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혼자 읽기

D-29
어떤 집단 살해는 편의의 문제에서 비롯한다. 원주민이 좋은 토지를 차지하고 있거나 물, 식량, 광물과 같은 자원을 독점하고 있다고 하자. 침략자는 제가 그것을 갖고 싶다. 이때 원주민을 몰살하는 것은 잡목을 베거나 해충을 근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심리도 전혀 유별나지 않다. 그저 인간은 상대를 어떻게 범주화하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공감을 껐다 켰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토착민 집단 살해는 땅이나 노예를 편리하게 얻기 위한 일이었고, 희생자는 인간이 아닌 것으로 분류되었다. 그런 집단 살해의 예로는 미국 정착민들과 정부들이 수많은 원주민을 쫓아내고 학살했던 것, 벨기에 왕 레오폴2세가 콩고 자유국에서 아프리카 부족들을 탄압했던 것, 독일 식민주의자들이 서남아프리카에서 헤레로 족을 절멸시켰던 것, 수단 정부를 등에 업은 잔자위드 민병대가 2000년대에 다르푸르를 공격했던 것이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인간의 마음에는 본질주의적 습관이 있어, 사람들을 범주로 나눠 뭉뚱그린다. 그리고 그 범주 전체에 도덕 감정을 적용한다. .... 불행하게도 집단 살해에는 구성 요소가 하나 더 있다. 솔제니친이 지적했듯이, 사람을 수백만 명 죽일 때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개인을 도덕화된 범주에 가두는 유토피아적 신념이 강력한 체제에 뿌리내리면, 그야말로 최대의 파괴력을 발휘한다. 집단 살해 사망자 수 분포에서 이데올로기들이 엄청난 이상치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 때문이다. 불화를 일으켰던 이데올로기로는 십자군 전쟁과 종교 전쟁을 일으켰던 기독교(중국 태평천국의 난도 먼 분파로 포함시킬 수 있다.), 프랑스 혁명에서 정치 살해를 일으켰던 혁명적 낭만주의, 오스만 투르크와 발칸의 집단 살해를 일으켰던 민족주의,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던 나치즘, 그리고 스탈린 치하 소련, 마오쩌둥 치하 중국, 폴 포트 치하 캄보디아에서 숙청, 추발, 테러 기근을 일으켰던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유토피아 이데올로기는 두 가지 이유에서 집단 살해를 끌어들인다. 첫째, 유해한 공리주의의 계산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두가 영원히 행복하므로, 그 도덕적 가치는 무한하다. 폭주하는 전차 때문에 다섯 명이 죽을 찰나인데, 전차를 지선으로 돌리면 한 명만 죽는다고 하자.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향을 돌리는 것이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절차를 돌림으로써 살릴 수 있는 목숨이 1억 명이라고 하자. 아니, 10억 명이라고 하자. 아니, 미래를 무한히 내다보아, 무한하다고 하자.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몇 명을 희생하는 것이 허락될까? 수백만 명쯤은 나쁘지 않은 거래로 보일 수도 있다. ... 유토피아가 집단 살해를 일으킬 수 있는 두 번째 위험 인자는 그것이 깔끔한 청사진을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모든 것에 존재의 이유가 있다. 인간은 어떨까? 글쎄, 인간 집단은 다양하다. 어떤 사람들은 완고하게, 아마도 근본주의적으로, 완벽한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가치를 고집할 것이다. ... 만일 당신이 깨끗한 종이에 완벽한 사회를 설계한다면, 당연히 이런 눈엣가시들을 계획에서부터 지우지 않겠는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집단 살해를 이해할 때는 지도자들의 동기가 결정적이다. 왜냐하면, 심리적 요소들이 - 본질주의 사고방식, 탐욕과 두려움과 복수라는 홉스의 역학, 혐오를 비롯한 감정들의 도덕화, 유토피아 이데올로기에 느끼는 매력 - 온 인구를 단번에 휘어잡아 대량 살해를 부추기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집단들은 서로 꺼리고 불신하고 심지어 경멸하면서도 집단 살해 없이 언제까지나 공존할 수 있다. 인종 차별적 미국 나무에서 살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 이스라엘이나 그 점령지에서 사는 팔레스타인인, 아파르트헤이트 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프리카인을 떠올려 보자. 나치 독일 지역은 반유대주의가 수백 년 동안 고착된 곳이었지만, 히틀러와 소수의 광신적 심복들 외에는 유대인 근절을 좋은 생각으로 여긴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집단 살해가 실제로 자행될 때도, 인구의 소수만이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다. 보통 경찰, 군대, 민병대이다. 1세기에 타키투스는 이렇게 썼다. "소수의 사악한 선동, 좀 더 많은 사람의 축복, 모든 사람의 수동적 묵인 속에서 충격적인 범죄가 저질러졌다." 정치학자 벤저민 발렌티노는 <최후의 해결책>에서 20세기 집단 살해에서도 그런 분업이 적용되었다고 말했다. 지도자나 소규모 패거리가 집단 살해의 때가 왔다고 결정한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한 무장 세력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다. 진심으로 믿는 사람, 순응주의자, 무뢰한이 (중세 군대처럼 범죄자, 부랑자, 청년 무직자 중에서 모집할 때가 많다.) 섞인 군대이다. 그들은 나머지 인구가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데, 8장에서 이야기할 사회 심리적 속성들 때문에 정말로 나머지 사람들은 대체로 방해하지 않는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1638년에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이 피쿼트 족을 몰살한 사건이 있었다. 직후에 인크리스 매더 목사는 "오늘 우리가 이방의 영혼 600명을 지옥으로 보낸 데 대해" 신께 감사하자고 회중에게 청했다. 이렇게 집단 살해를 찬양해도 매더의 경력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는 나중에 하버드 대학교의 학장이 되었다. 현재 내가 결연을 맺고 있는 기숙사는 그의 이름을 땄다(모토는 '인크리스 매더의 정신으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충격적이게도, 최근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 살해가 딱히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 중세부터 군사적 기사도라는 것이 있기는 했다. 전쟁에서 민간인 살해를 금하는 기사도였으나, 효력은 없었다. 근대 초기에 에라스뮈스나 후고 그로티우스처럼 항의하는 사상가가 간간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집단 살해에 대한 반대가 흔해진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이제 사람들은 미국 서부와 대영 제국에서 원주민이 가혹하게 다뤄지는 데 대해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런 시기였는데도, 미래의 '진보적' 대통령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886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사람들의 말처럼 죽은 인디언만이 선량한 인디언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10명 중 9명은 그렇다고 믿는다. 열 번째에 대해서도 너무 자세히 알고 싶지는 않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1944년까지만 해도 영어에는 집단 살해를 뜻하는 단어가 없었다. 그해에 폴란드 법학자 라파엘 렘킨은 나치의 통치에 대한 보고서에서 제노사이드(genocide)라는 말을 처음 썼다. ... 대중이 집단 살해의 공포를 새삼스레 깨우친 데에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려준 것이 적잖은 역할을 했다. 초크와 요나손은 이런 회고가 역사적으로 특이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집단 살해 생존자는 스스로를 모욕적인 패배자로 간주했다. 그 일에 관해 말하는 것은 역사의 가혹한 평결을 쓰라리게 상기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새로운 인도주의적 감수성 덕분에 집단 살해는 인류에 대한 범죄가 되었고, 생존자들은 그 범죄를 고발하는 증인이 되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우리는 집단 살해의 궤적이 20세기 이전에, 도중에, 이후에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하다. .... 럼멜이 내린 국가 살해의 정의와 책 제목에 '정부에 의한 죽음'이라는 표현이 들었던 탓에, 20세기에 정부들이 국민을 1억 7000만 명 가까이 죽였다는 그의 결론은 무정부주의자들과 급진적 자유주의들에게 인기 있는 밈이 되었다. 그러나 '예방 가능한 죽음의 주된 원인은 정부'라는 명제는 럼멜의 데이터로부터 도출할 올바른 교훈이 못 된다. 우선 럼멜의 '정부'는 정의가 너무 느슨하다. 그는 민병대, 준군부, 군벌까지 포함했는데, 사실 그런 조직들은 과다한 정부 통치보다는 부족한 정부 통치의 신호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 그러므로 정부에 의한 사망자는 그 대안 체제에 의한 사망자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적어, 3분의 1쯤 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 모든 정부들이 일반적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것이 아니고, 한 줌에 불과한 특정 종류의 정부들이 모든 희생자를 냈다는 점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141개 체제의 총 국가 살해 사망자 중 4분의 3을 단 네 정부가 발생시켰다. 럼멜은 이들을 천만 학살자(dekamegamurderer)라고 불렀다. 소련이 6200만 명, 중화 인민 공화국이 3500만 명, 나치 독일이 2100만 명, 1928~1949년 중국 국민 정부가 1000만 명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그래프(6-8)를 보면, 냉전 이후 20년 동안 집단 살해는 재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대량 살인의 봉우리들은 (1950년대 중국을 제외하고) 1960년대 중반과 1970년대 후반에 있다. 그 15년 동안 인도네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정치 살해(1965~1966년, '가장 위험한 해'로 불리며 사망자가 70만 명이었다.), 중국 문화 혁명 (1966~1975년, 60만 명가량), 부룬디에서 투시 족의 후투족 학살(1965~1973년, 14만 명), 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에서 저지른 학살(1971년, 170만 명가량), 수단에서 남북이 대립한 폭력 사태(1956~1972년, 50만 명가량), 우간다의 이디 아민 체제(1972~1979년, 15만 명가량), 캄보디아의 광기(1975~1979년, 250만 명), 베트남에서 보트피플의 추방으로 정점에 오른 10년간의 학살(1965~1975년, 50만 명가량)이 발생했다. 한편 냉전 이후 20년 동안에는 1992~1995년까지 보스니아 학살(사망자 22만 5000명), 르완다 학살(70만 명), 다르푸르 학살(2003년에서 2008년까지 37만 3000명)이 발생했다. 물론 이런 수치들은 잔혹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그래프가 보여 주듯이, 뚜렷한 감소세에서 잠깐 솟은 봉우리들이었을 뿐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하프는 오히려 (집단 살해를 일으키는) 다른 여섯 가지 인자를 발견했다. ... 첫째는 그 나라의 과거의 집단 살해 역사였다. ... 두번째 예측 인자는 근래의 정치적 불안정성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근래 15년 동안 겪은 체제 위기, 민족 간 전쟁, 혁명전쟁 등이었다. 정부가 위협을 느끼면, 반항적이거나 오염을 일으키는 세력을 집단째 몰살하거나 보복하려는 유혹을 느낀다. ... 세 번째 인자는 통치 엘리트가 소수 민족 집단에서 나온 상황이다. 그런 지도자는 통치력의 위태로움을 더 많이 걱정하기 때문이다. ... 나머지 세 예측 인자는 우리가 자유주의 평화 이론에서 익히 보았던 것들이다. 하프는 민주주의가 집단 살해 예방의 핵심 요인이라는 럼멜의 주장을 확인했다. 1955~2008년까지 독재 정부들이 집단 살해를 일으킬 가능성은 완전한 민주 정부나 부분적 민주 정부에 비해 3.5배였다. ... 또 다른 삼관왕은 무역에 대한 개방성이었다. 하프에 따르면, 국제 무역에 더 많이 의존하는 나라일수록 국가 간 전쟁의 가능성도 내전의 가능성도 더 낮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집단 살해도 덜 자행한다. ... 집단 살해의 마지막 예측 인자는 배타적 이데올로기이다. 특정 집단을 이상향의 장애물로 보아 '공인된 의무의 세계 바깥에' 두는 통치 엘리트는 좀 더 실용적이고 절충적인 통치 철학을 지닌 엘리트보다 집단 살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테러가 일으키는 공황과 테러가 일으키는 죽음의 불균형은 우연이 아니다. 테러(terror, 공포)라는 말 자체가 분명히 말해 주듯이, 공황이야말로 테러의 핵심이다. 테러리즘의 정의는 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누군가에게는 테러리스트, 다른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투사'라는 흔한 표현도 있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비국가 행위자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목표를 추구하고자 비교전자(민간인이나 비번인 군인)에게 사전에 계획된 폭력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 테러리스트는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대의를 좇아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타적이다. 그들은 불시에 은밀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비겁하다'는 평을 듣는다. 또한 그들은 소통을 추구한다. 그들은 선전과 주목을 원하고, 공포를 통해 그것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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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감 있는 지도자들 중에는 테러의 산수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도 있었다. 존 케리는 2004년 대통령 선거 운동을 할 때 어쩌다 방심한 상태에서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원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테러리스트가 삶의 중심이 아니라 귀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나는 법을 집행했던 몸으로서, 우리가 매춘을 근절하기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압니다. 불법 도박 근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조직 범죄를 줄여서 상승세를 타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일상을 매일같이 위협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과 지속적으로 싸워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 자체가 위태로운 것은 아닙니다." 워싱턴에서는 정치인이 진실을 말하는 것을 개프(gaffe, 공식 석상의 실수)로 정의한다는 농담을 확인시키듯이, 조지 부시와 딕 체니는 이 발언을 맹공격하면서 케리가 '지도자로 부적격'이라고 비난했다. 케리는 얼른 발언을 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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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9세기까지 인도의 한 종파는 칼리 여신에게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 여행자 수만 명을 목 졸라 죽였다. 이 집단들은 아무런 정치적 변화를 이루지 못했지만, 대신 젤롯(Zealot), 아사신(Assassin), 서그(Thug)라는 자신들의 이름을 후대에 남겼다.(오늘날은 각각 광신자, 암살자, 폭력단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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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무정부주의자(anarchist)라는 단어에서 검게 빼입은 폭탄 투척자를 연상했다면, 당신은 20세기 초에 횡행했던 한 운동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행위의 프로파간다'를 실천한다는 명목으로 카페, 의회, 영사관, 은행에 폭탄을 던졌고,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2세, 프랑스의 사디 카르노 대통령, 이탈리아의 움베르트 1세, 미국의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 수십명을 암살했다. 이런 이름과 이미지가 이토록 오래간다는 사실은 테러가 문화적 의식에 뿌리박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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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를 새 천 년의 현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부실한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낭만주의적 정치적 폭력에는 다양한 군대, 동맹, 연합, 여단, 당파, 전선이 저지른 수백 건의 폭탄 공격, 공중 납치, 총격이 있었다. 미국에는 흑인 해방군, 유대인 보호 연맹, 웨더언더그라운드(밥 딜런의 노래 가사 "바람의 방향은 기상 예보관이 없어도 알 수 있지."에서 딴 이름이다.), FALN(푸에르토리코 독립 단체), 그리고 결코 잊을 수 없는 공생 해방군(SLA)이 있었다. 1970년대에 SLA은 초현실적이기까지 한 일화를 남겼다. 1974년에 그들은 신문 재벌의 상속년 패티 허스트를 납치한 뒤 세뇌시켜, 집단에 가입시켰다. 그녀는 '타냐'라는 가명을 만들고, 그들의 은행 강도질을 도왔다. 그리고 머리 일곱 개짜리 코브라가 그려진 SLA 깃발 앞에서 베레모를 쓰고 기관총을 든 전투 자세로 찍은 사진을 남겨, 시대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다(1970년대의 또 다른 상징적 이미지로는 리처드 닉슨이 백악관을 영원히 떠나기 위해 헬리콥터를 타면서 V자를 그려 보이는 모습, 머리카락을 한껏 부풀린 비지스가 흰 폴리에스테르 디스코 양복을 입은 모습이 있다.). 같은 시기에 유럽에는 영국의 급진주의 IRA(아일랜드 공화국군)와 얼스터 자유군,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독일의 바더-마인호프강, 스페인의 ETA(바스크 분리주의 단체)가 있었다. 일본에는 적군파가, 캐나다에는 퀘백 해방 전선이 있었다. 유럽인에게 테러는 삶의 배경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루이스 부뉴엘의 1977년 사랑 영화 <욕망의 모호한 대상>에는 자동차와 가게가 펑펑 터지는데도 등장인물들이 신경도 안 쓰는 농담 같은 대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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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선진국에서 국내 테러는 폴리에스테르 디스코 양복의 전철을 밟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테러 단체는 대부분 실패하고 모두 사라진다. ... 숫자는 이런 인상을 확인시켜 준다. 정치학자 맥스 에이브럼스는 2006년에 쓴 <왜 테러리즘은 효과가 없는가>에서, 미국 국무부가 2001년에 해외 테러 조직으로 규정했던 28개 단체를 살펴보았다. 대부분 수십 년의 활동 역사가 있는 단체들이었다. 순전히 전략적인 승리를 제쳐 둘 경우(언론의 관심, 새로운 지지자, 죄수 석방, 몸값 등이다.), 그들 중 세 곳만이 (7퍼센트) 목표를 달성했다. 헤즈볼라 1984년과 2000년에 레바논 남부에서 다국적 평화 유지군과 이스라엘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타밀 반군이 1990년에 스리랑카 북동 해안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스리랑카는 2009년에 반군이 소탕되어 승리가 무위로 돌아갔으니, 테러 성공률은 42건 중 2건, 즉 5퍼센트도 못 되는 셈이다. 이것은 다른 형태의 정치적 압력보다 훨씬 못한 수준이다. 가령 경제 제재의 성공률은 약 3분의 1은 된다. 에이브럼스는 테러의 최근 역사를 훑은 뒤, 테러가 영토에 관한 제한적인 목표를 추구할 때는 간간이 성공한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외세가 이미 점령에 시들한 상태일 때 그것을 몰아내는 경우인데,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유럽 강국들이 테러가 있든 없든 식민지에서 단체로 손 뗀 것이 좋은 예다. 반면에 테러가 과격한 목표를 달성한 예는 한 번도 없었다. 가령 온 나라에 어떤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겠다거나 거꾸로 어떤 이데올로기를 근절하겠다는 목표는 성공한 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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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단체는 다른 방식으로도 스스로의 목을 조른다. 그들은 통 진전이 없고 사람들이 질린 것 같으면, 좌절한 나머지 전술을 격화시킨다. 더 뉴스거리가 될 만한 희생자를 노리는 것이다. 유명인이나 존경 받는 인물, 아니면 그저 많은 인원을. 그러면 틀림없이 이목은 끌지만, 그들의 의도했던 방향은 아니다. 오히려 지지자들마저 '지각없는 폭력'에 반감을 느껴 자금을 거두고, 은닉처를 제공하지 않고, 경찰에게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던 약속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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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의 역사적 궤적은 종잡기 힘들다. 통계는 1970년 무렵에야 시작된다. ... 세계적으로 테러는 1970년대 말에 증가하며 1990년대에 감소했다. 그 까닭은 같은 시기에 내전과 집단 살해가 오르내린 까닭과 같다. 탈식민화 이후 민족주의 운동이 등장했고 냉전 중인 초강대국들이 대리전 삼아 그들을 지원했지만, 결국 소련이 몰락하면서 그런 움직임이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불룩한 봉우리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 테러리스트들의 소행이었다(엘살바도르, 니카라과, 페루, 콜롬비아). 1977~1984년까지 테러로 인한 인명 피해의 61퍼센트를 그들이 차지했다. ... 라틴 아메리카는 1985~1992년까지 두 번째 상승에서도 지분을 유지했다(전체의 약 3분의 1을 차지했다.). 스리랑카의 타밀 반군 (15퍼센트), 인도, 필리핀, 모잠비크의 단체들도 가세했다. 인도와 필리핀의 테러 중 일부는 이슬람 단체의 소행이었지만, 아예 이슬람 국가에서 테러가 발생한 경우는 아주 적었다. 레바논에서 약 2퍼센트가, 파키스탄에서 1퍼센트가 발생했을 뿐이다. 그러다가 9/11 공격이 1997년 이래 테러의 감소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최근에는 파키스탄이 반등에 기여했는데, 이것은 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불확실한 국경을 넘어 흘러넘친 여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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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이 테러의 시대를 개막하지는 않았더라도, 이슬람 자살 테러의 시대를 예고했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 것이다. 9/11 비행기 납치범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죽을 각오가 없이는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이후 자살 공격 발생률은 급상승했다. 1980년대에는 연간 5건 미만이었으나 1990년대에는 16건이었고, 2001~2005년 사이에는 180건이었다. 대부분 이슬람 단체의 소행이었고, 모두가 부분적으로나마 종교적 동기를 표현했다. 미국 대테러 센터의 최근 데이터를 따르면, 2008년에는 테러 집단의 소행으로 규정할 수 있는 공격의 총 사망자 중 3분의 2가까이를 이슬람 수니파 과격분자들이 일으켰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전사들이 전투에서 죽음의 위험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또 있다. 진화 생물학자 J.B.S. 홀레인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내놓겠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하지만 두 명의 형제와 여덟 명의 사촌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그는 후에 혈연 선택, 포괄적 적응도, 혈연 이타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현상을 언급한 것이었다. 자연 선택은 생물체로 하여금 혈연을 위해 희생하게 만드는 유전자를 선호한다. 다만 그 친척에게 돌아갈 이익이 생물체가 치르는 비용을 능가할 때만 그렇고, 이익은 촌수가 멀어질수록 감소한다. 이것은 그 유전자가 친척의 몸속에 있는 자신의 복사본들을 도움으로써 편협한 이기적 대안보다 장기적으로 더 큰 이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이론을 단단히 오해한 비판자들은 생물체가 친족과의 유전자 공유 정도를 의식적으로 계산함으로써 제 DNA가 얻는 이들을 따진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생물체에게는 통계적으로 자신의 유전적 친척일 가능성이 높은 다른 개체들을 돕는 성향만 있으면 그만이다. 사람이라는 복잡한 생물에게는 그 성향이 형제애라는 감정으로 갖춰져 있다. ... 진화 이론이 밝혀낸 인간 심리의 모든 측면이 그렇듯이, 이때도 문제가 되는 것은 실제 유전적 연관성이 아니라 연관된다고 느끼는 인식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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