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10월, 금각사

D-29
어머니를 추악하게 만드는 것은... ... 그것은 희망이었다. 습기 찬 담홍색의, 끊임없이 가려움을 느끼게 하는, 이 세상의 그 무엇에도 뒤지지 않는, 더러운 피부에 번진 완고한 옴과도 같은 희망, 불치의 희망이었다.
금각사 (무선) P.210,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어떤 것이든,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있게 된다. 그 종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눈을 내 것으로 만들고, 또한 그 종말을 부여하는 결단이 내 손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 자유의 근거였다.
금각사 (무선) P.2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나았다! 신기하지? 아플 때 당신이 그렇게 해주면 언제나 통증이 멈추거든.” 그러고는 여자의 머리를 양손으로 잡아 들어올렸다. 머리를 잡힌 여자는 충실한 개와 같은 표정으로 가시와기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구름 낀 날의 하얀 광선을 받아, 이 순간 나에게는 아름다운 그 여자의 얼굴이, 언젠가 가시와기가 이야기한 예순 먹은 노파의 바로 그 얼굴처럼 보였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그토록 오로지 빛을 위해 만들어지고 빛에만 어울리던 그의 육체와 정신이 묘지의 흙에 묻혀서 편안히 잠들리라고 어찌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요절의 징후라곤 조금도 없었고 불안이나 우수(憂愁)와는 태어날 때부터 무관했으며, 죽음과 유사한 요소를 조금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의 돌연한 죽음은 그야말로 그러한 요소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순수한 혈통의 동물은 생명력이 약한 것처럼, 쓰루카와는 삶의 순수한 성분만으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막을 방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에게는 그것과 반대로 저주받을 장수가 약속되어 있는 듯이 여겨졌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마치 저주하듯이 나는 금각을 향해, 난생처음으로 거칠게 외쳤다. “언젠가 반드시 너를 지배할 테다. 두 번 다시 방해하지 못하도록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다!” 목소리는 황량하게 심야의 경호지에 메아리쳤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금각이 보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에 둘러싸여 금각은 한밤중에 꼼짝도 하지 않고, 그러나 결코 잠드는 일도 없이 서 있었다. 마치 밤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그렇다. 나는 잠들어 고요한 절간처럼 금각이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사람이 살지 않는 이 건축물은 잠을 잊을 수가 있었다. 그곳에 살고 있는 어둠은 인간적인 법칙이 완전히 면제되어 있었던 것이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영원의, 절대적인 금각이 출현하여 내 눈이 그 금각의 눈으로 변할 때 세계는 이처럼 변모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변모한 세계에서는 금각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미를 점유하며 그 밖의 것들은 흙먼지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이 이상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전에 금각의 정원에서 창녀를 밟은 이후로, 또한 쓰루카와가 급사한 이후로 내 마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과연 악은 가능할까?’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내 주위의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내 주위의 것들이 뿜어내는 무력한 냄새로부터……. 노사도 무력해. 아주 무력하지. 그것도 알았어.” “금각한테서도?” “그래. 금각한테서도.” “금각도 무력한가?” “금각은 무력하지 않아. 결코 무력하지 않아. 하지만 모든 무력의 근원이지.”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모름지기 생명이 있는 것들은 금각처럼 엄밀한 일회성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인간은 자연의 온갖 속성의 일부를 담당하여,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했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보다 해학에 넘치고 대담하며 활달한 선승다운 선승이었다면, 이토록 저속한 질책을 도제에게 퍼붓지는 않았으리라.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금각은 바람이 요란스러운 달밤 아래에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암울한 균형을 유지한 채로 우뚝 서 있었다. 즐비하게 늘어선 가느다란 기둥이 달빛을 받을 때면 그것이 가야금의 현처럼 느껴져서, 금각이 거대하고 괴이한 악기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달의 높낮이에 의해 그렇게 보이는 것인데, 오늘 밤이 바로 그랬다. 하지만 바람은 결코 울리지 않는 가야금의 현 사이를 헛되이 스치며 지나갔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나는 풀잎의 뾰족한 끝부분에 관해 오랫동안 생각한 적도 있다. 생각한 적이 있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 기묘하고 사소한 생각은 결코 지속되는 일이 없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를 나의 감각 위에 음악의 후렴처럼 집요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어째서 이 풀잎의 끝이 이처럼 날카로운 예각을 이루어야만 하는가? 만약 둔각이라면 풀이 종별은 사라지고 자연은 그 일각으로부터 붕괴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일까? 자연의 톱니 바퀴 중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떼어내면 자연 전체를 전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러한 방법을 나는 부질없이 이것저것 생각하곤 했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나는 나의 사상에 사회의 지원을 기대할 마음은 없었다. … 이해되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존재 이유였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그것은 그야말로 우라니혼의 바다였다! 나의 모든 불행과 어두운 사상의 원천, 나의 모든 추악함과 힘의 원천이었다. … 어두운 바다 위에 층층이 쌓인 구름은 중량감과 섬세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 그러나 이 황량한 자연은 봄날 오후의 잔디밭보다도 한결 내 마음을 끌었고 내 존재와 친밀했다. 이곳은 나에게는 흡족했다.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그 교육의 효과는 각별하겠지. 그 덕분에 사람들은 유추에 의한 불멸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리라.
금각사 (무선)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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