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s Search For Meaning

D-29
그믐 가입 후 첫 싱글챌린지
화제로 지정된 대화
싱글챌린지는 자신이 직접 정한 책으로 29일간 완독에 도전하는 과정입니다. 그믐의 안내자인 제가 앞으로 29일 동안 10개의 질문을 던질게요. 책을 성실히 읽고 모든 질문에 답하면 싱글챌린지 성공이에요. 29일간의 독서 마라톤, 저 도우리가 페이스메이커로 같이 뛰면서 함께 합니다. 그믐의 모든 회원들도 완독을 응원할거에요. 계속 미뤄 두기만 했던 책에 도전해 볼 수 있는 싱글챌린지! 자신만의 싱글챌린지를 시작하고 싶은 분들은 아래 링크로 접속해 주세요. https://www.gmeum.com/gather/create/solo/template
싱글챌린지로 왜 이 책을 왜 선택했나요?
20여년전부터 지인들에게 전해 듣거나 온라인서점, SNS에 뜨는 인상적인 문구들을 저장하면서 관심을 가져왔던 책인데 정독 완독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몇달 전부터 김새섬님의 팟캐스트를 듣다가 올해가 가기 전에 꼭 정독 완독을 하고 싶어 싱글 챌린지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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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8-10) 저자는 서문에서 자전적인 이야기를 기록한 <제1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체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이론적으로 다룬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의 기존 내용 구성에 책의 이론적인 결론을 갱신하려고 1984년 개정판에는 <3부 비극 속에 서의 낙관>를 추가했다고 하면서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3부 제목은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붙여진 것이라고 소개한다. (P. 16 )고든 W. 올포트 (Gordon W. Allport)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추천의 글에서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프랭클 박사는 크고 작은 고통으로 고생하고 있는 환자들의 대답 속에서 정신과 치료에 중요하게 적용될 수 있는 어떤 지침들을 발견하곤 했다면서 …조각난 삶의 가느다란 실오라기를 엮어 하나의 확고한 형태를 갖춘 의미와 책임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프랭클 박사가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실존적 분석', 즉 로고테라피의 목표이자 과제이며… 프랭클 박사는 로고테라피를 창안하는 계기가 됐던 프랭클 박사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P. 17) 고든 W. 올포트 (Gordon W. Allport)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추천의 글 중에서 바로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의 중심적인 주제와 만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 줄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 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P. 18) 고든 W. 올포트 (Gordon W. Allport) 하버드 대학 심리학과 교수 추천의 글 중에서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강제수용소에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뿐이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그중에 적어도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듦으로써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하는 인간의 능력을 보여 준 사람들도 있었다. <제1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에서 정신의학과 의사였던 저자는 수용소 죄수로서 강제수용소에 수용되면서 단계적으로 겪게 되는 충격, 무감각, 혐오, 모멸감, 굶주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에 대한 체험을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P. 69)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P. 70)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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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1) 그때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 내가 깨달은 것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사랑은 영적인 존재, 내적인 자아 안에서 더욱 깊은 의 미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았든, 아직 살았든 죽었든 그런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P. 72)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 일들을 회상했다. 그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작은 해프닝이나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 향수 어린 추억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들었으며, 때로는 이상한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게도 했다. 그들의 세계와 그들의 존재가 현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움을 향해 먼 과거로 달려갔다. 이렇게 내적인 삶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예술과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껴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체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때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끔찍한 상 황을 완전히 잊기도 했다. (P. 74) 곧 닥쳐 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덮은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다.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나의 질문 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찬 대답을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붙이 들 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Et lux in tenebris lucet.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P. 76) 강제 수용소 안에서의 예술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간에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 사람들이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 (P. 77) 나는 지금도 아우슈비츠에서 맞은 두 번째 밤을 생생하게 기억 한다. 그날 내가 왜 깊은 잠에서 깨어났는지를. (•••) 바이올린이 흐느끼듯 토해내는 애끓는 탱고 선율이 조용한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 바이올린이 흐느끼는 소리에 나도 덩달아 흐느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다른편 막사 어딘가에 누워있는 아내의 24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었다. (P. 77) 강제 수용소에서의 유머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P. 78)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 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P. 80)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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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P.86 ~ P. 87)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 떼처럼 무리 지어 -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로 떨어져 - 다니게 된다. (…) 양떼인 우리들은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 났다. (…) 가장 절박한 자기 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도…) 우리는 나치 대원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나 혼자만의 공간 ((P. 88) 모든 일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 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소위 말하는 '요양소로 옮긴 후, 나는 한 번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흔치 않은 행운을 누리게 됐다. (…) 시신 여섯 구를 보관하려고 기둥 몇 개와 나뭇가지를 엮어서 세운 임시 천막에 배수관으로 통하는 구멍의 나무 뚜껑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냥 앉아서 꽃이 만발한 초록빛 산등성이를 바라보거나 철조망의 마름모꼴 그물눈 안에 들어가 있는 먼 바바리아의 푸른 언덕을 바라보았다. 나는 간절하게 꿈을 꾸었다. 그러면 내 마음은 북쪽에서 북서쪽, 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다. 옆에 있는 시체, 이가 득실거리는 그 시체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번호로만 취급되는 사람들 (pp. 90~91) 수용소에서 사람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 중요한 것은 번호뿐이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 그 '번호'의 생명은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 번호 이면에 있는 것, 즉 그의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 된다. 그의 운명과 그가 살아온 내력 그리고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 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운명의 장난 (P. 91) 아우슈비츠에 있을 때 나는 나 자신을 위한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자 내 동료들도 모두 이 규칙에 따랐다. 나는 대체로 모든 종류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하는 편 이다. 하지만 딱 꼬집어서 질문을 받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 (P. 95)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됐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죠.“ 운명을 가르는 결정 (P. 96)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 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 - 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 - 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pp. 96~99) 저자 역시 운명을 가르는 결정을 해야 하는 고통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 전선이 수용소에 가까이 왔을 때 의사 출신 동료와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 마지막 순간 결연한 태도로 탈출시도를 번복한 이후(…) 탈출을 꿈꾸고 계획하던 내내-의사로서 환자들을 돌보는 내내 불편했던 감정이 사라졌고, (…) 그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pp. 91~103) 저자는 수용소에서 생존자로 풀려나기까지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까지 체험했던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듯한 여러 에피소드들을 기술한다. -수용자들이 자기 자신을 구하고자 발버둥쳤지만, 결국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인 여러 (엇갈린 운명과도 같은) 에피소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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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감각의 원인 (pp. 103~106) 수감자들의 무감각이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는 것 외에 여기에는 또 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굶주림과 수면 부족(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이 무감각 상태로 그들을 이끌었으며, 수감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조함이 이런 무감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 니코틴과 카페인 부족도 이런 무감각과 초조함의 원인이 됐다. 물질적인 요인 외에 정신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 고열에 시달리는 환자에게서는 무감각 증세가 더욱 심하게 나 타났다. 그들은 고함을 지르지 않으면 전혀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 (pp. 107~108)강제 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수용소 체험으로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P. 109)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시련의 의미 (P. 110)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나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 (P.114)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글로 쓰거나 이야기할 때, 당시 가장 절망적이었던 것은 얼마나 오랫동안 수용소 생활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얘기한다. (…) 한 저명한 연구 전문 심리학자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이런 삶을 ‘일시적인 삶provisional existence‘ 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자면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P. 115)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 혹은 완성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 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 현상을 볼 수 있다. (…)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 - 내면의 시간 -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 수감자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 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P. 117)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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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p. 118)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 병리적 상처를 정신 요법이나 정신 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 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p. 119) 내가 실제로 경험했던 일이 생각난다. (…) 강추위 속에 극심한 통증을 겪으며 긴 행렬에 끼어서 수용소에서 작업장까지 몇 킬로미터를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동안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하찮은 일들만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자신이 역겹게 느껴졌다(…)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려서(…)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고, 그 앞 청중들은 푹신한 의자에 앉아 <강제 수용소에서의 심리 상태>에 대한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p. 120) (…) 스피노자는 그의 《윤리학)에서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그 자신의 미래 -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pp. 121~122) 언젠가 나는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이런 위험한 자포자기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아주 극적인 사례를 보았다. (…)꽤 유명한 작곡가이자 작사가였던 우리 구역의 고참 관리인 F의 사례(…) 1945년 2월에 F가 꾼 꿈 속에서 소원을 말 하라는 어떤 목소리가 3월 30일에 수용소에서 해방되고 고통이 끝날 것이라고 답변을 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 3월이 막 시작했을 무렵 희망에 차 있었던 F는(…) 약속의 날이 다가와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였을 때(…) 3월 29일 갑자기 F는 아프기 시작했고 3월 30일에 의식을 잃었고, 3월 31에 사망했는데,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발진 티푸스였다. (p. 122) 인간의 정신 상태-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 -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 티푸스균에 대항하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됐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됐다. 살아야 할 이유 (pp. 123-125)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자기 삶에 더 이상의 (…)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 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 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 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 각각의 상황들은 그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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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p. 126)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 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됐다.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릴케는 마치'작업을 왼수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라 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자살 방지를 위한 노력 (p. 128)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 낼 수 있다. 집단 정신 치료의 경험 (p. 128) 행동을 통해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대개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인 법이다. 하지만 어떤 때는 말이 더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 어떤 외부 조건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폭이 넓어졌을 경우이다. (p. 132) 나는 내 동료(꼼짝도 않고 누워 있다가 가끔 한숨을 쉬던)를 향해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삶은 의미를 갖는 일을 절대로 멈추지 않다는 것. 삶의 무한한 의미에는 고통과 임종, 궁핍과 죽음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어둠 속에서 내 말에 열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는 불쌍한 신의 피조물들에게 우리가 처한 가혹한 현실에 과감하게 직면하자고 했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누군가가 - 친구나 아내, 산 사 람, 혹은 죽은 사람, 혹은 하느님 - 각각 다른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그 사람은 우리가 자기를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의연하고 비굴하지 않게 시련을 이겨내고, 어떤 태도로 죽어야 하는지 알기를 바란다고. 수용소의 여러 군상 (p. 133) 정신 의학자들이 자주 받는 질문(…) 그것은 수용소 감시병들의 정신 상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p. 134) 첫째, 감시병 중에는 사디스트, 정신 의학적인 의미에서 정말로 순수한 사디스트가 있었다. 둘째, 이 사디스트들은 아주 잔인한 감시병이 필요한 경우에 선발됐다. 셋째, 대다수 감시병들은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넷째, 감시병 중에서도 우리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반드시 밝혀 둘 필요가 있다. (p. 136)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으며, 고매한 인격을 가진 부류와 미천한 인격을 가진 부류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었다. 두 부류의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 모든 집단에 있다. 착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 악한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순전히 한 부류’의 사람들로만 구성된 집단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인간의 영혼을 파헤치고, 그 영혼의 깊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난 인간성에서도 선과 악의 혼합이라는 인간 본연의 특성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해방의 체험 (pp. 137~140) 이제 강제 수용소에서의 정신 의학,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됐다. 풀려난 사람들의 심리이다. 해방의 체험을 얘기하는 것은 당연히 개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극도로 긴장했던 며칠이 지 난 후 수용소 정문 위에 흰 깃발이 펄럭였던 그날 아침의 경험담 중에서 하나를 소개. 정신적 흥분 상태에 이어 전체적인 긴장 이완 상태가 찾아왔다.그러나 우리가 미친 듯이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피곤한 발걸음으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수용소 밖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보았다. (…) 우리는 천천히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 자유인의 눈으로 그전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수용소 주위를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 현실이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드디어 꽃이 만발한 초원에 이르렀다. 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았지만, 거기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불꽃 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 것은 꼬리에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단 수탉을 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 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 이렇게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 의학적인 용어로 '이인증depersonaliz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 육체는 마음보다 거부감이 적은 법이다. 육체는 처음부터 새롭게 얻은 이 자유를 잘 활용했다. 드디어 우리 육체가 게걸스럽게 먹어 대기 시작한 것이다. 몇 시간 동안, 며칠 동안 그리고 심지어는 한 밤중에도 우리는 먹었다. 한 사람이 먹어 치우는 음식의 양이 심히 놀라웠다. 우리 중 어떤 사람은 이웃에 있는 친절한 농부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 갔는데, 거기서도 그는 먹고 또 먹고 그리고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혀를 풀리게 했다. 그는 몇 시간 동안 이야기하고 또 했다. 몇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짓누르던 중압감이 마침 내 사라진 것이다. (…) 나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심한 중압감(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신경과민 상태)을 겪은 사람이 이와 유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을 보았 다. 혀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응어리도 함께 풀리는 데에는 여러 날이 걸렸다. 그런 다음에는 감정이 그것을 억압하고 있던 기이한 속박으로부터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pp 141~142)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며칠 동안 견뎌야 했던 극도의 정신적 긴장(예 를 들어 게슈타포의 혹독한 심문 같은 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길이 아무런 장애 없이 순탄했던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사람에게 더 이상 정신적 치료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잘 못된 생각이다. 그렇게 심한 정신적 압박을, 그렇게 오랜 시간 받았던 사람에게는 자유를 얻은 후에도 그전과 똑같은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특히 정신적 억압 상태에서 갑자기 벗어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위험은 정신 위생학적인 의미에서 일종의 잠수병과 같은 것이다. 깊은 물속에서 일하던 잠수부가 엄청난 압력을 받고 있다가 갑자기 밖으로 나올 때 가장 위험한 것처럼, 엄청난 정신적 억압을 받다가 갑자기 풀려난 사람은 도덕적, 정신적 건강에 손상을 입을 위 험이 크다. 이런 심리적 단계에서 원색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야만성의 영향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그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됐으니 이 자유를 마치 특허를 받은 것처럼 잔인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이제는 억압받는 쪽이 아니라 억압 하는 쪽이 됐다는 것뿐이다. 그들은 이제 폭력과 불의의 대상이 아니 라 그것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겪었던 끔찍한 경험으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이런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 자주 발생한다. (…)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비통과 환멸 (pp. 143~144) 정신적 억압에서 갑자기 풀려났을 때 도덕적 결함을 보이는 현상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성격에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두 가지 기본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왔을 때 겪게 되는 비통함과 환멸이다. 비통함은 그가 살던 마을로 돌아왔을 때 부딪히는 여러 가지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는 사람들이 자기를 보면 그저 어깨를 으쓱하거나 상투적인 인사치레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점점 비통해지면서 자기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 모든 고통을 겪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환멸을 경험하는 것은 이와는 또 다른 문제다. 여기서 그가 환멸을 느끼는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그토록 잔인해 보이는 운명 그 자체이다. 몇 년 동안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시련과 고난의 절대적인 한계까지 가 보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직도 시련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시련에는 끝이 없으며 앞으로도 더 많은 시련을 더 혹독하 게 겪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 그들의 상투성과 감정 결핍이 너무 혐오스러워서 마침내 구멍으로 기어들어 간 것처 럼 사람들을 더는 보려고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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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pp. 150~151) 로고테라피는 환자의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말하자면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말이다." 동시에 로고테라피는 정신 질환을 일으키는 데 아주 커다란 역할을 하는 악순환의 고리vicious circle formation 와 피드백 기제feedback mechanism를 약화시킨다. 그렇게 해서 정신 질환 환자에게 전형적인 자기 집중 증상이 발생하고 심화되는 것을 막는다 (…) 물론 이런 설명이 지나치게 단순화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실제로 로고테라피에서는 환자가 삶의 의미와 직접 대면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렇게 환자 스스로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도와주는 것이 정신병을 극복할 수 있도록 환자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된다. (…) 이 이론에 왜 '로고테라피Logotherapy’ 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 로고스Logos는 ‘의미'를 뜻하는 그리스어이다. 로고테라피 혹은 다른 학자들이 '빈 제3정신 의학파'로 부르는 이 이론은 인간 존재의 의미는 물론, 그 의미를 찾아 나가는 인간 의지에 초점을 맞춘 이론이다. 로고테라피 이론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고자 하는 노력을 인간의 원초적 동력으로 본다. (…) 로고테라피를 프로이트 학파가 중점을 두고 있는 쾌락의 원칙이나 아드리안 학파에서 '우월하려는 욕구'로 부르는 권력에의 추구와 대비시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pp. 151~152) 인간이 의미를 찾고자 하는 마음은 그 사람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우러나오는 것이지 본능적인 욕구를 2차적으로 합리화시키려고 생기는 것은 아니다. 이 의미는 유일하고 개별적인 것으로 반드시 그 사람이 실현시켜야 하고, 또 그 사람만이 실현시킬 수 있다. 그렇게 해야만 의미를 찾고자 하는 그 자신의 의지를 충족시킨다는 의의를 갖게 된다. 실존적 좌절 (pp. 153~154)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 의지도 좌절당할 수 있다. 이것을 로고테라피에서는 '실존적 좌절'이라고 한다. 여기서 '실존적'이라는 단어는 다음 세 가지 의미로 쓰일 수 있다. 1. 존재 그 자체, 즉 인간 특유의 존재 방식 2. 존재의 의미 3. 각 개인의 삶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찾아내려는 노력, 즉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실존적 좌절 역시 정신 질환을 초래할 수 있다. 정신 의학에서는 그동안 심인성 노이로제psychogemic neurosis라고 했지만,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누제닉 노이로제 noogenic neuross라고 부른다. 누제닉 노이로제는 병의 원인을 심리적인 것에 두지 않고 인간 실존의 정신론적 차원에 둔다. 이것이 인간 고유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또 다른 로고테라피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누제닉 노이로제 (pp. 154~155) 누제닉 노이로제는 욕구와 본능의 갈등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실존적인 문제 때문에 생긴다. 그 원인 중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이 제일 큰 비중을 차지한다. 누제닉 노이로제의 경우, 로고테라피가 일반적인 심리 요법보다 더 적절하고 완전한 치료법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치료법은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과감하게 들어간다. (실례: 빈 주재 미국의 한 고위 외교관 치료사례) (…)갈등을 겪는다고 해서 다 신경 질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의미에서 고통 역시 모두 다 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고통이 실존적 좌절 때문에 생긴 경우에는 그것을 신경 질환 증세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성취로 보아야 할 것이다. (…) 실존적 좌절 그 자체는 병적인 것도 병원적인 것도 아니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것에 대한 절망도 실존적 고민이지 정신 질환이 아니다. 후자의 견지에서 전자를 해석하다 보면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절망감을 한 웅큼의 신경 안정제로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의사의 역할은 이런 것이 아니다. (…) 의사는 환자의 실존적 위기를 통해 그가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정신의 역동성 (pp. 157~159)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기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라는 니체의 말에서(…)정신 치료에도 유용한 어떤 좌우명을 찾을 수 있다.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well-being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 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 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경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 환자의 정신 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 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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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적 공허 (pp. 160~162) 실존적 공허는 20세기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현상 중 하나이다. (…) 이는 인간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이 된 후에 겪어야 했던 두 가지 손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 인간은 (…) 본능에 따라 행동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동물적 본능을 잃어버린 것이다. (…) 근래 들어 인간은 또 다른 상실감을 맛보게 됐는데, 그것은 그간 자기 행동을 지탱해 주던 전통이 빠른 속도로 와해 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때는 스스로도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정도가 됐다. 그 결과 남이 하는 대로 따라 하거나(동조주의) 아니면 남이 시키는 대로(전체주의)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 실존적 공허는 대개 권태를 느끼는 상태에서 나타난다. 인간은 고민과 권태의 양극단을 끊임없이 오가도록 운명 지어진 존재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이해가 갈 것이다. 실제로 요즘은 고민보다는 권태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더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이 문제 때문에 정신과 의사를 찾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확실하다. 이 문제는 (…) 새로 얻게 된 한가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른다는 데 있다. (예: ‘일요병', 내면적 공허감이 밀려오면서 삶이 무의미하다 느끼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등) (…) 현대 사회에 만연해 있는 우울증과 공격성, 중독증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면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실존적 공허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예: 연금생활자나 나이 든 노인들이 느끼는 위기감 등) (…) 게다가 이런 실존적 공허는 가면을 쓰거나 위장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권력욕으로 좌절을 대신 보상받으려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주 원시적인 형태의 권력욕인 돈에 대한 욕구도 포함된다. (…) 한편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좌절된 곳에 쾌락을 추구하는 의지가 대신 자리 잡는 경우도 있다. 실존적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성적 탐닉에서 보상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삶의 의미 (pp. 163~164) (…)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존재의 본질 (pp. 164~167) 로고테라피에서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로고테라피의 행동 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로고테라피는 환자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한다.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해, 혹은 누구에게 책임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환자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 (…) 환자가 자기 삶의 과제를 사회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아니면 자기 양심에 대한 책임에서 찾을지 판단하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 로고테라피 치료사가 하는 일은 화가보다는 안과 의사가 하는 일에 가깝다. (…) 안과 의사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해 주려고 노력한다. 로고테라피 치료사의 역할은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장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잠재되어 있는 의미의 전체적인 스펙트럼을 환자가 인식하고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psyche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 지었다. (…)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 자아실현은 자아 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 삶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두 번째 방법은 어떤 것- 선이나 진리, 아름다움을 체험하는 것, 자연과 문화를 체험하거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을 유일한 존재로 체험하는 것,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의 의미 (pp. 167~168) 사랑으로써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돼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사랑을 소위 승화라는 의미에서의 성적 충동이나 본능의 단순한 부수 현상(일차적 현상의 결과로 발생하는 현상) 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 사랑을 섹스의 부산물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시련의 의미 (pp. 168~172)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운명or 상황에 대한 태도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 의미를 발견하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로고드라마 (p. 175) 임종의 순간을 맞아 과거를 돌아본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갑자기 자기 삶이 갖고 있는 의미, 그녀의 고통까지 포함된 자기 삶의 의미를 볼 수 있게 됐다. 초의미 (p. 176) 이런 (…인간이 겪는 시련의…) 궁극적인 의미는 인간이 지닌 지적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이것을 초의미super meaning라고 부른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실존 철학자들이 가르친 대로 삶의 무의미함을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닌 절대적인 의미를 합리적으로 터득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로고스는 논리보다 심오하다. 삶의 일회성 (pp. 178~180) (…) 나는 인생에서 정말로 무상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 가능성이라는 말을 입이 닳도록 해 왔다. 가능성은 그것이 실현되는 순간 바로 현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과거로 옮겨 간다. 이렇게 과거로 들어감으로써 일회성을 탈피해 영원한 실체로 보존될 수 있다. (…) 삶의 일회성이 우리 책임 아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이다. (…)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 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반면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 하는 사람은 떼어 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풍부한 내용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반추해 볼 수 있다. (…) ‘(…젊은이에게 놓여있는 잠재…)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기법으로서의 로고테라피 (pp. 180~189) (…) 신경 질환 환자에게 자주 나타나는 증상인 소위 예기 불안 anticipatory anxiety (…) 이 증상의 특징은 환자가 두려움을 느끼면 바로 그 증상이 정말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 (…)공포는 사건의 어머니 (…)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포 때문에 진짜로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그 일을 불가능 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도한 의도, 즉 과잉 의도hyper-intention는 성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환자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 과잉 의도 외에도 지나친 주의 집중, 즉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과잉 투사hyper-reflection 가 발병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한편 로고테라피에서 활용되는 '역설 의도paradoxical intention‘ 기법 (…) 이런 접근법을 통해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비록 잠시 동안이기는 하지만 자기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된다. (…) 이 치료에서는 타고난 유머 감각으로 자기 자신에게 초연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을 활용해야만 한다. 자기 자신을 분리시킬 수 있는 인간의 기본적인 능력은 역설 의도라는 로고테라피 치료 기법이 적용될 때마다 발휘된다. 로고테라피에서 역설 의도 기법이 먹혀 들어 가는 것은 인간에게 이런 거리두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는 자기 병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 볼 수 있게 된다. (…)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예기 불안은 역설 의도로 좌절시켜야 하고, 과잉 의도와 과잉 투사는 역투사의 방식으로 좌절시켜야 한다. 하지만 역투사는 환자가 자신의 삶에 주어진 특정한 과업과 사명을 바라보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자기 연민이든 멸시든 간에 환자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써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다. 치료의 핵심은 환자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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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학도서관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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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나의 인생책을 소개합니다
[인생책 5문5답] 47. 이자연 에디터[인생책 5문5답] 39. 레몬레몬[인생책 5문5답] 18. 윤성훈 클레이하우스 대표[인생책 5문5답] 44. Why I write
한 해의 마지막 달에 만나는 철학자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9. <미셸 푸코, 1926~1984>[책걸상 함께 읽기] #52. <어떻게 살 것인가: 삶의 철학자 몽테뉴에게 인생을 묻다>[도서 증정] 순수이성비판 길잡이 <괘씸한 철학 번역> 함께 읽어요![다산북스/책증정]《너를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니체가 말했다》 저자&편집자와 읽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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