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혼자 읽기

D-29
브라운은 강간이 인간의 보편 속성이듯이 강간에 대한 금기도 보편적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강간을 피해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기록을 찾으려면, 역사와 문화를 오랫동안 열심히 살펴보아야만 한다. '강간하지 말지어다'는 십계명에 포함되는 계율이 아니다. 열 번째 계율이 당시 여성의 위치를 말해주기는 하는데, 여성은 남편의 소유물 중 하나로서 집보다는 뒤에, 하인과 가축보다는 앞에 거론된다. 성경의 다른 대목을 보면, 기혼의 강간 피해자는 간통을 저질렀다고 간주되어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다. 이 판결은 오늘날의 샤리아 율법으로 이어졌다. 강간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 대한 침해로 여겨졌다. 여자의 아버지나 남편에 대한 침해, 노예라면 그 소유주에 대한 침해로 여겨졌다. 전 세계의 도덕과 법체계가 강간을 이런 식으로 성문화했다. 강간은 여성의 아버지로부터 여성의 처녀성을 훔치는 행위였고, 여성의 남편으로부터 여성의 정조를 훔치는 행위였다. 강간범은 피해자를 아내로 사들임으로써 체면을 회복할 수 있었다. 강간 당한 책임은 여성에게 있었다. 강간은 남편, 영주, 노예 소유주, 하렘 소유자의 권리였으며, 전쟁의 정당한 전리품이었다. 중세 유럽 정부들이 사법 정의를 국유화하기 시작하면서, 강간은 남편이나 아버지에 대한 불법 행위에서 국가에 대한 범죄로 바뀌었다. 국가는 명목상 여성과 사회의 이해를 대변했지만, 현실에서는 정의의 저울이 피고인 쪽으로 기울었다. 강간은 거짓으로 고발하기 쉽고 고발에 대해 변호하기는 어렵다는 이유에서, 범죄 증명이라는 무거운 부담은 여성 소추자의 몫이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강간의 약 5퍼센트는 임신으로 귀결되므로, 강간범에게는 진화적 이득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강간을 일으키는 성향이 무엇이든 그것이 진화 과정에서 솎아질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유리하게 선택될지도 모른다. 물론 이것은 모든 남자가 '태어날 때부터 강간범'이라거나, 강간범도 '어쩔 수 없었다'거나, 강간이 '자연적인' 행동이므로 불가피하고 용서할 만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다만, 어째서 강간이 모든 인간 사회에서 고질로 존재해 왔는지 설명해 줄 뿐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미국에서는 페미니즘의 첫 물결이 1848년 세니커폴스 회의에서 시작되어 1920년 헌법 수정 19조의 추인으로 매듭지어짐으로써 여성들에게 투표할 권리, 배심원이 될 권리, 결혼해서도 재산을 유지할 권리, 이혼할 권리, 교육 받을 권리가 생겼다. 그러나 강간에 대한 처분이 혁명적으로 바뀐 것은 1970년대의 두 번째 물결에서였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3장에서 보았듯이, 1990년대에는 모든 종류의 범죄가 줄었다. 살인에서 자동차 절도까지 두루두루. 그렇다면 강간 감소도 페미니스트들의 근절 노력 때문이 아니라 전반적인 범죄 감소의 한 측면이 아닐까? ... 그래프를 보면, 강간의 감소 추이는 살인과는 다르다. 살인율은 1992년까지 오르락내리락하다가 1990년대에 떨어져 2000년대에 안정되었다. 반면에 강간율은 1979년 무렵부터 떨어지기 시작하여 1990년대에 급락했고, 2000년대에도 계속 낮아졌다. 2008년 살인율은 1973년 수준의 57퍼센트였지만 강간율은 2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 ...어쩌면 강간 감소가 1990년대 전반적인 범죄 감소의 산물이었던 것 못지 않게, 전반적인 범죄 감소가 페미니즘 운동의 산물이었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범죄 탐닉이 정체기에 접어들자 페미니즘 운동이 나서서 여성에 대한 공격을 성토함으로써 길거리 폭력을 미화하는 시각을 폭로하고, 공공장소 안전을 권리로서 주장하고, 1990년대 재문명화 과정에 박차를 가했기 때문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강간범은 보통 남성이고, 피해자는 보통 여성이다. 강간 퇴치 운동이 힘을 얻었던 것은 여자들이 힘 있는 자리에 많이 밀고 들어가서 행정의 도구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바로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힘 있는 남자들의 주변에 여자가 많아짐으로써 남자들의 인식이 변한 것도 한몫했다. ... 강간은 남성 섹슈얼리티의 정상적인 요소가 아니다. 그러나 남성의 욕망이 섹스 상대를 무차별로 선택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상대의 내면에 무관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강간이 가능해진다. '상대'가 아니라 '대상'이 더 적합한 용어일 수도 있다. ... 우리는 전통 법률과 도덕 규범이 강간 피해자를 냉담하게 다뤘던 이유를 이런 성차로 좀 더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과거에 남성이 여성에게 무자비한 힘을 휘둘렀기 때문만은 아니고, 남성에게는 자신과는 다른 마음을 상상할 줄 모르는 편협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낯선 사람이 내가 요구하지도 않은 섹스를 불쑥 제안한다는 생각이 매혹적이기는커녕 불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모른다. 그러나 남자가 여자와 함께 일하는 사회, 따라서 자신의 이해를 정당화하면서도 여자의 이해도 고려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그런 아둔한 무관심을 계속 갖고 있을 수 없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서구에서는 1970년대에 여성을 남편의 소유물로 취급하는 법률이 폐지되었다. 이혼법도 더 균형 잡힌 방향으로 바뀌었다. 남자는 이제 간통한 아내나 그 연인을 죽이고 정당방위를 주장할 수 없었다. 아내를 완력으로 감금하거나 완력으로 가출을 막을 수도 없었다. 여자의 가족과 친구가 도망 나온 여자에게 피신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은닉죄'를 선고 받는 일도 더 이상 없었다. ...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었다. 과거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아내 구타를 결혼의 정상적인 요소로 여겼다. 17세기 극작가 보먼트와 플레처는 "자선과 구타는 가정에서 시작된다."는 경구를 남겼고, 20세기 버스 운전사 랠프 크램든은 "언젠가, 앨리스 ... 퍽! 하고 주둥아리를 때려 줄 테다."라는 대사를 남겼다. 가까이는 1972년에도 다양한 범죄들의 심각도를 물어본 설문 조사에서 배우자 폭력은 140개 항목 중 91위를 차지했다. (응답자들은 공원에서 낯선 사람이 강제로 저지르는 강간보다 LSD 판매가 더 나쁜 범죄라고 대답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좌우간 다른 연구들을 보면, 요즘은 남편이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자기 알 바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이 옛날보다 줄었다. 1995년 조사에서 응답자의 80퍼센트 이상이 가정 폭력을 '아주 중요한 사회적, 법적 문제'로 보았고(빈곤 아동 문제, 환경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87퍼센트는 여자가 다치지 않았더라도 남자가 아내를 때리면 주변에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99퍼센트는 남자가 아내를 다치게 할 경우 법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같은 질문을 다른 시대에 물었던 조사 결과에서는 충격적인 변화가 잘 드러난다. 1987년에는 남편이 아내를 허리띠나 회초리로 때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절반에 지나지 않았지만, 10년 뒤에는 80퍼센트가 그런 행동은 언제나 잘못이라고 대답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여자들도 남자들과 같은 수준으로 가정 폭력을 저지른다는 놀라운 주장의 진위를 따져 보자. 사회학자 머리 스트라우스는 익명으로 비밀을 보장한 여러 차례의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들에게 파트너에게 폭력을 쓴 적이 있느냐고 물어, 남녀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 이 발견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가정 폭력의 정의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사실을 알고 보니, 흔한 부부 싸움이 폭력으로 발전하는 경우와 (로저스와 하트의 노래 가사처럼 '접시가 날아다니는 대화'이다.) 한쪽이 상대를 체계적으로 협박하고 강제하는 경우를 구별해야 했다. 사회학자 마이클 존슨은 폭력적 관계의 상호 작용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하여, 일반적으로 통제 전략은 여러 종류가 공존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떤 커플들은 한쪽이 상대를 완력으로 위협하고, 가정의 자산을 통제하고, 상대의 행동을 제약하고, 자식이나 애완동물에 대한 분노와 폭력을 상대에게 돌리고, 칭찬과 애정은 전략적으로 아낀다. 이처럼 통제자가 있는 커플의 경우, 폭력적인 통제자는 거의 절대적으로 남자였다. 그러나 통제자가 아닌 쪽이 폭력을 쓰는 경우에는 거의 늘 여성이었다. 아마도 자신과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만일 어느 쪽도 통제자가 아니라면, 폭력은 싸움이 통제 불능일 때만 터졌다. 이때는 남자가 폭력을 쓸 가능성이 여자가 쓸 가능성보다 아주 약간 더 높았다. 이렇게 통제자와 흔한 부부 싸움을 구별하면, 비로소 성별 중립적인 폭력 통계의 수수께끼가 풀린다. 그 설문 조사의 데이터는 통제자가 없는 커플의 부부 싸움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이다. 이때는 여자도 받은 만큼 되갚는다. 그러나 쉼터 입소 기록, 법원 기록, 응급실 기록, 경찰 통계의 데이터는 통제자가 있는 커플의 사례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때는 보통 남자가 여자를 폭력으로 협박하고, 여자가 가끔만 폭력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헤어진 커플은 비대칭이 더 심하다. 이때 스토킹, 협박, 위해를 가하는 쪽은 대부분 남성이다. 다른 연구 결과들을 보아도 만성적 위협, 심각한 폭력, 남성성은 함께 가는 경향이 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세계 보건 기구는 최근 48개 나라의 심각한 가정 폭력 발생률 데이터가 뒤죽박죽 섞인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전 세계 여성의 5분의 1에서 2분의 1 사이를 가정 폭력 피해자로 추정했고, 서유럽과 영어권 국가들 바깥에서 훨씬 더 심하다고 했다.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전해에 파트너에게 맞았다고 보고한 여성이 3퍼센트 미만이었지만, 다른 나라들은 단위가 하나 더 높은 수준이었다. 니카라과의 표본 집단은 27퍼센트, 한국의 표본 집단은 38퍼센트, 팔레스타인의 표본 집단은 52퍼센트였다. 배우자 폭력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도 충격적으로 다르다. 남편에게 말대꾸하거나 순종하지 않는 아내를 때릴 권리가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뉴질랜드는 약 1퍼센트, 싱가포르는 약 4퍼센트였다. 반면에 이집트 시골지역은 78퍼센트였고, 인도 우타르프라데시 주는 50퍼센트에 육박했고, 팔레스타인은 57퍼센트였다. 법률 개혁도 서구 민주 국가들에게 뒤진다. 서유럽 국가의 84퍼센트가 가정 폭력을 불법으로 규정했거나 할 계획이고, 72퍼센트는 배우자 강간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다른 지역들의 두 수치는 다음과 같다. 동유럽은 57과 39퍼센트, 아시아 태평양 지역은 51과 19퍼센트, 라틴 아메리카는 94와 18퍼센트,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은 35와 12.5퍼센트, 아랍 국가들은 25와 0퍼센트, 여기에 더해,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남아시아, 서남아시아는 21세기 서구에서는 드물거나 아예 사라진 체계적 잔학 행위들의 온상이다. 여아 살해, 생식기 절단, 아동 매춘과 성 노예 인신매매, 명예 살인, 순종하지 않거나 지참금이 적은 아내에게 산을 뿌리거나 석유로 태워 죽이는 일, 그리고 전쟁, 폭동, 집단 살해 중의 집단 강간 등등. 여성에 대한 폭력 면에서 서구와 다른 지역들의 차이는 마태 효과로 한데 묶인 다수의 건전한 요인들 중 하나일까? 달리 말해, 민주주의, 번영, 자유 경제, 교육, 기술, 괜찮은 정부와 함께 가는 현상일까? 전적으로 그렇지만은 않다. 한국과 일본은 부유한 민주 국가인데도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이 빈번한 편이다. 반면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개발이 훨씬 덜 되었는데도 두 성의 폭력률이 좀 더 대등하고, 절대 발생률도 더 낮다. 덕분에 우리에게는 부를 고정했을 때 어떤 사회에서 여성이 더 안전한지 알아볼 수 있는 통계적 여지가 있다. 아처의 분석 결과, 정부와 전문 직종에서 여성 비율이 높은 나라일수록, 그리고 여성의 소득이 가정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큰 나라일수록, 여성이 배우자 학대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낮았다. 또한 개인주의로 분류되는 문화, 즉 누구나 스스로를 자신만의 목표를 추구할 권리가 있는 개인으로 생각하는 문화는 집단주의로 분류되는 문화, 즉 사람들이 스스로를 공동체의 일부로 느끼고 공동체의 이해가 자신의 이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화에 비해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이 적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우리는 인간의 생명 연장 욕구에 반대되는 신생아 살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의사 래너 밀너는 전 세계 영아 살해를 조사한 권위적 저작 <마음의 무정함/삶의 가혹함>의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 ... 나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방식이 병리적으로 특이하게 변질된 현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잖아도 생존이 지극히 민감한 균형에 달린 마당에, 자식을 죽이는 성향이 진화에서 보존된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아 보였다. ...연구 결과는 다양한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 제 자식을 자발적으로 죽이는 행위가 인간이 실시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일 중 하나임을 암시했다. 밀너의 혼란에 대한 대답은 생활사 이론(life history theory)이라고 불리는 진화 생물학의 하위 분야에서 찾을 수 있다. 어머니가 모든 자식을 무한히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직관은 자연 선택 이론의 속뜻이기는커녕, 그 이론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자연 선택은 개체의 기대 수명 전체에 걸쳐서 생식적 산출을 극대화하려고 하므로, 자원을 새 자식에게 투자하는 것과 현재나 미래의 자식을 위해서 아껴 두는 것 사이에서 타협해야만 한다. ... 포유류는 새끼를 임신한 상태보다 낳아서 젖을 물릴 때의 칼로리 지출이 더 크다. 자연은 일반적으로 매몰 비용의 오류를 혐오하므로, 산모는 자식과 환경의 상태를 평가한 뒤에 좀 더 투자할지, 아니면 이미 태어난 자식이나 앞으로 태어날 자식을 위해 에너지를 아낄지 결정할 것이다. ... 생물학자에게 인간의 영아 살해는 바로 이런 선별 행위이다.... ...밀너의 역작은 19세기 인류학의 창시자였던 에드워드 타일러의 말에서 제목을 땄는데, 타일러는 이렇게 적었다. "영아 살해는 마음의 무정함(hardness of heart)이 아니라 삶의 가혹함(hardness of life)에서 비롯한다. "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자연스러운 애정'은 결코 자동적이지 않다. 데일리와 윌슨은, 그리고 나중에 인류학자 에드워드 하겐은, 산후 우울증과 그 약한 형태인 '베이비 블루스'가 호르몬 기능 부전의 문제가 아니라 산모가 아기의 생사를 결정하는 기간을 겪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후 우울증이 있는 산모들은 아기와 감정적으로 분리된 것처럼 느끼며, 아기를 해치는 생각을 자꾸 떠올린다. 최근에 심리학자들이 발견했듯이, 가벼운 우울증은 우리가 평상시에 즐기는 장밋빛 시각보다 삶의 전망을 더 정확하게 평가하도록 돕는다. 우울한 산모의 전형적인 심사숙고는 - "내가 이 부담을 어떻게 지지?" - 현재의 확실한 비극과 그보다 더 클지도 모르는 미래의 비극 사이에서 무거운 선택에 직면한 역사상 모든 어머니들의 정당한 질문이다. 많은 여성은 상황이 견딜 만해지고 우울이 흩어진 뒤에야 아기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아기를 둘도 없이 멋진 한 인간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산후 우울증이 신생아 투자를 평가하는 시기라는 이론을 시험하기 위해서, 하겐은 산후 우울증에 관련된 정신과 문헌을 뒤져서 이론에서 도출되는 다섯 가지 예측을 확인해 보았다. 예상대로, 산후 우울증은 사회적 지원이 부족한 여성(미혼이거나, 별거 중이거나, 결혼이 불만족스럽거나, 부모와 관계가 먼 경우), 난산을 겪은 여성, 건강하지 않은 아기를 낳은 여성, 직업이 없는 여성, 직업이 없는 남편을 둔 여성에게 더 흔했다. 많은 비서구 인구 집단의 산후 우울증 기록에서도 동일한 위험 인자들이 확인되었다(다만 전통적인 친족 기반 사회에 대해서는 적절한 연구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산후 우울증은 실제 측정된 호르몬 불균형과는 느슨한 관계가 있을 뿐이었다. 산후 우울증이 기능 부전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설계상의 속성이라는 뜻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남아 선호는 재산권이 왜곡된 시장에서만 발생한다. 부모가 아들을 소유하되 딸은 사실상 소유하지 못하는 시장이다. 호크스에 따르면, 수렵 채집인 중에서도 부계 거주 사회(딸이 남편을 따라 시댁으로 가서 사는 사회)가 모계 거주 사회(딸이 부모와 함께 살고 남편이 이사 오는 사회)나 부부가 마을대로 거처를 정하는 사회보다 여아 살해가 더 흔하다. 부계 거주 사회는 같은 부족의 이웃 마을끼리 지속적으로 싸우는 상황일 때 흔하다. 혈연으로 묶인 남자들이 한 마을에서 살며 함께 싸우는 것이다. 적이 다른 부족일 때는 그렇지 않다. 이때는 남자들이 부족의 영토 내에서 좀 더 자유롭게 이동한다. 내부 교적 사회는 게다가 악순환에 빠지기 쉽다. 남자들은 아내들이 아들을 얼른 많이 낳게 하기 위해서, 딸이 태어나면 몽땅 죽인다. 그래야 전사가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웃 마을을 습격하기가 좋고, 자기 마을을 습격으로부터 보호하기도 좋으며, 영아 살해로 격감한 여성 인구를 습격으로 보충하기도 쉽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의 부족들이 이와 비슷한 덫에 걸렸다. 인도나 중국과 같은 국가 사회는 어떨까? 여아 살해를 실시하는 국가 사회에서도 부모는 아들은 소유하되 딸은 소유하지 못한다. 다만 군사적 이유가 아니라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호크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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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생명에 대한 터부는 나치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응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홀로코스트는 단계별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정신 지체자, 정신병 환자, 장애아를 안락사시키는 데서 시작하여, 다음에는 동성애자, 성가신 슬라브 족, 집시, 유대인으로 확장되었다. 홀로코스트의 기획자들과 그들에게 순응했던 시민들의 마음에서는 한 단계를 받아들이자 다음 단계도 괜찮게 느껴졌을 수 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는 바이지만, 만일 그 위험한 경사로의 꼭대기에 선명한 구분선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타락하는 것은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홀로코스트 이후 인간이 인간의 생사를 조작하는 일은 터부가 되었고, 그 때문에 영아 살해, 우생학, 적극적 안락사에 대한 공개 토론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터부가 그렇듯이, 인간 생명에 대한 터부도 현실의 일부 속성들과는 잘 맞지 않는다. 오늘날 생명 윤리를 둘러싼 맹렬한 논쟁의 핵심은 태아 발생(embryogenesis), 코마, 즉각적이지 않은 죽음 등 생명을 가르는 경계가 모호한 상황에서 현실과 터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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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구에서 영아 살해가 수천 분의 일로 감소한 것은 부분적으로 풍요의 선물이다. 절박한 궁지에 몰린 산모가 적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부분적으로 기술의 선물이다. 안전하고 믿음직한 피임과 낙태가 가능해져서 원치 않는 출산이 줄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현상은 아이에게 부여하는 가치가 바뀌었음을 반영한다. ...사람들의 집단적 관심이 아이들의 이해까지 포함하도록 확장된 것 같다. 아이들이 살아남을 권리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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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임신이 낙태로 끝나는 비율은 예전에 영아 살해로 끝나던 비율과 비슷한 것이 사실이다. 서구 선진국들에서는 임신한 여성의 12~25퍼센트가 낙태를 한다. 과거 공산권 국가들에서는 절반을 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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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반대자들은 한편으로는 모든 폭력이 줄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태아들이 죽는 이 상황을 엄청난 도덕적 위선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그 불일치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있다. 현대인은 도덕적 가치를 논할 때 의식에 근거하도록 감수성이 변했다. 특히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는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런 의식을 뇌 활동과 동일시하게 되었다. 이것은 도덕적 깨우침의 원천으로서 과거의 종교와 관습을 버리고 과학과 세속 철학을 택한 변화의 일부이다. 요즘은 심장이 아니라 뇌 활동이 정지한 순간을 법적 사망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생명의 시작은 태아의 의식이 처음 깨어나는 순간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의식의 신경 기반에 관한 오늘날의 지식에 따르면 시상과 대뇌겉질 사이에 신경 활동이 일어나는 시점이 바로 그 순간이고, 그 순간은 잉태 후 26주째께 벌어진다. 더 중요한 점은, 사람들이 태아를 완전한 의식을 지니지 않은 개체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심리학자 헤서 그레이, 커트 그레이, 대니얼 웨그너의 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은 태아가 로봇이나 시체보다는 무언가를 경험할 능력을 더 많이 갖고 있다고 보지만 동물, 아기, 아동, 성인보다는 덜 갖고 있다고 본다. 낙태의 압도적 다수는 뇌가 제대로 기능하기 전에 실시되므로, 사람들은 위와 같은 방식으로 생명의 가치를 이해하는 견해에 따라 그것이 영아 살해나 다른 폭력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안전하게 개념화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종류를 불문하고 모든 생명의 파괴를 일반적으로 꺼리게 되었다면, 비록 낙태가 살인과 동일시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낙태를 차츰 꺼릴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실제로 그렇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낙태율은 세계적으로 꾸준히 줄고 있다. ... 가장 가파르게 감소한 지역은 한 때 '낙태 문화'가 있었다고 이야기되는 옛 소련권이다. 공산주의 시대에는 낙태는 쉬웠지만 피임 기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여느 공산품처럼 피임 기구도 수요 공급에 따라 분배되지 않고 중앙의 인민 위원들이 배급했기 때문에 늘 부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 미국, 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처럼 낙태가 합법인 나라들에서도 낙태는 드물어졌다. 인도와 서유럽에서만 줄지 않았는데, 원래 낙태율이 가장 낮았던 지역들이다. 감소 원인은 대부분 실제적인 것이다. 그동안 낙태보다 피임이 더 싸고 간편해졌다. 피임이 쉬우면, 그것을 이용할 만큼 선견지명이 있고 자기 통제력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첫 번째 선택이 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부모-자식 간 갈등에서 아이가 쓰는 전략 때문에 부모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언제나 아이를 작은 악마라고 불렀고, 이후 기독교가 득세하자 타고난 방종과 원죄라는 종교적 신념이 그 생각을 비준했다. ... 삶의 전개에 대한 숙명론 때문에 사람들은 아이의 발달을 부모와 선생의 책임으로 보지 않고 운명이나 신의 뜻으로 보았다. 패러다임의 전환은 존 로크의 <교육에 관한 성찰>에서 왔다. 1693년에 출간된 이 책은 금세 입소문을 탔다. 로크는 무릇 아이는 "흰 종이나 밀랍처럼 깨끗하여, 어떤 형태로든 빚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원칙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빈 서판 이론이라고 불린다. 로크는 교육이 "인류에게 큰 차이를" 일으킬 수 있다고 했고, 교사는 제자들에게 공감하면서 그들의 눈높이에서 보아야 한다고 했다. 교사는 학생의 "성정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고, 학생이 공부를 즐기도록 도와야 한다. 또한 어린아이에게 어른과 같은 "몸가짐, 진지함, 열중"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거꾸로 "아이에게 ... 나이에 맞고 어리석고 유치한 행동을 허락해야 한다." ... 또 다른 게슈탈트 전환은 루소에게서 왔다. 루소는 기독교의 원죄 개념을 원초적 순수성이라는 낭만적 개념으로 교체했다. 1762년 저작 <에밀, 또는 교육에 관하여>에서 루소는 이렇게 썼다. "세상을 쓰신 분의 손을 떠날 때는 모든 것이 선했지만, 인간들의 손에 와서 모든 것이 타락했다." 20세기 심리학자 장 피아제의 이론을 예견하듯이, 루소는 아동기를 각각 본능, 감각, 사상에 집중하는 연속 단계로 나누었다. 그리고 아이는 아직 사상의 나이에 도달하지 못했으므로, 어른처럼 사고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어른은 아이에게 선악의 규칙을 주입하는 대신, 아이가 자연과 상호 작용하면서 스스로의 경험에서 배우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아이가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망가뜨리더라도 그것은 해를 끼치려는 의도가 아니라 순수함에서 나온 행동이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계몽 시대에 이르러, 엘리트들은 아동 친화적인 빈 서판 이론과 원초적 순수함 이론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아동에 대한 실제 대우가 바뀐 시점은 그보다 상당히 더 지난 20세기 초였다고 본다. 경제학자 비비아나 젤라이저는 187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서구 중상층 부모들 사이에서 아동기 '신성화'가 벌어졌다고 말한다. 그때 비로소 아이는 '경제적으로는 가치가 없지만 감정적으로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현재의 지위를 얻었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전문가들은 세 가지 이유에서 체벌에 반대한다. 첫째는 체벌이 아이의 나중 인생에까지 악영향을 미쳐 공격성, 범죄, 공감 결핍, 우울증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아이가 체벌을 겪으면 폭력을 문제 해결 방법으로서 학습하게 된다는 인과 이론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체벌과 폭력성의 관계를 다르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폭력성을 타고난 부모에게서 폭력성이 강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일 수도 있고, 체벌을 용인하는 문화와 이웃은 다른 폭력들도 쉽게 용인할 가능성이 있다. 아이를 때리지 말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체벌이 아이에게 잘못한 내용을 설명하고 꾸짖음이나 타임아웃과 같은 비폭력적 조치를 쓰는 것에 비해 나쁜 짓을 줄이는 데 딱히 더 효과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는 아픔과 수치심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리고 얌전하게 굴어야 할 이유가 오로지 벌을 피하려는 것뿐이라면, 아이는 부모가 딴 곳을 보는 순간 맘껏 말썽을 부릴 것이다. 그런데 체벌에 반대하는 이유로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상징적 이유가 아닐까 싶다. 스트라우스는 절대로, 결코 아이를 때려서는 안 되는 세 번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체벌은 가정과 사회에서 비폭력을 추구하는 이상에 모순된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체벌 금지는 놀라운 변화이다. 과거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자식을 부모의 소유로 여겼고, 자기 자식을 어떻게 다루든 남이 알 바 아니라고 여겼다. 이 변화는 국가가 가정에 개입하는 다른 조치들과 맥을 같이하는데, 가령 의무 교육, 의무 예방 접종, 학대 가정으로부터의 분리, 부모의 종교적 반대를 무릅쓰고 아이에게 구급 조치를 실시하는 것, 유럽 국가들이 이슬람 이민자 공동체의 여성 생식기 절단을 금지하는 것 등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국가가 가족만의 친밀한 영역에 전체주의적인 힘을 행사하는 것이지만, 다르게 보면 개인의 자율권을 인식하게 된 역사적 흐름의 일부이다. 아이도 사람이고, 아이도 어른처럼 생명과 신체에 대한 (또한 생식기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고, 그것 역시 국가와의 사회적 계약으로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개인이 - 부모가- 그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권리가 무효화될 수는 없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 스티븐 핑커 지음, 김명남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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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19. <콜카타의 세 사람> 메가 마줌다르2024.01.17. <참 괜찮은 눈이 온다 _ 나의 살던 골목에는> 한지혜2024.01.16. <이 별이 마음에 들어> 김하율2024.01.14. <각자 도사 사회> 송병기2026.01.01. <아무튼, 데모> 정보라2026.01.02. <버드 캐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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