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혼자 읽기

D-29
칸트가 <영구 평화론>에서 상정한 '자유 국가들이 연방'은 국제적 리바이어던에는 한참 못 미치는 형태였다. 그것은 지구적인 초거대 정부라기보다는 차츰 범위를 넓혀가는 자유 공화국들의 클럽이고, 무력의 독점보다는 도덕적 정당성이라는 유연한 힘에 의존한다. 현대에 그가 동등한 것을 찾자면 오히려 정부 간 국제기구( IGO)이다. 참가국들에게 공통의 이해가 있는 분야에서 제한적으로나마 각국의 정책을 조정할 권한을 지닌 관료 기구를 뜻한다. 국제 조직 중 세계 평화에 최고의 실적을 기록한 단체는 유엔이 아니라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일 것이다. 프랑스, 서독,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가 1950년에 창설한 이 기구는 석탄과 철이라는 두 중요한 전략적 필수품의 시장을 감시하고 생산을 조절한다. 기구는 참가국들의 - 특히 서독의 - 역사적 경쟁심과 야심을 공통의 상업 행위 속에서 가라앉히려는 방안으로서 설계되었다. 석탄 철강 공동체는 유럽 경제 공동체의 무대를 닦았고, 그로부터 유럽 연합이 탄생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긴 평화는 국제 무대에서 정언 명령이 득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많은 국제 관계 연구가 이 생각에 콧방귀를 뀔 것이다. 편향되게도 '현실주의'라고 불리는 유력한 이론은 세계 정부가 부재한 상황일 때 국가들은 영원히 홉스식 무정부 상태로 존재한다고 본다. 지도자들은 사이코패스처럼 행동하고, 자국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도덕성이라는 감상적인 (그리고 자살적인) 생각에 따라 유화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현실주의를 변호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인간 본성의 결과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들이 기저에 깐 인간 본성 이론이란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동물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8장과 9장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인간은 또한 도덕적 동물이다. 인간의 행동이 공평무사한 윤리적 분석에 비추어 도덕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은 감정, 규범, 터부를 기반으로 하는 도덕적 직관에 따른다는 뜻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세계주의 관점에서 본 보편 역사의 이념>이라는 글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했다. - 전쟁들, 긴장되고 쉴 새없는 대비, 그 때문에 평화로운 시절에조차 모든 국가가 내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고통. 자연은 이런 것을 수단으로 삼아서, 국가들이 모종의 조치를 시도하도록 이끈다. 처음에는 그 시도가 불완전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무수한 황폐와 격변과 심지어 내부의 힘을 모조리 소진하는 일까지 겪은 뒤에는, 야만적인 무법 상태를 등지려는 조치가 성공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결론은 굳이 수많은 슬픈 경험을 겪지 않고도 이성을 통해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세데르만은 칸트의 이른바 '학습을 통한 평화'이론을 칸트의 '민주주의를 통한 평화' 이론과 통합하자고 제안한다. 민주 국가를 포함하여 모든 국가가 처음에는 호전적인 상태에서 시작하고(강대국이 민주 국가가 된 예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국가이든 갑작스럽고 끔찍한 전쟁에 허를 찔릴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앙에서 배우는 능력은 민주 국가가 더 낫다. 정보에 대한 개방성과 지도자가 짊어진 의무 때문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긴 평화는 이런 종류(새로운 비관론을 부추긴 세 가지 조직적 폭력)까지 없애지는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이 '어느 때보다도 위험한 장소'라는 인상을 받는다. 첫 번째 조직적 폭력은 강대국 간 전쟁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전쟁들을 아우른다. 특히 주목할 것은 내전, 그리고 개발도상국들이 주로 겪는 군부, 게릴라, 준군부의 전쟁이다. 이런 전쟁은 '케케묵은 증오'를 연료로 타오르는 '새로운 전쟁' 혹은 '저강도 충돌'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조직적 폭력은 특정 인종이나 정치 집단에 대한 대량 살해이다. 지난 100년은 '집단 살해의 시대' 혹은 '집단 살해의 세기'로 불린다. ... 세 번째는 테러이다. 미국이 2001년 9월 11일에 공격을 받은 뒤, 테러에 대한 두려움에서 거대한 관료주의가 생겨났고, 두 차례 해외 전쟁이 벌어졌고, 정계에서는 집착에 가까운 논의가 이어졌다. 테러 위협은 미국에게 '존재론적 위협'을 가한다고 했고, '우리 삶의 방식을 끝장' 내거나 '문명 자체를' 끝장 낼 수 있다고 했다. ... 정치학자들이 이런 종류의 파괴를 측정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최근의 일인데, 분석 작업은 놀라운 결론에 도달했다. 모든 종류의 살해들이 감소세였던 것이다. 감소는 극히 최근의 일이라서 -지난 20년 안짝이다.- 앞으로도 지속되리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우므로, 잠정성을 고려하는 의미에서 나는 이것을 새로운 평화(New Peace)라고 부르겠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강대국이 식민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벌인 전쟁은 대단히 파괴적일 수 있었다. 프랑스가 1946~1954년까지 베트남을 유지하려고 벌였던 전쟁이나(전투 사망자 37만 5000명)1954~1962년까지 알제리를 유지하려고 벌였던 전쟁이(전투 사망자 18만 2500명) 그랬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최대의 권력 이전'(냉전 종식) 이후에는 이런 전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이것은(1946~2008년까지 국가 기반 무력 충돌 그래프에서 국가간 전쟁 데이터) 세 개의 큼직한 덩어리로 뭉쳐 있는데, 각각이 이전보다는 얇아졌다. 첫 번째는 1950~1953년까지 벌어졌던 한국 전쟁을 포함한 영역이고(4년간 전투 사망자 100만 명), 다음은 1962~1975년까지 벌어졌던 베트남 전쟁을 포함한 영역이고(14년간 전투 사망자 160만 명), 마지막은 이란-이라크 전쟁을 포함한 영역이다(9년간 전투 사망자 64만 5000명). 냉전 종식 뒤에는 국가 간 전쟁이 두 건 눈에 띈다. 전투 사망자 2만 3000명의 제1차 걸프전과 사망자 5만 명의 1998~2000년 에리트레아-에티오피아 전쟁이다. 새 천 년의 첫 10년은 국가 간 전쟁이 드물었고, 대체로 짧았고, 전투 사망자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인도-파키스탄과 에리트레아-지부티 충돌인데, 이것들은 연간 사망자 1000명이라는 엄격한 기준에서는 '전쟁으로 분류되지 않는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신속한 정권 교체도 이 시기에 포함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국가 간 전쟁이 꺼져가는 동안, 내전은 불붙었다. 그림 6-2에서 왼쪽의 큼지막한 진회색 쐐기를 보자. 그것은 주로 1946~1950년 중국 내전의 전투 사망자 120만 명 때문이다. 1980년대에도 좀 더 옅은 회색 덩어리가 꼭대기에 불룩 얹혀 있다. 여기에는 소련이 뒤를 봐주었던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전투 사망자 43만 5000명이 포함되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구불구불 이어진 진회색 층은 앙골라, 보스니아, 체첸, 크로아티아, 엘살바도르, 에티오피아, 과테말라, 이라크, 라이베리아, 모잠비크, 소말리아, 수단, 타지키스탄, 우간다 등에서 벌어졌던 작은 내전들의 합이다. 이조차도 2000년대에 더 가늘어져, 더 날씬한 층이 되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가난의 효과가 어떻든, 그런 경제 지표들과 그 밖의 '구조적 변수들'은 최근 내전 상황의 변동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변화가 너무 느리다. 가령 국가 인구 구성에서 젊은이와 남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그런 변수이다. 다만 그런 변수들의 효과는 그 나라의 통치 형태와 상호 작용한다. 사실 그래프에서 1960년대에 내전의 쐐기가 두꺼워진 데에는 명백한 유발 기제가 있었다. 바로 탈식민화이다. 유럽 국가들은 식민지를 정복하고 반란을 진압하면서 원주민들에게 가혹한 짓을 했지만, 제법 제대로 기능하는 경찰, 사법, 공공 서비스 하부 구조를 구축한 것도 사실이었다. 유럽인이 특정 인종 집단을 편애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주 관심사는 식민지 전체를 통제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법과 질서를 제법 광범위하게 적용했다. ... 그랬던 식민 정부들이 떠나면서, 유능한 통치도 함께 사라졌다. 1990년대 중앙아시아와 발칸 반도에서도 수십 년 동안 그들을 지배했던 공산주의 연방이 갑자기 해산된 뒤에 이와 비슷한 반(半) 무정부 상태가 분출했다. 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사람은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뒤에야 민족 간 폭력이 터진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옛날에 우리가 평화롭고 조화롭게 살았던 까닭은 100미터마다 경찰관이 서서 우리가 서로 못 견디게 사랑하는지 확인했기 때문이죠."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신생 정부의 운영자는 독재자나 도둑 정치가일 때가 많았고, 가끔 정신 이상자도 있었다. 그들은 국가의 많은 부분을 무정부 상태로 버려두어, 사람들의 약탈과 갱 전쟁을 초래했다. 3장에서 폴리 위스너가 뉴기니의 비문명화 과정을 묘사했던 것과 비슷하다. .... 이 시절을 상징하는 존재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장베델 보카사일 것이다. 과거에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이라고 불렸던 소국의 이름을 그가 그렇게 바꾸었다. 그는 아내가 17명이었고, 몸소 정적을 찔러 죽였고(인육을 먹었다는 소문도 있다.), 그의 제복을 본뜬 값비싼 의무 교복에 학생들이 항의하자 죽도록 구타했고, 황제로 자칭하는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서 세계 최빈국에 속하는 나라의 1년 세입에서 3분의 1을 쏟았다(황금 왕좌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왕관까지 갖추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냉전기에는 많은 폭군이 강대국의 가호로 권좌를 지켰다. 강대국들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니카라과의 아나스타시오 소모사에 대해서 했다는 말, "그는 개자식이지만 그래도 우리 개자식이라오." 라는 논리를 따랐다. 소련은 세계 공산주의 혁명을 전진시키려는 곳이라면 어느 체제에든 동정적이었고, 미국은 소련의 궤도에서 벗어나 있으려는 곳이라면 어느 체제에든 동정적이었다.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강대국들은 자국에게 석유와 광물을 공급하는 곳이라면 어느 체제하고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 두 후견국은 충돌이 얼른 끝나는 것보다는 끝내 자국의 피후견인이 이기는 것을 보고 싶어 했다. 그림 6-3에서, 1975년 무렵 내전이 두 번째로 팽창한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포르투갈이 식민 제국을 해체한 때였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것을 보고서 세계 각지의 반란군들이 대담해진 때였다. 내전은 1991년에 51건으로 가장 많았는데, 바로 그해에 소련이 사라졌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냉전이 부추겼던 대리전들이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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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충돌의 감소분 중 대리전이 사라진 탓으로 볼 수 있는 것은 5분의 1뿐이다. 세계의 갈등을 지피는 연료 중 또 하나를 제거한 사건은 공산주의의 종말이다. 공산주의는 루어드가 명명한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최후까지 남은 반인도주의적 강령이자 투쟁을 미화하는 강령이었다(새로 등장한 이슬람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이 장의 뒷부분에서 다루겠다.) 이데올로기는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하나같이 전쟁을 치명적 분포의 꼬리로 밀어붙인다. ... 마오쩌둥은 인민의 목숨이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을 서슴없이 했다. "우리는 인구가 아주 많다. 조금 잃어도 괜찮다. 그런들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한번은 그가 '조금'이 얼마인지 정량화해서 말했는데, 당시 중국 인구의 절반인 3억 명이었다. 그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인류에서도 그만큼의 비율을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말했다.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아 인류의 절반이 죽더라도, 나머지 절반은 제국주의가 남김없이 파괴되고 온 세계가 사회주의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정부 권력이 승자 독식의 복권과 같을 경우, 특히 정부가 석유, 금, 다이아몬드, 전략적 금속 등의 횡재를 통제하는 경우에는 내전 취약성이 증폭된다. 이런 노다지는 축복이기는커녕 이른바 자원의 저주를 불러온다. 다른 말로 풍요의 역설, 바보의 금이라고도 한다. 재생 불가능하고 독점하기 쉬운 자원을 잔뜩 가진 나라는 경제 성장이 더디고 허접스러운 정부가 서고, 폭력이 더 많다 베네수엘라 정치인 후안 페레스 알폰소의 말마따나 '석유는 악마의 배설물'이다. 국가는 자원 때문에 저주에 걸릴지도 모른다. 자원은 그것을 독점한 사람에게, 대개는 통치 엘리트이지만 때로는 지방 군벌에게, 권력과 부를 몰아주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 들러붙는 경쟁자를 쫓기에 급급할 뿐, 상호 의무 속에서 사회를 살찌우고 하나로 역을 상업망을 육성하는 데는 아무런 유인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콜리어는 "바닥의 국가들이 비록 우리와 함께 21세기를 살고는 있지만, 그들의 현실은 내전, 전염병, 무지가 횡행했던 14세기이다."라고 말했다. 문명화 과정의 목전이었던 그 무참한 세기와의 비유는 참으로 적절하다. 뮬러는 <전쟁의 자취>에서 오늘날 세계 무력 충돌의 대부분은 전문적인 군대들이 영토를 놓고 벌이는 싸움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보다는 젊은 무직자 무리가 군벌이나 지방 정치인을 섬기며 약탈, 겁박, 복수, 강간을 자행하는 경우이다. 중세 영주가 사적인 전쟁을 치르려고 모집했던 사회의 쓰레기들과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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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화로 인한 무정부적 비문명화 과정에서 내전이 급등했다면, 최근의 감소는 재문명화 과정을 반영할지도 모른다. 국민을 착취하기보다는 보호하고 섬기는 유능한 정부들이 생겨난 것이다. 많은 아프리카 나라는 보카사 스타일의 정신 이상자 대신 책임감있는 민주주의자를 권좌에 앉혔다. 넬슨 만델라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전환에는 이데올로기 변화도 필요했다. 해당 국가만이 아니라 국제 사회가 폭넓게 변해야 했다. 역사학자 제라를 프루니에는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식민 지배로부터의 독립은 구세주적 이상이었다고 지적했다. 신생 국가는 주권 국가의 장치들을 마련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를테면 항공 노선, 과저, 나라 이름이 붙은 시설들이었다. '종속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나라도 많았다. 그 이론가들은 제3세계 정부가 세계 경제와의 접촉을 끊고 자급자족 산업과 농업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요즘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그것을 극빈으로 가는 지름길로 여긴다. 때로 경제 국수주의는 폭력 혁명을 미화하는 낭만적 군사주의와 결합했다. 1960년대의 두 아이콘이 그 흐름을 잘 상징한다. 부드러운 색깔로 화사하게 그려진 마오쩌둥의 초상과 날카로운 윤곽으로 늠름하게 묘사된 체 게바라의 초상이다. 영광스런 혁명가들의 독재가 인기를 잃으면, 민주 선거가 새 묘약이 되었다. 누구도 문명화 과정의 시시한 제도들, 즉 유능한 정부, 경찰력, 무역과 상업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하부 구조 따위에서 낭만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역사에 따르면 그런 제도들이야말로 만성적 폭력 감소에 꼭 필요한 선결 조건이고, 다른 모든 사회적 이득에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점을, 지난 20년 동안 강대국, 기부국, 정부 간 국제기구(가령 아프리카 연합)가 강조했다. 이들은 무능한 폭군이 통제하는 나라를 배척하고, 처벌하고, 망신주고, 몇몇 경우에는 침공했다. 정부 부패를 추적하고 근절하는 조치들을 널리 시행했고, 세계 무역에서 개발 도상국에서 불리하게 작용하는 장벽을 확인하는 작업도 진행했다. 화려하지 않은 이런 조치들의 조합이, 196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내전의 횡행을 야기했던 개발 도상국 정부와 사회의 병리적 사고방식을 되돌렸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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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첫 지주인 민주주의가 내전의 횟수를 줄이지 못한다는 사실은 앞에서 말했다. 미덥지 못한 혼합 정치일 때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내전의 심각성만큼은 줄이는 듯하다. ... 민주주의 평화 이론의 두 번째 지주인 세계 경제에의 개방성은 이보다 더 강력하여, 내전의 확률과 심각성을 둘 다 끌어내리는 듯하다. 이때 개방성은 무역, 해외 투자, 조건부 원조, 전자 매체에의 접근성 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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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평화 이론은 평화의 무게를 세 지주 위에 얹었는데, 그 세 번째는 국제 조직이다. 그중에서도 내전 감소의 공을 크게 주장할 만한 조직이 있다. 국제 평화 유지군이다. ... ... 국제사회는 1980년대 말부터 평화 유지 작전을 늘렸다. 더 중요한 점으로, 평화 유지군 인원을 늘려 임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게 했다. 그 전환점은 냉전의 종식이었다. 강대국들은 마침내 대리전의 승리보다는 갈등의 종결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유엔이 갖가지 단점에도 불구하고 잘하고 있는 한 가지가 평화 유지군이다(유엔은 처음부터 전쟁을 예방하는 데는 성과가 그다지 좋지 않다.). 정치학자 버지니아 페이지 포트나는 <평화 유지군은 효력이 있는가?>에서, 책 제목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고 우렁찬 예스"라고 말했다. 포트나는 1944~1997년까지 115건의 내전 휴전에 대한 데이터를 모은 뒤, 평화 유지 작전이 전쟁의 재점화 가능성을 낮췄는지 살펴보았다. 데이터에는 유엔의 작전은 물론이고 NATO나 아프리카 연합과 같은 상설 기구들, 그리고 국가들의 임시 연합이 벌린 작전도 포함했다. 그녀에 따르면, 평화 유지군의 존재는 휴전 후 전쟁이 재발할 위험을 80퍼센트나 낮췄다. ... 소규모 파단도 평화 유지에 효과적일 수 있다. 상대의 선제공격이 두려워서 먼저 선제 공격을 하려 하는 홉스의 함정으로부터 양측을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평화 유지군의 간섭을 받아들인다는 행위 자체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는 양측의 주장이 진지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값비싼 (따라서 믿을 만한) 신호이다. 일단 평화 유지군이 주둔하면, 협정이 이행되도록 감시함으로써 안전을 강화하고 양측에게 상대가 몰래 재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평화 유지군은 또 일상적인 치안 활동을 맡아, 자칫 복수의 악순환으로 격화할지도 모르는 작은 폭력 행위를 저지한다. ... 평화 유지 작전은 다른 수단을 통해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반란군이나 군벌에게 자금을 대는 밀매 무역을 박멸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데, 사실 자금을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같은 사람들일 때가 많다. 아니면, 평화를 지키는 지도자에게는 지역 개발 사업 자금을 주겠다고 유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의 세력을 키우고 유권자들에게 인기를 끌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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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국가 충돌은) 군벌, 민병대, 마피아, 반란 집단, 준군부 등이 종종 민족 집단과 연대하여 서로 싸우는 경우이다. 이런 충돌은 보통 실패한 국가에서 벌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정부를 끌어들일 생각조차 않는 전쟁이라는 것은 국가가 폭력의 독점에 실패했다는 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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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국가 충돌은 2002년부터 집계되기 시작했다. UCDP(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에서 운영하는 세계 분쟁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는 그해에 '비국가 충돌 데이터 집합'을 꾸리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세 가지 통찰을 얻었다. 첫째, 어떤 해에는 비국가 충돌이 국가 기반 충돌만큼 많았다. 이것은 공동체 간 전투가 만연했다는 징후라기보다는 전쟁이 그만큼 희소해졌다는 징후이다. 충돌의 대부분이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에서 벌어졌다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지만, 중동에서도 수가 늘고 있다(이라크가 두드러진다.) 둘째, 비국가 충돌은 정부가 관여하는 충돌보다 훨씬 적은 사망자를 낸다. 대략 4분의 1이다. 이것 역시 놀랍지 않다. 정부란 정의상 폭력의 사업가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셋째, 2002~2008년까지 (2008년은 데이터 집합에서 제일 최근 년도이다.) 사망자 수는 대체로 감소했다. 2007년은 이라크에서 공동체 간 폭력이 가장 치명적이었던 해였는데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비국가 충돌이 무력 충돌 희생자의 세계적 감소세에 대한 반례가 될 만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 같지 않다. 비국가 충돌은 새로운 평화의 반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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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살해는 희생자 수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에 충격을 안긴다. 럼멜은 집단 살해의 피해를 헤아린 최초의 역사학자였는데,20세기에 정부에 의해 살해된 사람이 1억 6900만 명이었다는 추정치로 유명하다. 이 숫자는 지나치게 크게 잡은 것이지만, 20세기에 전쟁 사망자보다 국가 살해 사망자가 더 많았다는 주장에는 다른 전문가들도 대체로 동의한다. 매슈 화이트는 그동안 발표된 추정치들을 종합하여 검토한 결과, 국가 살해에서 8100만 명이 죽었고 인재로 간주할 수 있는 기근에서 4000만 명이 죽었다고 계산했다(주로 스탈린과 마오쩌둥 때문이었다.). 도합 1억 2100만 명이다. 한편 전쟁에서는 교전 중 군인 3700만 명과 민간이 2700만 명이 죽었고, 추가로 전쟁으로 인한 기근 때문에 1800만 명이 죽었다. 도합 8200만 명이다. (다만 화이트는 국가 살해 사망자의 절반쯤이 전쟁 중에 발생했고, 전쟁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런 학살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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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많은 사람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죽이려면 죽음의 대량 생산 기법이 필요하다. 이 점이 공포에 한 겹을 더 두른다. 나치의 가스실과 소각장은 언제까지나 집단 살해의 가장 충격적인 시각적 상징으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고출력의 살상을 자행하기 위해서 반드시 현대 화학과 철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 1972년 부룬디에서 투치 족이 후투 족을 집단 살해했을 때 (22년 뒤 르완다에서 거꾸로 벌어질 집단 살해의 전 단계였다.), 한 가해자는 이렇게 말했다. - 기술이야 여러 가지가 있다. 이것저것 많다. 한 건물에, 감옥이라고 하자. 2000명을 몰아넣을 수도 있다. 그렇게 큼직한 방들이 있다. 그 건물을 잠근다. 그 속의 사람들은 보름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방치된다. 그 뒤에 문을 연다. 그러면 시체들이 있다. 그들은 맞은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그냥 죽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내가 인간 집단도 다양한 과일들처럼 집단마다 공통된 속성이 있다고 말하면, 정치적 올바름을 따지는 사람들은 새치름한 반응을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세상에는 우리가 찬양할 어떤 문화적 다양성도 없을 것이고 우리가 자랑스러워할 어떤 민족적 특징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집단으로 뭉치는 것은 정말로 어떤 특징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비록 통계적인 공유이지만 말이다. 그러니 특정 개인을 범주에 따라 일반화하는 것이 그 자체로 결함은 아니다. 요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정말로 백인들보다 복지 제도에 더 많이 의존한다. 유대인들은 정말로 앵글로색슨 사람들보다 평균 소득이 더 높다. 경영 전공 학생들은 정말로 예술 전공 학생들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다. 어디까지나 평균적으로. 범주화의 문제는 이것이 종종 통계를 넘어선다는 데 있다. 일례로 우리는 압박을 느끼거나 주의가 산만하거나 감정적일 때, 범주가 근사적 성질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고서 마치 모든 남자, 여자, 아이에게 그 고정관념이 적용되는 것처럼 행동한다. 또 다른 예로, 우리는 범주를 도덕화(moralize)하는 경향이 있다. 동지에게는 칭찬할 만한 특징들을 부여하고 적에게는 비난할 만한 특징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미국인은 독일인보다 러시아인에게 긍정적인 특징이 많다고 여겼다. 그러나 냉전 중에는 거꾸로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집단을 본질화(essentialize)하는 경향이 있다. 아이들에게 출생 직후, 부모가 바뀐 아기가 친부모의 언어와 양부모의 언어 중 무엇을 말하겠느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친부모의 언어라고 대답한다. 나이가 들면서는, 특정 민족이나 종교 집단 구성원들은 유사 생물학적인 본질을 공유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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