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아홉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네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또 다른 심문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1부의 산문들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번역도 찬찬히 살펴보면서 천천히 읽겠습니다.
⏤케베도 73
⏤『돈키호테』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술성 86
⏤너새니얼 호손 93
⏤상징으로서의 발레리 128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관한 수수께끼 132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 139
⏤체스터턴에 대하여 146
⏤맨 처음의 웰스 153
⏤『비아타나토스』 159
⏤파스칼 167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174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 181
⏤도서 예찬에 대하여 186
⏤키츠의 나이팅게일 195
⏤수수께끼들의 거울 202
⏤두 권의 책 209
⏤1944년 8월 23일 자 기사 217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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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보르헤스 읽기] 『또 다른 심문들』 1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모임지기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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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ussist
[케베도] 스페인의 시인이었던 위대한 케베도를 향한 보르헤스의 복잡다단한 평가, 그 모순된 감정이 드러나는 글입니다. 케베도는 17세기 스페인어권에서 유명한 작가였습니다. 당시에도 이미 문인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문인들의 문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력에 걸맞은 명성을 누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보르헤스는 평가합니다. 그 이유인즉, 케베도는 작품으로써 사람들의 파토스를 건드리려고 하는 데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그것이 대단히 중요함에도요), 훗날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이렇다 할 '상징'을 떠올리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작가에게는 자기만의 상징이 하나씩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예컨대 카프카에게서는 그로테스크한 미로가 떠오르고, 멜빌에게서는 백경이 떠오릅니다. 말라르메는 그 자체로 비밀스러운 작가의 전형이며, 휘트먼은 미국 자체를 체현하는 반신적인 주인공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케베도의 작품에서는 앞선 작가들에 견줄 만한 상징을 떠올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케베도의 위대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보르헤스는 언어의 정확성에서 그 위대함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혹자는 케베도를 신학자나 철학자, 정치가로 보지만, 그의 글을 잘 살펴보면 "경직되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언어는 엄격했습니다. 그런데 이 특유의 정확성 때문에 케베도를 향한 평가는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깁니다. 케베도는 신학적으로 엄격했기에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해서 거의 테러리즘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내었으며, 철학적으로 경직되어 있던 탓에 문학적인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영혼이 육신을 달리해 가면서 거듭해서 삶을 반복한다는 윤회설이나 그노시즘은 그 자체로 '거짓'임과 별개로 문학적 상상력을 열어줄 수 있었는데도, 케베도는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언어적으로는 정교한 기술을 갖춘 최고의 장인이었으나 경직된 전통주의자였고, 사상적으로 빈곤했으며, 철학적으로는 무감했습니다.
한편, 체스터턴에게 "언어는 과학적이지 않고 예술적"인 것인 반면, 케베도에게 언어란 논리적 도구였습니다. 케베도는 시의 은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은유는 두 사물이 하나로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두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부딪치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거짓인지 참인지 논리적 정확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시적 효과를 얻어내는 것이 목적임을 몰랐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그럼에도 케베도가 많은 시를 남겼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케베도를 향한 보르헤스의 평가는 복잡다단한 감정이 뒤섞여 있습니다. 케베도가 돈 호세 데 살라스에게 써 보낸 소네트에서는 그만의 개인적인 슬픔과 분노, 환멸이 감지되기는 하나, 그 역시 케베도 특유의 '기지주의(conceptismo)’적 기교 탓에 가려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르헤스가 평가하기를, 케베도의 시는 기지주의 덕분에 유의미하다기보다는 "기지주의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합니다.
이 평가는 에세이 말미에서 묘한 반전을 데려옵니다. 이제껏 여차저차한 이유를 들어 케베도의 아쉬움을 토로하기는 했지만,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는 케베도의 예술적 진실성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케베도가 쓴 작품의 가치는 그 언어적 순수함과 완전성에 있습니다. 이는 독자가 케베도의 작품을 읽을 때, 달리 그의 의도를 헤아린다거나 별다른 배경지식을 몰라도 읽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말라르메나 예이츠나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들과 다르게 케베도의 작품은 고전적 명료함으로 가득합니다. 보르헤스는 케베도를 두고 이런 평가를 내립니다. “칼이나 은반지처럼 언어로 형상화될 수 있는 순수하고 독자적인 대상이다.”(85쪽) 이렇게 해서 케베도는 조이스나 괴테, 셰익스피어나 단테처럼 "하나의 광대하고 복잡한 문학"의 반열에 이릅니다. 보르헤스의 보편주의는 말 그대로 "하나의 광대하고 복잡한 문학"이지만, 그 하나에 다다르는 길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또 달라야 한다고, 저는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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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또한 관용구를 혐오했다. 그래서 관용구들은 "대중 앞에서 창피 주기" 위해 관용구들로 ⟪이야기 중의 이야기⟫라는 서사시를 짓기도 했다. 그런데 이 작품에 매료된 후손들은 케베도가 귀류법적으로 반박하려던 바에서 되레 보석의 박물관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온통 뒤죽박죽으로, 뒤범벅되어, 허둥지둥, 눈 깜짝할 새에, 닥치는 대로" 같은 표현을 신성하게도 망각에서 구해냈다는 것이다. ”
『또 다른 심문들』 7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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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의 소설에 어렴풋이 나타나는 마술성] 오늘날 사람들은 ⟪돈키호테⟫을 환상 소설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세르반테스에게 17세기와 그 당시 스페인이라는 공간("카스티야 지방의 흙먼지 뽀얀 시골길과 허름한 여인숙")은 지극한 현실이었습니다. 2025년의 독자가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느끼는 환상감은, 17세기와 현재 사이에 놓인 300년이라는 시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심지어 보르헤스는 호메로스나 단테,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비교하면 ⟪돈키호테⟫는 사실상 사실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실주의'란 19세기 플로베르가 보여준 사실주의와는 조금 결이 다르기는 합니다. 대표적으로 19세기 소설가인 조지프 콘래드와 헨리 제임스는 "현실이야말로 시적인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콘래드에게 현실이란 이미 경이로운 것이기에 그저 그 내재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드러내기만 하면 되었고, 오히려 초자연적인 것을 받아들이게 되면 일상이 충분히 경이롭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될까 우려했습니다. 반면, 17세기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통해서 시적인 상상의 세계와 산문적인 현실의 세계를 대비시켰습니다. 그는 상상과 현실을 명료히 구분한 채, ⟪돈키호테⟫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드러내고자 했고, 이때 자신이 살아가던 17세기 카스티야의 라만차라는 지극한 현실은, 그가 작별을 고하려는 기사소설을 부각시키기 참 좋은 배면이었습니다.
오늘의 관점에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돈키호테⟫는 기사소설의 패러디이며, 세르반테스는 환상의 해독제를 제시했다고요. 하지만 폴 그루삭의 주장에 따르면, 기사소설은 세르반테스의 "포로 생활을 달래준 자장가"였습니다. ⟪돈키호테⟫는 허구를 극복하고 몰아내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간 자신을 위로해 준 허구를 향한 "향수어린 작별인사"인 것입니다. 즉, 세르반테스는 표면적으로는 눈앞의 현실을 면밀하게 묘사하였지만, 기실 잃어버린 환상을 향한 애도와 헌사를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소설=이상적 현실'이라는 등식을 세워둔 뒤, 이 달콤한 가정 위에서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의도적으로 혼동하고, 책의 세계와 독자의 세계를 뒤섞으며 즐거움을 만끽합니다. 현대의 독자들은 ⟪돈키호테⟫에서 그 즐거움의 흔적을, 즉 세르반테스의 메타 해설을 곳곳에서 엿봅니다. 이를테면 9장 도입 부분에서 세르반테스는 독자의 독서에 개입해서 텍스트의 출처를 밝힙니다. ⟪돈키호테⟫란 다름 아닌 세르반테스 자신이 툴레도 시장에서 한 아랍어 필사본을 입수한 뒤, 한 무어인에게 직접 번역하도록 시킨 결과물이라는 겁니다. 소설의 등장인물로 하여금 자신이 집필한 또 다른 소설 ⟪칼라테아⟫를 평가하게 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심지어 ⟪돈키호테⟫ 2부의 등장인물들은 1부를 이미 읽어서 아는 상태입니다. 이 모든 것은 유구한 내력을 지닌 메타적 장치입니다. 일찍이 ⟪햄릿⟫ 속에는 ⟪햄릿⟫과 닮은 듯 다른 연극 무대가 연출됩니다. ⟪천일야화⟫도 마찬가집니다. 이 천일밤의 이야기 안에는 거듭 다른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듣는 이와 말하는 이를 모종의 불안 속으로 데려갑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메타적인 장치들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까요? 그 메타적인 상호작용 과정에서 주관과 객관, 주체와 객체가 거듭 뒤바뀌고, 현실적인 것과 허구적인 것도 뒤바뀐다고 느끼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는 자신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이 아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을, 자신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느끼면 불안해합니다. 즉, 메타적인 장치는 우리와 우리를 에워싼 세상 자체의 허구성을 끊임없이 암시하기에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혹은 영화를 보면서 완벽한 관객이 되고자 합니다. 대상에 시선을 주되, 자신이 시선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대상이 알아차리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지만 메타적인 장치들은 일종의 거울처럼 기능하기에 일방향의 시선을 분쇄합니다. '바라봄'은 '바라보아짐'으로 되돌아오게 돼 있습니다. 이는 허구의 등장인물들이 그저 수동적인 말이나 인형이 아닌 존재가 아닐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도 독자를 읽는다고 상상해보세요. 혹은 독자가 그 책의 등장인물이 된다고 상상해보세요. 영화 속 인물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할 때, 관객은 문득 자신이 관객이 아니라 등장인물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옴짝달싹하기 어려우며, 마치 관음 행위를 하다가 들킨 것만 같은 불안을 느낍니다. 이 불안감은 현실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 사이의 삼투 현상에서 연유합니다. 등장인물과 관객이 시선을 교환할 때, 쌍방향의 시선이 이루어진 것도 같을 때, 현실과 상상의 위계는 사라지고 얇은 스크린을 막 삼아 무언가가 교묘하게 교환됩니다. 현실과 허구는 그때부터 스크린이라는 막을 통해 자신을 유출하고 교환함으로써, 서로 존재를 지탱하고 있다는 기묘한 연약함을 공유하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1833년 칼라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우주의 역사 자체가 스스로 묘사되어지고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고 있는 성스러운 한 권의 책이라고 말했습니다.

russist
“ 우리는 왜 지도 속에 또 다른 지도가 내포되어 있고, ⟪천일야화⟫ 속에 천 하루 밤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가? 우리는 왜 돈키호테가 ⟪돈키호테⟫의 독자가 되고, 햄릿이 ⟪햄릿⟫의 관객이 된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것일까? 나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픽션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 독자나 관객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전복이야말로 또 다른 독자이거나 관객인 우리 자신을 허구의 존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833년에 칼라일은 말했다. 우주의 역사는 모든 이들이 쓰고 읽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 애쓰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우주의 역사 자체가 스스로 묘사되어지고 있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성스러운 한 권의 책이라고. ”
『또 다른 심문들』 91-9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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