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나눔] <고양이를 부탁해><말하는 건축가> 정재은 감독 에세이『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D-29
나에게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인공과 연출자의 관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그 관계가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관계 중 가장 고귀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왔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2쪽, 정재은 지음
종잡을 수 없는 날씨의 지난 주, 어떻게 보내셨나요? 제안드린 기간으로는 책의 중후반부가 시작되는 때이지만, 전반부의 인상적인 문장이나 생각할 거리도 언제든 환영이에요!
영화 <말하는 건축가>로 그랬듯이, 이 책으로도 많은 분들이 고 정기용 건축가를 알게 되고, 또 (혹은 더욱)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 정기용 건축가의 건축 세계, 삶과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서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뵌 적이 없는데도 그리움을 느끼기도 하고요.
건축가라는 직업은 많은 책과 영화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올해 화제가 됐던 에이드리언 브로디 주연의 영화 <브루탈리스트>처럼 미적 완성도를 위해 생을 바치는 건축가의 이미지도 익숙하고요.
브루탈리스트전쟁의 상흔을 뒤로하고 미국에 정착한 건축가 라즐로 토스. 미국 이민자의 냉혹한 현실 속에 전쟁의 트라우마를 견뎌내던 어느 날. 라즐로의 천재성을 알아본 부유한 사업가 해리슨이 기념비적인 건축물 설계를 제안한다. 하지만, 시대와 공간, 빛의 경계를 넘어 대담하고 혁신적인 그의 건축 설계는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후원자 해리슨의 감시와 압박, 주변의 비난이 거세질수록 오히려 더 자신의 설계에 집착하던 라즐로. 혁신적인 브루탈리즘 건축에 자신을 투영하던 라즐로는 결국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처하는데...
우리의 주인공 고 정기용 건축가는 인문학자적 면모가 강한 건축가입니다.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겪었던 한국 역사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봤고, 건축가이자 시민으로서 해법을 찾아가는 모습에서 존경을 느꼈어요. 죽음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두려움에 주춤하거나 망설이는 대신 끝까지 열정적으로 삶을 사랑하는 모습에서 저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기도 하더라고요.
말하는 건축가건축가 정기용은 대장암 판정 후, 자신의 건축세계를 담은 일민미술관 전시회 및 후배양성에 여전히 바쁘기 그지 없다. 무주공공프로젝트, 기적의 도서관 등 나눔의 미덕을 아는 공공건축의 대가이자 건축계의 이단아 故정기용은 마지막까지 사람과 자연을 향하는 건축을 알리고자 하지만, 시간은 얼마 남지 않는데…내가 사는 곳은 비록 월셋방일지라도, 모두가 사는 곳은 같이 나누는 것.그가 전하는 마지막 감동의 여정이 펼쳐진다.
내가 힘들고 여유가 없으면 타인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타인을 쉽게 공격하게 된다. 협력과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폭력적 위계로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그래서 부탁이 아닌 명령을 선호하게 된다. 충분한 수면이 보장되지 않는 촬영 스케줄은 증오심의 출발이 된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지 않아도 되는 삶을 추구하고 싶다. 그래서 더 많은 자유와 더 안전한 제작 환경을 추구하게 되었고 조금 더 미시적인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게 나에게는 다큐멘터리 제작이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40쪽, 정재은 지음
다큐멘터리를 선택한 이와 같은 동기가 좋습니다~
나는 생각했다. 만들어지는 것보다 누가 어떻게 만드느냐가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5쪽, 정재은 지음
나는 정기용의 건축에 끌리지 않았지만 끌리기로 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44쪽, 정재은 지음
그러나 다큐멘터리 영화에 있어서의 플롯은 촬영이라는 물리적 과정을 동반하고 비용을 발생시키는 안타까운 잉여노동의 생산물이다. 생산물인데 부산물인 셈이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69쪽, 정재은 지음
다큐멘터리 <데리다>를 봐야겠어요~
서사를 강렬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영화 산업적 욕망이 나를 어지럽히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자유를 찾아 이곳 다큐멘터리 마을에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자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휩싸여 한옥 프로젝트 같은 기획을 해 내고 있단 말인가. 어쩌면 그런 건 다 필요 없을지도 몰라.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75쪽, 정재은 지음
"건축보다 위대한 것은 여전히 자연입니다. 아무래도 자연을 더 잘 관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건축은 형태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과 시간의 교감의 문제다. 공간인 것 같지만 건축의 본질은 시간이다. 늘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변한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08-109쪽, 정재은 지음
정기용의 이 말을 여러 번 읽게 되네요.
많은 건축가들이 결국 자연을 가장 사랑하게 되는 거 같아요! 인간의 의도로는 만들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불가능한 자연의 장면들이 늘 새로운 공부거리와 사유를 제공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타인의 삶을 다룰 기본적인 태도도 서 있지 않은 데다, 다른 사회를 넓게 포용할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은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다큐멘터리 세계로 가는 길이었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13쪽, 정재은 지음
현실에서는 어떤 일이 늘 일어나고 있다. 내가 결정한 적 없는 삶의 사건들이 늘 발생하고 있고 그것이 작품의 서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관찰 다큐멘터리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여기서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느 만큼의 거리를 확보한 채 촬영에 임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억지로 사건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주는 엄청난 희열과 자유를 느꼈다. 현실에는 우열이 없다. 하지만 때로는 현실이 가진 상투성에 놀라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이 가진 이미지의 초월성에 감탄하기도 한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17-118쪽, 정재은 지음
삶에 대한 사랑과 애증, 그 다음에 도달하게 될 겸허함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는 부분 같아요.
"잘은 모르겠는데 오래 살 것 같진 않아 내가. 이 문제는 내가 좌지우지할 수 없지만 내가 언제까지 살고 세상을 떠나겠다는 것은 결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조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살려고 바둥거릴 수도 있고 대충 여기서 접어야겠다 할 수도 있다. 내가 죽는 날을 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34쪽, 정재은 지음
"위대한 건축가 정기용을 찍지 말고 건축가라는 사람이 생각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일반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다만 아마 힘들 것이다 생각했다. (...) 솔직한 심경은 3, 4개월 하다 포기할 줄 알았다. 정재은이 진지하더라. 스토리를 적어서 위대한 정기용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 언어로 접근하더라."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 139쪽, 정재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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