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혼자 읽기

D-29
아동을 폭력에서 보호한다는 것이 그만 목표를 넘어 신성한 서약과 터부의 수준으로까지 발전한 경우도 있다. 그런 터부 중 하나로 심리학자 주디스 해리스가 양육 가설(Nuture Assump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로크와 루소는 보호자의 역할을 바꿈으로써 양육 개념을 혁신했다. 그들 덕분에 보호자는 체벌로 아이에게서 나쁜 행동을 몰아내는 사람이 아니라 아이를 어떤 형태의 어른으로 빚어내는 사람이 되었다. 20세기 말에는 부모가 아이를 학대하고 방치함으로써 피해를 입힐 수 있다는 (옳은) 생각에서 한발 더 나아가, 부모가 아이의 지능, 성격, 사회성, 정신 질환도 빚어낸다는 (그릇된) 생각이 등장했다. 왜 그릇된 생각일까? 이민자 가정의 자식은 부모가 아니라 또래 친구들의 억양, 가치, 규범을 지닌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라. 아이는 가족보다 또래 집단에 의해 사회화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입양아들에 대한 연구를 보면, 입양아의 성격과 지능 지수는 혈연관계가 없는 양부모의 자녀들과는 상관관계가 없고, 생물학적 형제들과 상관관계가 있다. 이것은 성인기의 성격과 지능이 유전자와 우연에 의해 형성되지만 (일란성 쌍둥이라도 그 상관관계가 완벽하진 않기 때문이다.), 부모에 의해 형성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적어도 부모가 모든 자식에게 행하는 행동과는 관계없다는 말이다. 이런 반박에도 불구하고, 양육 가설은 전문가들의 뇌리에 뿌리 내렸다. 그들은 엄마에게 24시간 양육 기계가 되라고 조언한다. 엄마에게는 자신이 돌보는 작은 빈 서판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사회화하고, 인성을 발달시킬 의무가 있다고 다그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2008년, 뉴욕에 사는 저널리스트 레노어 스케나지의 아홉 살 난 아들이 혼자 지하철로 귀가하고 싶다고 엄마를 졸랐다. 그녀는 허락했고, 아이는 무사히 집으로 왔다. 그녀는 이 일화를 <뉴욕 선> 칼럼에 썼는데, 그러자 삽시간에 언론의 관심이 광풍처럼 몰아닥쳤다. 언론은 그녀를 '미국 최악의 엄마'로 명명했다('아홉 살 아이를 혼자 지하철로 귀가시킨 엄마: 칼럼리스트, 아동 독립성 실험으로 논란 일으키다.' 따위의 기사 제목이었다.) 그녀는 이에 대응하여 캠페인을 시작했고 - '어린이 풀어 키우기' - 어른의 지속적인 감독 없이 아이들 스스로 노는 법을 가르치자는 취지에서 '아이를 공원으로 데려가 내버려 두는 날' 제정을 제안했다. 스케나지는 미국 최악의 엄마가 아니다. ... 그녀는 사실을 살펴 보았다. 우유갑에 인쇄된 실종 아동의 압도적 다수는 변태, 인신 매매범, 몸값 사기꾼의 꾐에 넘어가 차에 탄 것이 아니었다. 가출한 십대이거나, 이혼한 부모 중 한쪽이 불리한 양육권 결정에 화가 나서 아이를 무턱대고 데려간 경우였다. 낯선 사람에 의한 납치는 1990년대에 연간 200~300건 사이였지만, 지금은 약 100건이다. 그중 절반 가량이 살해된다. 미국에서는 5000만 명의 아동이 있으니, 연간 100만명당 1명 정도 살해되는 셈이다. 이것은 익사 확률의 20분의 1쯤 되고, 교통사고 사망률의 40분의 1쯤 된다. 작가 워릭 케언스의 계산에 따르면, 아이가 낯선 사람에게 납치되어 하룻밤 억류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아이를 75만 년 동안 집 밖에 버려두어야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대꾸할지도 모른다. 아이의 안전은 너무나도 귀중하므로, 이런 조치가 연간 한 줌의 목숨만을 구할지라도 그만한 불안과 비용을 지불할 가치가 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은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인생의 좋은 것을 위해서 부득이 안전을 양보하며 살아간다. 돈이 생기면 집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는 대신 아이의 대학 학자금으로 저축하고, 아이들이 안전한 침실에서 여름 내내 비디오 게임이나 하며 놀게 두는 대신 함께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납치로부터의 완벽한 안전을 추구하는 운동은 다른 대가를 무시하는 것이다. 유년기의 경험이 축소되는 것, 아동 비만이 증가하는 것, 직장 여성들이 만성적으로 불안해 하는 것, 젊은이들을 겁주어 아이를 갖지 않도록 만드는 것 등등. 설령 위험의 최소화가 정말로 삶에서 유일하게 좋은 것일지라도, 통계를 제대로 모르고 만든 안전 조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것이다. 안전 조치 중에는 범죄학자들이 범죄 통제 극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하는 사례가 많다. 범죄 통제 극장이란 실효는 없지만 아무튼 무언가 하고 있다고 선전하는 것으로, 우유갑 광고가 대표적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진정한 (진화의) 수수께끼는 동성애 성향이다. 왜 이성과의 짝짓기 기회보다 동성과의 짝짓기를 일관되게 선호하는 남녀가 세상에 존재할까? 왜 반대 성과의 짝짓기를 아예 꺼리는 남녀가 존재할까? 적어도 남성의 경우에는, 동성애 성향이 선천적인 듯 하다. 게이들은 보통 사춘기 직전에 처음 성적 흥분을 느낄 때부터 동성에게 끌린다고 한다. 그리고 이란성 쌍둥이보다 일란성 쌍둥이끼리 동성애 성향이 더 일치하는 편이므로, 공통 유전자가 모종의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여담이지만, 동성애는 본성-양육 논쟁에서 '본성'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견해에 해당하는 드문 사례이다.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일 동성애가 선천적 성향이라면, 개개인이 게이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므로 그 생활 방식을 비난할 수 없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계몽 시대 들어 사람들은 본능적 충동이나 종교 교리에 기반한 도덕률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동성애도 다시 보게 되었다. 몽테스키외와 볼테르는 동성애를 도덕적인 행위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탈범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85년에 제레미 벤담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가져오는 행위를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 공리주의 추론을 써서, 동성애로 피해를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므로 동성애는 비도덕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프랑스는 혁명 이후 동성애를 탈범죄화했고,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다른 소수의 나라들이 뒤를 따랐다. 그림 7-23을 보라. 탈범죄화 추세는 20세기 중반에 박차를 가했고, 1970년대와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인권 개념이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 기름을 끼얹었기 때문이다. 현재는 동성애를 불법으로 규정하지 않는 나라가 120개 가까이 되지만, 다른 80개 나라에서는 여전히 법률로 금지한다. 주로 아프리카, 카리브해, 오세아니아, 이슬람권 국가들이다. 게다가 모리타니, 사우디아라비아, 수단, 예맨, 나이지리아의 일부, 소말리아의 일부, 이란의 전 지역에서는(비록 마무드 아마디네자드는 자기 나라에 동성애는 없다고 말하지만) 동성애에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그림 7-23을 보면, 미국에서는 동성애 탈범죄화가 좀 늦게 시작되었다. 1969년까지도 일리노이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동성애가 불법이었다. 경찰들은 야간에 따분하다 싶으면 게이들이 모이는 곳을 습격해서 해산시키거나 단골들을 체포했다. 가끔은 경찰봉도 동원했다. 그러나 1969년에 그리니치 빌리지의 게이 댄스 클럽이었던 스톤월 인이 습격 당하자 사흘에 걸쳐 항의 폭동이 일어났고, 그 일로 전국의 게이 공동체들이 자극을 받았다. 동성애를 범죄시하거나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법률을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로부터 10여 년 만에 절반 가까운 주들이 동성애를 탈불법화했다. 또 한 번 집중적으로 탈불법화가 진행된 직후였던 2003년, 연방 대법원은 텍사스의 동성애 금지법이 헌법에 위배된다고 판결했다. 당시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대법원 다수 의견을 설명하면서 자율의 원칙을 이유로 들었다. 종교적 신념이나 전통 관습을 강제하기 위해서 정부가 힘을 사용하는 것은 변호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 자유는 개인의 자율성을 상정한다. 여기에는 생각, 신념, 표현, 특정 사적 행위들의 자유가 포함된다. ...... 물론, 지난 수백 년 동안 동성애 행위를 비도덕적인 것으로 비난하는 강력한 목소리가 존재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종교적 신념, 옳고 용납할 만한 행동에 대한 관념, 전통적 가정을 존중하는 마음이 그런 비난을 형성했다. ..... 그러나 그런 고려들은 우리 앞에 놓인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는다. 작금의 문제는, 형법의 작동을 통해 사회 전체에게 그런 견해를 강제하기 위해서 다수가 국가의 힘을 사용해도 좋으냐 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 여러 지역에서 처음으로 동성애가 합법화된 때부터 15년 뒤에 남은 법률들마저 붕괴하기까지, 동성애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는 현격한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에는 AIDS 확산을 계기로 동성애자 활동가 단체들이 결집했다. 많은 유명 인사가 동성애자임을 공개했고, 사후에 공개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나는 교수에게 실험 설명을 들을 때부터 뭔가 꺼림칙하다고 느꼈다. 과정이 완벽하게 진행되더라도, 쥐는 12시간을 끊임없이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나는 실험이 늘 완벽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았다. 교수는 극단적인 행동주의자였기 때문에, '쥐의 입장은 어떨까?'라는 질문은 그에게는 말이 안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나는 쥐도 통증을 느낀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믿었다. 나는 교수의 요청으로 실험실에서 일하게 된 것이었고, 내가 이 실험을 거절하더라도 불이익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런데도 나는 실험을 실시했다. 윤리적으로 미심쩍지만 심리적으로 안심되는 원칙, 즉 그것이 표준 관행이라는 사실에 의지하여. 이 일화는 20세기의 몇몇 역사적 사건들과 무서울 정도로 비슷하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이런 냉담함은 실험 상자 밖으로도 번졌다. 듣자 하니 어느 연구자는 성질이 나면 실험에 쓰이지 않은 쥐 중에서 제일 가까운 녀석을 집어 벽에 내던진다고 했다. 또 다른 연구자는 내게 과학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여 주면서 냉혹한 농담을 공유하려고 했다. 쥐가 털북숭이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충격을 피하면서 앞발로 먹이 레버를 누르는 법을 익힌 모습에 '침대에서 아침 식사를'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내가 진심으로 안도하면서 보고하는 바, 그로부터 불과 5년 뒤에는 과학자가 동물의 안녕에 그토록 무관심한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아예 불법이었다. 1980년대부터 과학자가 연구와 교육에 동물을 이용할 때는 국제 실험동물 운영 위원회(IACUC)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아무 과학자나 잡고 물어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위원회는 절대로 무턱대고 승인 도장을 찍어 주지 않는다. 동물 우리의 크기, 먹이의 양과 질, 수의사의 보살핌, 운동과 사회적 접촉의 기회 등이 엄격하게 규정되어 있다. 연구자들과 조수들은 동물 실험 윤리에 대한 강좌를 들어야 하고, 일련의 공개 토론회에 참석해야 하고,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 동물에게 불편이나 고통을 가하는 실험은 특별 규제 대상으로 분류되고, '과학과 인류 복지에 더 큰 이득을' 안길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역시 어느 과학자에게 물어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과학자들 자신의 태도도 변했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동물 연구자들은 거의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실험동물이 통증을 느낀다고 믿는다. 오늘날 과학자가 실험동물의 안녕에 무관심하다면 동료들의 경멸을 산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동물의 대우를 논할 때, 근대 철학은 시작이 나빴다. 데카르트는 동물이 태엽 장치와 같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그 속에는 고통이나 쾌락을 느낄 존재가 없다. 우리에게 괴로운 비명처럼 들리는 소리는 경적이나 기계 소리처럼 소음 장치의 출력일 뿐이다. 데카르트는 동물과 인간의 신경계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왜 그가 인간에게는 의식을 부여하면서 동물에게는 부정했는지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는 신이 인간에게 영혼을 하사했다고 믿었고, 의식은 그 영혼에 깃든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의식을 내성(內省)한 뒤에 이렇게 썼다. "나는 내 자신에게서 어떤 부속을 구별하지 못했고, 나 자신의 명백한 하나의 전체로 파악할 뿐이다. ... 나의 일부분에 대해서 의지, 감각, 인식 등의 능력을 논할 수는 없다. 의지, 감각, 이해는 온전한 전체로서의 마음을 동원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 데카르트는 언어 또한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그 무엇, 우리가 마음 혹은 영혼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의 능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동물은 언어가 없으니 영혼도 없고, 따라서 의식도 없다. 인간의 몸과 뇌도 동물처럼 태엽 장치에 불과하지만,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 데카르트는 영혼이 솔방울샘이라는 뇌 구조를 통해서 뇌와 상호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현대 신경 과학의 관점에서는 이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우리는 의식이 속속들이 뇌의 생리적 활동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어와 나머지 의식이 분리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뇌졸중 환자가 언어 능력은 잃을지언정 지각없는 로봇으로 변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보면 분명하다. 그러나 실어증은 1861년에야 처음 기록되었기 때문에(데카르트의 동향 프랑스 사람인 폴 브로카가 발견했다.) 당시에는 데카르트의 이론이 그럴듯하게 들렸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의학 실험실에서는 동물을 생체 해부하여 연구했다. 사람 시체 해부는 교회가 금지했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공장식 사육도 20세기의 현상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시대에 돼지를 '브로닝'하는 방법, 즉 살찌우는 방법은 "좁아터진 방에 가둬 돼지들이 돌아다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돼지들은 늘 배를 붙이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기록했다. "돼지들은 고통 속에 먹었고, 고통 속에 앉아 있었고, 고통 속에 잠을 잤다." 가금류와 엽조는 캄캄한 곳에 가둬 살을 찌웠다. 아예 눈을 멀게 하기도 했다. ...... 거위는 물갈퀴를 바닥에 못으로 박아 두면 살이 찐다고 했고, 17세기 주부들은 산 가금류의 다리를 자르면 살이 더 연해진다고 믿었다. 1686년, 로버트 사우스웰 경은 "소들이 한 여물통에서 계속 먹고 마셔서 도살하기 알맞은 때까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외양간"을 발명했다고 선전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완전 채식으로 나아간 문화들도 동기는 가지각색이었다. 기원전 6세기, 피타고라스는 삼각형의 변을 재는 것 말고도 많은 일을 하는 종교를 창시했다. 피타고라스와 그 추종자들은 고기를 꺼렸다. 그들은 영혼이 몸에서 몸으로 환생한다고 믿었으며 동물의 영혼도 마찬가지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840년대에 채식주의자(vegetarian)라는 단어가 생기기 전에는 고기와 생선을 절제하는 식단을 가리켜 '피타고라스 식단'이라고 불렀다. 힌두교의 채식도 환생 원리에 입각하는데, 마빈 해리스 같은 냉소적인 인류학자들은 좀 더 평범한 설명을 제시했다. 인도에서 소는 소고기 커리의 재료로 쓰일 때보다 밭을 갈거나 젖과 똥(연료와 비료로 쓰인다.)을 공급하는 동물로서 더 소중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힌두교 채식주의의 영적 논리는 불교와 자이나교에게 전달되었고, 이들은 비폭력 철학에 기반하여 좀 더 명시적으로 동물을 배려했다. 자이나교 수도승은 곤충을 밟지 않기 위해서 빗자루로 발밑을 쓸면서 걷는다. 미생물을 들이마시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마스크를 쓰는 사람도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그러나 채식과 인도주의가 나란히 간다는 직관은 20세기 초에 산산이 깨어졌다. 나치가 동물을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히틀러와 여러 심복들은 채식주의자였다. 단 동물에 대한 연민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순수함에 대한 집착, 다시 흙과 이어지고 싶다는 신화적 욕망, 유대교의 인간 중심주의 및 육식 의례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 인간의 도덕 감정 구획화가 어디까지 가능한지 보여 주기라도 하듯이, 나치는 산 사람들에게는 형언할 수 없이 잔인한 실험을 자행하면서도 실험동물에 관해서는 유럽 역사상 유례없이 강력한 보호 법률을 제정했다. 법률에 따르면 농장, 영화 촬영장, 식당에서도 동물을 인도적으로 다루어야 했다. 가령 식당에서는 조리 전에 생선을 마취해야 했고, 바닷가재는 신속히 죽여야 했다. 동물 권리의 역사에서 가장 기이한 이 장이 펼쳐진 뒤, 채식 옹호자들은 육식이 사람의 공격성을 높이고 채식이 사람을 평화롭게 만든다는 오래된 주장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동물권 논증이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은 18세기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그 추진력의 일부는 과학에서 왔다. 데카르트의 실체 이원론, 즉 의식이 뇌와는 무관하게 작용하는 자유로운 개체라고 보았던 이원론은 이즈음 일원론과 속성 이원론에게 밀려났다. 이 이론들은 의식이 뇌 활동과 같다고 보거나 최소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았다. 초기의 이런 신경 생물학적 사고에는 동물 복지에 관한 함의가 담겨 있었다. ... ... 1859년에 <종의 기원>이 출간되어 생물학자들이 진화 이론을 받아들이자, 의식이 인간에게만 있다는 주장은 이제 더더욱 꺼낼 수 없었다. 19세기 말에는 동물 생체 해부를 금지하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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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세기 중반에는 동물 보호 운동이 힘을 잃었다. 두 번의 세계 대전으로 궁핍함을 겪은 대중은 고기를 원했고, 공장식 농장에서 쏟아진 값싼 고기에 그저 감사할 뿐 고기가 어디에서 오는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또한 1910년대부터 심리학과 철학을 주름잡은 행동주의(behaviorism)는 동물의 경험이라는 것 자체가 순진한 비과학적 개념이며 잘못된 의인화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평화 운동이 19세기에 그랬듯이, 이 시기에 동물 복지 운동은 나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위선자들이나 건강식품광들과 관련된 운동으로 비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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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권(animal rights)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브리지드 브로피였는데, 그녀가 다른 권리들과의 비유를 동원한 것은 의도적인 행위였다. "동물의 문제를 다른 평등주의, 자유주의 이상들과 결부시키고 싶었기" 때문인데, "그런 이상들은 현실에서 비록 간헐적이되 인상 깊은 정치적 결과를 내면서 노예, 동성애자, 여성 같은 다른 억압 계층을 구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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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전환점은 철학자 피터 싱어가 1975년에 발표한 <동물 해방>이었다. 이 책은 동물권 운동의 성서라고 불린다. ... 싱어는 벤담의 뒤를 따르는 예리한 논증을 전개하여 우리가 동물에게 굳이 '권리'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동물의 이해를 온전히 고려하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논증의 출발점은, 우리가 어떤 존재를 도덕적 고려 대상으로 간주할지 말지 결정할 때 그 기준은 지능이 아니라 의식이어야 한다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린아이나 정신 지체자를 괴롭혀서는 안 되는 것처럼 동물을 괴롭혀서도 안 된다는 결론이 이어지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채식을 해야 한다는 결론이 이어진다. 우리는 현대의 채식 식단만으로도 잘 살 수 있고, 우리가 동물의 살을 먹음으로써 얻는 쾌락의 근소한 증가분은 동물들이 고통과 때 이른 죽음을 겪지 않는 것에 비하면 확실히 덜 중요하다. 인간이 문화적 전통 때문이든 생물학적 진화 때문이든 혹은 둘 다 때문이든, '자연스럽게' 육식을 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도덕적으로 무관한 문제이다. ... 그는 <확장하는 원 - 사회 생물학과 윤리>에서 도덕 진보의 이론을 제안했다. 자연 선택은 인간에게 자신의 친족과 동맹을 중심에 놓는 감정 이입 능력을 부여했는데, 차츰, 그 대상의 폭이 넓어져서 가족에서 마을, 친족, 부족, 국가, 종, 이윽고 감각 있는 모든 생명들까지 포함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은 싱어의 통찰에 크게 빚졌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어쨌든 채식이 늘기는 할까? 우리가 아는 한은 그렇다. 영국 채식 협회는 구할 수 있는 모든 여론 조사 결과를 모아 표로 정리하고 있는데, 나는 그중에서 전국의 응답자들에게 채식주의자인지 아닌지 물었던 조사만을 골라 그림 7-28에 표시했다. 제일 잘 맞는 직선을 그은 결과, 지난 20년 동안 채식주의자는 인구의 약 2퍼센트에서 약 7퍼센트로 세 배 넘게 늘었다. 미국에서는 채식주의자 자원 단체가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고기만이 아니라 생선과 가금류를 먹는지도 엄밀하게 물어서 융통성 있게 먹는 사람, 린네 분류 체계를 창의적으로 이해하는 사람을 제외했다. 그 비율은 영국보다 낮았지만 추세는 비슷하여, 대략 15년 동안 세 배 이상 늘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동물 복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는 여러 신호에도 불구하고 채식주의자의 비율이 여전히 낮다는 사실은, 비록 증가세라고는 하나, 놀랍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과 동물 복지를 중시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채식에는 동물 복지 말고도 다른 동기들이 - 건강, 맛, 환경, 종교, 엄마를 미치게 만들기 - 있는 데다가, 동물 복지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도 채식이라는 상징적 선언이 정말로 동물의 고통을 줄이는 최선의 방법인가 의심할 수 있다. 자신이 이타적으로 햄버거를 포기해 보았자 방대한 전국 고기 수요에 손톱만큼도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고 소 한 마리의 목숨도 구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설령 한 마리는 구하더라도, 나머지 소들의 삶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식품 산업의 관행을 바꾸는 일은 이른바 집단행동의 딜레마에 해당한다. 개개인은 자신의 희생이 집단의 복지에는 미미한 영향만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여 회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채식의 성장은 동물에 대한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한 지표일 뿐이고, 그 관심은 다른 형태로도 더 폭넓게 드러나고 있다. 어쩌면 고기를 삼가는 원칙을 명시적으로 세우지 않은 사람들도 고기를 점점 덜 먹는지도 모른다 (미국은 1980년 이래 포유류 고기 소비가 줄고 있다.). 갈수록 많은 식당과 슈퍼마켓이 손님들에게 메인 요리의 재료가 무엇을 먹고 자랐는지, 발굽이나 발톱을 갖고 있었을 때 얼마나 자유롭게 방목되었는지 알려 준다. 2010년, 미국의 주요 가금류 가공업체 중 두 곳은 좀 더 인도적인 도축 방식으로 바꾼다고 선언했다. 닭을 거꾸로 매달아 목을 따기 전에 먼저 이산화탄소로 기절시키는 방식이다. 홍보 담당자들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손님들은 앙트레의 재료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인도적으로 다뤄졌다는 사실에 기뻐하겠지만, 정확히 어떤 최후를 맞았는지를 너무 자세히 알고 싶진 않을 것이다. 가장 인도적인 기법이라도 이미지가 썩 좋지는 않다. 한 중역은 "우리가 닭들을 가스로 죽인다고 선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더 중요한 점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법적 조치를 지지한다는 점이다. 법률로 사육업자들과 가공업체들에게 인도적인 처분을 강제한다면 집단행동의 딜레마를 풀수 있을 테니까.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폭력이 비도덕적인 이상, 우리는 때로 본능, 문화, 종교, 관행을 단호히 거부해야만 도덕적 삶을 살 수 있다. 권리 혁명은 이 점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 대신 감정 이입과 이성에 기반하고 권리의 언어로 선언된 윤리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우리는 감각 있는 다른 존재들의 처지에 스스로를 대입해 봄으로써 그들의 이해를 고려하게 된다. 시작은 다치거나 살해되지 않을 권리이다. 나아가 우리는 인종, 민족, 성별, 나이, 성적 지향처럼 눈길을 끌기는 하되 피상적인 특징들을 무시하게 된다. 종도 어느 정도까지는 마찬가지다. 이 결론은 물론 계몽주의가 주장했던 도덕적 전망과 같고 계몽주의에서 자라난 인도주의와 자유주의의 요소들도 일부 담겨 있다. 권리 혁명은 자유주의 혁명이었다. 모든 운동이 자유주의적 움직임과 관계가 있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운동이 서유럽에서 시작되어 미국의 자유당 지지 지역, 공화당 지지 지역, 라틴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민주 국가들, 좀 더 권위적인 국가들의 순서로 퍼지다가 아프리카와 이슬람 국가들로 끝맺었다. 또한 모든 운동은 서구 문화에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표현으로 비아냥을 살 만큼 지나친 예절과 터부를 남겼다. 그러나 숫자가 분명히 보여 주듯이, 이 운동들은 죽음과 고통의 많은 원인을 제거하고 어떤 폭력에도 관용을 보이지 않는 문화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내게 권리 혁명에서 가장 중요했던 외생적 원인을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사상과 사람의 이동성을 높인 기술들에게 돈을 걸겠다. 권리 혁명의 시대는 또한 전자 혁명의 시대였다. 텔레비전, 트랜지스터 라디오, 케이블 방송, 위성, 장거리 전화, 복사기, 팩스, 인터넷,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 웹 비디오. 또한 고속도로, 고속 열차, 제트 비행기의 시대였다. 고등 교육에서, 그리고 과학 연구의 가없는 최전선에서 유례없는 성장이 이루어진 시대였다. 이보다 덜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시기에 출판도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60~2000년 사이에 미국의 연간 출간 권수는 다섯 배 가까이 늘었다. ... 사상과 사람의 확산은 왜 폭력을 줄이는 개혁으로 귀결될까? 여러 경로가 있다. 가장 뚜렷한 것은 무지와 미신의 타파이다. 대중이 교육을 받고 서로 연결되면, 적어도 집단 차원에서 장기적으로는 유해한 신념의 미몽에서 깨어나기 마련이다. ....한때 폭력을 불러들이고 용인했던 신념들이 최근에 타파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당신에게 어리석은 것을 믿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잔학 행위를 저지르게 만들 수도 있다고 했던 볼테르의 말이 떠오른다. 또 다른 인과적 경로는 사람들에게 타인의 관점을 취해 보라고 권유하는 계기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 정보의 흐름이 도덕의 성장을 촉진하는 세 번째 경로를 보자. ... 물질적 성공의 열쇠는 많은 혁신을 받아 낼 수 있는 유역에 위치하는 법이라고. 제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남들이 기꺼이 사용하고 싶어 할 만큼 유익한 무언가를 혼자 고립되어 발명할 수는 없다. 모든 성공한 혁신가는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섰을 뿐 아니라, 지적 재산권 도둑질을 대대적으로 감행했다. 자신에게 흘러든 여러 지류들의 방대한 유역에서 좋은 발상을 걸러 냈던 것이다. ... 어쩌면 기술 발전에 해당되는 이야기가 도덕 발전에도 해당될지 모른다. 더없이 올바른 예언자가 고립 상태에서 작성한 도덕률보다는 방대한 정보 유역에 위치한 개인과 문명이 수집한 도덕적 노하우가 그 지속성과 확장성 면에서 더 뛰어날 수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킹이 즉각 깨우친 바, 간디의 비폭력 저항 이론은 도덕주의적 사랑을 장려하는 주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담긴 비폭력과는 달랐다. 그것은 적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는 적보다 한 수 앞섬으로써 이기겠다는 현실적 전략이었다. 킹은 이렇게 생각했다. 폭력을 터부시하면, 모험과 아수라장에 이끌려 찾아든 무뢰한과 선동가 때문에 운동이 오염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 때문에 초기에 운동이 패배를 겪더라도,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사기와 집중력이 유지될 것이다. 적에게 정당한 응징을 가할 구식을 전혀 주지 않으니, 제삼자는 우리를 도덕적 장부에서 긍정적인 쪽에 기입할 것이고 상대를 부정적인 쪽에 기입할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적 내부에도 분열이 생긴다. 폭력이 일방적인 것처럼 보인다면, 상대 지지자들 중에도 점차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이 생겨나 떨어져 나갈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연좌 농성, 파업, 시위 등의 방해 공작으로 의제를 부각할 수 있다. 모든 적에게 이 전략이 통하지는 않겠지만, 어떤 적에게는 통할 것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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