인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만찬의 성공에 취해 의기양양하게 눈을 반짝이는 아내를 보면서 처음으로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지금 레지 치버스 부인 및 젊은 뉴런드 부인과 마사 워싱턴 무도회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지만, 아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마음속에서 악마들이 왁자지껄 웃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저녁은 그렇게, 어떻게 멈춰야 할지 몰라서 끝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갔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아처는 자기가 무엇을 놓쳤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인생의 꽃이었다. 하지만 이제 너무도 까마득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그 때문에 불평한다면 마치 복권에서 일등을 놓쳤다고 아쉬워하는 것과 비슷할 듯했다. 그가 산 복권은 일억 장이 발행되었고 당첨자는 딱 한 명이었다. 그러니 그의 복권이 당첨될 확률은 아주 적었다. 엘런 올렌스카를 생각할 때면 책이나 그림에 나오는 상상 속의 연인을 그려볼 때처럼 추상적이고 차분한 느낌이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모든 것을 모아놓은 환영이었다. 그 환영은 희미하고 흐릿했지만, 아처는 그 덕분에 다른 여성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그는 이른바 충실한 남편이었고, 메이가 폐렴에 걸린 막내를 돌보다가 감염되는 바람에 세상을 떠났을 때 진심으로 슬퍼했다. 그녀와 오랜 세월 같이 살면서 아처는 결혼이 단조로운 의무이긴 해도, 의무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의무를 저버리면 결혼은 단지 추악한 욕망의 전쟁으로 전락할 터였다. 아처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지난날에 긍지를 느꼈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어쨌든 전통적인 생활방식에도 좋은 점은 있었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키는 좀 줄었지만 많이 작아지지 않았고, 너그럽고 충실하고 늘 부지런했지만, 메이는 상상력도, 변화할 능력도 없었기에 자기가 젊었을 때 살던 세상이 완전히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는데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평생을 살았다. 그처럼 견고하고 순수한 맹목성 때문에 그녀가 보는 세상은 늘 한결같았다. 엄마가 변화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걸 알기에 자녀들도 아처가 그랬듯이 그녀에게 자신의 견해를 얘기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처음부터 일종의 거짓된 동질성, 가족 전체가 공모하는 가식적인 순수함이 있었고, 아처와 자녀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에 동참했다. 그 결과 아내는 평생 이 세상이 자기 집처럼 사랑과 우애가 넘치는 가정들로 가득한 참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고,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처가 댈러스에게 그들 부부의 삶을 이끌어준 원칙과 편견을 심어줄 것이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댈러스 역시 막내 빌에게 그 소중한 믿음을 전해주리라고 생각하며 마음 편히 죽을 수 있었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올라가는 것보다 여기 있는 편이 더 생생해.” 아처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일 분 일 분 시간이 흐르는 동안 아처는 현실의 마지막 그림자가 스러질까 두려워 그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순수의 시대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완독했습니다. 영화 때문에 결말을 알고 있었고, 아처 뉴랜드는 한심하고 답답한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뭉클하네요...
ㅎㅎ 전 장작가님의 '그래도 뭉클하네요..'란 말을 믿고 끝까지 읽어보았습니다 중간은 좀 지지부진한 전개가 호흡이 느리게 느껴졌는데 역시 후반부로 가니 쓸쓸함과 허무함 그러면서도 따뜻한 황혼이 느껴져서 더 좋았습니다^^
완독했습니다. 다들 마음 속에 엘렌 하나 씩은 품고 살지 않나요? ㅎㅎ 마지막에 아처가 엘렌을 만나지 않음으로 해서 그의 사랑은 일상이 되어버리지 않고 예술이 되었네요. 아처는 일상에 의무에 매여 있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군요. 자유를 찾아 구대륙을 떠나온 사람들이 미국에서 더욱 강고한 귀족 윤리로 자신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는 모습이 신기해요. 일반적으로 뉴욕은 옛날부터 자유와 창의와 다양성이 끓어 넘쳤을 것만 같은데 말이죠. 내가 상상하는 뉴욕은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 터부시하고 엘렌이 교류하는 그 부류들인 것 같아요.
마음 속에 엘렌 하나, 와닿는 이야기네요.
저도 뉴욕이 화려한 도시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유럽의 관습과 윤리가 개개인보다 더 중요한 가치였던 시절이 있었는지 이번에 알았습니다 각자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엘렌이라~~ 어떤 느낌인가요?? 아무래도 안 만나는게 낫겠지요??^^
이 소설에서 파리 사람들을 매우 자유로운 (어쩌면 불경한) 사람들로 묘사하는데, 보봐리 부인이 떠오르네요. 현실의 무료함을 적극적으로 타개하며 욕망을 쫓다 파산하는 프랑스인, 욕망을 철저히 관리하는 미국인. 어쩌면 지난 달 읽은 책에 나오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아처, 메이 같은 미국인을 만들었을 것 같네요. 19세기 후반 프랑스 소설과 미국 소설의 차이라고까지 하면 비약이지만 비교해서 생각하니 재미있어요. 보봐리 부인에 비하면 이 책의 주인공들은 절제의 화신인 것 같아요. 그리고 상도덕도 비교가 되구요. 보퍼트 이야기로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신용에 대한 엄격함이 오늘의 미국을 이뤘나 싶기도 하고 놀라웠어요. 또 지난 달에 읽은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생각나구요. ㅋㅋ 의식의 흐름이 지난 책들과 연결되는 재미가 있군요.
말씀해 주신 내용들, 6월책, 7월책, 8월책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정말 흥미롭네요. 미국 영화나 책에서 프랑스 (특히 파리)는 자유롭고 이국적인 곳으로 묘사가 자주 되더라고요. "미국이 싫어서" 어딘가로 떠나는 경우 꼭 파리가 그 장소이던데...과연 미국인에게 프랑스는 어떤 이미지일까 궁금해집니다. 절제와 윤리에 그토록 갇혀 있는 <순수의 시대> 속 뉴요커들이야말로 진정 프로테스탄트 정신의 계승자들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9월이 제 2의 성이고 일단은 프랑스 작가란 점이 더 의미심장하게 와닿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모임 안녕하세요. 챌린저 여러분. 이 공간은 8월 29일(금)까지만 글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이후에는 글을 쓰는 것은 안 되고 읽는 것만 가능한 상태로 전환되니 참고해 주세요. 또한 기한 내 완독에 성공하신 분들은 글을 남겨 알려주세요. 함께 축하해요.~~ 8월에도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9월로 계속 클래식 챌린지 이어가겠습니다.
27장까지 읽었습니다! 열심히 따라잡아 보겠습니다!
덕분에 좋아하던 책 다시 한번 새롭게 들추어 볼 기회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몰랐던 뉴욕의 초기 모습에 매료되었고, 개성있는 세 인물의 삼각관계가 어찌될지 흥미로웠는데 다시 읽으니, 인물들은 다소 현실성이 떨어지는 전형적인 면이 부각되어 다가오지만 뉴욕시와 사회상, 생활상의 묘사는 또다시 새롭게 생생하게 다가오네요. 넷플릭스에서 영상화한다는데 정말 기대됩니다. 저는 영화화 버전에서는 엘렌과 아쳐의 나이가 너무 들어보였고, 미쉘 파이퍼는 지나치게 노련해보이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너무 진중해 보여서 미스캐스팅이고, 위노나 라이더는 정말 메이 그 자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어떤 배우들이 연기할지 궁금해요. 엘렌을 좀더 젊고, 이국적이지만 고고한 면이 잘 부각되는 배우가 했으면 해요. 요즘 배우들은 잘 모르지만 키이라 나이틀리나, 시얼샤 로넌 같은 분위기 깊은 배우요...
와.. 넷플릭스 시리즈로 나온다니 무지 기대되네요. 저는 아직 영화도 못 봐서 한번 챙겨봐야겠습니다.
오 넷플릭스요? 저도 기대되네요.
완독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을 때가 예순을 바라보던 나이였다니, 뭔가 위안(?)이 됩니다. 연보 등을 보니 그녀의 삶이 상당히 많이 녹아 있구나, 싶었네요. 9월도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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