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란과 불안, 수많은 시체와 엄청난 피가 금각의 미를 풍족하게 만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금각은 불안이 세운 건축, 한 사람의 장군을 중심으로 수많은 어두운 마음의 소유자들이 세운 건축이었던 것이다. 미술사가가 양식(樣式)의 절충밖에 발견하지 못한 3층의 부조화한 설계는 불안을 결정화할 양식을 추구하여 자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믐클래식 2025] 10월, 금각사
D-29

거북별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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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감적으로 나는 이 소년이 아마도 나만큼은 금각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금각에의 집념을 오로지 나 자신의 추한 모습 탓으로 돌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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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루카와는 처음 만난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내가 말더듬이라는 것을 놀려대려고 하지 않았다.
“왜지?”
나는 그렇게 다그쳤다. 동정보다도 비웃음이나 모멸 쪽이 훨씬 내 맘에 든다는 사실은 수차 말한 바와 같다.
쓰루카와는 더없이 다정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난, 그런 건 조금도 상관하지 않는 성격이거든.”
나는 놀랐다. 시골의 거친 환경에서 자란 나는 이런 종류의 다정함을 몰랐다. 나라는 존재로부터 말더듬 증세를 제외하더라도 여전히 나일 수 있다는 발견을, 쓰루카와의 다정함이 가르쳐주었다. 나는 홀딱 발가벗겨진 상쾌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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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전의 충격, 민족적 비애 따위에 금각은 초연했다. 혹은 초연을 가장하고 있었다. 어제까지의 금각은 이렇지 않았다. 결국 공습으로 불타지 않았다는 사실, 오늘 이후로는 이미 그럴 걱정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들이 금각으로 하여금 다시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 하는 표정을 되찾게 했음에 틀림없다. ”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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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하고 미군이 소리쳤다. 나는 돌아보았다. 가랑이를 넓게 벌린 채 버티고 선 그의 모습이 눈앞에 있었다. 손가락으로 나에게 신호하고 있었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밟아. 네가, 밟아봐!”
무슨 소린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의 파란 눈은 높은 곳에서 명령하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 뒤에는 눈에 덮인 금각이 빛나고, 씻어낸 듯이 파란 겨울 하늘이 촉촉이 어려 있었다. 그의 파란 눈은 조금도 잔혹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서정적이라고 느낀 것은 어째서일까?
그의 굵은 손이 내려와 멱살을 잡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명령하는 목소리는 역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밟아. 밟으라니까!”
저항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고무장화의 발을 들었다. 미군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내 발은 내려와, 봄날의 진흙처럼 부드러운 물체를 밟았다. 그것은 여자의 배였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신음했다.
“더 밟아. 더!”

거북별85
친구 쓰루카와와 미군의 일화는 무척 상반된 경험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미군정 이후 이런 경험들을 했겠지요??
그런데 문학적으로는 그당시 상황들에 대해 많이 남아 있는지 궁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