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07.화성 연대기 - 레이 브래드버리

D-29
"우리 아이들, 그 아이들은 미국인이 아닐 거야. 지구인도 아니겠지. 우리는 남은 일생을 화성인으로 지내게 될 거야."
화성 연대기 p.227,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지금은 세찬 바람이 그 모든 소리를 깔끔하게 쓸어 가 버린 것 같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창살문은 가죽 경첩에 매달린 채로 힘없이 열려 있었다. 고무 타이어 그네도 고요한 허공에 홀로 매달려 있었다. 강가의 빨래터 바위도 텅 비었고, 덩굴에 달린 수박도 달콤한 즙을 품은 채로 햇볕에 달아오르고 있었다. 거미들은 버려진 오두막에서 거미줄을 뽑기 시작했다. 해진 지붕에서 들어온 먼지가 갓 만든 거미집에 내려앉아 금빛으로 반짝였다. 여기저기 불길이 보였다. 마지막 순간에 서두르느라 잊고 간 불꽃이, 어질러진 오두막의 말라붙은 잔해를 먹어 치우며 갑자기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주변을 삼키며 타오르는 불길의 나직한 소리가 고요한 대기를 타고 퍼져 나갔다.
화성 연대기 p.25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고요함을 넘어 '적막함'을 참 잘 표현한 문장 같아 수집했어요. 글쓰기나 작문에 대한 글들을 보면 주제나 형식에 따라 때론 구체적으로 서술해야 하는 경우도 있고, 핵심적으로 간결하고 짧게 요약해야 하는 경우도 있죠. 그 완급을 어떻게 조절하여 분위기 전개에 잘 녹여내느냐가 글을 쓰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딱 그런 예시 같달까요. 단순히 조용했다, 적막했다라는 간단한 문장이 아닌 모든 자연과 건물과 장소마다 활기 대신 침묵이 켜켜이 쌓여가는 모습이 다 담겨있네요. 거미줄과 불길에서 특히 그 느낌이 와 닿았습니다. 누구 하나 신경쓰지 않아 모처럼만에 거미줄을 마음껏 풀어 헤치는 거미의 모습에 더해 느릿하게 거미줄에 달라붙는 먼지.. 시간이 느껴지는 문장이네요.
화성인이 지은 옛 이름은 물과 공기와 언덕의 이름이었다. 남쪽의 석조 운하를 비우고 말라붙은 바다를 채워 준 눈송이의 이름이었다. 봉인되고 파묻힌 수많은 마법사와 탑과 거석의 이름이었다.
화성 연대기 p.26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척박하고 생명을 품을 수 없는 죽은 대지지요. 이런 땅을 만드느라 제법 애썼습니다. 모든 생명을 죽였지요. DDT를 1만 톤이나 퍼부었습니다. 뱀 한 마리, 개구리 한 마리, 화성파리 한 마리 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황혼인 땅입니다, 스텐달 씨."
화성 연대기 p.266,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그 어떤 대상이라도 두려워하는 소수의 사람은 존재하게 마련이오. 그리고 다수를 차지하는 훨씬 많은 사람들은 어둠을, 미래를, 과거를, 현재를, 자기 자신과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화성 연대기 p.267,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그렇소! 저들은 모든 인간은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고 말했소. 이 땅의 현실을 직면해야 한다고! 따라서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조리 사라져야 한다고 말이오."
화성 연대기 p.268,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그래, 당신네 윤리사조국 사람들도 마침내 화성에 도착한 모양이지? 당신네가 언제쯤 등장할지 궁금해하던 참이라오." "지난주에 도착했지. 머지않아 이곳도 지구처럼 정결하고 깔끔하게 만들 생각이야."
화성 연대기 p.270,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그렇게 될 것이다. 밖으로 나가, 별들을 향해 날아가며, 밤 속에서, 거대하고 끔찍하고 칠흑 같은 옷장 속에서, 누구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면서. 유성우와 신의 손길이 닿지 않는 혜성들 속으로 영원히 떨어지게 될 것이다. 승강기의 통로 아래로. 공허뿐인 악몽의 갱도 아래로.
화성 연대기 p.225~226,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대답을 보내고 나자, 그녀는 자신이 뱉은 말을 다시 불러들이고 싶어졌다. 검열하고 재배치해서, 조금 더 아름다운 문장으로, 자신의 영혼을 보다 충실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그녀의 말은 행성들 사이를 날아가고 있었다.
화성 연대기 p.23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만약 어떤 우주적인 힘이 그 말에 불빛이 들어오게 한다면, 방울져 불타오르게 한다면, 그녀의 사랑은 열 몇 개의 행성에 빛을 밝히고 밤이 된 쪽의 지구에 때 이른 새벽을 찾아오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제 그 말은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라 우주의 일부가 되었다. 도착할 때까지는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초속 28만 9,682킬로미터의 속도로 목적지로 날아가고 있었다.
화성 연대기 p.235~236,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화성에서 들려온 소리는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는, 언제나 암흑 가운데 해가 떠 있는 밤을 통해 날아왔다. 그리고 화성과 지구 사이의 어디선가 소리의 대부분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지나가는 유성우로 인한 전자기장에 휩쓸려 버렸든가, 빗발치는 은빛 유성우의 장막에 가려진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사소한 단어, 중요하지 않은 단어들은 전부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는 단 하나의 단어만을 그녀에게 전달해 주었다. "……사랑……"
화성 연대기 p.236,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황야> 부분을 읽을 때 뭔가 등장인물인 재니스와 리어노라도 그렇고 이름과 문장이 익숙하다 싶어 이상하여 브래드버리 작가의 책들을 다시 찾아보니 마침 브래드버리 단편선에 이 장이 들어가 있었네요! 옮긴이도 조호근 님으로 같고요. 화성 연대기는 원래 브래드버리 작가가 단편으로 먼저 내놓았던 개별적인 이야기들을 편집자의 제안으로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연대기로 다시 묶은 책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작가 단편선에도 이 작품이 들어가 있었나 봐요. 같은 내용을 다른 책에서 또 만나는 경험이 뭔가 신기했습니다 :)
레이 브래드버리 - 태양의 황금 사과 외 31편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클라크, 로버트 하인라인, 스타니스와프 렘과 함께 변방의 문학으로 인식되었던 SF 문학의 위상을 주류 문학의 반열에 올린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단편선이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열여덟 번째 권으로 출간되었다.
"제 생각에는 다들 짐작은 하면서도 나서서 의문을 던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신의 섭리에는 의문을 품지 않는 법이잖아요. 현실을 가질 수 없으면 꿈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진짜로 살아 돌아온 죽은 이가 아닐지는 몰라도, 어떻게 보면 더 나은 존재일지도 모르니까요. 정신으로 빚어낸 이상적인 모습이니까요."
화성 연대기 p.309,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쫓기는 자와 쫓는 자들은, 꿈과 꿈꾸는 자들은, 사냥감과 사냥개들은, 그렇게 거리를 계속 달려왔다.
화성 연대기 p.3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나는 지구 사람들을 안 믿거든. 실제로 1만 대의 로켓이 10만 명의 멕시코인과 중국인을 싣고 도착한 다음에나 믿을 생각이야." "고객이라고." 그는 말꼬리를 붙들었다. "10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란 말씀이야."
화성 연대기 p.321,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우리는 당신을 해칠 생각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아니거든!" 샘은 힘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이방인은 싫다고. 화성인은 싫단 말이야. 지금껏 본 적도 없고."
화성 연대기 p.32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푸른빛의 날렵한 뱃전에는 어둡고 푸른 형상들이 늘어서 있었다. 가면을 쓴 사람들, 은빛 얼굴을 가진 사람들, 푸른 별처럼 반짝이는 눈을 가진 사람들, 섬세한 금빛 귀를 가진 사람들, 은도금한 볼과 위로 만든 입술을 가진 사람들, 그를 추격하는 사람들, 화성의 사람들이었다.
화성 연대기 p.330,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그들은 하얀 체스 말들이 늘어선 작은 도시를 지나고 있었다. 짜증 때문에, 분노 때문에, 그는 여섯 발의 총알을 수정 탑들에 명중시켰다. 도시는 고대의 유리와 부서진 수정 조각을 흩뿌리며 녹아내렸다. 마치 형상을 새긴 비누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지며 무너졌다.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크게 웃으며 다시 총을 쐈고, 마지막 남은 탑이, 마지막 체스 말이, 그대로 불이 붙어서 타올랐다. 푸른 파편이 별까지 닿을 듯 치솟았다.
화성 연대기 p.329,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처음에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지켜보는 이들>까지 읽다 보니 상황을 요약해서 알려주는 짧은 챕터 하나가 있고 이어서 구체적으로 화성에서 벌어진 일화나 사건을 보여주는 긴 챕터가 반복되는 형태로 전개되네요. 전자는 마치 화성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저 멀리 지구나 바깥 위치에서 요약하듯 내려다보는 느낌이고, 후자는 실제 화성에서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며 온갖 희노애락을 겪는 정착민들의 바로 옆에서 또 다른 정착민의 입장에서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뒤로 가면서 앞장에서 나온 인물들이 다시 등장하는 것도 감상의 포인트네요. 작가가 '연대기'라는 제목을 쓴 점에서 과학소설임에도 왠지 판타지나 전설의 분위기도 있고요. 먼저 도착했던 탐사대들의 희생, 어떻게 살아갔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알 길이 없는 화성인들의 역사, 스펜더와 와일더 대장이 마주 서서 나눈 대화, 페러그린 신부의 깨달음 등 화성에서 일어났던 무수히 많은 사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기록이 아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온갖 나라와 민족들 사이에서 퍼져있는 설화나 민담, 야사가 형성된 과정이 이런거겠구나 싶기도 하고요. 화성에 살아가던 모든 생명 하나하나마다 각자의 줄거리와 시간이 있지만 보다 긴 시간의 흐름으로 넘어가면 다 뒤섞여 녹아들어가 분간할 수 없는 과거가 되어버린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요.
작성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
[책나눔 이벤트] 지금 모집중!
[도서 증정] 《아버지를 구독해주세요》마케터와 함께 자유롭게 읽어요~! [도서 증정] 우리의 일상을 응원하다 이송현 작가 신작《제법 괜찮은 오늘》 함께 읽어요!
💡독서모임에 관심있는 출판사들을 위한 안내
출판사 협업 문의 관련 안내
그믐 새내기를 위한 가이드
그믐에 처음 오셨나요?[메뉴]를 알려드릴게요. [그믐레터]로 그믐 소식 받으세요
<코스모스> 읽고 미국 현지 NASA 탐방가요!
[인생 과학책] '코스모스'를 완독할 수 있을까?
죽음에 관해 생각합니다
[책 나눔] 송강원 에세이 <수월한 농담> 혼자 펼치기 어렵다면 함께 읽어요! [그믐북클럽Xsam]18. <어떻게 죽을 것인가> 읽고 답해요 죽음을 사색하는 책 읽기 1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
[도서 선물] <알고리즘 포비아> 현 인류에게 꼭 필요한 질문, 편집자와 함께 답해요🤖[지식의숲/책 증정] 《거짓 공감》, 캔슬 컬처에서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서
노벨문학상이 궁금하다면?
[밀리의 서재로 📙 읽기] 31. 사탄탱고[책 증정]2020 노벨문학상, 루이즈 글릭 대표작 <야생 붓꽃>을 함께 읽어요. 노벨문학상 한강 작가 작품 읽기
삶의 길을 밝히고 미래를 전망하는 한겨레 출판
[한겨레출판/책 증정] 《쓰는 몸으로 살기》 함께 읽으며 쓰는 몸 만들기! 💪[문풍북클럽] 뒷BOOK읽기(?) : 11월의 책 <말뚝들>, 김홍, 한겨레출판올해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멜라닌>을 읽어보아요[📚수북플러스] 3. 깊은숨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책 증정]내일의 문학을 가장 빠르게 만나는 방법! <셋셋 2024> 출간 기념 독서 모임
책 추천하는 그믐밤
[그믐밤] 41. 2026년, '웰다잉' 프로젝트 책을 함께 추천해요.[그믐밤] 39. 추석 연휴 동안 읽을 책, 읽어야 할 책 이야기해요. [그믐밤] 27. 2025년은 그림책의 해, 그림책 추천하고 이야기해요.
📝 느리게 천천히 책을 읽는 방법, 필사
[책증정] 더 완벽한 하루를 만드는『DAY&NIGHT 50일 영어 필사』함께 읽고 써요필사와 함께 하는 조지 오웰 읽기혹시 필사 좋아하세요?영어 필사 100일의 기적 / 모임이 100일동안 이루어지지는 못하겠지만 도전해봅니다.[책증정]《내 삶에 찾아온 역사 속 한 문장 필사노트 독립운동가편》저자, 편집자와 合讀하기
베오의 <마담 보바리>
절제는 감정의 부재가 아니라 투명함을 위한 것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Lego Ergo Sum 플로베르의 스타일에 관한 인용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에 나타난 보바리즘의 개념과 구현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수학은 나와 상관없다?! 🔢
[김영사/책증정]수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다《세상은 아름다운 난제로 가득하다》함께 읽기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마저 풀어요.[그믐북클럽] 8. <미래에서 온 남자 폰 노이만> 읽고 알아가요
모집중밤하늘
내 블로그
내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