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글엔 슬슬, 느긋하게 이런 말이 자주 등장한다.
지극히 사적인 일본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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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자기들은 잘 못 하니까 영어 쓰는 걸 아주 멋있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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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식당에서도 말을 시작하기 전에 손을 든다. 주문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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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아직 한국보다 전산화가 덜 된 것을 감안하고 글을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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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행복
결론적으로 말해 사람 사는 이승에선 ‘진정한 행복’은
없다고 본다.
그게 있다면 진정한 행복의 왕국인 내세(來世)와
천국을 왜 인간들이 만들었겠나.
이게 이승에선 어름도 없으니까 그걸 채울 수 있는
가상을 만들어 그리로 갈 희망을 품고
현세에선 그런대로 감수하며 불만족한 채 사는 게 아닐까.
현세에는 그냥 거기에 가까이 가는 미흡한 행복만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 같다.
아무리 부자나 절대 권력을 가진 황제라도
자기 삶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
현실에선 ‘진정한 행복(Pure Happiness)’은 없다는 것이다.
작은 거라도 인간인 이상, 불만을 품게 되어 있다.
“난 완벽한 인간이고, 완전한 행복을 계속 누리고 있어.”
라고 남에게 자랑삼아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속마음까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자기기만에 빠진 것이다.
불만족 속에 사는 건, 인간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실존이고 굴레, 인간의 원죄(原罪)다.
인간은 현실에서,
원하는 대학이나 입사 시험에 합격하고
자기 이상형을 만나 결혼에 골인해도 6개월이면
그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기 시작한다.
현실 행복의 유효기간은 반드시 온다.
행복은 영원하지 않다.
살아 있는 한 진정한 행복도 없다.
그래 불교에선 삶을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질곡(桎梏),
결국 고해(苦海)로 점철(點綴)된 것이라고 하고
그것을 벗어난 걸 해탈, 열반, 피안(彼岸)이라 해,
그런 고통의 현세를 번뇌로 가득한 사바세계라고 했다.
고통의 현세와 그걸 극복한 이상향을 구별한 것이다.
현실에서 도저히 안 되니까 이걸 이룬
영적(靈的) 공간을 따로 만든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한 행복이 없는 현실을 견딜 수 있어서다.
인간이 이승에서 아무리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건 인간이 마음, 감정을 가져 그런 것 같다.
마음이 없는 동물은 그냥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
불만을 품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리 하나가 없는 강아지는 다리 셋만 가지고도 흰 눈밭에서
뒹굴며 마냥 신나서 뛰논다.
다리 셋, 그 상태 그대로 즐기는 것이다.
그걸 자기 놀이와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놀이하고 그건 별개(別個)다.
인간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에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본능만 있는 게 삶을 더 행복하게 영위할 수도 있는 것 같다.
배부른 돼지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실은 더 행복하다.
이 인간 마음이 불행의 씨앗이라 예수도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면서
강아지와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만
진정으로 행복에 이를 것이라고 역설(力說)했다.
그렇게 하면 현실에 살면서도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진정으로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가식적인 웃음을 짓지 않는다.
진정으로 행복하고 좋아서 웃는 것이다.
그래 사람들은 이들의 웃음을 믿고 같이 웃는다.
아빠가 퇴근해 아이들의 깔깔 웃음과
아무 근심 없이 세상모르고 자는 모습을 보고
무장 해제되는 해방감을 느껴 하루의 고단과 피로가
순식간에 가시는 것이다.
이들을 보고 웃음이 안 나오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순수함에 매료(魅了)되지 않는 인간은 거의 없다.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자가 복을 얻는 것이다.
같이 웃었던 누구라도 이들에게 어려움이 닥치면
도우려 할 것이다.
이들은 마음이 가난해서 사람들의 도움, 복을 받는다.
이와 반대로 예수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건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라고 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행복한 천국에 가지 못한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아 현실에선 더 어림도 없는 거고.
다소나마 행복에 이르는 길은 자기가 현세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을 나름대로 유토피아, 파라다이스,
무릉도원, 이상향을 만들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거라며 자기에게 최면을 걸고 상상하며
꿈을 꾸는 경지에 이르면 그런 행복을, 거기서 잠시나마
맛볼 수 있다고 본다.
고통으로 점철된 현실과 고통 없고 행복만 가득한
이상을 분리하는 것이다.
왜냐면 현실에선 도저히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허구적 공간은 종교적 영역일 수 있고,
인류의 난제에 도전하는 불같은 열정이나
무아지경(無我之境)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경지일 수 있다.
현실이 그러니 진정한 행복은 없고 실은 고통이
더 긴 시간을 차지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깨닫고
그러려니 하며 사는 게 나을 수 있다.
그러면서 신이나 어떤 자기만의 세계를
가상(假想)에 라도 건설해 자기 나름대로 진정한 행복이라며
착각하고 그 세계에 잠시 젖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세계 속에 침잠(沈潛)하는 걸 불교에선
법열감(法悅感)이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속세와 떨어져 깊은 적막과 무거운 침묵 속에
절대 고독에 이르러 묵언수행 하는 것도 이에 해당할 것이다.
현실과 이상(理想)에서 진정한 행복을 향해
서로 보충해 주는 것이다.
현실에서의 불만을 이상에서 어느 정도 풀고
이상에서 누리거나 보충한 행복을 현실에서
불만족한 행복을 어느 정도 상쇄(相殺)하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조화와 상호부조(相互扶助)라고나 할까.
역시 인간이 해결 못 하지만 그래도 가야만 하는
과제와 화두(話頭)는 현실과 이상의 유리(遊離)를
어떻게 메우고 그걸 어떻게 절충하고
타협시키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방법으로,
자기에게만 주어져 타고난 것을 불평 안 하고 이 세상에서
그걸 가지고 그나마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게
거기(진정한 행복)에 조금이나마 다가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으로 태어났으면 장애의 조건에서 자기 나름대로
자기만의 할 일을 찾는 것이다.
한국에서 여자로 2025년에 살아가는 거라면 미국에서
왜 남자로 안 태어났나 원망할 게 아니라 한국에서
지금 나의 이 상태를 받아들이고 지금 자기 나름대로
최선으로 할 것을 찾으며 그걸 하는 중에
그 속에서 그게 나의 행복이라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자기에게 천부적(天賦的)으로 주어진 것을 현실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건 자기만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자기만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전업주부로만 살다가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결혼 전에 하고 싶었던 것을 생활에 파묻혀 못 해
뭔가 늘 아쉬움이 남았었는데,
그래서 자신의 가슴 한구석엔 항상 채워지지 않는 뭔가가
숙제로 남아 있던 것이다.
살면서도 허전하고 자꾸 이곳이 아닌 다른 쪽으로
눈길이 가는 걸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강한 회의(懷疑)가 엄습하기도 한다.
실생활에 별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이런 게
예술 쪽이 많은데, 바이올린을 맘껏 연주해 봤으면,
미술 전공이라 그걸 살려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려봤으면,
어릴 때부터 문학소녀를 꿈꿨는데 글쓰기를 계속
했더라면, 하고
어느 날 갑자기 후회가 밀려오는 것이다.
자기를 비로소 찾았는데 정작 손에 잡힌 건 없는 것이다.
자기를 정의하는 정체성(正體性)이 모호한 것이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멈추지 말고 생활에서도 짬을 내 실현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현실에서도 행복 쪽으로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다고 본다.
현실에서 자신이 깊이 빠지거나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절대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이게 또 현실에서 자기만이 구축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상 세계랄 수 있다.
요는, 자기가 사는 현실을 떠나 나름대로
이상 세계를 만들어 거기서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내 꿈을 맘껏 펼치는 것이다.
정신으로나마 꿈을 이루는 것이다.
현실에선 늘 불안하고 불완전한, 그래서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니까 현실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실현하며 거기서 나름 보람과 행복을 찾는 길밖에
달리 없는 것 같다. “아, 이런 순간이 행복인가보다.” 하고
실컷 맛보는 것이다.
인간이기에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 우선 현실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기란 힘들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 그래서 자기만의 세계인, 가상에서 행복을 찾아,
● 그걸 가지고 현실의 불만족을 상쇄, 상호 보완
● 주어진 걸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행복에 더 가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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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때문에 주유소가 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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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넓으면 자동차는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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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터미널에 차를 잘 살 수 없는 동남아 노동자들만 있어 그걸 이용했던 젊은 한국 여자들이 더 초조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한국인만 더 많은 KTX는 덜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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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는 불쑥 같은 부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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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좋아하니 일본 관련 책도 흥미와 호기심를 가지고 깊게 읽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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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심이지만 남은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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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마누라가 미인이면 우월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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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시골 고향에 남아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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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집에 사람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택배도 그냥 문앞에 물건을 놓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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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면 차에서 나는 뜨거운 열기가 그렇게 싫다. 추울 땐 찬바람이 그렇게 차게 느껴진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도 한겨울엔 미지근하게 느껴지고, 한여름엔 반대로 더 뜨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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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가의 글을 여러 번 읽는 게 더 많은 것을 얻는다
같은 작가의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게 실은
여러 글을 섭렵하며 여러 작가의 글을 읽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결과적으로 얻을 수 있다.
그래서 그런 거겠지만,
특히 자신이 거듭 읽는 글이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라면
더욱 그렇다.
글에도 익숙함이 있고 한 구절이라고
그 작가의 속으로 들어가 생각하기 때문이다.
친근함, 익숙함, 좋아함은 자기 것이 되는데
더 십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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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기 위주이고 자기 입장에 빠져 남의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즉 남의 일에 그렇게까지 신경을 쓸 수 없는 것이다. 자기일이 우선 바 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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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일본인은 가게에서 전화가 와도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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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 같은 말은 이제 거의 한국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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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거의 완전히 사라진 것 같은데 일본은 아직도 천천히 하는 버릇이 있어 연하장이 있다. 신문도 아직도 많이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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