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D-29
배우는 사람이 분발하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고, 애써 말하려 하지 않으면 틔워 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들었는데 세 모퉁이에서 반향하지 않으면 되풀이하지 않는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무릇 사단이란 정이며 칠정 또한 정입니다. 같은 정인데 왜 사단과 칠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습니까? 보내 주신 글에서 말씀하신 대로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무릇 이와 기는 본래부터 서로 따르면서 본체를 이루고, 서로 기다리면서 작용이 됩니다. 참으로 이가 없는 기란 있을 수 없으며, 기가 없는 이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분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그와 더불어 이야기하면 지초나 난초의 향기가 사람에게서 풍기는 것 같고 기상은 비 개인 후인 가을 하늘이요, 얕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과 같아 인욕을 초월한 사람’ 양팽손
유림 - 전6권 세트2천5백 년 유교의 역사를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작가 최인호가 유교의 역사와 유교가 찬란히 꽃피운 인문과 문화, 시대가 낳은 동양의 대사상가들을 특유의 대담하고 거침없는 문장으로 되살려 놓았다. 유교의 기원인 공자에서부터 유교의 완성자인 퇴계, 유가 사상을 잇는 제자백가들의 행적과 사상이 시공을 초월해 펼쳐진다.
사단의 발현에 대해 맹자가 이미 마음이라 했습니다만, 마음이란 진실로 이기의 합입니다. 그런데도 강조점이 주로 이에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어짊•의로움•예의바름•지혜로움의 성은 순수하게 사람 속에 존재하는데, 사단이 그것의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칠정의 발현에 대해 주자가 “본래 당연한 법칙이 있다.” 했으니, 칠정에도 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강조점이 주로 기에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바깥의 사물이 가까이 다가오면 쉽사리 감응하여 먼저 움직이는 것으로 형기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칠정이 바로 그 형기의 싹이기 때문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무릇 의리의 학문이란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마음을 크게 먹고 눈을 높게 둔 다음 절대로 먼저 한 가지 이론에 얽매이지 말고, 마음을 비우고 편안한 기분으로 속깊은 뜻을 차근차근 살펴야 합니다. 같은 것을 보더라도 다른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하고, 다른 것을 보더라도 같은 점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둘로 나누더라도 나누기 전의 본래 뜻을 해치지 않아야 하며, 하나로 합치더라도 서로 제멋대로 섞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치우침 없이 두루 알게 되는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무릇 사람의 정은 하나입니다. 그리고 정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습니다. 다만 맹자는 이기가 오묘하게 합쳐진 속에서 오로지 이에서 발현하여 언제나 선한 것만을 가리켜 말했으니, 사단이 그것입니다. 자사는 이기가 묘하게 합쳐진 속에서 섞여 있는 것을 말했으니 정에서 진실로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것, 칠정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이 바로 “강조점이 같지 않다.” 하는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그런데 칠정이라는 것은 비록 기에 의해서 간섭받는 것 같지만 이 또한 스스로 그 속에 있습니다. 칠정이 발현되어 절도에 맞는 것이 곧 하늘이 준 성이요 본연의 실체로서, 맹자가 말한 사단과 실질은 같으면서 이름만 다른 것입니다. 발현되어 절도에 맞지 않게 된 것은 기가 부여하는 사물에 대한 욕망이 작용하여 성의 본연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지난번에 “칠정 바깥에 따로 사단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것은 바로 이것을 이른 것입나다. 그리고 “사단과 칠정이 애당초 두 가지 뜻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것도 이것을 이른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호광중에게 답한 글] 에서 말하기를 “이천 선생은 ‘하늘과 땅에 쌓여 있는 정기 가운데 오행의 빼어남을 얻은 것이 사람이니, 그 근본은 참되고 고요하다. 아직 발현되기 전에는 오성을 갖추었으니 어짊•의로움•예의바름•지혜로움•신실함이 그것이다. 형기가 생기면 바깥의 사물이 형기에 닿아 안에서 움직이는데, 안이 움직이면 칠정이 나오니 기쁨•노여움•슬픔•두려움•사랑함•미워함•하고픔이 그것이다. 정이 너무 왕성하여 방탕해지면 성이 뚫린다’ 했다. …”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공경에 근거하여 경전을 연구하고, 묵묵히 생각하며 스스로 터득하여, 본성을 높이고 덕을 기른다면, 이와 기가 뒤섞인 하나라서 본체와 작용, 움직임과 고요함 사이에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대학자의 비루하지 않은 겸손, 학문을 대함에의 존엄
첫째, 그대의 말에 본래 잘못이 없는데 제가 착각하여 엉뚱하게 논한 것 둘째, 그대의 편지를 받고서 제 말이 마땅하지 않음을 깨달은 것 셋째, 그대의 편지 내용이 제가 들은 것과 근본이 같아서 다름이 없는 것 넷째, 근본은 같지만 다르게 나아간 것 다섯째, 의견이 달라서 끝내 따를 수 없는 것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다만 칠정을 사단과 댓구로 놓아 각각 나누어 말한 것은, 칠정과 기의 관계가 사단과 이의 관계와 같이, 발현할 때 각각 나름의 흐름이 있고, 제각기 따로 가리키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주된 바에 따라 이와 기에 나누어 붙일 수 있다고 한 것뿐입니다. 저도 칠정이 이와 전혀 관계없이 바깥의 사물이 우연히 서로 모이고 붙을 때만 감응하여 움직인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단이 사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도 진실로 칠정과 다르지 않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단지 사단은 이가 발현하여 기가 따르는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현하여 이가 타는 것일 뿐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황은 말합니다 : 순수한 이이기 때문에 언제나 선하고 기를 겸했기 때문에 선악이 있습니다. 이 말은 본래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아닙니다. 알아듣는 이는 같은 데 나아가서 다름을 알고, 또한 다름으로 인해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째서 못 알아듣는 이가 잘못 아는 것을 걱정하여 이치에 맞는 말을 없앨 걱정을 합니까?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정성서]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쉽게 발현하고 제어하기 어려운 것으로는 노여움이 으뜸이다. 그런데 노여울 때 서둘러 서둘러 그 노여움을 잊고 이의 옳고 그름을 보면 또한 바깥의 유혹이 미워할 만한 것이 못됨을 보게 될 것이다.” 했습니다. 쉽게 발현하고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입니까 기입니까? 이라면 어째서 제어하기 어렵겠습니까? 오직 기이기 때문에 갑자기 내달려 부리기 어려울 따름입니다. 또한 노여움이 이의 발현이라면 어찌하여 노여움을 잊고 이를 본다고 하겠습니까? 오직 기의 발현이기 때문에 노여움을 잊고 이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로써 기를 제어하는 것을 말함이니, 제가 이 말을 인용하여 칠정이 기에 속한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 어째서 원래 뜻과 다릅니까?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이름 붙여 말할 때에 성정의 실제와 조금 맞지 않아 편치 않다고 했던 곳은 그대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아니면 스스로 깨달아 이미 고쳤습니다. 고쳐서 편치 않은 부분을 빼고 나서 보니, 의미와 이치가 밝게 통하고 맥락이 분명하여 창틈으로 들어오는 맑고 투명한 빛과 같아서, 입 속에 죽을 한 입 가득 떠 넣듯 뭉뚱그려 넘어가는 병집이 거의 없습니다. 존성의 공부에 대해 감히 주제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아마 크게 잘못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그러므로 진정한 강직함과 진정한 용기는 기세 높여 자신의 주장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을 고치는데 인색하지 않고 의를 들으면 바로 따르는데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주자가 “무극이면서 태극이다.” 하고 말한 곳에 이르러서는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은 하나처럼 되어 버려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근본이 되기에 부족하고,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적막한 공에 빠져버려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근본이 될 수 없다.” 했습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이치를 보려면 깨달아 아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고 이치를 설명하려면 완벽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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