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문장 읽고 벅차올라서 책 잠시 덮었다가 다시 한 문장 읽고를 반복하는 중입니다. 이 글이 17세기에 쓰여진 것에 대해 감탄을 해야할 지, 21세기에도 여전히 똑같다는 사실에 분노를 해야할 지 잘 모르겠지만 문장 문장 마다 박수를 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최고에요.
[도서 증정]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함께 읽기
D-29
슈북슈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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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남자들보다 훨씬 더 많은 괴로움을 견디며 살아가 기에, 나는 여자들에게서 '흔들리지 않는 근성'을 배제할 타당한 근거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29p,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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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아이
“ 토마스 아퀴나스는 힘이란 선善을 지향하며 이성에 부응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습관이라고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정념과 잡념의 농간에 맞서 올곧은 태도를 유지할 때 정신은 그만큼 강해진다. ”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64,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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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의아이
“ 내가 생각하는 강한 힘은 자연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자질에 속한다'.-사람이 진중하려면 정신이 안정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하며, 강함 또한 한곳에 굳것히 자리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한 인간이 큰일을 이루려면 근원적인 품성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 ”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66~67,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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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는
“탄탄한 논리와 신빙성있는 인용에 근거한 나의 논지를 반박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라는 쉬숑의 멘트가 도입부부터 인상적입니다. 그 시절 분위기에 굴하지 않고 자신감을 드러낸 것은 진리에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책 한장한장 기대하며 넘기고 있습니다!
슈북슈북
💬 대담한 주장 혹은 반박을 거침없이 해나가면서도 그 속에 뭔가를 잡아 비트는 듯한 위트와 사르카즘이 있어 여성 독자의 입장에서는 "그래!!! 바로 내가 말하고 싶던 바로 그거야!"하는 통쾌함을 주는 것 같아요. 바꿔 생각해보면, 남성 독자의 입장에서는 꽤나 거슬리는 말들이 적혀 있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요 지점이 제일 인상적이었어요. 가브리엘 쉬숑은 여성을 독자로 한정하여 적은 것 처럼 어떤 눈치도 보지 않는 느낌으로 읽혀서요. 혹시나 남성이 이 책을 읽게 되더라도 어디 반박해볼테면 반박해보라는 식으로 그들의 논리를 깨부숴버리구요. 어떻게 보면 여성에 대한 일종의 계몽서 같달까..?
그리고 또 재미있는 부분은,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루이 14세가 재위하던 기간으로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했던 시절이었을텐데 '성경'을 논거로 여성을 낮춰 말하는 부분들을 도리어 '가톨릭'적인 시점으로도 조목조목 반박하는 점이었어요. 아예 서론부터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여성은 뱀의 유혹에 넘어간 원죄를 갖고 있다는 논리를 들이대며 인류의 기원부터 여성은 나약했다는 그들의 논리를 거꾸로 뒤집는 부분에서는 정말 속이 시원하더라구요.
내일부터는 3장과 4장을 읽게 될텐데, 가벼움과 의지에 대해서 가브리엘 쉬숑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벌써 궁금해지네요 :)

아를
너무 정확하게 보신 게, 쉬숑이 수녀 서원 파기 청원을 통해 속인이 되기는 했어도 생의 대부분을 교회에서 보냈고 당대 가톨릭 교리의 자장에서도 자유롭지 못했을 거거든요. 이 책에서도 계속해서 그런 흔적이 발견되곤 하는데요, 성경 내용이나 교회를 비판한다기보다는 성경을 남성 중심적으로 해석하는 관점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곤 합니다. 즉, "성경은 실제로 그렇지 않은데, 너희는 왜 너희 입맛에 맞게 해석하고 규율화하는 거니?"라며 되묻는 듯한...
지혜
우리가 여성에게 전가하는 나약한 기질이란 여성의 신체나 정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편견에 내재하는 본질일 가능성이 크다.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52쪽,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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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
요새 마감하느라 며칠 못 들어왔더니, 이렇게나 많은 글들이... 또 발췌해주신 문장들도 너무 좋고...ㅠㅠㅠㅠㅠ 너무 감동입니다. 책도 모두 잘 받으신 것 같아 기쁘고, 많은 분들이 열심히 참여해주셔서 행복하네요!!

아를
참고할 만한 읽기 자료로 에딘버러대학에서 프랑스어와 프랑스 문화를 가르치는 베로니크 데넹 교수의 [가브리엘 쉬숑: 위험한 철학자]라는 글의 일부 대목을 공유합니다. 책 만들면서 찾아 읽었던 글이었어요.
...
쉬숑은 자신의 작업이 여성들이 평등을 요구하도록 격려하기를 바라면서 글을 썼기 때문에 위험했다. 쉬숑과 그녀보다 앞선 여성 작가들 사이에 존재하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은 그녀가 어느 성의 우월성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그녀는 다르지만 평등한 입장에 의존하며 각 개인은 성별이 아닌 능력에 따라 대우받아야 한다고 논증했다. 그녀는 여성의 예속이 자연적 질서가 아닌 사회적, 정치적 질서의 일부라고 논증한다. 이 개념은 남성 헤게모니에 대한 위협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아마도 쉬숑의 작업이 그녀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 거의 반향을 얻지 못한 까닭은 바로 그 독창성 때문일 것이다. 엘사 도를랭(Elsa Dorlin, 프랑스의 페미니즘 철학자)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남녀 간의 자연적 불평등을 이론화하는 텍스트만이 공개되고 논평된다. 오직 그것들만이 참된 것으로 여겨지고 가르쳐진다. 따라서 논의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논증의 상대적 가치나 과학적 엄밀성이 아니라 특정한 지식과 권력 질서와의 관계에서 그것들의 위치이다."
실제로 여러 특징들이 쉬숑의 작업을 이전에 나온 것들과 명확히 구별한다. '여성 논쟁'에 참여한 남성 작가들과 달리 쉬숑은 자신의 수사학적 기법을 과시하기보다 주제에 더 관심을 두었으며, 여성을 비방하는 사람들과 옹호하는 사람들 모두가 가진 본질주의적 견해를 일축한다. 크리스틴 드 피장과 달리 그녀는 여성을 아내와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선택하는 어떤 소명에도 헌신할 수 있는 자율적 개인으로서 다룬다. 마리 드 구르네와 달리 그녀는 주로 교육받은 남성 독자들에게 말하지 않고 자신의 의도된 청중이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매우 명확히 한다. 이 모든 면에서 그녀의 작업은 앞선 이들의 것보다 훨씬 더 명시적으로 전복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실용적 문제들에 대한 그녀의 조언은 남성 우월주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라는 격려로 읽힐 수 있었다.
내용을 차치하고라도 쉬숑의 글쓰기는 그 존재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는 문학, 철학, 과학, 그리고 일반적으로 예술이 압도적으로 남성의 영역이었다고 들어왔다. 단순히 여성들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생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이에 대한 명백한 대답은 그러한 실천에 대한 여성의 접근이 최근까지 제한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재능의 부족이 아니라 교육의 부족과 그들의 길에 놓인 실용적 장애물들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는 문학, 철학, 과학의 역사에서 여성들의 '인식된 부재'에 훨씬 더 교묘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꽤 설득력 있게 입증했다. 즉 그들이 거기 있었을 때조차 우리는 그들에 대해 듣지 못했다. 그들은 역사의 담론에서 주변화됐다. 그들은 역사 자체에서 지워졌다.
그렇다면 글쓰기는, 소설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설명하는 어떤 형태의 글쓰기든, 여성에게는 '말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형태와 영향을 주는 힘, 과거를 이해할 뿐 아니라 현재를 정당화하면서 자신을 미래로 투사하는 힘, 뒤따라올 사람들을 위한 선구자를 창조하고 패턴을 확립하며 자신에 대한 지식에 상응하는 적절한 이름과 이미지를 발명하고, 이 이름과 이미지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신호등으로 남겨두는 힘'이 된다. 실제로 쉬숑의 전체 프로젝트는 그녀가 의식적으로 후계자들을 위해 남겨둔 '신호등'으로 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시대에 변화를 보리라는 희망이 거의 없었지만, 미래의 사회적 변화를 예상한 것 같다: "내 시대의 여성들은 결코 남성들로부터 그들의 힘과 권위를 빼앗으려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아마도 잠재적 남성 독자에게는 안심이 되겠지만, 제한적으로 쓰인 "내 시대에는"이라는 표현은 그녀가 다른 사람들이 미래에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희망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일단 여기까지 발췌합니다. 다른 부분들도 곧 공유할게요~
Hwihwi
그의 영향을 받은 보부아르의 《제2의 성》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남성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끊 임없이 여성을 혐오하거나 혐오하도록 하는 지난한 역사를 여러 분야에 걸쳐 증명하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지혜
쉬숑이 "신호등"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매우 적절한 은유라는 생각이 듭니다.
Hwihwi
전문을 다 읽고 싶네요. @.@

아를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발췌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

아를
앞서 소개한 [가브리엘 쉬숑: 위험한 철학자]의 뒷부분을 마저 올립니다. 쉬숑 깊이 읽기에 도움이 되시길.
...
쉬숑의 저작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전복적인 측면 중 하나는 억압의 메커니즘과 이론적 담론의 배후에 있는 실천적 문제들을 규명한다는 점이다. 그녀의 방법론과 논증은 모든 형태의 억압을 검토하는 데 최적화되어 있으며, 그녀의 저작이 갖는 함의는 처음 읽을 때보다 훨씬 급진적일 수 있다. 실제로 검열을 피하기 위해 정통 교리 내에 머물러야 할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특히 그녀의 논증이 종교적 텍스트에서 그 근원을 찾을 때) 주의 깊은 독자는 곧 "그녀의 몇몇 공격적 진술들에 의해 드러나며, 그녀가 파괴적이고 위험한 사상들에 대한 암시를 통해 언급하는, 훨씬 더 매혹적인 측면이 행간에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의 동시대인들이 그러한 "위험한 생각들"을 무시하는 것을 선호했을 수도 있지만, 현대 철학이나 페미니즘 역사에서 그녀가 부재한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아일린 오닐(Eileen O'Neill, 아일랜드 태생의 철학자)은 철학사에서 여성의 "소멸"에 대한 여러 이유를 제시하는데, 이는 쉬숑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철학의 정화'라고 부른 이유 중 하나가 있다. 여성의 저작물 대부분은 한편으로는 신앙과 계시와 같은 주제들을,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본성과 사회에서의 역할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다. 그러나 18세기 말은 종교적 관심에 의해 동기화된 철학을 순수 철학에서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현대 비평가들이 여전히 여러 면에서 철학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관심사들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가정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쉬숑의 여성 옹호는 신앙의 문제들과 인간과 신적인 것의 구별, 소명의 본성, 그리고 하느님과 피조물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신학적 논의와 깊이 얽혀 있다. 저자의 성별이 많은 남성 비평가들로 하여금 그녀의 작업을 무시하게 만드는 충분한 이유였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저작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성격은 때때로 페미니스트들에게 실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쉬숑이 자신의 기획에서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는 것은 그녀 시대의 맥락 속에서 예상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녀의 텍스트가 지닌 전복적 잠재력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켜서는 안 되는 유용한 수사학적 전략이다. 교회가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의 중심인 사회에서 자라 수도원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후(그녀는 십 대에 수도회에 들어가도록 강요되었고 사십 대에 마침내 서원에서 해제되었다), 종교를 삶의 필수적 부분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녀가 여성 옹호의 초석으로서 진정한 신앙과 그것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억압적 제도들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그녀의 신학적 입장은 여성을 비방하는 자들과 같은 영역에서 작동하는 논리적 논증을 구성할 수 있게 한다. 그녀는 자신이 공격하고 있는 논증을 주장하는 자들이 유효한 것으로 인정한 권위들을 해석하고 그것을 다시 논증[반론]의 기초로 삼는다. 그들 자신의 준거 틀 내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그녀로 하여금 그들의 논증에 내재한 결함과 오류를 폭로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종교 개혁의 여파, 가톨릭 교회가 그들의 통제권을 재확립하려는 시도 속에서 쉬숑 같은 여성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고 자신의 영적 필요에 따라 그것을 실천할 수단을 요구해야 할 더 큰 필요성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것이 교리 측면에서는 명백할 수 있지만, 종교 제도의 남성 중심적 성격은 여성들이 오랫동안 방정식에서 제외되었음을 의미한다. 쉬숑은 여성의 열등성을 관습으로 축소시키고 이를 소명과 대조시킨다. 따라서 그녀의 여성 옹호는 세속적인 것과 신적인 것, 역사적 특수성과 신적 목적의 불변성 사이의 대립에 기초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쉬숑의 종교적 언급을 단순히 수사학적인 것으로 보거나 젠더에 관한 급진적 사상을 흐리게 만드는 것으로, 또는 실제로 그러한 사상들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은 역사적 상황을 무시하고 그녀의 작업에 시대착오적 사고 틀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것은 또한 상당한 정도로 여성 영성을 남성 영성의 단순한 부속물로 설정하고, 여성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제도의 수동적 추종자가 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교리와 영적 실천에 대해 입장을 취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인들로 인해 쉬숑의 유산이 300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제 우리는 그녀를 재발견할 때가 되었다. 우리는 이 여성이 여전히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Hwihwi
나약함이란 인류 전체의 타고난 성질이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세상이 남성보다 여성에게 이를 더 특별하게 적용하는지,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p.39,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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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ihwi
'나약한 남성'으로 낙인 찍히기 싫어, 허세를 부리는 남성들도 많이 봤습니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나약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리면, 서로 기대고 도울 수 있을텐데... 굳이 개기는 건지 잘 모르겠다. 인생을 피곤하고 힘들게 사는 느낌.
Hwihwi
자연은 조금이라도 더 완벽에 가까운 형질을 골라 생산 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남성을 세상에 낳되, 그게 여의찮을 경우 여자를 세상에 낳는 것이 자연의 속성이라고 말한다.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p.42,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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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ihwi
이런 해석을 기독교 계열의 종교에서 정말 많이 들었다. 큰 일은 남성 목사가 하고 교회의 잡다한 대부분의 일은 여성 신도에게 돌아간다. 하나님 눈에 더 완벽한 남성에게 잡다한 그러나 실질적으로 교회가 운영되는 데 큰 몫을 하는 여성의 노동은 할 필요가 없는 일이 된다.
Hwihwi
특히 장기간에 걸쳐 힘든 일을 해내면서 역경을 헤쳐나가는 근성으로 보자면, 여성의 능력과 자질이 남성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여성은 나약하고 가볍고 변덕스럽다는 속설에 대한 반론』 p.48, 가브리엘 쉬숑 지음, 성귀수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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