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연적인 추상화가 습관이 되면,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구체적인 힘, 즉 그 자체로 폭력의 형태라 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관심을 잃는 데 익숙해질 수 있다. "
추상화라는 것을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100%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단순화하고, 이름을 붙이고, 분류합니다. 이것이 바로 '추상화'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아마 인간의 부족한 두뇌용량이 모든 것을 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편리한 '추상화'가 생각 없는 '습관'이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저자는 지적하는 것 같습니다. 즉, 더 이상 구체적인 대상을 보려 하지 않고, 우리가 만들어낸 '딱지(label)'나 '개념'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습관적으로 추상화하다 보면, 내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실제적인 원인이나 구체적인 상황을 보지 못하게 되면서 '원래 그런 거야'라며 무시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마도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될 것 같은데) 나의 이러한 편리함과 안락함이 의도치 않게 타인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위협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이 "그 자체로 폭력의 형태라 할 수 있는 환경" 즉 이러한 '보이지 않는 폭력'을 당연하게 여기게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참으로 정곡을 찌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지점입니다.
아... 참 어렵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유난히 더운 여름을 보내는 2025년 8월 이 더위에서 에어컨의 안락함과 쾌적함이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 guilty한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주장하는 저자의 말이 '불편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어떠한 행동을 해야할텐데... 선뜻 에어컨의 온도를 올리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p.16.,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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