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 세이렌이 오디세우스를 향해 노래하자, 이제 오디세우스는 그 아름다움과 위안을 갈망하기 시작한다. 페이글스에 따르면, 그의 심장이 그걸 느끼고 싶어서 “두근두근 고동치고” 오디세우스는 눈짓으로 선원들에게 자신을 풀어달라고 애걸한다. 하지만 선원들은 그의 뜻대로 해주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애원한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선원들은 오디세우스가 묶인 밧줄을 더 단단히 죄고, 노를 저어 그곳을 빠져나온다. 호메로스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진행시킨 이야기도 없다. 오디세우스의 “날랜” 배처럼, 장면 전체는 40행 만에 휙 지나가버리고 만다. 그처럼 간단하게 묘사된 이야기가 이토록 널리 파문을 일으키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세이렌의 노래가 부드럽게 유혹하는 듯한 곡조 같은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세이렌이 노래한 것은 바로 『일리아스』였다. ]
[ 이 사람들이 견뎌내야만 했던 그 모든 고통을. 트로이의 드넓은 평원에서 신의 뜻에 따라 풍요로운 대지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일들을, 우리는 전부 다 알고 있어요.   세이렌은 찬란했던 과거를 노래한다. 그런데 그게 바로 무덤이다. 세이렌은 오디세우스의 과거 모습을 그린 영웅담으로 그를 유혹하려 한다. 여러 해 동안 온갖 시련을 겪고 떠돌다가 ‘숨겨진 것’을 뜻하는 칼립소라는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망각의 여신의 팔에 안겨 여정을 중단하고 있던 오디세우스는 다시 활기찬 세상, 그가 트로이에서 분명하게 알고 있었던 단순하고 명징한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애타는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른다. 이 점에서 세이렌의 전략은 정확히 적중했다. 그들은 오디세우스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갈망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명백한 영웅이 되고 싶다는 희망에 불 지펴진 그는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이 시는 물론, 선원들도 바보가 아니다. 선원들은 오디세우스를 배에다 더 단단히 묶어둔다. 그들은 향수의 환영, 영웅적인 삶이 가능했던 옛날 세계에 대한 동경에 걸려 난파하지 않을 것이다. 『오디세이아』라는 작품이 인식하고 있듯이, 세상에서 잘 살아나가려면 향수에 저항해야만 하니까. 우리가 이미 올라타고 있는 배에 머물러야 하고, 현재에 단단히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든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멈추지 않고 계속 돛대를 적절히 조종해야 하며, 돛이 제대로 바람을 타고 갈 수 있도록 그게 얼마나 부풀었는지, 바람의 방향이 갑자기 바뀌지는 않는지, 돛의 아랫부분을 지지하는 봉재가 제 위치에서 이탈해버리지는 않는지 매 순간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현재 삶의 혼돈과 속임수와 어려움에 열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빛나는 과거에서 찾을 수 있는 달콤한 단순함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그날, 호메로스와 세이렌과 로버트 페이글스가 한 목소리로 내게 해준 말이었다. ]
[ 여러 종류의 번역본으로 읽어볼수록, 그리고 그리스어 사전을 찾아가며 번역본의 조각들을 서로 끼워 맞춰 이해하려 애쓰면 애쓸수록, 내게는 호메로스가 점점 더 인생 안내서처럼 느껴졌다. 실수투성이에다 제멋대로이고 허영덩어리인 인간의 실체를 아는, 그러면서도 고결하고 진실하고 올바르게 행동하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자각의 한 형태가 여기에 있었다. 『일리아스』에 쓴 포프의 서문이나 호메로스 번역에 대한 매슈 아널드의 유명한 강의문을 읽기 전에 나는 호메로스의 시가 불타오르는 인간 정신이라는 사실을, 너무도 순식간에 활활 타올라서 밤새 덜그럭거리며 돌아가는 엔진 바퀴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듯 작은 깨달음의 불티가 끊임없이 튕겨 나오는 영혼의 불덩어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호메로스의 시는 빠르고 방대하고 폭력적이며 위험투성이다. 그러나 그 모든 불꽃 속에는 언제나 따듯한 인간미가 들어 있다. ]
[ 무슨 형이상학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호메로스가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시어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인데,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추수할 수 없는 바다” 같은 시구가 아름다운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 표현은, 호메로스에서 운율에 맞추어 여러 차례 등장하는 완벽하며 정형화된 또 다른 시구인 “추수하는 대지”라는 말과 대칭으로 한 쌍을 이룬다. 그런데 그 표현이 왜 아름답다는 걸까? 그 이유는 그 표현이 해변에 서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면서 저 앞에 놓인 소금사막의 무자비한 척박함을 상상하는 감성을 잘 압축하여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저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이 거꾸로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곳을 응시한다. 그 문구는, 당신이 그 적의를 내다보고 서 있는 동안 당신 등 뒤에는 육지가 주는 모든 풍요가 펼쳐져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표현인 것이다. 올리브, 포도, 안전한 집, 방금 베어낸 건초 냄새, 추수한 밀과 보리로 꽉 찬 창고, 타작해놓은 곡물, 그 곡물들을 꽉꽉 채워 담은 자루들이 그득한 곡물창고, 곡물가루, 아침으로 먹는 빵이나 꿀 혹은 기름처럼 육지에서 거둬들인 그 모든 것들이. ‘추수할 수 없는 바다’―그리스어로는 ‘폰토스 아트리게토스pontos atrygetos’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바로 지상에서의 삶의 조건을 응축해놓은 지혜의 표현이다. 그 말은 그저 명백한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고통스러움과 동시에 계시적이기도 한 현실에 접근하는 한 가지 방식을 제시해주고 있기도 하다. 사실, 호메로스의 모든 것은 그 문구 하나에 다 들어 있다. 그 표현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두 서사시에 여러 차례, 종종 가슴 저미게 등장한다. ]
[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이란 뜻을 지닌 이름인 텔레마코스는 이 아래에서 나이 든 여인 에우리클레이아Eurycleia를 만난다. 그녀는 텔레마코스가 어렸을 때 그를 먹이고 양육하는 유모였다. 이제 텔레마코스는 남자가 되었고, 에우리클레이아는 이 모든 지상의 소중한 과실들을 돌보고 지키는 일을 하고 있다. 텔레마코스는 에우리클레이아에게 작은 여행 항아리들에는 최상의 포도주를, 가죽 자루들에는 보릿가루를 담아달라고 부탁한다. 육지의 좋은 것들을 바다로 가지고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우리클레이아―뭐든 돌보는 일에 능숙한 유모의 이 이름에는 ‘명성이 자자하다’라는 뜻이 있다―는 아버지가 죽으러 간 곳으로 텔레마코스가 가는 게 두렵다. 텔레마코스가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슬픔에 겨워 통곡을 하다가 갑자기 그를 향해 마치 오래전부터 품어왔던 생각인 양 거침없이 말을 쏟아낸다. ]
[ 아, 도련님, 어쩌자고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 품게 되었나이까? 오디세우스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의 외아들이신 도련님께서 대체 넓디넓은 이 세상 어디로 떠돌겠다는 거예요? 오디세우스는 죽었어요. 저 머나먼 낯선 땅에서 죽었어요. 안 돼요, 이곳에, 도련님이 다스려야 할 이 땅에 남아 있어요. 무엇 때문에 사서 고통을 겪으며 저 ‘추수할 수 없는 바다’를 떠돌려 한단 말인가요? ]
[ 이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다. 추수할 수 없는 바다는 가서는 안 되는 곳, 죽음의 영역이다. 오디세우스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을 때(그 귀향에는 에우리클레이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호메로스는 바다를 한 단어와 동격으로 부른다. 바로 ‘악惡’이다. 여기서 그녀가 방랑을 표현할 때 쓰는 표현도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예컨대 ‘알라오마이alaomai’에는 뱃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걸인이나 객사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
[ 그리스인들에게는 신체가 모든 관심사다. 젊은 전사는 아킬레우스의 무릎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기도하고, 그러다 곧바로 칼이 간을 쑥 찌르고 들어오고, 몸의 갈라진 틈새로 간이 흘러나오며, 검은 피가 전사의 허벅지를 흥건히 적시고, “죽음의 어둠이 그의 두 눈을 덮는다.” 몸이 처한 현실을 매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호메로스의 벌거벗음이야말로 그의 힘인 것이다. ]
[ 문화적 편의상으로는 호메로스가 하나의 고전으로 말끔한 옷을 입고 있을지 몰라도, 사실 그것은 그의 진짜 모습이 아니다. 그는 타자성 그 자체로, 무람없고 남성적이고 장대하고 거칠고 거대하다. ]
[ 호메로스는 아침으로 뭘 먹었을까?(기름, 꿀, 요구르트, 맛있는 빵. 외눈박이 거인족인 키클롭스에게 해당 사항이 아닌 게 하나 있다면 그들은 빵을 먹지 않는다는 거다.) 나들이 때는?(포도, 무화과열매, 자두, 콩.) 그의 영웅들에게는 뭘 먹였을까?(구운 고기와 완전히 익힌 소시지.) 그는 파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그는 파티를 무척 좋아했다. 남자로서, 와인이 그득 놓인 식탁에 친구들과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인들이 궁금해했던 질문들이었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 살았던 소크라테스는 예컨대 영웅은 얼음과자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호메로스의 결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모든 직업 운동선수들은 몸 상태가 좋으려면 그런 것은 절대 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웅이 먹는 음식은 단백질―소금에 잘 절여지고 끓이지 않은 것―, 그것도 붉은 고기여야만 했다. 생선은 다른 고기가 없을 때만 먹었고, 닭고기는 아직 극동에서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닭은 기원전 500년경 에게인들에게 전해졌는데, 그리스인들에게는 ‘페르시아 새’로 알려졌다. ]
[ 기원전 370년경에 쓰인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가 이상적인 도시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주장했다. 시라는 것 자체가 수상쩍은 것이고 그것이 시민들의 균형 잡힌 삶을 방해할 경우에는 위험하기까지 한 것인데, 호메로스가 어떤 대목에서는 지나치게 도를 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는 『오디세이아』의 제9권 도입부에서 오디세우스가 아름다운 파이아케스 왕궁에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잡고 앉는 장면을 인용한다. 오디세우스는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식사 테이블에 앉는 것보다 인생에서 더욱 기막히게 좋은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식탁은 소란스럽고 시종은 잔을 채운다. “내 생각에,” 오디세우스는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서 자신을 구해준 새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쾌활하게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삶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그의 제자 플라톤에게는 아니었다. 호메로스는 최고의 시인이고 최초의 비극 작가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확고한 신념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신들을 찬미하고 위대한 사람들을 칭송하는 시가 우리나라에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시라는 믿음 말입니다. ]
[ 우리 현대 문화의 관점으로 보면 어리둥절한 상태에 해당한다. 그토록 중요하고 풍부한 어떤 것이 어떻게 구체적인 형태도 없이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리스인들은 자기네들의 머리를 그렇게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었단 말인가? 스코틀랜드의 내 집에서 나는 가끔 집 위쪽에 있는 바다의 벼랑 끄트머리로 올라가, 내가 서 있는 곳 100여 미터 아래에서 풀머 갈매기가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곤 한다. 다시, 또 다시, 새는 전혀 애쓰는 기색도 없이 유연하게 완벽한 원을 그리고 또 그리며 난다. 햇빛 안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벗어났다가 하며 급선회를 거듭하면서도 깃털 하나 조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둘러싼 그 모든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고요하고 침착하게 난다. 나는 그 풀머 갈매기의 비행에 호메로스의 사고 틀을 이해하기 위한 모델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굳이 그것을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절대 완전히 똑같게는 아니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게 시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키의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보면―여기저기 조금씩 맞춰가다 보면― 딱 부러지게 고정된 태도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들을 알게 된다. 비행은 비행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그것을 기록한 것에서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호메로스가 아니라 우리가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3,000가지의 언어들 가운데 78종의 언어에만 글로 쓰인 문학이 있다. 나머지 언어에서는 문학이 오로지 머리와 입속에서만 존재한다. 언어의 본질은 결국 입말이고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
[ 패리는 심지어, 시에 옛 형태의 그리스어가 많이 섞여 있어서 6보격의 리듬에는 맞았을지 몰라도 기원전 8세기에 키오스 섬에서 온 이오니아 시인 ‘호메로스’ 자신은 그 시를 완전히 이해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내놓았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는 호메로스에 딱 한 차례 나오고 그리스 문학 전체를 통틀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단어가 201개다. 고유명사를 포함하면 494개로 늘어나는데, 그 고유명사들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어의 훨씬 더 오래전 형태에 있다. 그중 많은 부분이 그리스 북부에 있는 테살리아 지방에서 쓰였던 말로, 키오스 섬과 아나톨리아의 이오니아 해안가 지역들에서는 그런 말을 더 이상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번역된 적이 한 번도 없는 단어들도 많았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나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말이 많았고, 그 의미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패리한테는 이것이 전통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호메로스가 시의 의미보다는 서사시적 운율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명백한 증거였다.157 과거는 나름의 합당한 존중을 받아야 하며, 그 언어의 해독불가능성이야말로 과거가 지닌 피할 수 없는 한 측면이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할 때만이 가인과 그가 전수하는 전통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전통은 당연히 그런 가인들의 총합일 뿐이다. 그것을 한 명의 가인이라는 생각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모든 가인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나오는 서사시 시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명한 부분을 인용한다. “시인의 문체는 평범하게 쓰이는 언어와 달라야 한다. 거리감이 느껴지면 경이로운 감정이 생기고,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은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함이 곧 권력이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분명한 것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법이다. ]
[ 호메로스에 대한 패리의 관점은 중세 유럽 전역에서 무지한 농부들이 들었던, 라틴어로 부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미사예식 노래와 무척 흡사하다. 엘리엇이 1929년에 단테에 대해서 쓴 에세이에서, “진정한 시인은 이해도 되기 전에 소통에 성공한다.”라고 지나가듯이 쓴 적이 있는데, 그 말조차도 이보다는 덜 급진적이다. 패리는 호메로스를 가장 깊은 부분은 절대 접근이 불가능한 시라는 영역에서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하나의 문화로 본다. 소르본 대학 교수들은 패리에게 그가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뭔가를 알려주었다. 그가 쫓고 있던 모든 것이 호메로스가 본래 글로 쓰인 텍스트가 아니라 구전 텍스트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후였던 것이다.161 이렇게 일종의 공식을 만드는 것은 노래로 불렸던 시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가인은 이처럼 미리 만들어진 요소에 의존하여 노래를 하면서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 노래는 무시무시한 기억력을 자랑하는 것도, 매 순간 즉흥적으로 지어 부른 것도 아니었으며, 훨씬 더 오래전에 만들어진 공식의 도움 덕에 구전된 것이었기에 가인은 각 행의 일정한 리듬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에만 의존하면 되었다. 가인은 어떤 시도 외울 필요가 없었고 그 대신 전통이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었던 것, 요컨대 시를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드는 능력을 배워야 했다. 이것은 좀 주제넘은 비교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 사실이 분명하게 이해된다. 청중 앞에 서본 적 있는, 어떤 청중이 됐건 그 앞에서 연설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을 하면서 말을 만들어낸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다. 특히, 이전에 한 번이라도 해본 연설이라면 혹은 몇 달에 걸쳐서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목적으로 같은 연설을 여러 차례 해봤다면 더 잘 알 것이다. 본질적으로 당신이 해야 하는 이야기, 당신이 그리고자 하는 윤리적 내용은 이미 알고 있다. ]
[ 이전에 시도했던 표현들 가운데 효과가 있었던 말과 그렇지 못했던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안다. 그냥 아는 것이다. 다만 당신과 청중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일종의 정곡을 찌르는 대화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내는 건지, 그들이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는 사실을 대체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 건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야기가 올바르게 전개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당신이 어떻게 각 지점마다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완전히 즉흥연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적어도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한테는 당신의 정체성을 말해주며 당신이 다른 곳에서 물려받은 당신만의 공식, 의식, 반半무의식, 무의식, 습관적인 표현이 있다. 당신한테서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대목이 있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낼지, 그다음에 어떤 길로 가게 될지, 그 목적지는 어딘지를 당신은 직관적으로 생각해낸다. 그리고 당신한테는 당신만의 재료, 용어, 문구가 이미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완전히 새롭게 창안해낼 필요 없이, 그저 이전에 이미 말해본 적이 있는 것을 말하면 된다. 그런 문구들 덕에 새로운 것도 머릿속에서 쉽게 만들어진다. 이야기의 요지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말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방 안이 좀 어두울 때 하는 편이 더 쉽다.162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6보격으로 말을 한다거나 복잡한 사고체계와 역설을 고안해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1만 4,000행에 수천 명의 등장인물을 실은 기차를 끌고 갈 재주도 없다. 하지만 나는 매우 기본적인 수준에서 기억과 현재와 구전된 말 사이에 일종의 삼각춤three-part dance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 내가 만든 펌프 엔진 같은 운율에 주로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잠이 들었지만, 종속절 없이 이처럼 한 내용에서 그 다음 내용을 병렬적으로 하나하나 쌓아나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호메로스적인 것이다. 이야기의 빠른 전개, 시행의 배열에서 안정감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정형화된 문구, 기억을 소중하게 다루고 평범한 것을 영웅시하는 것, 화자와 청자가 함께 경험을 나누는 것을 사랑하며, 사실 자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 등도 호메로스적인 요소들이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이렇게 운율에 맞춰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인간 유기체의 한 부분이라고, 그리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시작된 세계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능력이 도가 넘칠 정도로 실현되었던 거라고 말할 밖에. 이런 대단한 이야기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버지한테서 듣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그들 삶의 기반이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전해 듣던 세계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진대도 이것만큼은 변함없이 이어질 그런 세계였던 것이다. ]
[ 1933년과 1935년 사이에, 파리의 교수에게서 자극을 받은 패리는 유고슬라비아의 외딴 산마을을 돌아다녔다. 규모가 꽤 큰 여행단이었다. 그의 조수인 하버드 대학 학생 앨버트 로드Albert Lord와 몇 명의 타자수 및 통역사, 그 자신이 헤르체고비나에서 온 가인인 니콜라 부예노비츠Nikola Vujnovia가 그 구성원이었다. 부예노비츠는 그들이 만나게 될 사람들과의 만남을 도와줄 사람이었다. 그들은 700명이 넘는 가인들을 만나서 노래를 들었는데, 그들은 전부 ‘거슬gusle’이라는 한 줄짜리 현악기를 퉁기면서 노래를 불렀다. 거의 13,000개의 노래가 수집되어 800권의 공책에 옮겨졌고, 3,500개의 12인치짜리 알루미늄 디스크에 수백 곡이 넘게 녹음되었다. 하버드로 돌아온 패리는 도서관에 거의 정확하게 1톤이 나가는 문서를 전달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흥분했다. 여기 텁수룩한 수염을 달고 담뱃대를 문 채로 살아서 움직이는 과거가 그들 앞에서 서사시를 읊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장날에 커피점에 들러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근처에 ‘거슬라리(guslari, 거슬 켜는 사람 _옮긴이)’가 온 적이 있습니까? 잘합디까? 또 올까요? 어느 날 아침, 몬테네그로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 비옐로폴레에서 그들은 커피점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오래된 은색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터키인을 찾아냈다. 그의 이름은 베간 리우차 니시츠Began Lyutsa Nikshitch였는데, 마치 머나먼 과거에서 온 전사 같은 어투로 말을 했으며 ‘키가 크고 말랐으며 인상이 강한 사람’이었다. ]
[ 베간은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농부인 아브도 메데도비츠Avdo Medjedo-vitch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고, 미국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마침내 아브도가 왔고, 그는 우리한테 노래를 불러주었다. [···]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이 작달막하고 소박해 보이는 농부에게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는 큰 갑상선종 때문에 목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는 긴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거슬을 켜면서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노래를 무척 빠르게 불렀는데 때로는 멜로디를 버리고 그냥 가사만 읊기도 하다가 곧 활을 현 위에서 앞뒤로 가볍게 움직이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의 신식 젊은이들 몇이서 시끄럽게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가 결국 판이 깨지고 말았다. 다음 며칠 동안에 경험한 것은 하나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브도의 노래는 우리가 이전에 들어본 어떤 노래보다 길고 정교했다. 노래 하나를 며칠이라도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 노래들 중 몇 곡은 15,000에서 16,000행에 육박했다. 다른 가인들도 왔지만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우리의 호메로스, 아브도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거슬라리는 전쟁과 재앙에 관한 서사 노래를 언제나 힘 있고 크게, 높은 음성으로, 온 힘을 다해 불렀다. 그냥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혼신을 다해서 말이다. ]
[ 이런 식으로 노래하려면 온몸의 힘을 다 써야 한다. 악기를 연주할 때 몸의 움직임, 그 엄청난 길이의 노래를 부르는 데 필요한 숨을 쉬기 위한 폐 활동, 말을 하기 위한 목과 입 근육의 긴장 탓에 노래는 일종의 고된 노동과도 같아서 좋은 가인은 반 시간만 지나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만다.   거슬은 소리가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고, 시를 노래할 때 무슨 뚜렷한 멜로디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악기 줄이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는 동안에 거슬라리는 화려하거나 우아한 곡조를 연주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그저 묵묵히 시를 읊조린다. 이것은 뭔가 거창한 것을 보여주려는 공연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진지한 것으로, 집중력 있는 목소리로 정형화된 어구나 구절,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모든 어구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운율을 만들어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비극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악기를 쉬지 않고 연주하는 것은 곡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낯선 느낌을 유발하기 위해서, 즉 이것은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
[ 가인들은 보통 20분에서 40분간 무릎에 올려놓은 거슬을 연주하면서 노래했다. 분당 20행 정도까지 노래했는데, 처음에는 더 천천히 부르다가 이야기의 절정에 다다르면 속력을 마구 내다가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목구멍에 불이 나게 만드는 독한 자두 라키(동유럽이나 중동에서 마시는 독한 술의 한 종류 _옮긴이) 한 잔을 마시거나 아니면 그냥 잠깐 쉰다. 밤이 되어 목소리가 가늘게 잦아드는데 노래가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가인은 노래의 결말을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고, 언제나 마지막 부분은 시작 부분보다 더 다양하게 전개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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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 영화 보고 이야기해요.
[인디온감] 독립영화 함께 감상하기 #1. 도시와 고독[그믐무비클럽] 5. 디어 라이프 with 서울독립영화제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조영주 작가가 고른 재미있는 한국 소설들
[책증정] [꿈꾸는 책들의 특급변소] 김호연 작가의 <나의 돈키호테>를 함께 읽어요 차무진 작가와 귀주대첩을 다룬 장편소설 <여우의 계절>을 함께 읽어요최하나 작가와 <반짝반짝 샛별야학>을 함께 읽어요.
6인의 평론가들이 주목한 이 계절의 소설!
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1다음 세대에도 읽힐 작품을 찾는 [이 계절의 소설] 네 번째 계절 #2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 있던 이 책, 망나니누나와 함께 되살려봐요.
[Re:Fresh] 2.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다시 읽어요. [Re:Fresh] 1. 『원미동 사람들』 다시 읽어요.
이런 주제로도 독서모임이?
혹시 필사 좋아하세요?문학편식쟁이의 수학공부! 50일 수학(상) 함께 풀어요.스몰 색채 워크샵
어서 오세요. 연극 보고 이야기하는 모임은 처음이시죠?
[그믐연뮤클럽의 서막 & 도박사 번외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이반과 스메르자코프"[그믐밤] 10. 도박사 3탄,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수북강녕
⏰ 그믐 라이브 채팅 : 5월 16일 목요일 저녁 7시, 편지가게 글월 사장님과 함께
[책 증정] 텍스티와 함께 『편지 가게 글월』 함께 읽어요!
🐷 꿀돼지님의 꿀같은 독서 기록들
권여선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문학동네)은모든 장편소설 『애주가의 결심』(은행나무)수전 팔루디 『다크룸』(아르테)최현숙 『할매의 탄생』(글항아리)
🎁 여러분의 활발한 독서 생활을 응원하며 그믐이 선물을 드려요.
[인생책 5문 5답] , [싱글 챌린지] 완수자에게 선물을 드립니다
이 봄, 시집 한 권 🌿🌷
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2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10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9여드레 동안 시집 한 권 읽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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