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혼자 읽기

D-29
전쟁들은 멱함수 분포를 따르므로, 이 분포의 수학적 특징을 알면 전쟁의 속성과 발생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우선 전쟁 그래프와 같은 지수값을 지닌 멱함수 분포에서는 고정된 평균이 없다. '전형적인 전쟁'이란 없다는 말이다. 즉, 전쟁이 발발하면 우리가 예상하는 어떤 수준까지 사망자가 쌓인 뒤 이후에는 자연적으로 잦아들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평균적으로도 그렇지 않다. 또한 멱함수 분포는 척도가 없다. 로그-로그 그래프의 선을 위로 쫓든 아래로 쫓든, 모양이 늘 직선이다. 수학적으로 말한다면, 단위를 확대하거나 축소하더라도 분포의 모야이 늘 같다는 뜻이다. ... 이 상황을 전쟁으로 바꾸면 이렇다. 사망자 1000명의 작은 전쟁에서 사망자 1만 명의 중간 전쟁으로 갈 확률은 얼마일까? 그것은 사망자 1만 명의 중간 전쟁에서 사망자 10만 명의 큰 전쟁으로 갈 확률과 같고, 사망자 10만 명의 큰 전쟁에서 사망자 100만 명의 기록적인 전쟁으로 갈 확률과도 같으며, 기록적인 전쟁에서 세계 대전으로 갈 확률과도 같다. 마지막으로 멱함수 분포는 '꼬리가 두껍다.' 극단적인 값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존재한다는 뜻이다. ... 세계가 사망자 1억 명의 전쟁을 목격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고, 사망자 10억 명의 전쟁을 목격할 가능성은 그보다 더 낮다. 하지만 핵무기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의 겁에 질린 상상력과 멱함수의 수학이 동의하는 바, 그 가능성이 천문학적으로 낮지는 않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우리는 치명적 싸움들이 척도 없는 분포를 따른다는 점에서 전쟁의 추진력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직관적으로 보면, 그것은 규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싸우는 연합체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심리적 역학, 그리하여 위협, 후퇴, 엄포, 교전, 확전, 버티기, 항복을 결정하게 만드는 게임 이론적 역학은 그 연합체가 거리의 불량배이든, 군벌이든, 강대국 군대이든 다 같게 적용된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로서 연합체를 꾸리고, 그것이 더 큰 연합체로 뭉치고, 그것이 더 커지고, 이렇게 자연적으로 이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차원에서든 연합체는 단 하나의 파벌이나 개인 때문에 전쟁터로 내몰릴 수 있다. 그 개인이 불량배 두목이든, 군사 지도자이든, 왕이든, 황제이든.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멱함수 분포를 낳는) 또 다른 메커니즘은 복잡계 과학이 제안했다. 복잡계 과학은 서로 다른 재료로 만들어졌음에도 비슷한 패턴으로 조직되는 구조들의 법칙을 연구한다. 복잡계 이론가들은 자기 조직적 임계성이라는 패턴을 드러내는 체계에 흥미가 있다. '임계성(criticality)'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최후의 지푸라기와 같다. 작은 입력이 갑자기 큰 출력을 낳는 것이다. ... 모래더미 위에 모래가 졸졸 쏟아지는 상황이 좋은 예이다. 이때 모래더미는 주기적으로 다양한 크기의 사태(沙汰)를 일으키는데, 사태들의 크기는 멱함수 분포를 따른다. 그러다가 경사가 너무 낮아져서 모래더미가 안정해지면 더 이상 사태가 일어나지 않지만,위에서 계속 모래가 졸졸 쏟아지기 때문에 금세 경사가 가팔라지고 금세 다시 사태가 일어난다. ... 그런 모형에서 국가는 이웃 국가를 정복하여 더 큰 국가가 된다. 숲에 떨어진 담배꽁초가 작은 덤불을 태우고 말 수도 있고 큰 산불로 번질 수도 있듯이, 국가들의 시뮬레이션에서 하나의 비안정화 사건이 소규모 충돌을 일으킬 수도 있고 세계 대전을 일으킬 수도 있다. 이런 시뮬레이션에서 전쟁의 파괴력은 교전국들과 그 동맹들의 영토 넓이에 주로 좌우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다르다. 양측의 지속 의지, 즉 상대가 먼저 무너질 때까지 버티겠다는 의지도 파괴력의 차이를 낳는 요인이다. 현대사에서 최악의 충돌들 중 일부는 이런 소모전이었다. 미국 남북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 이란-이라크 전쟁이 그랬다. 양쪽은 전쟁 기계의 아가리에 계속 인원과 군수품을 투입하면서 상대가 먼저 소진되기를 바랐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소모전의 경우, 시간에 따라 비용 감수의 의지가 변하는 지도자를 상상할 수 있다. 충돌이 진행되고 결의가 강화되면 그는 점차 의지가 강해진다. 그의 모토는 이렇다. '우리 병사들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으니, 우리는 계속 싸우리라.' 손실 회피, 매몰 비용의 오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불리는 이런 사고방식은 명백히 비합리적이지만, 사람들의 의사 결정에 놀랍도록 만연한 현상이다. ... 리처드슨의 데이터에는 전쟁이 치명적일수록 교전자들이 더 오래 싸운다는 증거가 있다. 전쟁이 발발한 후 몇 년째에 끝날 확률은 몇 년이 되었든 큰 전쟁보다 작은 전쟁이 더 높았다. 헌신이 증폭되는 현상은 '전쟁 상관관계 프로젝트'의 데이터에서도 드러났다. 긴 전쟁은 단지 길기 때문에 사망자가 많은 것이 아니었으며, 기간으로만 예측한 수준보다 더 큰 피해를 기록했다. ...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전쟁들은 한쪽이나 양쪽 지도자들이 명백히 비합리적인 손실 회피 전략을 고집한 탓에 그렇게까지 파괴적인 경우가 많았다.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 최후의 몇 달 동안, 패배가 자명한 시점을 한참 넘겨서까지 광적으로 싸웠다. 일본도 그랬다. 린든 존슨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 점점 더 많은 자원을 쏟자, 파괴적 전쟁에 대한 대중의 생각을 반영한 이런 노래 가사가 씌어졌다. "우리는 거대한 진흙탕에 허리까지 빠졌네, 그런데도 저 바보는 계속 가라고 하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시스템 생물학자 장바티스트 미셸은 소모전에서 헌신의 확대가 멱함수 분포를 낳을 수 있다고 내게 알려 주었다. 지도자들이 이전의 헌실에 대한 일정 비율을 다음번에 투입한다고 가정하면 된다. 가령 이전까지 투입했던 병력의 10퍼센트를 다음 공세에 투입하는 식이다. 이처럼 일정 비율로 증가시키는 방식은 베버의 법칙이라는 유명한 심리학적 발견과 상통한다. 사람들은 기존 강도에 대해 일정 비율이 넘는 증가분만 알아차린다는 법칙이다. ... 리처드슨은 희생된 목숨도 이렇게 인식된다고 말했다. "평화로운 시기에 신문들은 영국 잠수함 테티스의 손실에 대해 며칠이나 유감을 표했지만, 전쟁 중에는 비슷한 손실을 간결하게만 발표했다. 이런 대비는 사람들이 증가분을 기존의 양에 대해 상대적으로 판단한다는 베버-페히너 원리의 예시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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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18은 유럽에서 폭력적 충돌의 역사를 (임시적이지만) 최대한 살펴본 그림이다. 인구대비로 계산하더라도, 1950년까지 이어진 전반적 상승세가 사라지지 않았다. 유럽의 살상력이 인구 증가를 능가하여 커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유혈적이었던 세 시기가 그래프에서 툭 튀어나와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포함된 사반세기를 제외할 때, 유럽에서 사람이 살기에 가장 위험했던 때는 종교전쟁들이 있었던 17세기 초였다. 다음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포함된 사반세기였고, 그 다음은 프랑스 혁명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였다. 요컨대, 유럽의 조직적 폭력은 대충 이렇게 진행되었다. 1400년대에서 1600년까지는 낮지만 꾸준한 수준으로 충돌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종교 전쟁의 참극이 벌어졌고, 프랑스의 혼란이 지나간 뒤 1775년까지는 충돌이 덜컥대며 잦아들었다. 19세기 중후반은 눈에 띄는 소강상태였다. 그러다가 20세기에 헤모클리즘이 벌어졌고, 이후에는 바닥에 붙을 정도로 유례없이 낮아진 긴 평화가 왔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전쟁은 현실에서 만연했을 뿐 아니라, 이론에서 흔쾌히 받아들여졌다. 하워드에 따르면, 통치 계층 사람들에게 "평화는 전쟁 사이의 짧은 막간"이었고 전쟁은 "거의 자동적인 행위이자 자연의 질서였다." 루어드에 따르면, 15세기와 16세기의 전투들은 사망률이 비교적 낮았지만, "설령 사망률이 높아도 그것이 통치자나 군사 지도자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는 증거는 없다. 사람들은 그것을 전쟁의 불가피한 대가로 여겼고, 그 자체로 명예롭고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성격형질은 다유전자형이기 때문에, 평균으로의 회귀라는 통계 법칙을 따른다. 부모의 용기와 지혜가 제아무리 특출한들 자신은 평균적으로 그보다 못하다는 법칙이다. (비평가 레베카 웨스트가 지적했듯이, 645년 역사의 합스부르크 왕조에서 '천재는 한명도 없었고, 유능한 통치자는 두 명뿐이었고, ...... 얼간이는 무수히 많았고, 저능아와 미치광이도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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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어드는 1559년을 종교의 시대가 개막한 해로 정했다. 이 시대는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전쟁이 끝난 1648년까지 이어졌다. ... 이시대가 살해의 신기록을 세웠던 것은 머스킷 총, 파이크 창, 대포와 같은 군사 기술의 발전 덕분이었지만, 그것이 살육의 주된 원인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기술의 살상력은 꾸준히 향상되었지만 사망자 수는 바닥으로 내려왔기 때문이다. 루어드는 대신 종교적 열정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쟁이 민간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민간인은 (특히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라면) 소모해도 좋은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전쟁의 참혹성과 사망자를 늘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람들은 참혹한 유혈 행위를 신의 분노 탓으로 돌렸다. 알바 대공은 나르던 시를 정복하여 남성 인구를 모조리 죽이고는 (1572년), 그들이 뻣뻣하고 완고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신이 심판을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후대의 크롬웰도 마찬가지였다. ... 이 잔인한 역설 때문에, 신앙의 이름으로 싸우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상대에게 인간미를 보여주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 종교 전쟁은 격렬했을 뿐 아니라 도무지 끝을 몰랐다. 외교사학자 개릿 매팅리는 당시에 전쟁 종결의 중요한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종교 쟁점이 정치 쟁점을 압도하자, 적국과의 타협은 이단이자 배신으로 보이게 되었다. 가톨릭과 개신교를 나누는 문제들은 더이상 타협 가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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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은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이 종교 전쟁을 진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최초의 근대적 국제 질서를 구축했다고 본다. 유럽은 교황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명목상으로 다스리던 복잡한 조각보 지형에서 벗어나 주권 국가들로 구획 지어졌다. 주권 국가 시대에 부상한 국가들은 여전히 왕조와 종교에 얽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부, 영토, 상업적 제국에 국가의 위신을 걸었다. 우리가 지금껏 살펴본 모든 통계에서 드러났던 교차하는 두 경향성, 즉 전쟁의 빈도가 점점 줄되 파괴력은 점점 더 커진 추세는 바로 이때, 주권 국가들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1648년보다 훨씬 더 일찍부터 진행되어 온 과정의 정점에 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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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과 왕조의 시대에, 통치자들은 많은 농민들 무장시키고 전투 훈련을 시키는 것을 당연히 걱정스러워했다. (통치자들이 "혹시라도 잘못되면 어쩌나?"하고 자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대신 임시 변통으로 군대를 모집했다. 용병을 고용했고, 불량배나 건달처럼 돈으로 병역을 회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징집했다. ... 16세기와 17세기에 군사 혁명을 겪으면서, 국가들은 전문적인 상비군을 꾸렸다. 사회 밑바닥 사람들만이 아니라 사회의 위아래를 아울러서 남자들을 모집했다. 반복 훈련, 세뇌, 잔혹한 처벌을 섞어서 그들을 조직적 전투에 맞게 다듬었다. 규율, 극기, 용맹의 기율을 주입시켰다. 덕분에 그런 군대끼리 충돌하면 삽시간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했다. 군사 역사학자 아자르 가트는 군사 '혁명'이 잘못된 이름이라고 본다. 사실은 점진적인 발달이었다는 것이다. 군대의 효율화는 몇 백 년에 걸쳐 그 밖의 모든 것을 효율화한 기술적, 조직적 변화의 일부였다. 어쩌면 전투의 살상력을 바싹 끌어올린 공은 그런 의미의 군사 혁명이 아니라 나폴레옹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나폴레옹은 양측이 병력을 보존하려고 애쓰면서 앉은 자리에서 싸우던 전투를, 동원 가능한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 적을 궤멸시키는 과감한 공격 전투로 바꾸었다. 또다른 '발전'은 산업 혁명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산업 혁명 덕분에 국가는 19세기부터 점점 더 많은 병력을 건사할 수 있었고, 그들을 더 신속하게 최전선으로 보낼 수 있었다. 재생 가능한 총알받이 공급원이 확보되자 소모전 게임이 가능해졌다. 덕분에 전쟁은 멱함수 분포에서 꼬리를 향해 더 멀리 밀려났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루어드는 1789년을 민족 국가의 시대가 시작된 해로 지목했다. 앞선 주권 국가의 시대에 활약했던 국가들은 문어발처럼 뻗은 왕조 제국들이었다. 하나의 고향,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에서의 '민족 국가'로 고정되지 않았다. 반면에 새 시대의 국가들은 민족과의 정렬 관계가 더 깔끔했고, 다른 민족 국가들과 패권을 다퉜다. 민족 국가의 염원 때문에 유럽에서는 독립 전쟁이 30건 벌어졌고, 벨기에, 그리스, 불가리아, 알바니아, 세르비아가 자치권을 얻었다. 그 염원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국가 통일 전쟁도 부추겼다. 한편 유럽인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직 국가적 자기 표현에 적합하지 않다고 간주했으므로, 유럽 민족 국가들은 그들을 식민지화하여 국가의 영광을 드높였다. 이런 체계에서 볼 때, 제1차 세계 대전은 민족주의적 갈망들이 최고조에 이른 사건이었다. ... 루어드는 민족 국가의 시대를 1917년까지로 본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듦으로써 전쟁의 구실이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투쟁으로 바뀐 해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한 해였다.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들어섰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즘에 맞서 함께 싸웠고, 이어진 냉전에서는 서로 싸웠다. 루어드는 1986년에 글을 쓰면서 '1917년~'이라고 뒤를 열어 두었지만, 이제 우리는 '~1989년'이라고 닫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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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이 나왔다는 점 때문에 유럽인은 나폴레옹 시절을 프랑스 계몽주의와 연결 짓지만, 사실 그것은 최초의 파시즘으로 보는 편이 낫다. 나폴레옹은 미터법이나 민법 법전과 같은 소수의 합리적 개혁을 실시했지만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지금도 그 제도들이 많이 살아남았다.), 다른 측면에서는 계몽주의의 인도적 발전을 난폭하게 과거로 되돌렸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권력을 쥐었고, 입헌 정부를 진압했고, 노예제를 다시 도입했고, 전쟁을 미화했고, 교황을 통해 황제 칭호를 받았고, 가톨릭을 국교로 다시 지정했고, 세 명의 형제와 한 명의 매제를 외국 왕위에 앉혔고, 생명을 범죄에 가깝도록 경시하면서 무자비한 영토 확장 원정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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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은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가 민족주의, 그리고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의 결합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 혁명가들에게 칸트의 "영구 평화는 기초적인 도덕률에 합치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역사적 진보에 합치하기 때문에 가치있는 목표였다. ...... 그 때문에 미래 평화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수단도, 심지어 적을 궤멸시키는 전쟁마저도 정당화된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칸트 자신은 이런 반전을 경멸했다. 칸트는 그런 전쟁이 "온 인류의 무덤 위에서 영구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구부러진 나무와도 같은 인간성을 칸트 못지않게 통감했던 미국의 설립자들도 제국적 혹은 구세주적 지도자의 등장에 대해서 바람직한 두려움을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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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5년 빈 회의에서 강대국 정치가들은 향후 한 세기 동안 지속될 국제 관계 체제를 정립했다. 무엇보다도 안정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버크식 보수주의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워드의 관찰을 빌리면, 그 계획가들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의 후예인 만큼이나 계몽주의의 후예였다. 그들은 왕의 신성한 권리도 교회의 신성한 권위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이 엉망으로 어지럽힌 내부 질서를 회복하고 유지하려면 교회의 왕이라는 도구가 필요했기에, 그들의 권위를 모든 곳에서 회복하고 수호해야 했다.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이 주요국 간 전쟁을 더이상 국제 체제에서 불가피한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25년의 사건들은 그 위험을 너무나 잘 보여 주었다." 강대국들은 평화와 질서를 보존할 의무를 졌다(그들은 그 둘을 거의 같게 보았다.). 그들이 결성한 유럽 협조 체제는 국제 연행, 국제 연합, 유럽 연합의 선구였다. 국제적 리바이어던은 19세기 유럽의 장기적 평화에 대해 공로를 인정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안정은 불균질하게 섞인 민족 집단들에게 군주가 강제로 가한 것이었다. 이내 집단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행사하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민족주의였다. 하워드에 따르면, 그것은 "보편 인권에 기초했다기보다는 모든 민족들이 투쟁으로 자신만의 국가를 구축할 권리, 그렇게 생겨난 국가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에 기초했다." 단기적으로는 평화가 딱히 바람직하지 않았다. 평화는 "모든 민족들이 자유로워진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민족들은] 폭력을 사용해 자유를 얻을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의 민족 해방 전쟁은 빈 체제가 예방하려고 했던 바로 그런 혼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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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결'이 위험한 것은, 어떤민족 문화적 집단이 어떤 땅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의 '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나 산과 같은 풍경의 요소와 달리, 사람은 발이 있다. 사람은 더 좋은 기회가 있는 장소로 움직이고, 나중에 친구와 친 척까지 초대한다. 집단들이 섞이면서 풍경은 프랙탈처럼 바뀐다. 소수 집단 내에 소수 집단 내에 소수 집단이 생긴다. 어떤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는 스스로 '민족'을 구현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거주자 중 많은 이들의 이해를 구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정치적 경계와 인종적 경계가 일치하는 세상을 낙원으로 여긴다면, 지도자들은 인종 청소와 민족 통일 캠페인으로 낙원을 앞당기려고 할 것이다. 또한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에의 확고부동한 헌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민족과 정치적 통치자를 동일시하는 제유법 때문에 어떤 국제적 연합이든 (가령 국제 연합 총회가) 우스꽝스러운 모조품으로 변질될 것이다. 시시한 독재자에 지나지 않는 통치자들이 국가들의 동맹에서 환영 받을 테고, 제 국민을 굶기고 가두고 죽이는 데 대한 전권을 인정받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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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류 진보에 필요하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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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서) 겨우 4년 만에 전투에서 860만명이 죽었고, 전체로는 약 1500만 명이 죽었다. 낭만적 군사주의만으로는 이 살육의 향연을 설명할 수 없다. 작가들은 최소한 18세기부터 줄곧 전쟁을 미화했지만, 19세기 나폴레옹 히우에는 전례없이 오랫동안 강대국 간 전쟁이 없었다. 전쟁은 파괴적 흐름들이 일으킨 최악의 폭풍이었다. 마르스 여신의 강철 주사위 때문에 느닷없이 발생한 폭풍이었다. 군사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배경, 강대국들의 신용을 위협하는 갑작스런 명예 경쟁, 지도자들을 겁주어 선제 공격으로 이끄는 홉스의 함정, 저마다 신속한 승리를 자신하는 망상, 막대한 병력을 전선으로 운반할 수 있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파멸의 상황에 이르고야 마는 소모전 게임. 어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운수 나쁜 날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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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와 20세기 초 반전 운동의 두뇌 집단은 존 브라이트 같은 퀘이커 교도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같은 노예제 폐지론자들, 존 스튜어트 밀이나 리처드 코브던 같은 온화한 상업 이론 지지자들, 레오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마크 트웨인, 조지 버나드 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같은 평화주의 작가들, 앤드루 카네기나 (평화상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 같은 산업가들, 많은 페미니스트들, 일단의 사회주의자들(이들의 모토는 '총검을 쥔 자도 맞는 자도 노동자'였다.)이었다. 일부 도덕 활동가들은 전쟁을 회피하고 억제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꾸렸다. 헤이그의 국제 중재 재판소, 전쟁 행위를 토론했던 일련의 제네바 협약 등이었다. ... 반전 운동은 독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주류 정치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으로 여겼다. 누군가는 주트너(오스트리아 소설가로 전쟁의 섬뜩함을 일인칭으로 기술한 소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를 발표)를 "은은한 어리석음의 향기"라고 불렀고, 그녀의 독일 평화 협회를 "남녀 공히 감상적인 자들로 구성된 희극적인 바느질 모임"이라고 불렀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제1차 세계 대전은 서구 주류의 낭만적 군사주의를 끝장냈고, 전쟁이 궁극에는 바람직하거나 불가피하다는 생각마저 끝장냈다. 루어드는 이렇게 지적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쟁에 대한 전통적 태도를 바꾸었다. 더이상 고의적인 개전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유럽이 막대한 인명 및 자원 손실로 비틀거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뮬러가 지적했듯이, 이전에도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큼 파괴적인 전쟁들이 있었지만 그때 국가들은 툭툭 털고 일어나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듯이 재깍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었다. 치명적 싸움의 통계에서도 싫증의 기미는 전혀 없지 않았던가. 뮬러는 이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던 탓이라고 설명했다. 언어로 구체적으로 표현된 반전 운동이 배경에 줄곧 도사리고 있다가 "내가 그렇다고 말했잖아." 라고 나섰다는 점이다. 변화는 정치 지도자들과 문화 전반에서 드러났다. 거대한 전쟁의 파괴력이 분명해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으로 재정의했다. 그 전쟁이 끝나자, 세계 지도자들은 전쟁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앞으로의 전쟁을 막을 국제 연맹을 창설함으로써 희망을 현실화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서투르게만 느껴지는 조치들이지만, 당시에 그것은 과거와의 급진적인 결별이었다. 수백 년 동안 전쟁은 영광스럽고 영웅적이고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군사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그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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