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보르헤스 읽기] 『또 다른 심문들』 1부 같이 읽어요

D-29
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아홉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네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극단적으로 느리게 읽는 모임입니다😀 『또 다른 심문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1부의 산문들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번역도 찬찬히 살펴보면서 천천히 읽겠습니다. ⏤너새니얼 호손 93 ⏤상징으로서의 발레리 128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관한 수수께끼 132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 139 ⏤체스터턴에 대하여 146 ⏤맨 처음의 웰스 153 ⏤『비아타나토스』 159 ⏤파스칼 167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174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 181 ⏤도서 예찬에 대하여 186 ⏤키츠의 나이팅게일 195 ⏤수수께끼들의 거울 202 ⏤두 권의 책 209 ⏤1944년 8월 23일 자 기사 217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이전 모임에서 워낙 게으름을 피우느라 읽지 못한 15개의 텍스트를 이어서 읽겠습니다. 사실 한참 전에 다 읽기는 했지만 어떤 말을 써야할지 뒤늦게 고민하다가 모임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제가 이 보르헤스 읽기 모임을 지속하는 데는 거창한 목적이 없습니다. 이 모임은 실시간으로 진행될 테지만 나중에라도 홀로 책을 읽게 될 사람을 상상하면서 만들었습니다. 아마 다들 이 책을 읽으면서 뜻모를 미진함이나 해소되지 않는 갑갑함을 느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이 모임이 조그만 이정표가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혼란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너새니얼 호손] 미국 문학의 특유의 환상성을 고찰한 에세이입니다. 일찍이 융(Jung)은 문학 창작이 꿈의 창작일 뿐 아니라 문학이 곧 꿈이라고 말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 오래된 은유에서 너새니얼 호손이라는 소설가의 삶과 그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구한 문학적 내력을 고찰합니다. 이미 17세기 스페인의 공고라는 자신의 시에서 '꿈이야말로 극작가'라고 말했고, 과거 페르시아의 오마르 하이얌도 비슷한 은유를 든 적이 있습니다. 세계사란 범신론에서 말하는 무수한 신들이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획하고 공연하고 관람했던 한 편의 연극이었다는 것입니다. 문학은 무의식이 연출하는 꿈과는 조금 다르며, 의도적이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근원적으로 완벽히 통제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꿈의 한 갈래입니다.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문학사는 꿈이라는 거대한 판게아에서 떨어져나온 한 조각입니다. 우리는 문학이라는 판게아 안에서 국적을 가리지 않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은 거의 12년간 은둔하면서 환상 소설에 탐닉했습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적 히키코모리의 원형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히키코모리의 은둔이 무언가를 향한 극도의 '부정' 혹은 '거부' 행위를 나타낸다면, 호손의 은둔은 상상의 세계를 넓히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런 상상력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은둔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알레고리에 빠져들었는데요, 변변찮은 아동 문학이랄 게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이미 여섯 살 무렵에 ⟪천로역정⟫을 읽었습니다. 참고로 18-19세기에 ⟪천로역정⟫은 영미권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구원을 추구하는 인간의 여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알레고리 소설입니다. 심지어 그가 값을 치르고 산 첫 번째 책은 에드워드 스펜서의 알레고리 서사시 ⟪페어리 퀸⟫이었습니다. 하물며 ⟪성경⟫은 말해 뭐할까요? 1842년 에드거 앨런 포는 호손의 단편에서 드러나는 알레고리 경향을 비판했습니다. 소설은 독자에게 즉각적이고 강렬한 인상을 줘야 한다는 것이 비판의 논지였습니다. 알레고리 소설은 이야기를 두 가지 층위로 구분하고, 표면적인 이야기 뒤에 도덕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숨기는 다소 뻔한 구조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때 독자는 소설을 있는 그대로 즐기지 못하고 그 뒤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는 일종의 번역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숨겨진 의미라는 것도 청교도적인 경직성이 드러나는 도덕적 설교에 불과하기에 결국 이야기는 교훈성이 지배하게 됩니다. 직관적인 예술성은 사라집니다. 포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If the allegory ever establishes a fact, it is by dint of overturning a fiction.” 번역하면 "알레고리는 허구를 희생하는 대가로 진리를 확보한다"입니다. 이런 포의 알레고리 비판은, 훗날 호손을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됩니다. 보르헤스의 에세이는 이런 비판 앞에 마주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고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 글을 쓴 목적 두 가지를 밝힙니다. "첫 번째는 알레고리라는 장르가 과연 정당한가 하는 문제이고, 두 번째는 호손의 이야기들이 알레고리인가 하는 문제이다." 먼저 보르헤스는 알레고리를 둘러싼 유구한 논쟁사를 불러옵니다. 바로 알레고리를 비판한 크로체, 그리고 그것을 옹호한 체스터턴의 주장을 살펴봅니다. 크로체는 포와 비슷한 논지를 폅니다. 알레고리란 "가면 무도회"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 '피곤한 수수께끼'이자 '불필요한 동어반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를테면 ⟪신곡⟫에서 단테는 서사상으로는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인도를 받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기실 단테는 우리네 영혼이고 베르길리우스는 철학이나 이성이나 자연의 빛에 대응하며, 베아트리체는 신학이나 은총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는 '작품이 진정 이렇게 도식적인 구조로 짜여졌는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하며, 실상 도식적인 것은 작품이나 알레고리 자체가 아닌 이런 해석은 아니었을까 물어야 합니다.) 과연, 크로체의 알레고리 비판을 두고 체스터턴은 '언어의 자의성'으로 응수합니다. 현실은 무한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그런 '압도적인 규모'의 현실을 담아내기에 언어는 어떤 식으로든 미진하다는 것입니다. 알레고리를 경유하든 아니든 언어는 모두 "자의적인 장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어가 어떤 식으로든 자의적이며 관습적인 기호 체계라면 알레고리라고 해서 유독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어디도 없습니다. 일상 언어나 알레고리나 똑같이 언어의 자의성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오히려 알레고리가 권장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현실은 압도적인 규모이기에 그것에 대응하는 부분적이고 개별적인 진리와 수단이 우리에게는 '전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칼은 도구이며 그 용도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언어도 마찬가지여서 일상 언어가 필요한 순간이 있다면 알레고리가 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 현실은 ⟪화엄경⟫에 나오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와 다르지 않아서, 다만 자기 위치에서 더듬는 다양한 손이 있을 따름입니다. 코끼리의 거칠거칠한 꼬리를 만지는 손은 무용하고 단단하고 매끄러운 상아를 만지는 손은 유용하다고 말할 근거는 어디도 없습니다. (99) “사람은 자신의 영혼 속에 가을 숲속의 색깔들보다도 더욱 더 다채롭고 훨씬 더 무한하며 뭐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색깔들이 들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 무수한 색깔들이, 뒤섞여서 변해버렸음에도, 투덜대는 소리와 괴성으로 가득한 자의적인 장치를 통해서 정확히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 주식 중개인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는 소리들은 하나같이 신기에 가까운 기억력과 조바심으로 가득한 번민을 담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훗날 체스터턴은 파악할 수 없는 현실에 어떻게든 상응하는 언어가 있을 수 있다고 추론한다. 그 여러 가지 가운데 알레고리와 우화의 언어도 있다.
체스터턴은 말합니다. 세상에는 "특별한 감정, 내적 감정, 혹은 일련의 유사한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무언가가 있으며, 그것은 두 개의 기호로 제시될 수 있다고요. 모두 파악할 수 없는 현실에 대응하는 수단으로서 언어는 반드시 하나일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단테에게 '베아트리체=신앙'이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단테는 '베아트리체'로도, '신앙'으로도 오롯이 환원되지 않는 제삼의 무언가를 설득하려고 '베아트리체와 신앙'을 말했을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씁니다. "알레고리는 단순한 도식이나, 차갑고 추상적인 유희로 환원되지 않을 수록 더 훌륭하다는 것을 안다."(100쪽) 알레고리를 비판하는 쪽의 주장과 달리, 성공한 알레고리는 A를 말하기 위해서 B라는 동의어를 내세우지 않으며, A나 B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다층적인 '무언가'를 표현하기 위해서 A와 B를 모두 말합니다. 이때 표현된 '무언가'는 A로도 B로도 환원되지 않습니다. 앞서 ⟨케베도⟩에서도 언급한, 좋은 메타포의 정의를 떠올려보세요. 좋은 메타포란, 서로 다른 두 가지의 동화가 아닌 두 이미지의 충돌입니다. 두 관념 사이에 위계를 두지 않고 내/외를 구분하지 않습니다. "A는 B다"라고 말할 때도 A는 B에게 봉사하지 않으며, B 역시 A에게 봉사하지 않습니다. 다만 A와 B는 서로로 인해 풍성해질 따름입니다. 물론 호손의 모든 작품에서 이렇게 성공한 알레고리만 있었다고 말하기는 힘듭니다. 도식적인 작품도 분명 있습니다. 보르헤스도 인정합니다. 호손은 "상상한 것 하나하나를 우화로 탄생시켜야 한다는 청교도적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재미난 상상력을 발휘하였으며, 청교도적 도덕률에 매여 있지 않은 채 순수한 환상을 확보했습니다. 호손은 "상상과 현실의 접촉"을 선호했습니다. 이 역시 유구한 역사적 내력이 있습니다. ⟪일리아스⟫에서 헬레나가 짜는 직물이 곧 전쟁과 그 전쟁이 초래할 불안이며 ⟪아이네이스⟫에서 아이네이아스는 어느 신전의 대리석 석판에서 자신이 참전한 전쟁 장면을 목도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술이 현실의 반영물이자 복제품임을 확인합니다. 보르헤스는 호손이 이런 메타픽션의 장치 안에서 "한 사람은 곧 모든 사람"이 되는 범신론적 관념으로 기울었음을 봅니다. 호손의 소설에는 고유한 특징이 엿보입니다. 여느 소설가가 '인물'을 재현하기에 힘썼다면, 호손은 인물보다는 상상력이 우선인 사람이었습니다. 조지프 콘래드가 ⟪빅토리⟫에서 '스콤버그'라는 역동적인 인물을 창안했고,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라는 불멸의 인물을 고안해낸 것과 달리, 호손은 상황을 먼저 떠올리고 거기에 걸맞은 인물을 떠올렸습니다. 그렇기에 호손 작품의 백미는 등장인물보다는 서사와 그 구조에 눈길이 더 쏠릴 수밖에 없는 단편 소설입니다. 그중에서도 보르헤스는 단편 ⟨웨이크필드⟩를 으뜸으로 꼽습니다. 마치 12년 동안 은둔했던 자신의 인생을 연상케하는 기이한 이야기입니다. 요약하면, 어느날 아무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고 떠났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가까이에 거처를 정한 뒤,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장장 20년을 숨어 지낸 어느 영국인의 이야기입니다. 흥미롭게도 우리는 이 이상한 이야기에서, 훗날 카프카와 멜빌이 만들어낸 "수수께끼 같은 형벌과 불가해한 죄악의 세계"를 봅니다. 오늘 우리는 카프카가 호손보다 연대기적으로 후대의 인물임을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함부로 카프카가 호손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호손과 카프카 이후를 살아가는 현재 우리의 관점이 문제시되는 탓입니다. 현재의 관점에서, 19세기 호손은 20세기 카프카를 경유해서 읽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보르헤스는 연대기적 영향 관계를 뒤집습니다. 20세기 초의 카프카의 단편이 그토록 성공적이었으며 그러한 성공을 우리가 알기에, 그 이전의 인물인 호손의 단편에 우리가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지 물어야 합니다. 카프카의 독해로 인해서 호손의 독해가 더욱 풍성해졌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카프카는 ⟨웨이크필드⟩ 읽기를 수정하고 정련한다."(111쪽) 과거는 현재에 영향을 미치지만, 모든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며, 외려 좋은 현재는 과거를 재발견하게 한다는 전복적인 문학적 영향관계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잠정적으로 결론 내립니다. "위대한 작가는 선구자들을 창조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과 달리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선형적인 시간관을 기반으로 사고하며, 과거를 고찰하면서도 자꾸 그 영향관계를 '논증'합니다. 보르헤스는 과거를 살펴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인정하면서, 19세기 호손의 성공과 실패를 섬세하게 조명합니다. 호손은 1844년 ⟪지구라는 홀로코스트⟫(Earth's Holocaust)라는 문제적인 소설을 발표합니다. 이 알레고리 소설에서 인간들은 "불필요한 축적"에 지친 나머지 과거 자체를 일거에 말소하기에 이릅니다. 20세기라는 역사를 배워서 아는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달리 읽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홀로코스트'라는 단어에 씌인 그늘을 지나치게 잘 알기 때문입니다. 20세기 나치가 체계적으로 행했던 유대인 말살 행위를 의미하는 고유명사이기 때문이죠. 하지만 1844년에 이 단어에는 지금과 같은 그늘이 없었다는 점을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홀로코스트는 종교적 번제(燔祭)를 일컫는 단어로, 그리스어 "holokauston"에 유래합니다. 풀어보자면 "holos"는 '완전한'이란 의미이고 "kauston"은 '태우기'라는 의미입니다. 합치면 '완전한 소각'이며, 종교적 의미의 정화(淨化)를 의미합니다. 호손은 소설에서 세상의 모든 축적물을 불태우면서도, 악마로 대변되는 한 남자를 등장시켜서 이렇게 말하도록 합니다. "사람의 마음, 마음, 그것은 모든 죄악의 진원지인 작지만 무한한 구체다." 여기서 우리는 관념론으로 개진될 수 있는 여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호손은 '마음'이라는 '작지만 무한한 구체'를 발견하고도, 칼뱅주의적인 해석, 즉 '원죄'로 끌려가고 맙니다. 모든 문제는 인간의 타락한 마음에 있기에 영적이고 종교적인 회개만이 진정한 해결책이라는 종교적 해석에 소설을 국한시키고 만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 '마음이 무한한 구체'이고 '세계가 정신적인 실재'라면, 우리는 물질적인 파괴를 넘어 언제든 세상을 재건할 수 있다는, 에머슨이 ⟨역사⟩에서 보여준 방식으로 나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찌보면 청교도의 혈통을 물려받은 호손에게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선조들의 죄의식이 그로 하여금 글에 몰두하도록 만들었지만, 계속해서 글을 써서 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행위는 다시 한번 죄의식을 유발했습니다. 소설은 재현의 수단이고, 달리 우상을 짓는 행위였으며, 환영에 매달린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호손이 찾아낸 타협안이란, 자신의 우화에 교훈성을 삽입하는 것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호손의 작품이 도덕적 목적을 추구했다고 해서 그의 작품이 무익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옹호합니다. 진정 재능있는 작가라면 '의도'를 넘어서는 지점을 반드시 글로 구현해냅니다. ⟪대리석의 신상⟫에서 우리는 호손이 무의식적으로 '꿈의 논리'를 노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소설의 '구멍'은 지옥의 입구이고 원초적 두려움이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간이며 그런 시간조차 묻어버리는 영원을 모두 일컫습니다. 이것은 꿈과 같습니다. 꿈속에서는 하나가 여러 가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전 호손이 남긴 방대한 일기 역시 그가 '꿈'에 탐닉했음을 알려줍니다. 헨리 제임스는 호손의 방대한 일기에 혀를 내두르면서 "반갑기는 하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편지"라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평가야말로 호손이 꿈꾸고자 하는 세계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호손은 자신을 사로잡은 비현실감과 환영에서 놓여나기 위해서 그 많은 일기를 썼을 것입니다. 그가 발표한 작품은 저 방대한 일기의 분량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습니다. 마가렛 풀러 여사는 호손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대양 속에서 우리는 고작 몇 방울만 얻었을 따름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문학 창작과 꿈의 창작을 동일시하는 융의 발언으로 되돌아옵니다. 보르헤스가 보기에 미국 문학은 환상적입니다. 미국 문학은 모사하기보다는 창조하는 힘을 지녔고, 관찰하기보다는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실주의를 표방하는 모파상을 갈망하면서도, 상상력과 환상에 의존하는 위고는 비교적 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을 선망하는 법이니까요. 훗날 등장한 포크너도 미국 특유의 환상성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그가 묘사하는 지옥이란 환상적인 방법을 따르며, 그 점에서 포크너는 호손이라는 미국 문학의 계보를 따릅니다. 눈을 감으면 계속해서 이어지는 꿈속 상황들처럼 미국 문학은 호손이라는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호손은 단순한 청교도적 도덕률과 교훈성에만 매달렸던 작가가 아닙니다. 그는 무의식적인 꿈의 논리를 따른 독창적인 작가였습니다. 카프카를 경유하여 읽는 호손은 이처럼 매혹적입니다. 두말할 것도 없이 호손의 시대에 카프카는 없었고, 두 사람은 서로 존재도 몰랐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영향 관계를 논증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겁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호손은 카프카 없이 독해되기 어려우며, 카프카를 경유해서 읽는 호손은 이렇게나 풍성합니다. 마치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프란체스카를 통해서 고찰해보는 신앙의 의미가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호손은 카프카를 알지 못하는 카프카였던 것입니다.
결국 포럼은 구멍은 다중의 상징, 서로 병립하기 어려운 온갖 가치들을 내포하는 하나의 상징인 셈이다. 이성이나 논리적 사고로 판단하자면 이와 같은 다양한 가치가 일대의 혼란을 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나름의 독특하고 비밀스러운 규범을 갖는 꿈에서는 그렇지 않을 뿐 아니라, 꿈이라는 모호한 영역 속에서는 하나도 여럿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꿈의 세계가 바로 호손의 세계이다. 호손은 "일관성도 없고, 기이하며, 꿈꾸려는 의도조차 갖지 않은" 진짜 꿈같은 꿈을 글로 써내기로 하면서, 지금껏 아무도 이와 유사한 시도를 해 보지 않았다는 데 놀라움을 드러냈다. 이 별난 계획, 우리의 "근대" 문학이 시행해 보려 했지만 모두 무위에 그쳤고, 오로지 루이스 캐럴만이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계획을 기록해 두었던 바로 그 일기장에 그는 소소하고 구체적인 사안들, 즉 암탉의 움직임, 벽에 비친 나뭇가지의 그림자 등에서 느껴지는 세밀한 인상들 수천 가지를 적어 놓았다.
또 다른 심문들 122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상징으로서의 발레리] 오늘날 '시인'의 상징이 된 윌트 휘트먼과 폴 발레리를 살펴봅니다. 흥미롭게도 두 사람은 시인의 두 상징적인 유형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일견 서로 상반되는 특징을 보여줍니다. 보르헤스가 말하길, 발레리는 "사고(思考)의 미로"를 인격화했다면 휘트먼은 "육체의 감탄사"를 인격화했습니다. 나아가 발레리가 "유럽적인 황혼"을 상징한다면 휘트먼은 "미국적인 여명"을 상징합니다. 먼저 우리가 아는 문인 휘트먼은 ⟪풀잎⟫에 등장하는 범미국적 화자인 휘트먼과 구분됩니다(작가≠화자). 휘트먼은 ⟪풀잎⟫에서 직접 가보지 못한 미국의 여러 지역을 배경으로 시를 썼습니다. 시의 말미에는 “Brooklyn, 1855”, “Washington, 1865”처럼 구체적인 지명과 날짜를 덧붙였고 이를 일종의 문학적 장치처럼 활용했습니다. 그 지명을 살아가는 화자를 내세우고 시 전체를 한 권에 아우름으로써 미국 전체를 대변하는 보편적인 화자를 창조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까지 휘트먼은 "미국의 시인"으로 불립니다. 반면 발레리는 조금 달랐습니다. 발레리는 너무도 발레리 자신이었으며, 테스트 씨는 발레리의 도플갱어나 다름 없었습니다(작가=화자). 오늘날 우리가 테스트 씨에게서 보는 것은 발레리의 강한 개성에 다름 아닙니다. 테스트 씨는 '정신적인 덕목'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순수한 지성의 화신이며 감정 없는 관찰자였고 완벽에 가까운 자기 인식을 지녔습니다. 눈치 챘겠지만 보르헤스가 이 에세이에서 더욱 주목하는 시인은 후자, 즉 발레리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발레리가 살았던 20세기라는 특수한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20세기는 여러 면에서 테스트 씨라는 시적 화자를 부각하는 시의적절한 배면이었습니다. 보르헤스는 20세기를 두고 "저급한 낭만주의가 판치는 시대"라고 평합니다. "나치즘과 변증법적 유물론이 지배하는 우울한 시대"이자, "프로이트의 추종자들이 예언을 일삼고 초현실주의라는 장사꾼들이 활보하는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이성적인 조류 속에서도 발레리는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지적 명료함과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지 않는 개인의 이성을 역설하는 테스트 씨를 제시했습니다. 휘트먼이 의도적으로 시집 전체에서 개성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범미국적인 화자를 설득해냈다면 발레리는 강한 개성을 지닌 인물을 앞세워서 혼돈스러운 20세기에 이성의 가치를 제시했습니다. 한편 이 에세이의 마지막 한 단락은 매우 섬세하게 읽혀야 합니다. 이제껏 보르헤스는 발레리에 필적할 개성을 갖춘 작가는 드물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발레리가 지녔다는 '개성'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작가로서 강한 자아를 내세우는 것과는 방향이 다릅니다. 앞서 휘트먼이 다양한 화자를 내세우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개개인의 개성을 부각하지 않음으로써 범국가적인 화자를 창조해낸 것처럼, 발레리 역시 "자아의 제각기 다른 특징을 뛰어"넘어서 감정과 편견을 제거한 순수한 지성으로서 테스트 씨를 제시함으로써 마찬가지로 보편성을 획득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휘트먼과 발레리가 만나는 모습을 봅니다. 셰익스피어가 문학사적으로는 강력한 개성을 지녔지만, "그는 자기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 완벽히 투명한 존재가 됨으로써 보편적인 창조력을 발휘한 것처럼요. 결국 휘트먼과 발레리는 개인성을 초월하여 특정한 개성이 갇히지 않는 화자를 창조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폴 발레리는 죽었지만 우리에게 한 인간으로서의 상징을 남겨준다. 모든 사실에 무한히 민감하고, 모든 사실에서 영감을 받아 무한대에 가까운 사유를 펼쳐낼 수 있는 한 인간의 상징을. 자아의 제각기 다른 특징을 뛰어넘는 한 인간의 상징을, 그리고 윌리엄 해즐릿이 셰익스피어를 두고 말했듯이 "그는 자기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He is nothing in himself)"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의 상징을. 그리하여 발레리의 경탄할 만한 텍스트들은 그가 지닌 전방위적 가능성을 모두 드러내지 못하며, 심지어 정의 내리지도 못한다. 피와 땅과 열정이라는 혼돈스러운 우상을 숭배하는 시대에, 그는 언제나 명료한 사고가 주는 즐거움과 질서를 구축하는 비밀스러운 모험을 선호했던 한 인간으로서의 상징을 남겨준다.
또 다른 심문들 131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 관한 수수께끼] 11세기 페르시아의 천문학자였던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를 19세기에 번역해서 되살려놓은 영국 시인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의 얘기입니다. 먼저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이 에세이는 시대를 초월해서 한 정신을 오늘날 옮겨놓는 번역 행위에서 범신론적인 뿌리를 발견합니다. 11세기 프르시아의 니샤푸르에 살았던 오마르 하이얌은 천문학, 대수학, 변증법 따위를 연구하면서도 방대한 시를 틈틈이 남겨서 유명해졌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작품은 7세기 뒤 영국의 한 외골수스러운 영국인에게 재조명받으면서 그 문학적 명맥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19세기 피츠제럴드는 돈키호테에 매료되어, 온갖 언어를 공부하다가 11세기 페르시아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일련의 흐름에서 오늘날 우리는 한 위대한 영혼이 수세기를 뛰어넘어 영욕과 유위전변의 세월 거쳐서 다른 육신으로 옮겨간 것을 목도하게 됩니다. 보르헤스는 "위대한 작가는 선구자들을 창조한다"고 말했습니다. (앞서 ⟨너새니얼 호손⟩에서도 살펴봤고, 이후에 읽을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에서도 보게 될 겁니다.) 이는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오마르 하이얌은 영혼의 윤회를 믿었지만, 여기서 윤회는 반드시 시간순으로만 전개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무한히 펼쳐져 있는 문학적인 계보 안에서 한 명의 작가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 과정은 자신의 전생을 사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피츠제럴드의 전생은 오마르 하이얌입니다. 이렇게 "어쩌다 시를 창작하게 된 페르시아의 천문학자"와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동방의 책과 스페인의 책을 탐독한 영국 출신의 괴짜"는 7세기라는 시간을 건너뛰어서 조우함으로써 전에 없던 시인을 만들어냅니다. 이렇듯 문학적 결합은 화학적이며 결코 되돌릴 수 없습니다. 19세기 피츠제럴드가 번역한 오마르 하이얌은 11세기의 오마르 하이얌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19세기 피츠제럴드와도 같지 않습니다. 번역 작업은 이렇게 역동적입니다. 흔히들 '번역'이라고 하면, 이미 정해진 원문을 좇기만 하는 창작의 부산물쯤으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번역은 단순히 어떤 일을 수임하고 결과를 산출하는 기계적인 행위라고 할 수 없었으며, 자신의 정신적 DNA를 사후적으로 창조하는 일로 여겨져 왔습니다. 아무 작품이나 번역할 리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의 특정 작품을 선정하고 번역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작품의 중요성을 담보하며, 번역가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드러냅니다. 그렇게 원전보다 뛰어난 원전을 창조해낸 번역가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천일야화의 유구한 번역가들이 그랬고, 오마르 하이얌을 번역한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그랬습니다. 범신론적 관점에서 보면, 번역이라는 행위는 자신의 전생을 선택하고 탐구하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번역가는 자신이 번역할 과거를 선택할 수 있기에,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는 계보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이때 번역가는 과거-현재-미래로 순차적으로 이어지는 시계열을 따르지 않으며, 오히려 적극적으로 시간을 거슬러가면서 자기 과거를 선택하고 참조함으로써 창조를 이룹니다. 다시 말하지만 번역은 기계적으로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행위가 아니며, 자신의 선구자를 창조하는 역동적 수단인 것입니다. 한편, 피츠제럴드가 번역한 11세기의 ⟪루바이야트⟫는 안팎으로 자기 존재의 이유를 설득하고 있습니다. 책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세계사란 범신론에서 말하는 무수한 신들이 자신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기획하고 공연하고 관람했던 한 편의 연극이라는 겁니다. 범신론은 오로지 신이 실재이며 그 여남은 것들, 즉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세계는 신의 표현이거나 유추일 따름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오마르 하이얌과 에드워드 피츠제럴드는 범신론과 윤회론 안에서 한 명의 작가로 모아집니다. 반복하지만, 피츠제럴드가 번역한 ⟪루바이야트⟫는 오마르 하이얌의 그것과 다르며, 그렇다고 해서 피츠제럴드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제삼의 무언가입니다. 이렇듯 번역물은 원전과 복잡하고 역동적인 관계를 맺습니다. 보르헤스가 작가로서 명성을 알리기 한참 전부터 번역가이자 편집자였다는 사실에 유념하세요. 어쩌면 번역과 편집이라는 행위야말로 우리 삶에 알게 모르게 스며 있는 범신론의 한 가지일 수도 있습니다. 번역과 편집은 과거를 살았던 한 위대한 정신이 오늘날 거듭 되살아나야 할 이유를 이미 보여줍니다.
이 시는 자기들의 왕 시무르그를 찾아 길을 떠난 세 떼에 대한 신비로운 서사인데, 새들은 일곱 개의 대양을 건너 마침내 왕이 사는 궁전까지 날아오르지만, 알고 보니 그들 모두가 시무르그이며, 시무르그는 그들 모두이자 각각의 새 한 마리 한 마리였다는 걸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또 다른 심문들 135-136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오스카 와일드에 대하여] 오늘날 사람들에게 오스카 와일드는 멋지게 차려입고서 넥타이를 맨 '멋쟁이 시인'의 이미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의 작품을 묘사할 때 가장 빈번하게 들먹이는 단어도 '유미주의'나 '퇴폐주의' 같은 것들입니다. 흔히들 와일드 하면, 자신의 모든 작품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패턴이 있다고 주장하는 휴 베레커 같은 인물을 떠올리거나, 극도의 엘리트주의적이고 상징적인 시를 썼던 독일의 슈테판 게오르게를 떠올립니다. 물론 이런 주장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 오스카 와일드는 화려한 기교를 아낌없이 뽐낼 수 있는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고전주의자였습니다. 누구보다 고전적인 전통을 계승하고자 했던 작가였던 것입니다. 혹자는 오스카 와일드가 상징주의자였다고 말합니다. 레베카 웨스트는 와일드가 본디 반부르주아적이었던 퇴폐주의 운동에 "중산층의 인장"을 찍었다면서, 악의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와일드가 순수한 예술적 반항 운동을 부르주아적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여주듯, 와일드는 슈보브나 말라르메와 친교했는데, 그것을 보여주듯 그의 시에서 보여지는 단어는 학문적으로 엄선되었다는 인상을 주며 장엄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보르헤스는 그렇게 간단히 와일드를 상징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왜냐면 그의 산문이나 시는 굉장히 간결한 편이라는 것입니다. 와일드는 당대의 뛰어난 상징주의자들과 친교했고 그들을 더러 칭송하기도 했으나, 그는 상징주의로 파고들기보다는 대중과 소통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교 면에서 힘을 뺀 와일드의 스타일이야말로 위대함을 담보하는 것입니다. 그의 몇몇 작품에서도 보듯 그는 얼마든지 기교적인 산문과 시를 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흔히들 ‘purple patch’라고 하는 화려하고 장식적은 문체를 배제할 줄도 알았습니다. 리케츠와 헤스키스 피어슨과 같은 비평가들은 ‘purple patch’라는 표현이 오스카 와일드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기실 해당 표현은 2000년 전 고대 로마의 호라티우스의 ⟪시학⟫에 이미 등장한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보라색'은 극도로 희귀한 염료로만 구현이 가능했기에 화려함과 사치와 과시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에 호라티우스는 쓸데없이 장식적인 구절을 일컬어 ‘purple patch’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오스카 와일드가 해당 표현이 사용된 문맥을 정확히 알고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고전적인 인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요구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제공했습니다. 대중에게는 감상적인 희극을 제공했고, 소수의 예술가들에게는 언어적 아라베스크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말미에 보르헤스는 오스카 와일드와 체스터턴 경을 비교하면서 다음 에세이를 이렇게 예고하고 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이름은 허허벌판 위에 세워진 도시들을 떠오르게 만들고, 그가 누린 영광은 형벌과 옥살이와 직결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는 기본적으로 행복의 맛이 묻어난다. 이와는 반대로, 강건한 신체와 정신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체스터턴의 값진 작품은 늘 악몽이 되어 버릴 여지를 지니고 있다. 악마적인 것과 공포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낫다고 생각되는 부분마저도 독자를 경악으로 몰고 가니 말이다. 체스터턴이 유년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 어른이라면, 와일드는 온갖 불운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순수함을 지켜 가는 어른이다.
또 다른 심문들 144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체스터턴에 대하여] 체스터턴이 문학적 생애 전반에 걸쳐서 일종의 카프카적인 악몽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라는, 다소 독특한 해석을 내놓는 에세이입니다. 체스터턴은 19세기 라파엘전파가 재현한 '이상적인 중세의 이미지'를 신봉했던 가톨릭 신자였습니다(간략히 라파엘전파란 15세기 초 르네상스로 돌아가고자 했던 19세기 영국의 미술 사조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런던을 "작고, 희고, 깨끗"한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흔히들 체스터턴을 휘트먼과 묶어서, '존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견지했던 낙관적인 가톨릭 작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보르헤스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체스터턴을 볼 때, 그가 표면적으로 내비친 신념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가 인생 전체에서 보여준 경향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체스터턴이 악몽적인 것에 푹 빠져 있었다는 것은 작품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그는 "경악에 찬 천지의 창조를 상정"했으며, 무시무시하고 기괴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눈이 세 개인 사람을 내세우고, 날개가 세 개인 새를 등장시키며, 사면이 거울로 된 감옥을 묘사하고, 새를 잡아먹고 잎사귀 대신 깃털이 돋아나는 나무를 상상합니다. 체스터턴의 작품에는 에드거 앨런 포나 프란츠 카프카가 어른거립니다. '나'라는 수렁 속에는 뭔가 악몽으로 변하려는 것이 들어 있으며, 우리 인격 속에는 은밀하고 맹목적인 구석이 있다고 믿는 겁니다. 체스터턴은 일견 낙관적인 가톨릭 교도의 삶을 내세웠지만 내심 카프카적인 몽상에 이끌렸기에 그의 문학적 밑바닥에는 이 두 가지가 늘 긴장 상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 내면적 투쟁이 상징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브라운 신부의 모험담이며, 각각의 이야기는 "이성에 기대어 설명할 길 없는 사실들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이성'이란 가톨릭적인 믿음입니다. 에세이의 말미에서 보르헤스는 체스터턴이라는 문학적 과실의 겉껍질과 과육을 말합니다. 표면적으로 체스터턴은 가톨릭 교도로서 17세기 청교도인의 고전인 ⟪천로역정⟫의 서사를 따릅니다. 즉 고난을 거쳐 구원에 이르는 여정에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진정 그의 마음 깊숙한 곳에는 카프카의 단편소설 ⟨법 앞에서⟩가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극도의 아이러니와 악몽 같은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좀더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감히 체스터턴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했으며, 속으로 늘 갈망하던 것과 다른 것을 바라는 척 하면서 헛물켜는 세월을 보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체스터턴의 문학적 성취란 오히려 정통적인 가톨릭 교도의 옷을 입고서 카프카적인 것을 갈망했다는 데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체스터턴은 카프카가 아닌 체스터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습니다.
체스터턴은 휘트먼처럼 존재한다는 자체가 너무 경이로워서 어떠한 불행을 겪더라도 범우주적 차원의 감사함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체스터턴이 그렇게 믿었다는 것은 사실이겠지만, 체스터턴을 그렇게만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좁게 보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 사람의 신념이란 일련의 정신적, 감정적 여정의 종착지일 따름이며 한 인간은 인생의 과정 전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하는 것이다.
또 다른 심문들 147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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