ㅎㅎㅎ 율곡 이이도 정철에게 제발 술 좀 끊고 말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오랜 친구로서 조언했죠..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8.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D-29

borumis

향팔
“ 이 책은 당쟁을 권력현상의 관점에서 접근했다. 하나 더 첨언한다면 그것이 정치적 이상의 이름으로, ‘공론’ 혹은 ‘국시’ 등의 이름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 왜 도덕적, 정치적 이상에 대한 사림의 오랜 집단적 열망이 그들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대한 파국으로 귀결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훌륭한 개인의 인격과 무관하게, 그들의 진정성에 독립하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의 실체는 무엇이었나?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12쪽,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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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리더십’이라는 말은 얼핏 리더 개인의 인간적 특성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리더십은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 집단 구성원이 바람직하게 여기는 혹은 더 우선시하는 가치, 그들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특정한 종류의 권위, 편안하고 익숙한 인간관계의 형식, 집단 내의 당연시되는 의사결정 방식 같은 것들과 더 많이 관련된다. 이것들 모두는 대개 그 집단 구성원들 삶의 누적된 경험에서 나온다. 과거는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34쪽,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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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한마디로 낭천제는 도덕적 측면에서 젊은 낭관들이 대신들에 앞선다는 것을 공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낭천제는 『경국대전』에 나오는 제도도 아니었다. 말하자면 낭관에 대한 도덕적 신뢰가 법제도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후 전개되는 정치적 갈등에서 언관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스스로에게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거기에는 낭천제라는 현실적, 제도적 근거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조정에서 그에 따른 정치세력 변화를 가져왔다. 요컨대, 젊은 사림들에게 부여되었던 도덕적 신뢰가 그들이 갖게 되는 정치적 힘의 기초였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48쪽,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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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
프롤로그에 나오는 ‘수기치인’을 읽으면서, ‘선한 사람이 정치도 잘할 것’이라는 기대는 어느 사회, 조직에서나 자주 어긋난다는 것을 되짚어보게 됩니다. 국가 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사람이 좋고 인품이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동료가 일을 잘하거나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않는 경우를 종종 보기도 하고요.
역사에 등장하는 단어들과 연도들을 어려워하는 제게 이 책은 꼭 같이 읽어야 하는 책이라서 이번 달도 기대가 됩니다. :) 정치적 힘의 실체는 어떤 모양인지 궁금함을 가지고 시작해 볼게요.

부엌의토토
“
여기에 대한 이이의 입장은 단호했다. 논의는 일 자체의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뿐 간관이 한 말인가 아닌가 여부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이이의 주장에 대해서 홍문관 관원들은 "모두 기뻐하지 않았으나 끝내 감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였다." 56쪽
평범하게 지나갔을 수도 있었을 한 미해결 살인사건이 허엽이 개입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되었다. 조원 한 사람을 제외한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 전체가 교체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건은 이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대사헌에서 물러난 김계휘가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좌천성 인사발령이었다. 본래 조선에서는 언관직에 있던 사람을 곧바로 지방 관직에 발령하지 않는 관행이 있었다. 언관을 보호하기 위한 관행이었다. 김계휘가 지방 관직에 임명된 것에는 의미심장한 내막이 있었다. 57쪽
박근원에 대한 세간의 평가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임백령 시호 사건이다.
시호의 충자를 넣지 않은 것은 을사사화에 대한 이들의 정치적 태도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때 박순은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동요하지 않은 모습을 유지했다. 반면에 박근원은 "크게 두려워하여 외척과 권귀들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 일을 들어서 실록은 두 사람의 우열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꼭 기록하고 있다. 60쪽
평범한 하나의 미해결 살인사건이 정치적 사건으로 전환된 직접적 원인은 대사관 허엽이 사간원 이름으로 박순에 대한 추고를 요청하고 김효원의 동의 아래 사헌부가 동조했기 때문이다. 허엽이 박순에 대한 추고를 요청한 것은 규정된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무리한 일이었다. 박순이 맡았던 위관 직책은 죄인을 추구할 때 삼정승 가운데서 한 사람을 임금이 뽑아서 임명하는 임시 직책이다. 더구나 검시 결과가 불분명했을 때 영의정 홍섬이 죄인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박순은 그 주장에 반대했다. 따라서 허엽은 박순이 아니라 홍섬에게 화를 냈어야 마땅하다. 문제에 대한 책임을 박순에게 추국 형식으로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박순에 대한 허협의 개인적 감정을 빼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이 말대로 허엽의 주장은 지나쳤다. 65쪽
류성룡이 당론 발생 원인으로 제시한 "전랑의 천거"란, 김효원의 심의겸에 대한 사적인 감정을, "대신을 추감"하는 것은 허엽의 박순에 대한 사적 감정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사적인 감정에 더하여 두 사람의 주변인들이 그 갈등을 조장했다는 말이다. 류정룡의 진단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갈등의 최초 원인을 제공한 것은 허협과 김효원 측이다. 하지만 류성룡은 이 사건이 결코 두 사람의 의도적인 당파적 목적에서 비롯되었다고는 보지 않았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동서분당' 양상의 마지막 상황, 즉 김계휘의 지방 좌천을 이끌어낸 박근원의 역할이다. 박근원과 허봉의 관계는 구신과 신진 사림 양측이 서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합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것은 몇 년 후에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의 선구적 사례이다. 요컨대 선조 8년 7월부터 4개월에 걸쳐서 전개된 '동서분당' 사태는 이후의 전개될 정치적 갈등 양상의 단초를 보여주었다. 66쪽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1장 선조8~10년 분열의 시작,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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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
“ 이이는 즉위 초에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대신들이 선조에게 잘못된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구신의 수구적 생각이 개혁이 지체되는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오판이었다. 선조는 누구 말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프롤로그, p.30,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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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의토토
“ 낭천제도는 선조 2년 이탁이 이조판서가 되어서 새롭게 실시한 인사추천제도였다. 선조 즉위 초 분위기는 마치 정치 혁신이 진행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구체제 청산이 국정 쇄신의 첫 번째 과제였다. 인사 제도는 핵심적인 개혁 대상이었다.
이후 박순이 이조 판서가 되어서는 "학행이 있는 선비는 곧장 6품으로 나가게 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선조초년에 이탁과 박순이 주도하여 성립시킨 낭천제도는 조정에서 신진사림의 세력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이이는 자신의 《석담일기》에 이때 선조가 낭천을 폐지하도록 한 것에 대해 "임금의 뜻이 (신진)사류의 하는 바를 싫어했기 때문에 하교가 이러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실제로 한 달여 뒤 선조는 직접 인사 전형을 주관하면서 이조에 "과격한 사람을 쓰지 말고 순우한 사람을 힘써 취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젊은 사류에 대한 선조의 부정적 입장 표명이었다. 사실 선조가 가장 싫어한 사람이 '강경하고 과격한 사람'이었다. 물론 자기 입장과 느낌이 기준이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1장47~49쪽,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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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이이는 "위로 국왕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아래로 동료들이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이로서는 조정에서 물러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p.74,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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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 그는 선조 8년 '동서분당'이후 서인의 행위는 물론 잘못됐지만, 작금의 동인 행동은 서인이 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과오임을 지적했다. 그는 서인과 동인은 둘 다 사림이고, 사림은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동인과 서인이 화합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동인 강경파의 생각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p.93,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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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흥미롭게도 이이 역시 면신례를 거부하여 파직된 바 있다. 이이나 김우옹 모 두 조직의 이름으로 개인의 신념을 침해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p.109,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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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팔
“ 그런데 허엽과 김효원 두 사람이 미리부터 정치세력화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 은 당시 상황이 사림 내부의 집단적 갈등 형태로 나타나고 전개되었다는 사실 자체이다. 더불어 주목할 것은 ‘동서분당’ 양상의 마지막 상황, 즉 김계휘의 지방 좌천을 이끌어 낸 박근원의 역할이다. 박근원과 허봉의 관계는 구신과 신진사림 양측이 서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합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것은 몇 년 후에 전면적으로 나타나는 양상의 선구적 사례이다. 요컨대 선조 8년 7월부터 4개월에 걸쳐서 전개된 ‘동서분당’ 사태는 이후에 전개될 정치적 갈등 양상의 단초를 보여 주었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66쪽,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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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 김우옹은 적어도 선조 13, 14년 어느 시기까지는 큰 원칙에서 이이와 생각을 함께했다. 공유한 생각의 핵심은 사림은 하나이고, 서인을 소인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출신 지역이나 그가 속한 인적 네트워크 등의 현실적 조건에서는 동인 중진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동인의 핵심적인 정치적 믿음을 공유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출사와 낙향을 반복하면서 관료보다는 지식인에 더 가까운 정체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때까지만 해도 조직 논리에 매몰되지 않았던 것 같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p.111,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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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G
저자의 페르소나 이이를 둘러싼 재미있는 사연도 하나 투척. 당대 최고 재상으로 칭송받던 원로 정치인 이준경이 있습니다. 이미 20대 때부터 당대 최고 천재로 칭송받으면 매사에 거침이 없었던 30대의 이이를 보면서 이렇게 불평했다고 해요.
틈만 나면 이이를 칭찬하는 친구에게,
"당신이 말한(칭찬하는) 이이는 어쩌면 그렇게 말이 가벼운가?"

stella15
저어.. 궁금한게 있는데요, 저자의 페르소나라 하심은 당대에 이이는 그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그 모든 상황을 봤던 인물이란 말인가요? 아님 저자가 이이를 좋아했다는 말인가요? 당시 이이는 어느 편에 섰던 인물인지 모르겠네요. 국사 공부를 안한지가 하도 오래되나서리...ㅠ

YG
@stella15 아, 의도하진 않았지만 바로 위에 답을 드렸네요. 이이는 중립 지향이었어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stella15 님 말씀 듣고서 제미나이랑 입씨름하면서 정리해 봤어요. 참고하세요.
*
1. 세대 차이와 학파의 미성숙
선배 세대의 퇴장: 붕당이 가시화된 1575년 시점에서 사림의 거두였던 이황(1570년 졸)과 조식(1572년 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서경덕은 그보다 훨씬 전인 1546년에 사망했지요.
후배 세대의 등장: 이이(1536년생)와 성혼(1535년생)은 이들보다 한 세대(약 30년) 아래의 인물들로, 당시 40세 전후의 한창나이였습니다.
학파의 미형성: 따라서 1575년 당시는 '퇴계학파 vs 율곡학파'라는 학문적 대결 구도가 명확히 성립되기 전입니다. 동인은 이황·조식·서경덕의 제자들이 혼재된 연합체 성격이 강했고, 서인은 심의겸을 필두로 한 서울·경기 중심의 기성 사림 명망가들의 정치적 결사체에 가까웠습니다.
2. 이이(율곡)의 초기 위치: '중립'과 '조제(調劑)'
초기의 중립적 조정자: 지적하신 대로 1575년 당시 이이는 서인의 당수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며 동인(김효원)과 서인(심의겸) 사이를 중재하려는 '조제보합(조화롭게 기운을 맞춤)'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두 사람 모두를 외직으로 보내 갈등을 봉합하려 했지요.
서인으로 기운 계기: 이이의 중립 노력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동인 측 강경파들이 이이의 중재안을 '서인 편들기'라고 비판하며 그를 탄핵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이는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점차 범서인 계열로 분류되기 시작했고, 그가 사망한 후 제자들이 서인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서인=율곡학파'라는 등식이 사후적으로 완성됩니다.

stella15
아이고, 고맙습니다! 그러니까 좀 더 감을 잡겠네요. 근데 중립은 중립이어서 힘들었겠네요. 이도저도 아닌 것처럼 보였을테니. 정치에 중립이 가당키나 했겠습니까?

YG
서인과 동인 인물 표도 정리했는데, 이동 중이라서 나중에 공유할게요!

borumis
오! 감사합니다! 안그래도 이제 막 헷갈리기 시작해서 서인 동인 구신 표를 작성해야하나..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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