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버둥 치다는 띄어 써야 한다.
나에게만 보이는 살인
D-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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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도시락을 먹고 자판기가 발달한 것은 개인주의가 팽배해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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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데 행복한 가정을 골라 아예 몰살해 평형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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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설은 거의 전부 살인이 나온다. 인간의 잔인성과 파괴 본능을 그대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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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왜 여자들이 그렇게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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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있는 것 잘 활용하는 게
내가 보기에 불안이나 질투, 공포 같은 부정적 감정이
괜히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다.
인간 진화 과정에서 필요하니까 만들어진 것 같다.
보면 그냥 생긴 것은 없고 반드시 그 원인이 있다.
그러니까 감정은 인간이 어떤 문제에 대한
처리 해법인 것이다.
그걸 잘 활용해야 하고 뭐든 거기엔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반드시 단점만 있는 게 없다.
장점을 반드시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긴장하면 일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아도
절제하고 준비를 철저히 하는 그런 장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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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주먹밥을 잘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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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희미한 것이 나는 제일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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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의 서사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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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에 일본 경찰들이 습관으로 하는 게 있어서 그런지 비슷한 장면이 작가가 다른 데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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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지지 않는 인간
고쳐지지 않는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그-그 자리 없는-에 대한 대개는
안 좋은 소릴 한다.
좋은 소리는 대개는 안 한다.
해도 가물에 콩 나듯 한다.
술을 먹고 있다면 안줏거리로 딱이다.
그리면서 친한 친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이게 어떤 패턴이 있다.
모이기만 하면 남 험담하고 그걸 말리는 친하게 지낸다는
사람이 있다.
이런 패턴은 인간 사회에서 안 바뀌는 것 같다.
험담하는 사람은 그저 그런 나쁜 사람이고, 그걸 말리는 사람은
주인공이거나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 거기서 거기다.
그냥 이런 패턴이 안 바뀌고 계속 무슨 힘이 있는지 계속 유지,
영구적이란 얘기다.
이런 것 때문에 초등하고 교사들이 자살을 택하는 것이고
동네에서 자기 장애인 자식을 제발 받아달라고 그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통사정한다.
자기 자식 기죽이지 말라는 말이고,
자기 동네 아파트값 떨어진다는 말이다.
인간 세상은 너무나 냉혹하고 고쳐지지 않는다.
그래 놓고는 자기는 아닌 척 시치미를 떼고
자길 합리화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누구라도 내 처지에 놓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자기를 정당화한다.
참, 인간은 야비하고 음흉하고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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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소 설은 거의 살인인데, 이걸 보면 인간의 적나라한 원초적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인간의 잔인성과 파괴 본능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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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V 배우는 일단 섹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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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글에 사람들이 댓글을 단다. 악플이 아니어도 그 댓글을 보고 이 사람은 내 글을 다 이해 한 것은 아니고 그저 댓글에 자기 생각만 적어 놓은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그래 댓글에 댓글을 달아도 그 댓글에 대한 언급은 안 하고 대개는 또 다른 자기 생각을 댓글의 댓글로 적어 놓을 뿐이다. 원래 사람은 자기 위주이기 때문이다. 남을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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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가을로 접어들어 이젠 더운 게 아니라 따뜻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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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성
운동도 그렇고 뭐든 그렇지만 고수들은 하수에게 몸에서
힘을 빼라고 한다.
운전할 때도 초보는 운전대를 꽉 잡는다.
그러나 베테랑 드라이버는 핸들을 살짝만 부드럽게 잡는다.
전에도 그런 적은 없지만, 더,
이젠 글을 좀 쉽게 쓰려고 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게, 쓸데없이 글을
어렵게 쓰는 건 심오한 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는 걸
방증(傍證)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론(Preface)이 길었다.
방향성(지향성, Directivity)을 곧잘 논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걸 밀고 나가기 위해
독재를 저지르고 누구처럼 뜬금없고
어리석게 계엄을 선포해 결국 철창신세가 될 수 있다.
다 방향을 잘못 잡아 그렇게 된 것이다.
방향을 잘못 잡으면 김정은이 되고 트럼프가 되고
푸틴이 되고 시진핑이 된다.
그리고 히틀러가 된다.
자기 맘대로 하려고 한다.
언젠가는 크게 사달이 날 것이다.
다 방향을 잘못 잡아 그런 것이다.
인류 전체라고 방향을 잘 잡는 것도 아니다.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기후 위기를 낳게 되었다.
인류가 방향을 잘못 잡아서 그런 것이다.
난 진보(Progress)다.
지금 틀을 유지하려는 보수는 되고 싶지 않다.
뭔가 깨부수고 싶은 것이다.
주류에 반감이 있고 다수를 의심한다.
거기서 나와 혼자서 걷고 싶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나는 자유로운 영혼이고, 영원한 낭만파(Romanticist)이고
세상에 대해 회의적(懷疑的)인 시선을 가지고 있다.
진보를 지향해, 한 개인의 개성과 다양성과
상대적 가치를 추구한다.
이런 걸 방향으로 잡았기에 진보를 택한 것이다.
이루긴 어려워도 인류가 꿈꾸는 이상(理想)을 좇는 것이다.
절대적인 건 거부한다.
예수처럼 유일신이 아니라 불교처럼 노력하면 나도
부처가 되는 상대적인 가치를 선호한다.
절대자는 너도 될 수 있고 나도 될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만 왕이 되어선 안 된다는 주의(主義)다.
아니, 왕도 별것 아닌 세상을 만들려는 것이다.
뭔가 유리천장이 있어, 한계가 있어 아무리 해도
하느님이 안 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든다.
아무리 노력해도 겨우 해봐야 하느님의 노예이고
종에 불과한 세계어서 벗어나고 싶다.
사람에게 이런 방향성은 왜 생기나?
나는 우선 타고난 기질이 반골인 것 같다.
7080으로 그 시대엔 데모하며 학교에 다녔다.
시내 중심가를 가면 데모로 최루액 때문에 늘
눈이 따가워 눈물을 흘리고 다녔다.
데모가 일상화된 것이다.
뭔가 하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고 정의를
구현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다.
정치적 올바름(PC)을 갖고 그걸 이루려고 노력했다.
그래 이런 기질과, 감수성이 예민한 순간에 받은
환경적인 요인도 나를 진보로 만들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위치)에 맞게
그런 방향성이 생기는 것도 같다.
근데, 방향성을,
올바로 잡으려면 나를 알고 세상을 알아야 한다.
나를 확장하면 우주가 된다.
우주는 곧 나인 것이다.
나를 깊이 연구하면 우주의 원리에 도달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이 풀리지 않는 게 있으면 세상 물정 모르는
중에게 찾아가 묻는 이유가 뭐겠나.
그들은 잡생각 안 하고 계속 도(道)만 닦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로 깊이 침잠하니까 세상의 이치를
속인(俗人)보다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알고 보면 세상 이치는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나를 잘 알면 된다.
그래 노자는 안방에 앉아서도 천하를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나를 알면 내가 우주이므로 세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을 축소하면 내가 된다.
마치 눈 결정(結晶) 같은 것이다.
눈[雪]은 확대해도 눈이고 쪼개도 눈이다.
확장은 같은 구조가 여러 개 겹친 것이고,
축소는 그 구조가 하나만 있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게 세상을 아는 것이다.
방향성은 자기의 타고난 기질과 그 환경과
자신이 지금 처한 처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 같다.
북한 주민이 민주주의자(Democrat)가 되긴 어렵다.
그런 환경에 놓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골 기질이 있어도 그걸 죽여야 그 체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자기 지금 처지에 맞게 방향성을 가져봐야
자기 주변 세상은 안 바뀐다는 것을 알고 포기한다.
그걸 모르고 나대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이다.
자기 방향성을 맘대로 잡지 못하니 얼마나 불행한가.
방향을 잘못 잡으면 망할 수 있다는 것을
기후 위기를 보면 안다.
보수(Conservative)는 그게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그래 환경 보전보다 개발이나 성장을 우선한다.
이런 게 방향이다.
곧 정치 진영(陣營)이다.
그러나 극지방의 빙하가 녹고 만년설이 녹아
등산객을 녹은 눈이 덮어버리고, 태평양 한가운데
섬들이 물에 가라앉아 사라진다.
전에 없던 대륙 간 산불이 나고 봄가을은 사라지고
여름과 겨울만 남은 것 같다.
열대야 일수가 해를 거듭할수록 길어져 나도 밤잠을 설친다.
이런 어리석고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즉
그 방향성을 틀려면 우선 자기 잘못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자기는 지금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와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한국에 2025년도에 살고 있다.
내가 K컬처에 물들어 있지, 짐바브웨 문화에
물들어 있나? 나는 2025년에 살고 있어
조선시대 떠꺼머리를 하고 있지 않다.
나는 2025년 한국의 틀 안에 갇혀 있다.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남들이 써놓은 기록을 봐야 한다.
독서하고 그렇게 되면 생각이란 걸 하게 되어 있다.
이 두 가지를 하면, 쓰고 싶어진다.
쓰면, 자기 생각이 정리되고 속이 후련해진다.
자기 정화(Catharsis)가 일어나는 것이다.
자기 문제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시각을 갖는다.
자기를 객체(Object)로 보는 것이다.
그건 오히려 주체적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쓰는 기쁨을 맛본다.
그럼 더 쓴다.
글쓰기가 는다.
이 세 가지를 꾸준히 하면,
자기가 갇혀 있다면 갇힌 것을 알고 벗어나려고 하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고 가장 현명한 선택을 고를
안목(眼目)도 생긴다.
이런 걸 자꾸 쓰면 그것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이 만들어지고
거듭 쓰면 잔가지는 사라지면서 핵심만 남게 된다.
진정한 자기 생각이 탄생한다.
잘못된 방향성을 알고 거기서 벗어나 현명한 방향성을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읽고 생각하고 자꾸 쓰는 수밖에 없다.
즉, 구양수(歐陽修)가 말한 삼다(三多)를 실천하는 것이다.
방향성
● 기질과 살아온 환경과 자신이 지금 처한 것에 따라 방향성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 방향을 잘못 잡으면 자신을 망가뜨리는 건 물론 그가 힘이 있는 인간이라면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다.
● 자기 방향성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부터 방향성 틀기가 시작된다. 자기 잘못을 모르는데 어떻게 고치나?
● 방향성 틀기(Shift)는 독서와 사색과 글쓰기보다 더 쉬운 방법은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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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 분명 몸 파는 여자들과 노래방 여자들이 있는데도 마치 없는 것처럼 그들에 대해선 안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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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반 공휴일(토요일) 하굣길,
추석을 앞두고 발걸음이 가볍지 않을 수 없다.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코스모스가
한길 가에서 한들한들 나를 반긴다.
고추잠자리가 까까머리에 앉았다가
공중제비를 한 번 하고는 저 멀리 날아간다.
도라꾸가 흙먼지를 풍기며 지나가도 그저 즐겁기만 하다.
추석이 코앞에 다가왔기 때문이다.
누구나 보름달처럼 풍요로운 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집에 당도하니 벌써 어머니가 마당에서 붉은 흙벽돌에
엎어놓은 소두방에 쪽파 지짐이와 호박, 두부를
기름에 지져 사방으로 냄새가 진동한다.
이거 얼마 만에 맡아보는 기름 냄새인가?
내 마음도 덩달아 들뜨고 동시에 세상이 온통 포근해진다.
누렁이도 봉당에 배를 깔고 누웠다가
내가 다가오는 기척에 꼬리를 흔들며 달려온다.
나는 어깨에 두른 책보를 끌러 마룻바닥으로 던지고는
누렁이를 번쩍 들어 올린다.
새로 돋아난 야들야들한 솔잎을 켜켜이 깔고
그 위에 송편을 올려 찐다.
찐 송편은 참기름을 바르고 큰 광주리로 옮긴다.
어머니가 입에 넣어주는, 참기름을 막 바른 송편의
그 고소한 맛을 어떻게 잊겠는가.
조기를 조리고, 데친 각종 나물을 색 있는 양념 없이 버무린다.
쇠고기, 돼지, 닭고기를 삶고, 탕국과 포를 마련한다.
할머니는 송화(松花)를 넣은 다식을 꽃무늬 틀로 찍고
밥풀을 삭혀 엿질금을 부어 감주를 빚는다.
아버지는 마을에서 구정물 먹여 잡은 돼지고기를
두어 근 끊어 짚에 꿰어, 술로 거나한 얼굴을 하고는
흘러간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고
한숨 푹 잔 다음, 찐 밥알을 절구통에 넣어 떡메로
내리친다. 조율이시(棗栗梨枾), 밤과 배를 정성껏 깎는다.
동네 공터에선 어른들이
꽹과리, 북, 징, 장구, 태평소를 불며 풍물(風物)을 논다.
막 잡은 뜨끈한 돼지 간과 염통을 왕소금에 찍어 그대로
막걸리 한 사발과 함께 목으로 넘긴다.
아이들은 돼지 오줌보에 바람을 불어넣어 추수가 끝난
너른 돈에서 공을 차며 논다.
이건 우리 부락(部落)에만 전해오는 추석놀이인데,
수숫잎을 엮어 몸에 두르고 진흙을 얼굴과 팔다리에 칠해
시커멓게 해서, 마치 아프리카 토인처럼 하고
동네방네 집집을 돌며 먹을 것을 달라고 조른다.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하며
품바 타령을 내지르고, 그 집 앞마당에서 신명나게 놀면
주인이 송편과 술떡, 고기와 술로 한 상 차려 대접한다.
그럼 다시 마당을 빙빙 돌며 한바탕 각설이 타령을
구성지게 소리한 후 다음 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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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이 다가오니까 기분이 좋고 뭔가 홀가분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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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귀에서 태백 탄광촌에서 어떻게 남자들이 여자들을 그렇게 학대할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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