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첫사랑을 제가 더 많이 좋아해서 굽실굽실 했었지요! (비굴) (고백도 제가 먼저) 하하하 애인이랑 시와 음악을 꽁냥꽁냥 나누던 짓거리는 그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네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6. <조지 오웰 뒤에서>
D-29

향팔

stella15
짓거리라니?ㅋㅋㅋ 원래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낮아진다잖아요. 뭐 그런거 가지고 비굴까지. 전 편지에 집착이 있는데 나만 열나 보냈지 상대는 꿈쩍도. (나쁜 시키!) 저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 다 과정이죠 뭐.ㅎㅎㅎ

YG
지젤 사피로는 프랑스의 유명한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제자입니다. 사피로 자신이 부르디외 이론을 지도 삼아서 문화와 예술을 소재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부르디외 이론을 접할 수 있는 좋은 책으로는 또 다른 제자 로익 바캉이 스승을 인터뷰한 내용이 실린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그린비)를 추천합니다.)
사피로는 이 책에서 부르디외의 이론을 바탕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를 놓고서 자기 생각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와 서유럽의 맥락이 있기에 등장하는 작가나 작품이 한국 독자에게 낯설 수도 있습니다. 다만,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 노벨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와 페터 한트케 등은 한국 독자에게도 익숙한 인물이죠.
관심사에 따라서는 유명한 문학 이론가로 꼽히는 모리스 블랑쇼, 폴 드 만,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 같은 이름이 눈에 띌 수도 있고요. 사피로는 이들을 사례 삼아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지, 또 이 질문에 답할 때 우리가 어떤 점을 세심하게 따지고 고려해야 하는지를 놓고서 자기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성찰적 사회학으로의 초대 - 부르디외 사유의 지평현대 사회학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인 피에르 부르디외의 방대한 학문 세계를 집대성한 책. 제자인 로익 바캉이 질문을 던지고 부르디외가 답하는 인터뷰(2부)가 중심을 이루고, 바캉이 쓴 부르디외 사회학 개관(1부)과 학문하는 자세에 관해 부르디외가 학생들에게 행한 강연(3부)이 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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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분량은 짧지만 아주 복잡한 여러 쟁점을 다루고 있어서 한 줄로 사피로의 생각을 요약하기는 쉽지 않아요. 사실, 사피로는 이 질문을 놓고서 ‘예, 아니오’ 같은 긍정과 부정의 답변이 곧바로 나오는 반응 자체를 거부합니다. 각각의 사례마다 맥락을 따져야 하고, 필요하다면 공론화해서 토론하는 일이 필수라고 주장하죠.
하지만, 기왕 얘기를 꺼냈으니 제 식으로 거칠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사피로는 기본적으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심지어 난센스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기에 작품이 작가나 혹은 그 작가가 살았고 작품이 등장했던 시대(사회)와 무관한 ‘신의 선물’과 같다는 식의 접근 방법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가 ‘사회학자’라는 사실에 주목하세요!)
이 대목에서 사피로가 던지는 질문의 맥락에서 개인적으로 고민해 본 흥미로운 질문도 한 가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가는 작품의 성공으로 명성을 얻고 운이 좋다면 부도 쌓습니다. 그 작가의 수많은 작품은 그의 재능과 노력의 결과물로 받아들여지죠. 이때는 아무도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아요.
하지만, 작가가 문제가 될 때는 어김없이 작가와 작품은 분리해야 한다, 이런 반문이 나오죠. 그렇다면, 그 전에 작가와 작품이 동일시될 때 작품의 성공으로 작가가 쌓은 명성과 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작품은 ‘신의 선물’이니 그 작가에게 보상이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사피로는 작가와 작품의 관계가 이렇게 아주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지적합니다.

롱기누스
아. 이 주제가 이렇게 빨리 다뤄지는 군요. 벌써부터 방이 후끈 합니다. 참 쉽지 않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작가와 작품의 분리.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작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음에도 좋았했던 작품을 작가의 개인적인 비위로 인해 폄훼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어 어떤 노래를 듣고 작곡가나 작사가 또는 가수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너무 좋아하게 된거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수가 개인적으로 너무 문란한 사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그 노래를 싫어하게 될 이유가 충분한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드네요... 때로는 비슷한 탈선을 한 연예인도 선택적으로 호오가 갈리는 경우도 있지 않나요? 연기를 진짜 잘해서 용서가 되는 누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누구도 있는 것 같아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적어봤습니다.

YG
@롱기누스 저는 음악에는 문외한이라서, 예술가(작곡가, 작사가, 연주자 그리고 가수 등)의 사유 (또 그것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는 삶)이 음악을 통해서 독자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철학 문학 영화 같은 작품의 영향은 결이 다를 것도 같고. 이건 음악을 포함해 두루 아시는 분들이 한번 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롱기누스 님, 이번 달에도 환영합니다. (참, 모종의 프로젝트는 잘 진행 중이신가요?)

롱기누스
네. 말씀대로 같은 예술이라 하더라도, 철학, 문학과 음악이나 미술의 영역은 또 다르지 싶습니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이리 지리하게도 논쟁이 지속되나 싶구요. 모종의 프로젝트는... 샘플을 요청하셔서 지난 주 금요일 보냈는데 아직 응답이 없어요. 템포가 느리나 보다.. 하고 기다리고는 있습니다. ^^* 바쁘신 가운데서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YG
@롱기누스 모종의 프로젝트 잘 되면 좋겠습니다. (혹시 그곳과 최종적으로 틀어지면 다시 얘기해 주세요!) 응원합니다.

롱기누스
@YG 넵. 응원 감사합니다. 진행 여부 결정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

향팔
@롱기누스 저도 그저 개인의 ‘사생활’만 가지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가령 외도를 했다거나, 애인이 여러 명이라거나 하는 이유로요. (예를 들어 홍상수 씨랑 김민희 씨가 부적절한 관계라고 해서 팬심을 철회하거나 작품을 보이콧 할 거까지 있나? 하는 생각입니다.) 살면서 바람 피우는 사람들을 참 자주 보기도 했고 겪기도 했고 그래서 그런거 일일이 다 거르면 남을 인간이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하하! 근데, 사생활의 문제가 아닌 ‘공공성’을 띤 문제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겠지요. 하지만 또 어디까지가 사적인 문제이고 어디부터가 공적인 문제인지 헷갈리는 경우 도 많아요. 진짜 케바케인 것 같아요. 말씀대로 참 어렵습니다.
밥심
이렇게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이 만드는 영화에서 결혼생활의 충실함을 예찬해왔다면 그와 일치되지 않는 사생활이 문제가 되겠지만 사실 그의 영화가 그렇진 않았잖아요. 그래서인지 전 그와 그의 작품이 분리되어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조지 오웰이 그가 쓴 수 많은 글에서 당시 가부장제의 위선과 불합리함을 공격하고 여성 인권 존중에 대해 주장했다면 아일린을 대했던 그의 태도을 알게 되었을 때 엄청난 실망감과 분노까지 느끼겠지만, 그게 아니었다면 원래 그런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로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연해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라는 주제로 여러 이야기가 오간 걸 주말에 찬찬히 읽었는데요. 밥심님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저는 오랫동안 존경했던 혹은 좋아했던 예술가(나 지식인 등)에게 실망하게 되는 지점이 이 지점이 아닐까 싶거든요. 본인이 그토록 주장하던 삶의 진리와 실제 살아온 삶이 전혀 다른 경우의 괴리감이랄까. 이때는 실망을 넘어 배신감이 생기기 때문에...
예를 들어 '세상에서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 말하던 사람이 알고 봤더니 가정에서 폭력을 행사하거나 배우자와 자녀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걸 알게 되면 '아니, 어떻게 저럴 수가!'라고 생각하겠지만 애초에 그런 부분(가족은 소중하다)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는 것 같... 기는커녕 그냥 사람이 별로다 싶네요. 에휴, 여전히 어려워요.

롱기누스
그죠... 내 좋아했던 작품인데 갑자기 그 사람의 사 생활로 인해 그 작품까지 싫어진다면, 그걸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요. 그 작품을 좋아한 것인가? 그 사람을 좋아한 것인가? 내가 진짜 좋아한 것은 무엇이지? 작품을 작가의 창작물이고 그 창작물은 작가의 철학과 사상이 반영된 것이라면 그것을 온전하게 분리할 수 있는지. 분리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가 작품을 잘못 이해한 것인지(처음에 좋아졌다가 후에 싫어지는 경우).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지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YG
@롱기누스 많은 독자가 그 둘을 사실 구분하지 않고 있죠. 예를 들어, 오랫동안 팟 캐스트 진행하면서 다양한 반응을 보곤 하는데. 특히 흥미로운(?) 반응은 작품이 좋다고 작가에게도 아주 강한 애 착을 느끼는 모습이었어요. 사실, 그 청취자는 그 작가와는 일면식도 없거나 있더라도 북 토크 콘서트 같은 행사에서 사회 자아를 본 게 다일 텐데 말이죠.
가끔, 제가 작가와 이메일도 몇 차례 주고받고 심지어 술자리도 같이 한 적이 있는 경우에도 그래요. 그런 저에게도 '네가 그 작가에 대해서 뭘 알기에 이렇게 얘기해?' 같은 반응을 자주 보곤 해요. 그럴 때마다 아,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구나. 이런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독자가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는 데에 공을 들이는 경우는 그 작가에게 변명하지 못할 추문이 생기는 때인 것 같아요. 이런 역설을 앞에서 언급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이음)에서 집요하게 따져 묻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부르디외의 사회학 개념을 토대로 쓴 일종의 예술 사회학 연구서이기도 해서 읽을 때 공을 많이 들여야 합니다. 혹시 손에 들었다가 당혹스러우실 듯해서.

롱기누스
@YG 독자들이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는데 애쓰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하신 기준에 대해 공감합니다. 일반적으로 작가들의 추문이 자신의 정체성 또는 철학과 불일치 할 경우 자신의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하는 것 같더라구요...

새벽서가
저도 최대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서 보려고 하는데, 사생활이 어느정도의 혐오감을 주는지, 그게 한 번의 실수인지 지속적인 행동인지에 따라서도 제가 가지는 느낌이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 라지는거 같아요

YG
그렇다면, 작품이 문제가 될 때마다 그 작품과 그것의 창작자인 작가를 문학사에서 지워버리는 방향은 어떨까요? 사피로는 이런 접근에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과거의 작품 가운데는 여성을 비하하고, 장애인을 비하하고,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을 언급하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런 폭력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 작품에서 그런 표현을 순화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과할 때는 아예 작품이나 작가를 문학사에서 지워버리려는 대응이 있을 수 있죠. 사피로는 그런 시도야말로 그 작품의 폭력성을 은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고 지적합니다. 대신, 그는 해당 작품의 그런 요소를 적극적으로 분석하고 폭로해서 드러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죠.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가 실제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제3제국과 나치의 이념에 동조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검열하고 삭제해서 그의 철학과의 접속을 ‘취소’해야 할까요? 사피로는 그런 하이데거의 개인사가 그의 철학에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는 일이야말로 훨씬 생산적이고 필요한 일이라고 여깁니다.

YG
물론, 저자도 선을 긋는 대목이 있습니다. 증거가 명백한 노골적인 성폭력을 저지른 작가의 작품에 상을 주는 일은 어떨까요?
사회학적으로 예술 영역(부르디외의 용어로는 ‘예술 장’)을 분석하는 연구자로서 저자는 그 영역이 지탱하도록 돕는 제도적 행위자(에이전트, 편집자, 출판사, 제작자, 박물관과 시상식 관계자 등)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그런 어 처구니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런 제도적 행위자가 훨씬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떻습니까? 물론, 이런 사피로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저는 글머리에 언급한 그 작가의 책은 읽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그 일을 폭로하고 싶습니다. 어떤 눈 밝은 독자는 분명히 그 밑바닥의 실체가 그의 작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세심하게 살필 테니까요.
밥심
젊었을 때 거의 모든 작품을 재밌게 읽었던 이문열 작가, 매년 발표되는 평론가들이 뽑는 우수 국내영화에 항상 작품을 탑랭크에 올려놓는 홍상수 감독. 저의 경우는 이 두 분이 생각나네요. 각기 다른 이유로 지금은 많은 비난을 받고 있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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