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5. <일인 분의 안락함>

D-29
겉으로 봐선 캘리포니아 쿠퍼티노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내 전화기는 43개국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채굴 지역에서 정치적, 환경적 폭력을 역대급으로 부추긴 분쟁 광물과 희토류 금속을 포함하고 있다. 나와 세상을 안정적으로 연결해주는 내 전화기는 그 재료가 채굴되는 지역을 덜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나의 안정성은 내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공동체의 늘어난 불안정성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이 편안함은 누구의 것인가?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46-147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편안함’이 사회문화적으로 구축된 것이라는 이러한 생각과 결을 같이하는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열적 쾌적성의 경계는 평생 주어진 문화와 개인 안에서 놀라울 정도로 유연해질 수 있다. 이 경계는 사회적 환경뿐만 아니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경계는 변화할 수 있고 또 실제로 변화한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47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먼저, 폭염은 다른 이유 중에서도 에어컨 사용의 증가로 더 뜨거워지고, 길어지고, 빈번해지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에어컨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에어컨에 거의 접근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맞겠지만 말이다. 핵심은 역사적으로 에어컨이 (위험 요인으로 흔히 오해되었던) 단기적 열적 불쾌함에 대한 해결법으로서 지구상의 보다 편안히 지내는 거주자들에 의해, 또 그들을 위해 처방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만병통치약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구를 이제 실제로 더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었는데, 특히 기계적 냉각 장치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욱 위험으로 다가왔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49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냉방 시스템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미국의 가장 곤란한 통념, 즉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채, 값싼 에너지가 무한대로 공급될 것이라는 믿음을 사실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미국은 소위 더 문명화된 세계 건설에 일조하기 위해 (명백하게 인간을 노예화함으로써) 무료이거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운영되었다. 노예 해방령이 노골적인 노예제도를 끝낸 후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미국은 물, 나무, 육체적 힘을 활용하던 경제에서 주로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경제로 전환했고, 후자는 전자를 (부)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었다. 노동 착취를 위한 노예화된 인간과 탐욕스럽게 소비되는 화석 연료라는 에너지의 두 원천은 연결되어 있다. 에어컨은 결과야 어떻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에너지라는 믿음을 이용해 보급될 것이었다. 식민지 지배와 노예화에서 비롯된 이러한 그룻된 통념은 열적인 것이든 아니든 편안함을 생각할 때 늘 우리를 사로잡는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56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현대 미국인들의 편안한 휴식에 대한 개념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자연스러워 보이는 토대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56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19세기의 기차와 공장이 시간의 표준화를 강요했다면, 냉방 설비를 갖춘 20세기의 환경은 주어진 경계를 넘어 시간과 장소를 확장했다. 실내 공기가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더는 노동자들이 여름날 오후 가장 더운 시간에 따로 쉬지 않아도 되었다. 또한, 시원하고 건조한 작업 환경이 처음으로 미국 최남단 지역에서도 재현될 수 있었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60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궁극적으로 냉방은 이상적 노동 조건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미국 무대의 한편을 차지했다. 푸코는 건물을 밀폐함으로써, “목표가 생산력을 높여…최대한 이익을 끌어내고 불편함을 없애는 것, 재료들과 도구를 보호하고 노동력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썼다. 그러나 공기조화의 목적이 공업용 공조에서 쾌적한 냉방으로 옮겨갔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과도한 연장이라는 목적은 지속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60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예전에 어디서 주워들었던 말인데, ‘니가 야근하는 건 에디슨 때문이다. 전구 덕분에 노동자들은 밤에도 쉬지 못하게 되었다.’ 하는 얘기가 떠오릅니다.
거 말되네요. 지금 양계장의 닭들이 그렇다잖아요. 불을 꺼야 잠을 자는데 낮인줄 알고 계속 알을 낳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네요.
오, 맞네요! 양계장 닭들도 고통스런 삶을 살더군요. 예전에 읽은 <마당을 나온 암탉>이 생각납니다. 친구가 줘서 보다가 엉엉 울었는데…
이러니까 꼭 사람이 닭된 거 같습니다. 서글프죠.ㅠ 전 우리나라 밤이 너무 밝다고 생각합니다.
여담이지만 저는 코로나 때, 재택근무하던 게 문득 떠오르기도 했어요. 출퇴근의 경계가 사라진 느낌? 실시간으로 접속되어 있어 일과 휴식의 분리가 모호해진... 언제든 연락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이 생겨서 한동안 다들 어버버했었죠. 저는 집에 컴퓨터가 없어서 더 난감했고요.
노동자들이 덥고 습한 여름 기후 때문에 과열된 상태로 일을 할 수밖에 없거나 일터로 복귀하는 데 필요한 힘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잠을 잘 수 없다면, 생산 수단의 소유주들은 오직 두 가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하나는 노동자들이 해야 할 일을 줄이는 것(그러면 소유주는 손해를 본다)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 공간의 기후적 … 특성’을 바꾸는 것이다. 에어컨의 부상은 두 번째 안이 선택되었다는 증거다(기후는 먼저 실내에서 의도적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실외에서 의도치 않게 지구온난화를 통해 바뀌었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61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하지만 노동시간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 아닐까요? 노동시간이 늘어났다는 게 오해를 부를 수 있는 표현 같아요. 에어컨은 노동 시간을 늘린 게 아니라 노동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린 것이고 그 덕분에 기업의 소유자들 뿐 아니라 사회 전체의 생산량이 늘어난 것이 아닐까요? 경제가 성장해야 복지 예산을 비롯해 정부가 쓸 수 있는 세금도 늘어나고 일자리도 생기고 근로시간 단축이나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기술에의 투자를 비롯해 긍정적인 사회변화의 기반이 되는 역량이 늘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제가 무척 우파적인 것 같지만 경제 성장과 다른 가치들을 조화시켜야 하는 것이지 경제 성장의 가치를 폄하하는 듯한 시각에는 공감이 잘 안되요.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일도 비판적 시각에서 보면 자본의 노동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테일러리즘이나 포드의 일관생산도입 같은 일들과 에어컨을 설치해 작업하기 편안한 환경을 만드는 일은 좀 결이 다르지 않나 싶어요.
미국에서 에어컨이 처음 공장에 도입됐을 때라면 시카고 노동자들이 하루에 8시간만 일하자고 시위하고 파업하다가 총 맞고 죽은 메이데이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때가 아닌가요. 초기 자본주의 산업 사회의 노동 시간은 이미 살인적으로 길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이 싸우고 피를 흘려서 8시간 노동제를 쟁취해낸 것인데, 그때로부터 100년이 넘게 흘렀지요. 전 이제 하루 4시간만 일했으면 좋겠어요. 주4일 근무제도 빨리 도입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사회의 장시간 노동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죠. 제가 고3때 취업 나간 사업장에서는 하루 13시간씩 일을 시킨 적도 많은데, 그 직장을 그만둘 자유는 사실상 없었죠. 오래 전 일이라 그렇다 치려고 해도, 은유 작가의 책을 보면 요즘도 노동 환경이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더군요. 나중에 대학을 나와봐도 야근하는 건 똑같더라고요. 싫으면 나갈 수 있다는 게 다를 뿐… 그래도 굶어죽지 않으려면 어딘가에서 또 일을 해야 하죠.
저도 노동 시간 단축에 찬성합니다. 시장 이론에 따르면 기업과 노동자가 자유롭게 협상해서 노동 조건을 결정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지만, 현실적으로 협상력의 차이가 있고 또 다른 무슨 요인 때문이든 시장 이론대로 잘 안 맞는 것 같고, 노동조건은 사회적인 합의로 정해져야 하는 것 같아요. 저도 토요일에 출근해 본 시기가 있었는데 주5일 근무제 당시 논란이 많았지만 그 덕을 봤죠. 만약 반대 논리가 이겨서 10년 정도 제도 도입이 늦었다면 제 청춘에 여유가 훨씬 부족했겠죠. 주52시간 근무제도 효과가 느껴졌구요. 다만, 노동 시간을 늘리는 것과 노동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건 서로 다른 일인 것 같습니다. 에어컨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동 시간이 줄어들거나 작업 효율성이 떨어진다면, 그건 노동자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아요.
더운데 에어컨 없으면 저라도 일 못 하죠, 낮잠을 자겠죠! 하하 제가 생각하기로 9장에서 얘기하는 초점은 에어컨이 노동자가 일할 때 편안하게 해주고 효율을 높인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쾌적함으로 인해 어떻게 노동 시간을 늘리고 효율성을 극대화하여 자본주의에 기여하게 되었는가에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런 견해가 참 흥미로워서 8,9장 모두 재미있게 읽었답니다. 특히 8장은 철학 에세이 같기도 하고 역사, 사회학, 과학 얘기도 다 섞여있는 느낌이라 더 재밌었어요.
초기의 에어컨 산업은 불편함은 구식이고, 어쩌다 겪는 불편함이라는 낡은 생각은 진보의 흐름을 역행하는 것이며, 예전의 ‘나쁜 공기’나 ‘집단 독’처럼 불편함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근절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밀어붙였다. 그렇게 업계는 대단히 심각하고 유독한 생활수준을 안전한 것으로 인식되도록 세상을 세뇌시켰다. 편안함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를 위해 갈망하고 획득해야 하는 상품이 되었다.
일인분의 안락함 - 지구인으로 살아가는, 그 마땅하고 불편한 윤리에 관하여 163쪽, 에릭 딘 윌슨 지음, 정미진 옮김
그리고 저는 이런 시각도 마찬가지로 공감하긴 어려운데 저희 집에선 지금도 에어컨이 없어요. 그런데 이번 여름을 나면서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내년 여름이 되기 전엔 놓기로 했지요. 이런 결정을 할 때 불편함을 정의하는 문화의 영향이 크진 않았다고 봅니다. 명품 가방이나 고급 자동차 같은 경우는 문화의 영향이 클 것 같지만 냉방에 대한 수요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리적 욕구라는 측면이 큰 것 같아요. 산업 초기에는 마케팅 역할이 컸겠지만 마케팅만으로 수요가 확산된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이 대목을 저는 ‘초기 에어컨 산업계의 의도와 행위가 그랬구나, 그게 널리 잘 먹혔구나’ 하면서 읽었습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쐴 때 한번쯤 생각해 볼만한 얘기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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