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완독 축하드립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처음 벽돌책 모임 참여하시면서 일부 해소된 평소 가지고 있었던 궁금증이 어떤 거였을까요?
저는 실은 제 궁금증은 아직 다소 해결이 안 되었는데 라인홀트 니버의 책에서도 실은 완전히 해결이 되지 않았어요.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어떤 실마리를 더 얻어가면 좋겠네요
다음 벽돌책에서도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8.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D-29

borumis

oh
축하감사드리고 여러 문장수집도 감사드려요.
선한 의도가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게 저는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어요. 의도와 결과는 실은 완전 별개의 영역인게 당연하겠지만 그 의도가 선하다면 좀 특별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순진한 생각, 전래동화의 권선징악적 교훈에 여전히 좀 사로잡혀있는편이에요. 머리로는 결과와 무관하게 선을 행해야하는 거라 받아들이면서도요.
그래서 선한 지식인이 왜 나쁜정치를 할까라는 제목에 완전 끌렸죠. 부패한 훈척 대신들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바르고 옳은 일이지만 정치인이라면 악을 비판하고 축출하는데 그치면 안되고 그 지위나 권한을 승계받은 후 실질적 성과를 내고 그 성과에 책임을 져야한다는게 핵심인거죠. 악을 비판하는건 쉽지만 악이 차지했던 자리에 들어가 제대로된 성과를 내는건 완전 다른 영역이죠. 학문적 성과라면 실패도 의미가 있겠으나 정치인이 보여야할 성과는 민생에 대한 것이니 실패는 그냥 나쁜것입니다. 조선의 선한지식인은 선함에 대한 독단과 집착으로 유연성을 잃은채 자신의 신념에 대한 개인적책임에 갇혀 정치인으로서 당연히 더 크게 가져야한 사회적 책임에 둔감했네요. 안타까운건 그들이 사익이나 추구하는 소인배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그럼에도 잘못된 결과를 낼 수 밖에없다는 것.
지식인이 선한의도로 정치를 비판하는것과 그 지식인이 실무를 담당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건 완전히 다른영역이고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는건 별로 놀랄것도 없는 일이구나가 제 결론이에요.
공부는 단순하고 실무는 복잡하죠. 실재를 최대한 단순화 해논게 이론이니까.
제 개인삶에 적용하면 온갖 육아서보며 선한 양육관과 신념을 다졌지만 현실에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실질적 성과(아이의 건강한독립)와 아이에 대한 책임의식이 라는 결론입니다.
선한 부모는 왜 나쁜 양육을 할까로 전환해서 적용해봤어요. 그래서 선한 부모라는 어떤 특정 모습은 지우고(실은 이건 제 만족감을 위한거더군요) 실질성과를 위해 좀더 유연하고 자연스럽게 책임감을 가지고 임하자 다짐했어요. 일단 다짐까지는 했네요

YG
아, '선한 부모는 왜 나쁜 양육을 할까'는 별개의 흥미로운 출판 기획인데요?! :) 처음으로 참여하셔서 함께 읽고 또 좋은 생각도 나눠주셔서 다시 감사드립니다.

borumis
와 맞아요! 정말 여러가지 방향으로 적용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실은 육아서로 무장하고 심지어 정신과 치료와 상담 및 부모교육도 받아봤지만 정작 이게 아이에 대한 실질적 영향을 볼 때는 아주 미미한 것 같았는데 오히려 아이에 대해 신경이 쓸 겨를이 없을 정도로 제 건강과 제 일로 정신이 없어지고 아예 다 손 놓아버리니까 아이가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책임을 져보려고 노력하게 되더라구요. 내 육아/교육 의도도 (실은 교육부의 여러가지 교육 정책의 의도한 바도 그런 듯;;) 아이의 실질적인 성장은 별개의 문제더라구요.

도롱
“ 선조는 동인과 서인의 갈등에서 자신이 어떤 편을 지지한 적이 없고, 이이와 성혼도 단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신하들 추천에 따라 등용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자신은 이이가 오활하고 경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p. 277,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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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
어떤 세력 이 강한 지에 따라 왕도 주장을 순식간에 바꾸는 것이 정치인가 봅니다.

YG
@oh 완독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오래 기억에 남은 책이어서 읽자고 권했었는데 여러 생각을 하신 듯해서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oh
넵^^ 즐거운 고생이었습니다. 다른분들 도움받아가며 제 눈높이에 맞게 앞으로도 잘 따라가볼게요.
밥심
완독 후에 이 책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선한 지식인이란 전제가 맞는건가 하는 문제죠. 과연 조선 선조 대 사림들이 선한 사람들이었나? 장강명 작가님이 <먼저 온 미래>에서 우리는 정의가 불명확한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쓴 대목이 생각나는데 도대체 ‘선하다’의 정의가 뭘까요? 도덕적으로 자신들이 옳고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저놈들은 나쁜 패거리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본능적으로 결국엔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고 믿는 사람이라, 이 책의 제목 전제부터가 잘 못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해
밥심님도 완독 축하드려요:)
(저도 진도 맞춰서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읽으면서 '선하다'의 정의에 대한 말씀이 유독 인상 깊었어요.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고, 본능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유리한 쪽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말씀도요. 잊을만하면 제가 한 번씩 언급하는 새폴스키의 『행동』을 읽을 때, 저도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유전적으로 타고 났다해도 환경과 맞으면 발현되는 거고, 그렇지 않으면 발현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럼 그 사람은 선한 사람인가, 악한 사람인가. 악하게 태어났어도 숨겨질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은(쓰고 나니 무슨 말장난 같네요).
여담이지만요. 제가 몸담고 있는 조직에서도 몇 해 전인가, 토론 주제로 '소통'을 엄청 강조했던 적이 있는데요. 그 토론을 이어가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소통의 정의가 다 다르다는 걸 깨닫고는 소통의 정의부터 다시 정하자고 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게 조직이라는 집단의 정설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하하하).
밥심
소통이라.. 금요일 오후 잖아요. 우선 주말 재밌게 잘 지내고 다음주부터 소통 잘 해보죠. 하하.

borumis
오 밥심님도 완독 축하드립니다!
안그래도 아까 제 해결되지 않았던 질문들 중 하나가 그 '선' 또는 '도덕적'의 정의인데요..
만약에 다른 환경에 다른 사회적 구조라면? 예를 들어 그 선한 정치인이 이이같은 중간 급의 정치인이 아니라 선조처럼 더 위쪽 지도자라면? 상황이 좀 다르게 진행되었을까?
붕당을 화합하는 방법도 중요하고 어려운 문제지만 어떻게 하면 선조를 더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이끌고 갈 수 있었을까?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나 다양한데 반드시 선악 등 도덕적 잣대가 절대적이고 이분화되어야 할까 좀더 진실을 다층적으로 바라보고 선도 다각적인 방법으로 추구할 수는 없을까? 등등 아직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 투성이입니다.
어찌 보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선은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에 중점을 둔 것 같은데.. 사회적 책임 또한 다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의도보다는 결과인 건가.. 하고 고민이 더 생기더라구요..^^;;;
밥심
역사를 보면 우리가 흔히 태평성대라고 불렸던 시기도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그 당시 사람들이 더 선하거나 도덕적이어서가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맞는 정치체제가 잘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 있는 자연/사회 환경이 크게 도움 되었을거구요. 라인홀드 니버의 책은 안 읽어봤지만 개인이나 사회의 도덕성 발현 여부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애당초 도덕성의 정의도 시대에 따라 다를 것 같고요. @borumis 님의 완독 기원합니다!!

YG
@밥심 네,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선함'을 독점한다는 발상 자체가 사실 문제고, 근대 이전(종교)과 이후(이데올로기)에 등장한 수많은 역사적 비극의 근원이었죠. 이정철 선생님도 바로 그런 대목에 꽂히셔서 2016년의 시점에 이 책을 낸 게 아닌가 싶어요. 사실, 저는 2016년뿐만 아니라 그 문제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연해
“ 이원익의 선조에 대한 충은 선조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반면, 이산해의 충은 개인 선조에 대한 추종에 더 가까웠다. 그런 맥락에서 그의 충성은 조선시대에 강조되던 충忠 개념과 달랐다. 오늘날, 국가의 정체政體와 특정 정권은 구분된다. 조선시대에 이는 종묘사직과 금상今上 즉, 현재 왕의 관계와 비슷하다. 이산해는 양자를 구분하지 않았고, 사실은, 그랬기 때문에 선조도 그를 좋아했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p.352,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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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 선조와 이산해 관계는 선조와 이이 관계와는 전혀 달랐다. 말 그대로 이산해는 선조의 종속변수였다. 그는 무언가를 주장하며 선조를 설득하거나 그에게 반발한 적이 없다. 사실 이산해의 행동이 지금의 현실에서는 오히려 익숙하다. 공적이든 사적이든 어떤 조직 안에서 논리와 당위로 상급자와 부딪히는 것을 감수하는 것에는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당연히 이이보다는 이산해 유형의 사람이 많기 마련이다. 공동체의 이상을 위해서 분투하 기보다는 개인의 보상을 위해서 애쓰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p.354,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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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이 대목이 유독 씁쓸했어요.

borumis
맞아요! 정말 예나 지금이나;;

borumis
“ 사건 발생 직후 형성된 정치적 구도와 그것이 작동하는 힘의 방향은 명확하고 강력했다. 이귀의 예견대로 정철은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없었다. 정철은 이귀의 상황 판단에는 동의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일정하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그가 조정에 나갔을 때 상황은 이미 그가 통제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선조가 상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333, 이정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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