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07.화성 연대기 - 레이 브래드버리

D-29
대답을 보내고 나자, 그녀는 자신이 뱉은 말을 다시 불러들이고 싶어졌다. 검열하고 재배치해서, 조금 더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신의 영혼을 보다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말은 행성들 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
화성 연대기 p.23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만약 어떤 우주적인 힘이 그 말에 불빛이 들어오게 한다면, 방울져 불타오르게 한다면, 그녀의 사랑은 열 몇 개의 행성에 빛을 밝히고 밤이 된 쪽의 지구에 때 이른 새벽을 찾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 그 말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일부가 되었다. 도착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초속 28만 9,682킬로미터의 속도로 목적지로 날아가고 있었다.
화성 연대기 p.235~236,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화성에서 들려온 소리는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는, 언제나 암흑 가운데 해가 떠 있는 밤을 통해 날아왔다. 그리고 화성과 지구 사이의 어디선가 소리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지나가는 유성우로 인한 전자기장에 휩쓸려 버렸든가, 빗발치는 은빛 유성우의 장막에 가려진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사소한 단어, 중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전부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단 하나의 단어만을 그녀에게 전달해 주었다. "……사랑……"
화성 연대기 p.236,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황야> 부분을 읽을 때 뭔가 등장인물인 재니스와 리어노라도 그렇고 이름과 문장이 익숙하다 싶어 이상하여 브래드버리 작가의 책들을 다시 찾아보니 마침 브래드버리 단편선에 이 장이 들어가 있었네요! 옮긴이도 조호근 님으로 같고요. 화성 연대기는 원래 브래드버리 작가가 단편으로 먼저 내놓았던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편집자의 제안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연대기로 다시 묶은 책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작가 단편선에도 이 작품이 들어가 있었나 봐요. 같은 내용을 다른 책에서 또 만나는 경험이 뭔가 신기했습니다 :)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스타니스와프 렘과 함께 변방의 문학으로 인식되었던 SF 문학의 위상을 주류 문학의 반열에 올린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선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열여덟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제 생각에는 다들 짐작은 하면서도 나서서 의문을 던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신의 섭리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 법이잖아요. 현실을 가질 수 없으면 꿈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진짜로 살아 돌아온 죽은 이가 아닐지는 몰라도,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존재일지도 모르니까요. 정신으로 빚어낸 이상적인 모습이니까요."
화성 연대기 p.309,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쫓기는 자와 쫓는 자들은, 꿈과 꿈꾸는 자들은, 사냥감과 사냥개들은, 그렇게 거리를 계속 달려왔다.
화성 연대기 p.3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나는 지구 사람들을 안 믿거든. 실제로 1만 대의 로켓이 10만 명의 멕시코인과 중국인을 싣고 도착한 다음에나 믿을 생각이야." "고객이라고." 그는 말꼬리를 붙들었다. "10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란 말씀이야."
화성 연대기 p.32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우리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샘은 힘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방인은 싫다고. 화성인은 싫단 말이야. 지금껏 본 적도 없고."
화성 연대기 p.32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푸른빛의 날렵한 뱃전에는 어둡고 푸른 형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 은빛 얼굴을 가진 사람들, 푸른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 섬세한 금빛 귀를 가진 사람들, 은도금한 볼과 위로 만든 입술을 가진 사람들, 그를 추격하는 사람들, 화성의 사람들이었다.
화성 연대기 p.330,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그들은 하얀 체스 말들이 늘어선 작은 도시를 지나고 있었다. 짜증 때문에, 분노 때문에, 그는 여섯 발의 총알을 수정 탑들에 명중시켰다. 도시는 고대의 유리와 부서진 수정 조각을 흩뿌리며 녹아내렸다. 마치 형상을 새긴 비누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무너졌다.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크게 웃으며 다시 총을 쐈고, 마지막 남은 탑이, 마지막 체스 말이, 그대로 불이 붙어서 타올랐다. 푸른 파편이 별까지 닿을 듯 치솟았다.
화성 연대기 p.329,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켜보는 이들>까지 읽다 보니 상황을 요약해서 알려주는 짧은 챕터 하나가 있고 이어서 구체적으로 화성에서 벌어진 일화나 사건을 보여주는 긴 챕터가 반복되는 형태로 전개되네요. 전자는 마치 화성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저 멀리 지구나 바깥 위치에서 요약하듯 내려다보는 느낌이고, 후자는 실제 화성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며 온갖 희노애락을 겪는 정착민들의 바로 옆에서 또 다른 정착민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뒤로 가면서 앞장에서 나온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감상의 포인트네요. 작가가 '연대기'라는 제목을 쓴 점에서 과학소설임에도 왠지 판타지나 전설의 분위기도 있고요. 먼저 도착했던 탐사대들의 희생, 어떻게 살아갔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알 길이 없는 화성인들의 역사, 스펜더와 와일더 대장이 마주 서서 나눈 대화, 페러그린 신부의 깨달음 등 화성에서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기록이 아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온갖 나라와 민족들 사이에서 퍼져있는 설화나 민담, 야사가 형성된 과정이 이런거겠구나 싶기도 하고요. 화성에 살아가던 모든 생명 하나하나마다 각자의 줄거리와 시간이 있지만 보다 긴 시간의 흐름으로 넘어가면 다 뒤섞여 녹아들어가 분간할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그냥 조용히 저를 받아들이시면 안 되는 거예요?" 소년이 소리쳤다. 그의 손이 얼굴을 완전히 가렸다. "절 의심하지 마세요. 제발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화성 연대기 p.299,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우리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하는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 그 정체는 무엇이며, 무슨 이유에서 외로움에 사로잡혀 외계인의 거처로 다가오는 것일까? 어째서 우리 기억 속의 목소리와 얼굴로 자신을 치장하고, 우리와 함께 거닐면서 받아들여지고 행복해지려 애쓰는 것일까? 지구에서 로켓이 도착했을 때, 이 행성의 주민들은 어디에 있었을까? 어느 산속에, 어느 동굴에, 얼마나 많은 최후의 생존자들이 살아남아 있던 것일까?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알 길이 없었다. 이 아이는 어딜 봐도 톰이었으니까.
화성 연대기 p.30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그러나 고작 하루 머무르다 사라져 버린다 해도, 텅 빈 마음을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해도, 어두운 밤을 더욱 어둑하게 만든다 해도, 비내리는 밤을 더욱 젖어들게 만든다 해도, 우리가 진심으로 갈망하던 바로 그것을 어떻게 내던질 수 있단 말인가?
화성 연대기 p.302~303,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이 집 안에는 강렬한 생각이 가득해요. 감금당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돌아갈 수가 없어요."
화성 연대기 p.308,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제 생각에는 다들 짐작은 하면서도 나서서 의문을 던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신의 섭리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 법이잖아요. 현실을 가질 수 없으면 꿈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진짜로 살아 돌아온 죽은 이가 아닐지는 몰라도,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존재일지도 모르니까요. 정신으로 빚어낸 이상적인 모습이니까요."
화성 연대기 p.309,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우주는 마취제나 다름없다. 1억 1200만 킬로미터의 우주 공간은 모든 것을 먹먹하게 만든다. 기억을 잠재우고, 지구인의 존재를 잊게 하고, 과거를 잠재우고, 이곳에서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만든다.
화성 연대기 p.340,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중간중간 나오는 아직 살아있는 화성인들과의 교류, 지구의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화성은 이제 더 이상 전과 같은 척박한 개척지가 아닌 인간들이 적응하며 살아가야 할 제2의 모성이 되어가는 모습이네요. 화성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욕망과 결핍을 찾아가는 일화들을 보며 지구에서도, 화성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이라는 감상이었습니다. 1. <화성인>에서 라파지 영감은 톰의 모습을 했던 화성인을 받아들인 선택을 끝에 가서는 후회했을까요? 여러분이 라파지 영감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내렸을 것 같나요? 2. <화성인>의 톰(화성인)은 왜 라파지 또는 인간들의 거처로 내려왔을까요? 톰(화성인)에게 어떤 과거가 있었을지 상상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보거나 상상해 보셨나요? 3. <비수기>에서 화성인들은 왜 샘 파크힐에게 자신들의 땅을 넘겨줬다고 보시나요? 샘의 결말을 보며 어떻게 느끼셨나요?
1) 저는 자식이 없어 라파지 영감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라파지 영감은 화성인을 집에 들인 걸 후회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아들이 나이를 먹지 않고 사별했을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 점에서 이미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란 걸 스스로도 알았겠죠. 하지만 그에게는 지금 일어나는 일이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돌아온 아들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다시 주어진 그 순간이 더 중요하죠. 어릴 적 기억이 하나 떠오르는게 있어요. 초등학교나 그보다 더 어렸을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매우 화가 나 저녁을 안 먹겠다고 고집을 부린 적이 있어요. 부모님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음에도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아 계속 떼를 억지로 쓰며 제 방에 틀어박혀 있었죠. 그 상황에서 고집을 더 부려봐야 나아질 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밥을 안 먹어봐야 저만 손해이고 이미 일은 다 마무리 됐으니까요. 그럼에도 그 때의 저는 일부러 더 떼를 쓰고 악착같이 화를 내서 제가 얼마나 답답하고 화났는지를 부모님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나 봐요. 전 라파지 영감의 감정을 그런 느낌으로 이해했습니다. 감정은 다르지만 그런 선택을 내린, 또는 굳이 화성인을 내치지 않은 이유를요. 아마 저도 그 상황이었다면 무섭기는 해도 같은 선택을 내렸을 것 같고요. 이성적이지 않고 비합리적인 결정이지만 사실 이 책에 나오는 지구인과 화성인들 상당수가 이런 결정과 발언들을 하는 일화가 계속 반복되죠. 지구인을 무턱대고 배척하는 화성인들, 지구에 생명이 살 리 없다고 단정짓는 화성인들, 흑인들을 깜둥이라고 멸시하며 그들이 화성으로 갈 리가 없다고 깔보던 백인, 몇 명의 정적들을 제거하고자 거금을 들여 어셔 가의 저택을 세운 스텐달, 화성을 지키겠다고 동료들을 죽인 스펜더 등. 작가는 그런 결정들이 옳고 그름의 영역보다는 문명과 지성에 반드시 수반되는 문제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책에 나오는 많은 지구인들이 선한 의도건, 이기적이거나 무지해서건 각자의 방식으로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리는 일화들이 나오죠. 그리고 화성인들도 그들 나름대로 무지하고 옳지 않은 결정을 내리는 모습들이 나왔고요.
2) 책에서는 화성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데 그래서 더 상상을 자극하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건 왜 그들이 처음에는 지구인에게 적대적이었다가 나중에는 초탈한 존재가 되었는지 입니다. 수두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몸이 바싹 타 들어가고, 그 과정에서 육체의 껍데기를 버리고 정신적인 존재로 거듭났다고 페러그린 신부에게 설명했지만 그렇게 빨리 각성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상상한 바는 화성인들의 정신 감응력이 너무 강하여 점차 몰려드는 지구인들에게 정신과 감정적으로 압도당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 초반에 보면 지구의 탐험대들이 화성에 가까워질수록 지구인들이 부르던 노래를 자신들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그들이 느끼던 감정을 공유하는 듯한 묘사들이 있죠. 지구인들과의 동화 또는 감정의 과부하를 몸과 정신이 이겨내지 못하고 수두와 비슷한 질병으로 발전한 것 같고요. 페러그린 신부가 만난 푸른 구체들은 아마도 화성인들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 않을까 상상했습니다. 다른 화성인들 중에서도 더 성숙하고, 지적이거나 포용력과 개방성이 높은 존재만이 승천하고 나머지 다수는 질병으로 쓰러지고 극히 일부만이 어딘가에 숨어 살다가 자연스럽게 소멸하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톰은 아마도 몇 안되게 살아남은 화성인 생존자일 겁니다. 가족은커녕 동족조차 찾을 수 없는 화성을 떠돌던 톰(화성인)은 비록 종족은 다를지라도 다른 지성체와의 교류, 감정적인 안정감을 찾아 헤메다 인간들의 거처로 흘러 들어왔을 테고요. 라파지 영감에게는 톰이 필요했듯 톰(화성인)에게는 부모가 필요했나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라파지 영감 못지 않게 톰(화성인)의 결말도 안타깝게 다가오더라고요. 먼저 떠나보낸 자식을 사무치게 그리워 하는 부모의 애절함, 더이상 만날 수 없는 가족과 몇 안 남은 또는 마지막 생존자로서 동족이 아니라도 좋으니 무언가 감정적으로 교류할 대상을 찾고 싶었던 외로움이 서로의 인연을 만들어냈지만 그 인연은 오래 갈 수도 없었고, 진실한 인연도 아니었으니까요. 이 뒤에 나오는 <기나긴 기다림>과 겹쳐 보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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