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간

D-29
독자가 언어를 넘어 어떤 담론의 중심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의 그림자, 진술이 아닌 중얼거림, 존재가 아닌 부재를 목도한다. 따라서 블랑쇼가 체계화된 사유에 반대하는 것은 필연적인 귀결이다. 언제나 그가 사유하는 것은 부재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어찌 보면 우리는 문학이 요구하는 바를 따를 때 죽음을 경험한다. 물론 이때의 죽음은 누군가의 소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무의미성’이나 주체성의 한계를 묻는 질문으로서의 죽음이다. 글을 쓰는 것은 언어의 익명성에 노출되는 것이니, 인간의 주체의 파멸과 소멸은 문학의 조건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언어의 익명성이란, 언어는 누군가에게 속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의 산물이라고도 볼 수 없으므로 특정한 이름 아래 귀속될 수 없다는 뜻이다. 현대 대중 사회의 한 특질을 가리키는 사회학적 용어인 익명성과는 다르다. 블랑쇼는 언어에 대한 사유에서 출발해 문학도, 죽음 앞에 처한 인간도 익명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성찰로 나아갔다. 그가 언어, 죽음, 문학이 갖는 공통적인 특성으로 제시한 익명성, 비인칭, 중성성은 블랑쇼가 일찍부터 탈주체적 시각을 앞세워 사유해 왔음을 보여 준다. 특히 문법적인 의미를 포함하는 비인칭과 중성성이라는 용어는 언어의 본성에 관한 성찰을 중요시한 블랑쇼의 사유를 잘 반영하고 있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정의들을 만들어 내지만, 정의한다는 행위가 필요로 하는 일반화는 독서 경험의 독특성을 놓치게 만든다. 게다가 문학 텍스트의 문학성이 무엇인지도 포착하지 못하게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재적으로 예술적 가치라는 차원에서 따지든, 외재적으로 도덕적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든지 간에, 문학에 대한 일반적인 철학적 정의는 독서 경험과 아무 관계가 없다. 말하자면 이 두 가지 관점은 모두 바깥에서 바라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블랑쇼는 텍스트의 양면성을 설명하고자 성경의 한 대목인 나사로의 부활을 끌어 온다. 독자는 무덤 앞에 서서 “나사로야 이리로 나와라.” 하고 명하는 예수이다. 무덤은 책이고, 나사로는 독자가 독서 행위로써 밝혀 내고 싶어 하는 책의 의미다. 나사로는 두 가지 모습으로 무덤에서 걸어 나온다. 하얀 수의로 몸을 감싸고 서 있는 부활한 나사로와, 아직도 수의 안의 몸이 무덤 속에서 썩어 가는 시체의 냄새를 풍기는 나사로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문학 텍스트를 소설의 인물이나 상황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독자의 내면생활이라고 생각하거나, 소설의 인물이나 상황은 그저 작가의 내면생활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라고 치부하는 양쪽 모두, 독서 경험의 핵심이 우리와 삶을 떼어 놓는 언어에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우리 눈앞에 출현한 텍스트가 텍스트와 세계 사이에 열어 놓은 어떤 공간은 우리가 “베케트의 소설은 현대 생활의 공허함과 부조리에 대한 거야.”라는 식으로 말할 때 닫혀 버린다. 언어를 일상적인 용법에서 분리시켜서 낯설게 하는 것이 문학의 본질이라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시적인 말은 그때 단지 일상적 언어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언어와도 대립된다.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세계로, 피난처로서의 세계로도, 목표로서의 세계로도 보내지지 않는다. 거기서 세계는 뒷걸음질치고 목표는 중단되었다. 거기서 세계는 침묵한다. 그들의 편견과 의도와 활동 속의 존재들은 결국 더 이상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적인 말 속에 존재들이 침묵한다는 사실이 표현된다.
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존재들은 침묵한다. 하지만 그때 다시 말이 되고자 하는 것은 존재이고 그리고 말은 존재가 되고자 한다. 시적인 말은 더 이상 어느 누구의 말이 아니다. 그 말 속에서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어느 누구가 아니다. 오히려 말 홀로 스스로를 말하는 것 같다. 언어는 그때 그 모든 중요성을 획득한다. 언어는 본질적인 것이 되고, 언어는 본질적인 것으로서 말하고, 이러한 까닭에 시인에게 맡겨진 말은 본질적 말이라 말해질 수 있다. 이것은 먼저 주도권을 쥔 말이 어떤 사물을 지시하거나 어느 누구에게 발언권을 주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되고, 말은 말 속에 그 목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말하는 자는 말라르메가 아니다. 언어가 스스로를 말한다. 작품으로서의 언어와 언어의 작품을.
문학의 공간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문학 언어는 의사소통에 필요한 언어와 다르다. 시든 소설이든 모든 개별 문학 텍스트는 자기만의 자율성을 가지기 때문에 일반론을 펼치면 그 표현의 독특성을 포착해 내지 못한다. 확실히 블랑쇼는 문학의 기준을, [문학의 공간]에서 예술 작품의 ‘고독’이라 부른 개별성과 고립성에 두었다. 블랑쇼 문학비평의 독창성을 보여 주는 이런 특징이야말로 데리다를 비롯한 이후의 프랑스 비평 이론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부분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독서는 알지 못한다. 읽기 시작하면서 최초의 힘이 드러난다. 독서는 받아들이며 듣는 것이지, 판독하고 분석하는 힘이 아니며, 발전하여 나아가거나 폭로하여 되돌아가는 힘이 아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독서는 이해가 아니다. 그저 따라간다. 이 놀라운 무지. (The Infinite Conversation)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라르메를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가 세계를 재현하는 언어의 힘과 대립하는 언어의 텍스트성을, 재현 그 자체가 거의 텍스트성의 결과로 보일 정도로까지 밀어붙였기 때문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일상 언어의 작동 방식이 ‘언어 정보 모델’을 따르는가
반대로 문학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정보 교환에서 하찮게 취급되는, 낱말의 물질적 현존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그러나 블랑쇼와 말라르메에게, 개념의 부재를 관념의 현존이 채워 놓는 이 부정성은 충분히 부정적이지 않았다. 만약 언어가 부정이라면, 그 기묘한 힘을 완전히 구현하는 것은 사물의 실재와 관념의 현존을 모두 부정하는 문학이다. 말하자면 문학은 이중 부재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말은 재현만이 아니라 파괴하는 역할도 한다. 말은 사라지게 만들고, 대상을 부재하게 하며 소멸시킨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언어 정보 모델은 언어의 본질을 잊게 만든다. 어떤 의미가 표현되기도 전에 언어는 대상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점을 놓치는 것이다. 사물들을 말할 때 우리는 이미 사물의 직접성을 지워 버린다. 우리는 언어의 부재 안에서 지연된다. 그리고 이 지연은 언어가 언어적 현실 바깥에서는 안정성을 갖지 못하게 한다. ‘나무’라는 말은 그저 이 나무나 저 나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나무’라는 말은 현실에서 스스로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무의 관념은 창조되던 순간을 잊어버린 시적 파편이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문학작품에 들어 있는 낱말들은 언어의 부정성을 개념의 긍정성으로 바꿔 놓지 않으며, 고집스럽게 언어의 부정성을 유지하고 지킨다. 블랑쇼는 이때의 부정성을 가리켜 문학작품의 무용성 혹은 ‘무위’라고 부른다. … 문학은 우리가 부재를 부재로서 체험하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문학에 쓰인 낱말들에서는 사물의 실재뿐만 아니라 낱말이 지시하는 개념 역시 부정된다.
모리스 블랑쇼 침묵에 다가가기 울리히 하세.윌리엄 라지 지음, 최영석 옮김
참고문헌과 더불어 전반부 n회독 후 모호한 부분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할 필요를 느끼고 병행하여 다른 저작으로 나아간다. 침묵의 내밀성 말 되어질 수 없음에 대하여 도래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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