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혼자 읽기

D-29
루어드는 1789년을 민족 국가의 시대가 시작된 해로 지목했다. 앞선 주권 국가의 시대에 활약했던 국가들은 문어발처럼 뻗은 왕조 제국들이었다. 하나의 고향, 언어, 문화를 공유하는 집단이라는 의미에서의 '민족 국가'로 고정되지 않았다. 반면에 새 시대의 국가들은 민족과의 정렬 관계가 더 깔끔했고, 다른 민족 국가들과 패권을 다퉜다. 민족 국가의 염원 때문에 유럽에서는 독립 전쟁이 30건 벌어졌고, 벨기에, 그리스, 불가리아, 알바니아, 세르비아가 자치권을 얻었다. 그 염원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국가 통일 전쟁도 부추겼다. 한편 유럽인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이 아직 국가적 자기 표현에 적합하지 않다고 간주했으므로, 유럽 민족 국가들은 그들을 식민지화하여 국가의 영광을 드높였다. 이런 체계에서 볼 때, 제1차 세계 대전은 민족주의적 갈망들이 최고조에 이른 사건이었다. ... 루어드는 민족 국가의 시대를 1917년까지로 본다. 미국이 전쟁에 뛰어듦으로써 전쟁의 구실이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의 투쟁으로 바뀐 해였고, 러시아 혁명으로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가 탄생한 해였다. 세계는 이데올로기의 시대로 들어섰다. 민주주의와 공산주의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즘에 맞서 함께 싸웠고, 이어진 냉전에서는 서로 싸웠다. 루어드는 1986년에 글을 쓰면서 '1917년~'이라고 뒤를 열어 두었지만, 이제 우리는 '~1989년'이라고 닫아 줄 수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프랑스 혁명에서 나폴레옹이 나왔다는 점 때문에 유럽인은 나폴레옹 시절을 프랑스 계몽주의와 연결 짓지만, 사실 그것은 최초의 파시즘으로 보는 편이 낫다. 나폴레옹은 미터법이나 민법 법전과 같은 소수의 합리적 개혁을 실시했지만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는 지금도 그 제도들이 많이 살아남았다.), 다른 측면에서는 계몽주의의 인도적 발전을 난폭하게 과거로 되돌렸다.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권력을 쥐었고, 입헌 정부를 진압했고, 노예제를 다시 도입했고, 전쟁을 미화했고, 교황을 통해 황제 칭호를 받았고, 가톨릭을 국교로 다시 지정했고, 세 명의 형제와 한 명의 매제를 외국 왕위에 앉혔고, 생명을 범죄에 가깝도록 경시하면서 무자비한 영토 확장 원정을 벌였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벨은 혁명기와 나폴레옹 시대 프랑스가 민족주의, 그리고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의 결합에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 혁명가들에게 칸트의 "영구 평화는 기초적인 도덕률에 합치하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역사적 진보에 합치하기 때문에 가치있는 목표였다. ...... 그 때문에 미래 평화의 이름으로는 그 어떤 수단도, 심지어 적을 궤멸시키는 전쟁마저도 정당화된다는 생각이 뒤따랐다." 칸트 자신은 이런 반전을 경멸했다. 칸트는 그런 전쟁이 "온 인류의 무덤 위에서 영구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구부러진 나무와도 같은 인간성을 칸트 못지않게 통감했던 미국의 설립자들도 제국적 혹은 구세주적 지도자의 등장에 대해서 바람직한 두려움을 품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1815년 빈 회의에서 강대국 정치가들은 향후 한 세기 동안 지속될 국제 관계 체제를 정립했다. 무엇보다도 안정을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그것은 버크식 보수주의의 승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워드의 관찰을 빌리면, 그 계획가들은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의 후예인 만큼이나 계몽주의의 후예였다. 그들은 왕의 신성한 권리도 교회의 신성한 권위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이 엉망으로 어지럽힌 내부 질서를 회복하고 유지하려면 교회의 왕이라는 도구가 필요했기에, 그들의 권위를 모든 곳에서 회복하고 수호해야 했다. 더 중요한 점은, "그들이 주요국 간 전쟁을 더이상 국제 체제에서 불가피한 요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 25년의 사건들은 그 위험을 너무나 잘 보여 주었다." 강대국들은 평화와 질서를 보존할 의무를 졌다(그들은 그 둘을 거의 같게 보았다.). 그들이 결성한 유럽 협조 체제는 국제 연행, 국제 연합, 유럽 연합의 선구였다. 국제적 리바이어던은 19세기 유럽의 장기적 평화에 대해 공로를 인정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그 안정은 불균질하게 섞인 민족 집단들에게 군주가 강제로 가한 것이었다. 이내 집단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한 발언권을 행사하며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민족주의였다. 하워드에 따르면, 그것은 "보편 인권에 기초했다기보다는 모든 민족들이 투쟁으로 자신만의 국가를 구축할 권리, 그렇게 생겨난 국가가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에 기초했다." 단기적으로는 평화가 딱히 바람직하지 않았다. 평화는 "모든 민족들이 자유로워진 뒤에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까지 [민족들은] 폭력을 사용해 자유를 얻을 권리를 주장했다. 그들의 민족 해방 전쟁은 빈 체제가 예방하려고 했던 바로 그런 혼란이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민족 자결'이 위험한 것은, 어떤민족 문화적 집단이 어떤 땅과 동일하다는 의미에서의 '민족'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무나 산과 같은 풍경의 요소와 달리, 사람은 발이 있다. 사람은 더 좋은 기회가 있는 장소로 움직이고, 나중에 친구와 친 척까지 초대한다. 집단들이 섞이면서 풍경은 프랙탈처럼 바뀐다. 소수 집단 내에 소수 집단 내에 소수 집단이 생긴다. 어떤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정부는 스스로 '민족'을 구현한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거주자 중 많은 이들의 이해를 구현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영토에 거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 만일 우리가 정치적 경계와 인종적 경계가 일치하는 세상을 낙원으로 여긴다면, 지도자들은 인종 청소와 민족 통일 캠페인으로 낙원을 앞당기려고 할 것이다. 또한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에의 확고부동한 헌신이 없는 상태에서는, 민족과 정치적 통치자를 동일시하는 제유법 때문에 어떤 국제적 연합이든 (가령 국제 연합 총회가) 우스꽝스러운 모조품으로 변질될 것이다. 시시한 독재자에 지나지 않는 통치자들이 국가들의 동맹에서 환영 받을 테고, 제 국민을 굶기고 가두고 죽이는 데 대한 전권을 인정받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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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류 진보에 필요하다.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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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서) 겨우 4년 만에 전투에서 860만명이 죽었고, 전체로는 약 1500만 명이 죽었다. 낭만적 군사주의만으로는 이 살육의 향연을 설명할 수 없다. 작가들은 최소한 18세기부터 줄곧 전쟁을 미화했지만, 19세기 나폴레옹 히우에는 전례없이 오랫동안 강대국 간 전쟁이 없었다. 전쟁은 파괴적 흐름들이 일으킨 최악의 폭풍이었다. 마르스 여신의 강철 주사위 때문에 느닷없이 발생한 폭풍이었다. 군사주의와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적 배경, 강대국들의 신용을 위협하는 갑작스런 명예 경쟁, 지도자들을 겁주어 선제 공격으로 이끄는 홉스의 함정, 저마다 신속한 승리를 자신하는 망상, 막대한 병력을 전선으로 운반할 수 있고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파멸의 상황에 이르고야 마는 소모전 게임. 어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운수 나쁜 날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19세기와 20세기 초 반전 운동의 두뇌 집단은 존 브라이트 같은 퀘이커 교도들,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같은 노예제 폐지론자들, 존 스튜어트 밀이나 리처드 코브던 같은 온화한 상업 이론 지지자들, 레오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마크 트웨인, 조지 버나드 쇼,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같은 평화주의 작가들, 앤드루 카네기나 (평화상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 같은 산업가들, 많은 페미니스트들, 일단의 사회주의자들(이들의 모토는 '총검을 쥔 자도 맞는 자도 노동자'였다.)이었다. 일부 도덕 활동가들은 전쟁을 회피하고 억제하기 위한 새로운 제도들을 꾸렸다. 헤이그의 국제 중재 재판소, 전쟁 행위를 토론했던 일련의 제네바 협약 등이었다. ... 반전 운동은 독자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주류 정치는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으로 여겼다. 누군가는 주트너(오스트리아 소설가로 전쟁의 섬뜩함을 일인칭으로 기술한 소설, <무기를 내려놓으시오!>를 발표)를 "은은한 어리석음의 향기"라고 불렀고, 그녀의 독일 평화 협회를 "남녀 공히 감상적인 자들로 구성된 희극적인 바느질 모임"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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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 대전은 서구 주류의 낭만적 군사주의를 끝장냈고, 전쟁이 궁극에는 바람직하거나 불가피하다는 생각마저 끝장냈다. 루어드는 이렇게 지적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은 전쟁에 대한 전통적 태도를 바꾸었다. 더이상 고의적인 개전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생각이 역사상 처음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퍼졌다." 유럽이 막대한 인명 및 자원 손실로 비틀거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뮬러가 지적했듯이, 이전에도 유럽에는 이에 비견할 만큼 파괴적인 전쟁들이 있었지만 그때 국가들은 툭툭 털고 일어나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듯이 재깍 새로운 전쟁에 뛰어들었다. 치명적 싸움의 통계에서도 싫증의 기미는 전혀 없지 않았던가. 뮬러는 이번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던 탓이라고 설명했다. 언어로 구체적으로 표현된 반전 운동이 배경에 줄곧 도사리고 있다가 "내가 그렇다고 말했잖아." 라고 나섰다는 점이다. 변화는 정치 지도자들과 문화 전반에서 드러났다. 거대한 전쟁의 파괴력이 분명해지자, 사람들은 그것을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으로 재정의했다. 그 전쟁이 끝나자, 세계 지도자들은 전쟁 포기를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앞으로의 전쟁을 막을 국제 연맹을 창설함으로써 희망을 현실화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서투르게만 느껴지는 조치들이지만, 당시에 그것은 과거와의 급진적인 결별이었다. 수백 년 동안 전쟁은 영광스럽고 영웅적이고 명예로운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군사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유명한 말을 빌리자면 그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장"으로 간주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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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고금을 통틀어 최고의 반전 영화는 막스 형제의 <식은 죽 먹기>(1933년)일 것이다. 그루초 막스가 연기한 루퍼스 T.파이어플라이는 프리도니아의 새 지도자로서, 이웃 나라 실바니아 대사와 평화 협정을 맺어야 한다. -사랑하는 조국 프리도니아가 세계와 평화를 유지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지 않아서야, 내게 주어진 크나큰 신뢰에 대한 보답이 아닐테지. 트렌티노 대사를 만나게 되어 기쁘군. 우리 나라를 대신하여 그에게 진실한 우정의 악수를 청해야지. 그도 틀림없이 내 취지에 걸맞는 행동으로 응할 거야. 그런데 안 그러면 어쩌지? 거참 볼 만한 광경이겠군. 내가 손을 내밀었는데 그가 맞잡지 않는다면 말이야. 내 위신에 퍽도 도움이 되겠어, 안 그래?... 생각해보라고. 내가 손을 내밀었어. 그런데 그 하이에나 같은 놈이 악수를 받아들이지 않아. 젠장, 치사하게 허세나 부리는 놈 같으니라고!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주겠어, 두고 보라고! [대사가 들어온다] 그래서, 네 녀석이 내 악수를 거부했다는 거지? [대사의 따귀를 때린다] 대사 : 티스데일 씨, 보자보자 하니 안되겠군요! 이제 어쩔 수 없습니다! 이건 전쟁 선포예요! 이 대목에서 어처구니없이 노래가 터져 나오고, 막스 형제들은 운집한 병사들의 철모를 실로폰처럼 두드리면서 총알과 폭탄을 요리조리 피한다. 그동안 병사들의 제복이 계속 바뀌는데, 처음에는 남북 전쟁의 제복이었다가 다음에는 보이스카우트로, 영국 근위병으로, 너구리 가죽 모자를 쓴 변경 개척자로 바뀐다. 사람들은 전쟁을 결투에 빗대기도 했는데, 알다시피 결투는 결국 비웃음을 받으며 사라졌다. 전쟁도 그렇게 쪼그라들고 있었다.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의 예언이 실현되었는지도 모른다. "전쟁이 사악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 그 매력은 언제까지나 간직될 것이다. 그것이 천박한 것으로 여겨질 때, 그 인기가 사라질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뮬러에 따르면, 1930년대에는 유럽의 전쟁 기피 풍조가 독일 대중과 군사 지도자들에게까지 퍼졌다.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악감정이 컸지만,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정복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뮬러는 당시 총리가 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던 지도자들을 모두 살핀 뒤, 히틀러 외에는 어느 누구도 유럽 정복의 열망을 보이지 않았다고 결론 내렸다. 역사학자 헨리 터너는 독일군의 쿠데타조차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리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전쟁에 대한 세상의 염증을 이용했다. 그는 거듭 평화에 대한 사랑을 천명했다. 그는 자신을 막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아직은 그를 막을 수 있었던 시기였는데 말이다. 뮬러는 히틀러의 전기들을 검토함으로써, 세계 최대 격변에 대한 책임을 대체로 이 한 명의 인간에게 있다는 견해를 옹호했다. 다른 역사학자들도 이런 견해를 많이 갖고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이제 1945년 이후의 가장 흥미로운 통계를 볼 때가 되었다. 0의 통계이다. ... -0은 충돌에서 핵무기가 사용된 횟수이다. -0은 냉전의 주인공인 두 초강대국이 전장에서 서로 싸운 횟수이다. -0은 1953년 이래 강대국들이 서로 싸운 횟수이다 -0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서유럽 나라들이 서로 싸운 국가간 전쟁 횟수이다. -0은 1945년 이래 세계의 주요 선진국들이 (1인당 소득에서 상위44개 나라를 말한다.) 서로 싸운 국가 간 전쟁 횟수이다. -0은 1940년대 말 이래 선진국들이 다른 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확장한 횟수이다. -0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적으로 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은 나라들 중 정복을 당해 존재가 지워진 나라의 수이다. ... 이 장의 요지는, 이런 0들도 - 긴 평화를 뜻한다. - 과거 역사에서 수시로 등장하여 폭력을 줄였던 심리적 조율의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선진국들은 전쟁을 개념화하고 대비하는 방식에서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1500년 이래 전쟁의 치사력이 갈수록 높아졌던 것은 (그림 5-16 참고) 징집이라는 연료 공급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군대를 재생 가능한 육체들로 채울 수 있었던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는 모종의 징병 제도가 있었다. .... 징병은 국가가 개인에게 이중으로 무력을 가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강제로 병역을 치르는 데다가, 병역을 치르면서 불구가 되거나 죽을 확률이 높다. 존재론적 위협의 시절이 아닌 경우, 징병의 범위는 국가가 어디까지 힘을 행사할 의사가 있는지를 보여 주는 지표와 같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 년 동안, 의무 병역 기간은 세계적으로 착실히 줄었다. 미국, 캐나다, 유럽 국가 대부분은 강제 징집을 아예 폐지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강제 징집은 전투원 훈련 제도라기보다 국민 의식을 함양하는 제도로 기능한다. 페인은 역사가 오래된 48개 국가를 대상으로 1970~2000년까지 병역 기간 통계를 수집했다. 나는 거기에 2010년 자료를 덧붙여 그림 5-19를 그렸다. 징집은 냉전이 끝나기 전인 1980년대 말부터 감소세였다. 1970년에는 이 나라들 중에서 징집하지 않는 나라의 비율이 19퍼센트였지만, 2000년에는 33퍼센트로 높아졌고 2010년에는 50퍼센트가 되었다. 추가로 최소 두 나라가 2010년대 초에 징병을 폐지할 계획이기 때문에 (폴란드와 세르비아), 수치는 곧 50퍼센트를 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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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친화적 사고방식의 모든 요소들은 - 국가주의, 영토에 대한 야심, 국제적 명예의 문화, 대중의 전쟁 수용, 인적 비용에 대한 무관심 - 20세기 후반부에 선진국에서 한물간 것이 되었다. 그 신호탄은 1948년 48개 나라가 세계 인권 선언에 서명한 사건이었다. ... ... 이런 선언은 듣기 좋은 말일 뿐 속 빈 강정이 아닐까? 그러나 정치영역에서 인간 개개인이야말로 궁극의 가치라는 계몽주의적 이상을 승인하기 위해서, 서명국들은 궁극의 가치가 국가, 민족, 문화, 폴크, 계층 등의 연합체라는 한 세기 동안의 원칙으로부터 결별해야 했다. (하물며 궁극의 가치는 군주이고 백성은 그의 소유라는, 그보다 더 앞선 원칙은 말할 것도 없다.), 세계 인권 선언의 필요성은 1945~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났다. 몇몇 변호사들이 나치가 폴란드 같은 점령국에서 저지른 집단 살해에 대해서만 전범을 기소할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옛 사고방식에 따르면 나치가 제 영토 내에서 저지른 짓은 남들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강대국들이 서명을 주저했다는 점도 선언이 허풍만은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영국은 식민지들 때문에, 미국은 흑인들 때문에, 소련은 괴뢰 국가들 때문에 우려했다. 그러나 엘리너 루스벨트가 83번의 모임을 주재하면서 잘 이끈 덕분에 선언은 반대 없이 통과되었다(다만 소련 지역에서 기권 여덟 표가 나왔다는 점으로 신랄한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시대가 반계몽주의 이데올로기와 의절했다는 점은 45년 뒤에 바츨라프 하벨이 명확하게 지적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폭력 벨벳 혁명으로 공산주의 정부가 전복된 뒤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던 극작가 출신의 하벨은 이렇게 썼다. "유럽이 민주적 기반에서 하나로 통합한다는 발상은 민족 국가를 국가 생명의 지고의 표현으로 간주했던 과거 헤르더식 사상을 극복한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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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신성시하는 심리는 감정 이입이나 도덕적 추론보다는 규범과 터부에서 나온다 ... 차허는 영토 보전의 규범이 정복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국경 수정도 논외로 몰아냈다고 말했다. ... (제국의 행정관이 과거 식민지의 국경에 대해서) 지도에 임의로 그은 선을 신성화하는 것이 비논리적인 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임의적이고 정당화하기 어려운 규범이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존중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게임 이론가 토머스 셸링이 지적했듯이, 협상의 양측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보다 타협할 때 더 나아질 선택지가 다양하게 존재할 경우, 무엇이 되었든 인식적으로 두드러진 경계표가 있다면 그것을 계기로 삼아서 양쪽 다 이득을 보는 합의안을 끌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을 가격을 흥정할 때 양쪽이 제안한 값의 차이를 나눠 부담하기로 함으로써 "그렇게 합시다."에 도달한다. 혹은 어림수로 타협을 본다. 공정한 가격이 얼마인지 따지면서 무한정 입씨름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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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이 비록 냉전 중에 신발을 두드려 대는 허세를 아끼지 않았지만(1960년 유엔 총회에서 흐루쇼프가 신발을 벗어 단상을 두드렸던 일화를 가리킨다. - 옮긴이), 그 지도부는 세상에 또 한 번의 동란을 안기는 일을 피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처음에는 소비에트 블록의 소멸을, 나중에는 연방 자체의 소멸을 허락했던 것이다. 역사학자 티머시 가턴 애시는 이것을 가리켜 "충격적이리만큼 놀라운 힘의 단념"이자 "역사에서 개인이 중요성을 명쾌하게 보여 준 사례"라고 평했다. 애시의 마지막 발언은 역사의 우연성이 양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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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가치들의 풍경에서 또 다른 역사적 격변은, 민주 국가의 대중이 지도자의 전쟁 계획에 저항한 것이었다.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에 핵폭탄 금지 시위가 벌어졌다. 그 유산인 삼지창 기호는 다른 반전 운동들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 1960년대 말에 미국은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로 가리가리 찢겼다. 반전 신념은 남녀를 막론하고 감상적인 족속에게만 국한되지 않았다. 샌들을 신고 턱수염을 기른 이상주의자는 소수의 괴짜가 아니었고, 1960년대에 성인이 된 세대의 상당수를 차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을 개탄한 예술 작품들은 종전 후 10여 년이 지나서 등장했던 데 비해, 1960년대 대중 예술은 핵무기 경쟁과 베트남 전쟁을 실시간으로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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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제임스 시헌은 유럽 사람들이 국가의 개념 자체를 바꿨다고 주장했다. 국가는 더 이상 민족의 위엄과 안전을 드높이는 군사력의 독점 소유자가 아니다. 사회적 안전과 물질적 복지의 제공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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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평화가 핵 평화라면, 이것은 바보들의 낙원인 셈이다. 하나의 사고, 하나의 오해, 고귀한 체액에 집착하는 한 명의 공군 장군만으로도 묵시록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귀한 체액'이란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 나오는 대사이다. - 옮긴이). ... 루어드는 이렇게 말했다. "대단히 파괴적인 무기의 존재만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증거는 역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1939년에 세균 무기, 독가스, 신경가스, 다른 화학 무기들이 전쟁을 억제하지 못했다면, 오늘날 핵무기라고 해서 그럴 이유가 없다." 게다가, 핵 평화 이론은 핵무기가 없는 나라까지 전쟁을 삼가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 초강대국들은 어떨까? 뮬러는 그들이 서로 안 싸우는 이유는 더 간단하다고 했다. 그들은 재래식 전쟁의 전망만으로도 충분히 억제된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은 조립 라인에서 대량 생산한 탱크, 대포, 폭격기로 수천만 명을 죽이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생생히 보여 주었다. ... 마지막으로, 핵 평화 이론은 그동안 실제로 일어난 전쟁 중 비핵 세력이 핵보유국을 자극한 경우가 (혹은 핵보유국에게 굴복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1930년대 이후의 독가스 사용은 1967년에 이집트가 예맨에서 사용했던 것, 1980~1988년 전쟁에서 이라크가 이란 세력들에게 (자국의 쿠르드 시민들에게도) 사용했던 것이 전부였다. 사담 후세인의 영락에는 그가 터부를 깬 것이 한몫했을지도 모른다. 그의 독가스 사용에 대한 반감 때문에 2003년 미국이 전쟁을 주도했을 때 반대가 일부 줄었고, 그 전쟁으로 결국 후세인이 실각했다. 2006년 이라크 전범 재판에서 후세인에게 씌어진 일곱 죄목 중 두 가지는 독가스 사용과 관계있었다. 결국 그는 그해에 처형되었다. 전 세계 국가들은 1993년에 공식적으로 화학 무기를 폐지했고, 알려진 모든 비축량은 현재 해체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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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달빛 아래, 셰익스피어를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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