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호메로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 혼자 읽기

D-29
[ 호메로스는 아침으로 뭘 먹었을까?(기름, 꿀, 요구르트, 맛있는 빵. 외눈박이 거인족인 키클롭스에게 해당 사항이 아닌 게 하나 있다면 그들은 빵을 먹지 않는다는 거다.) 나들이 때는?(포도, 무화과열매, 자두, 콩.) 그의 영웅들에게는 뭘 먹였을까?(구운 고기와 완전히 익힌 소시지.) 그는 파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그는 파티를 무척 좋아했다. 남자로서, 와인이 그득 놓인 식탁에 친구들과 함께 둘러앉아 있는 것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 이런 것들이 그리스인들이 궁금해했던 질문들이었다. 기원전 5세기에 아테네에 살았던 소크라테스는 예컨대 영웅은 얼음과자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과 같은 호메로스의 결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모든 직업 운동선수들은 몸 상태가 좋으려면 그런 것은 절대 먹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영웅이 먹는 음식은 단백질―소금에 잘 절여지고 끓이지 않은 것―, 그것도 붉은 고기여야만 했다. 생선은 다른 고기가 없을 때만 먹었고, 닭고기는 아직 극동에서 전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닭은 기원전 500년경 에게인들에게 전해졌는데, 그리스인들에게는 ‘페르시아 새’로 알려졌다. ]
[ 기원전 370년경에 쓰인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가 이상적인 도시에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재앙과도 같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주장했다. 시라는 것 자체가 수상쩍은 것이고 그것이 시민들의 균형 잡힌 삶을 방해할 경우에는 위험하기까지 한 것인데, 호메로스가 어떤 대목에서는 지나치게 도를 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 예로 소크라테스는 『오디세이아』의 제9권 도입부에서 오디세우스가 아름다운 파이아케스 왕궁에서 저녁식사를 하려고 자리를 잡고 앉는 장면을 인용한다. 오디세우스는 친구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식사 테이블에 앉는 것보다 인생에서 더욱 기막히게 좋은 순간은 없다고 말한다. 식탁은 소란스럽고 시종은 잔을 채운다. “내 생각에,” 오디세우스는 추수할 수 없는 바다에서 자신을 구해준 새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쾌활하게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삶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나 그의 제자 플라톤에게는 아니었다. 호메로스는 최고의 시인이고 최초의 비극 작가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확고한 신념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신들을 찬미하고 위대한 사람들을 칭송하는 시가 우리나라에 허용될 수 있는 유일한 시라는 믿음 말입니다. ]
[ 우리 현대 문화의 관점으로 보면 어리둥절한 상태에 해당한다. 그토록 중요하고 풍부한 어떤 것이 어떻게 구체적인 형태도 없이 존재할 수 있었단 말인가? 어떻게 그리스인들은 자기네들의 머리를 그렇게 완벽하게 신뢰할 수 있었단 말인가? 스코틀랜드의 내 집에서 나는 가끔 집 위쪽에 있는 바다의 벼랑 끄트머리로 올라가, 내가 서 있는 곳 100여 미터 아래에서 풀머 갈매기가 빙빙 돌고 있는 모습을 내려다보곤 한다. 다시, 또 다시, 새는 전혀 애쓰는 기색도 없이 유연하게 완벽한 원을 그리고 또 그리며 난다. 햇빛 안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벗어났다가 하며 급선회를 거듭하면서도 깃털 하나 조정하지 않고 자신들을 둘러싼 그 모든 변화무쌍함 속에서도 고요하고 침착하게 난다. 나는 그 풀머 갈매기의 비행에 호메로스의 사고 틀을 이해하기 위한 모델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 굳이 그것을 고정시킬 필요는 없다. 다시, 그리고 또다시, 절대 완전히 똑같게는 아니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게 시도하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키의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다 보면―여기저기 조금씩 맞춰가다 보면― 딱 부러지게 고정된 태도로는 결코 알아낼 수 없을 것들을 알게 된다. 비행은 비행 속에서 살아 움직이지, 그것을 기록한 것에서 살아 움직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호메로스가 아니라 우리가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3,000가지의 언어들 가운데 78종의 언어에만 글로 쓰인 문학이 있다. 나머지 언어에서는 문학이 오로지 머리와 입속에서만 존재한다. 언어의 본질은 결국 입말이고 인간은 말을 하는 존재인 것이다. ]
[ 패리는 심지어, 시에 옛 형태의 그리스어가 많이 섞여 있어서 6보격의 리듬에는 맞았을지 몰라도 기원전 8세기에 키오스 섬에서 온 이오니아 시인 ‘호메로스’ 자신은 그 시를 완전히 이해조차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까지 내놓았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는 호메로스에 딱 한 차례 나오고 그리스 문학 전체를 통틀어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단어가 201개다. 고유명사를 포함하면 494개로 늘어나는데, 그 고유명사들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어의 훨씬 더 오래전 형태에 있다. 그중 많은 부분이 그리스 북부에 있는 테살리아 지방에서 쓰였던 말로, 키오스 섬과 아나톨리아의 이오니아 해안가 지역들에서는 그런 말을 더 이상 사용하고 있지 않았다. 번역된 적이 한 번도 없는 단어들도 많았다. 기원전 5세기의 아테네나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이해하기 힘든 말이 많았고, 그 의미는 단지 추측만 할 수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패리한테는 이것이 전통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호메로스가 시의 의미보다는 서사시적 운율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는 명백한 증거였다.157 과거는 나름의 합당한 존중을 받아야 하며, 그 언어의 해독불가능성이야말로 과거가 지닌 피할 수 없는 한 측면이었다. 그런 사실을 인정할 때만이 가인과 그가 전수하는 전통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전통은 당연히 그런 가인들의 총합일 뿐이다. 그것을 한 명의 가인이라는 생각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 모든 가인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나오는 서사시 시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설명한 부분을 인용한다. “시인의 문체는 평범하게 쓰이는 언어와 달라야 한다. 거리감이 느껴지면 경이로운 감정이 생기고, 경이로움이라는 감정은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함이 곧 권력이고,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은 분명한 것보다 더 대단해 보이는 법이다. ]
[ 호메로스에 대한 패리의 관점은 중세 유럽 전역에서 무지한 농부들이 들었던, 라틴어로 부르는 알아들을 수 없는 미사예식 노래와 무척 흡사하다. 엘리엇이 1929년에 단테에 대해서 쓴 에세이에서, “진정한 시인은 이해도 되기 전에 소통에 성공한다.”라고 지나가듯이 쓴 적이 있는데, 그 말조차도 이보다는 덜 급진적이다. 패리는 호메로스를 가장 깊은 부분은 절대 접근이 불가능한 시라는 영역에서 미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하나의 문화로 본다. 소르본 대학 교수들은 패리에게 그가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었던 뭔가를 알려주었다. 그가 쫓고 있던 모든 것이 호메로스가 본래 글로 쓰인 텍스트가 아니라 구전 텍스트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후였던 것이다.161 이렇게 일종의 공식을 만드는 것은 노래로 불렸던 시의 특징이었다. 그래서 가인은 이처럼 미리 만들어진 요소에 의존하여 노래를 하면서 말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런 노래는 무시무시한 기억력을 자랑하는 것도, 매 순간 즉흥적으로 지어 부른 것도 아니었으며, 훨씬 더 오래전에 만들어진 공식의 도움 덕에 구전된 것이었기에 가인은 각 행의 일정한 리듬구조를 이루는 요소들에만 의존하면 되었다. 가인은 어떤 시도 외울 필요가 없었고 그 대신 전통이 그에게 가르쳐줄 수 있었던 것, 요컨대 시를 살아 있는 상태로 만드는 능력을 배워야 했다. 이것은 좀 주제넘은 비교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그 사실이 분명하게 이해된다. 청중 앞에 서본 적 있는, 어떤 청중이 됐건 그 앞에서 연설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을 하면서 말을 만들어낸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다. 특히, 이전에 한 번이라도 해본 연설이라면 혹은 몇 달에 걸쳐서 다른 청중을 대상으로 다른 분위기에서, 다른 목적으로 같은 연설을 여러 차례 해봤다면 더 잘 알 것이다. 본질적으로 당신이 해야 하는 이야기, 당신이 그리고자 하는 윤리적 내용은 이미 알고 있다. ]
[ 이전에 시도했던 표현들 가운데 효과가 있었던 말과 그렇지 못했던 말이 어떤 것이었는지도 안다. 그냥 아는 것이다. 다만 당신과 청중 사이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일종의 정곡을 찌르는 대화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내는 건지, 그들이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는 사실을 대체 당신이 어떻게 느끼는 건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야기가 올바르게 전개되고 있는지의 여부를 당신이 어떻게 각 지점마다 이해하고 있는 건지도 불가사의하다. 그것은 완전히 즉흥연주는 아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적어도 당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 건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한테는 당신의 정체성을 말해주며 당신이 다른 곳에서 물려받은 당신만의 공식, 의식, 반半무의식, 무의식, 습관적인 표현이 있다. 당신한테서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대목이 있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 만들어낼지, 그다음에 어떤 길로 가게 될지, 그 목적지는 어딘지를 당신은 직관적으로 생각해낸다. 그리고 당신한테는 당신만의 재료, 용어, 문구가 이미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완전히 새롭게 창안해낼 필요 없이, 그저 이전에 이미 말해본 적이 있는 것을 말하면 된다. 그런 문구들 덕에 새로운 것도 머릿속에서 쉽게 만들어진다. 이야기의 요지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말을 찾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방 안이 좀 어두울 때 하는 편이 더 쉽다.162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6보격으로 말을 한다거나 복잡한 사고체계와 역설을 고안해낸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게는 1만 4,000행에 수천 명의 등장인물을 실은 기차를 끌고 갈 재주도 없다. 하지만 나는 매우 기본적인 수준에서 기억과 현재와 구전된 말 사이에 일종의 삼각춤three-part dance이 이뤄진다는 사실을 이미 이해하고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
[ 내가 만든 펌프 엔진 같은 운율에 주로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잠이 들었지만, 종속절 없이 이처럼 한 내용에서 그 다음 내용을 병렬적으로 하나하나 쌓아나가며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호메로스적인 것이다. 이야기의 빠른 전개, 시행의 배열에서 안정감 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정형화된 문구, 기억을 소중하게 다루고 평범한 것을 영웅시하는 것, 화자와 청자가 함께 경험을 나누는 것을 사랑하며, 사실 자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태도 등도 호메로스적인 요소들이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이렇게 운율에 맞춰 전해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인간 유기체의 한 부분이라고, 그리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시작된 세계에서는 이런 기본적인 능력이 도가 넘칠 정도로 실현되었던 거라고 말할 밖에. 이런 대단한 이야기를 잠자리에 들기 전에 아버지한테서 듣는 게 아니라, 이 이야기들이 그들 삶의 기반이었던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전해 듣던 세계고,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진대도 이것만큼은 변함없이 이어질 그런 세계였던 것이다. ]
[ 1933년과 1935년 사이에, 파리의 교수에게서 자극을 받은 패리는 유고슬라비아의 외딴 산마을을 돌아다녔다. 규모가 꽤 큰 여행단이었다. 그의 조수인 하버드 대학 학생 앨버트 로드Albert Lord와 몇 명의 타자수 및 통역사, 그 자신이 헤르체고비나에서 온 가인인 니콜라 부예노비츠Nikola Vujnovia가 그 구성원이었다. 부예노비츠는 그들이 만나게 될 사람들과의 만남을 도와줄 사람이었다. 그들은 700명이 넘는 가인들을 만나서 노래를 들었는데, 그들은 전부 ‘거슬gusle’이라는 한 줄짜리 현악기를 퉁기면서 노래를 불렀다. 거의 13,000개의 노래가 수집되어 800권의 공책에 옮겨졌고, 3,500개의 12인치짜리 알루미늄 디스크에 수백 곡이 넘게 녹음되었다. 하버드로 돌아온 패리는 도서관에 거의 정확하게 1톤이 나가는 문서를 전달했다. 사람들은 정말로 흥분했다. 여기 텁수룩한 수염을 달고 담뱃대를 문 채로 살아서 움직이는 과거가 그들 앞에서 서사시를 읊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장날에 커피점에 들러 수소문을 하고 다녔다. 근처에 ‘거슬라리(guslari, 거슬 켜는 사람 _옮긴이)’가 온 적이 있습니까? 잘합디까? 또 올까요? 어느 날 아침, 몬테네그로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 비옐로폴레에서 그들은 커피점의 기다란 의자에 앉아 오래된 은색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터키인을 찾아냈다. 그의 이름은 베간 리우차 니시츠Began Lyutsa Nikshitch였는데, 마치 머나먼 과거에서 온 전사 같은 어투로 말을 했으며 ‘키가 크고 말랐으며 인상이 강한 사람’이었다. ]
[ 베간은 한 시간 거리에 살고 있는 농부인 아브도 메데도비츠Avdo Medjedo-vitch라는 사람을 알고 있었고, 미국 사람들이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마침내 아브도가 왔고, 그는 우리한테 노래를 불러주었다. [···]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이 작달막하고 소박해 보이는 농부에게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는 큰 갑상선종 때문에 목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다. 그는 긴 의자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거슬을 켜면서 음악에 맞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노래를 무척 빠르게 불렀는데 때로는 멜로디를 버리고 그냥 가사만 읊기도 하다가 곧 활을 현 위에서 앞뒤로 가볍게 움직이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마을의 신식 젊은이들 몇이서 시끄럽게 카드놀이를 하고 있다가 결국 판이 깨지고 말았다. 다음 며칠 동안에 경험한 것은 하나의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브도의 노래는 우리가 이전에 들어본 어떤 노래보다 길고 정교했다. 노래 하나를 며칠이라도 계속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 노래들 중 몇 곡은 15,000에서 16,000행에 육박했다. 다른 가인들도 왔지만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우리의 호메로스, 아브도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거슬라리는 전쟁과 재앙에 관한 서사 노래를 언제나 힘 있고 크게, 높은 음성으로, 온 힘을 다해 불렀다. 그냥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모두 끌어모아 혼신을 다해서 말이다. ]
[ 이런 식으로 노래하려면 온몸의 힘을 다 써야 한다. 악기를 연주할 때 몸의 움직임, 그 엄청난 길이의 노래를 부르는 데 필요한 숨을 쉬기 위한 폐 활동, 말을 하기 위한 목과 입 근육의 긴장 탓에 노래는 일종의 고된 노동과도 같아서 좋은 가인은 반 시간만 지나도 온몸이 땀에 흠뻑 젖고 만다.   거슬은 소리가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고, 시를 노래할 때 무슨 뚜렷한 멜로디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악기 줄이 끽끽거리는 소리를 내는 동안에 거슬라리는 화려하거나 우아한 곡조를 연주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이 그저 묵묵히 시를 읊조린다. 이것은 뭔가 거창한 것을 보여주려는 공연이 아니라 그보다 더 진지한 것으로, 집중력 있는 목소리로 정형화된 어구나 구절, 그리고 그가 사용하는 모든 어구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운율을 만들어낸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비극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악기를 쉬지 않고 연주하는 것은 곡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낯선 느낌을 유발하기 위해서, 즉 이것은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다. ]
[ 가인들은 보통 20분에서 40분간 무릎에 올려놓은 거슬을 연주하면서 노래했다. 분당 20행 정도까지 노래했는데, 처음에는 더 천천히 부르다가 이야기의 절정에 다다르면 속력을 마구 내다가 갑자기 노래를 멈추고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목구멍에 불이 나게 만드는 독한 자두 라키(동유럽이나 중동에서 마시는 독한 술의 한 종류 _옮긴이) 한 잔을 마시거나 아니면 그냥 잠깐 쉰다. 밤이 되어 목소리가 가늘게 잦아드는데 노래가 끝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떤 가인은 노래의 결말을 아예 모르는 경우도 있고, 언제나 마지막 부분은 시작 부분보다 더 다양하게 전개된다. ]
[ 서사시에서는 ‘어느 날 아침에······’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선은 이야기의 공간이 열리고 가인을 둘러싼 시간이 확장되는 호사를 먼저 누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시간을 더 끌기 위해서는 이런 농담도 덧붙일 수 있다.   젊은이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난로에 불을 붙이고 불에다가 커피 주전자를 올려놓는다네. 알리야는 커피를 내린 뒤에 한 잔, 두 잔, 부어 마시고 한 잔, 두 잔에도 잠이 안 깨서 세 잔, 그리고 네 잔, 이제 정신이 번쩍 드는데 일곱, 여덟 잔, 충분할 때까지 계속 마신다네. ]
[ 영웅이 카페인을 충분히 마시고 나자 마침내 정형화된 어구가 이어지기 시작한다. 여행을 위해 ‘긴 갈기의 붉은 말’이 준비되는데, 그 말은 그것이 끄는 마차와 함께 아름답게 묘사된다. ‘산 위의 말괄량이 양치기 소녀가 / 두건을 쓰고 알록달록한 외투를 입은 듯’하다. 영웅의 장비 역시 마찬가지로 멋지게 묘사된다. 그에게는 장검과 단검, 우아하게 생긴 권총이 있는데, 하나는 베네치아산産이고 또 하나는 영국산이다. 마침내 길을 떠난 그는―굳이 말을 안 해도 주인이 뭘 원하는지 척척 아는―훌륭한 말에 올라탄 채 커다란 강을 헤엄쳐 건너 마침내 도시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검붉은 포도주로 목을 축이고 / 담뱃대에 꽉꽉 눌러 채운 담배를 두 차례 피운다.’ 호메로스적인 상황을 20세기 초기의 유럽 산악 지대의 계곡으로 옮겨놓으면 시는 알아서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게 바로 패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이 시는 독특한 한 천재의 작품이 아니라 구전 서사시가 과거의 의미들을 현재로 전달하는 수단인 세계, 그 시를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할 필요 자체가 시의 형태를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인 그런 세계가 만들어낸 거라는 사실 말이다. 요컨대, 정형화된 운문은 사회적 필요의 산물인 것이다. ]
[ 그가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순간은 1933년 여름, 초기 답사가 끝날 무렵에 세르비아 언덕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한 내륙 마을에 여장을 풀고 있다가 마침내 우연히 거슬라리 한 사람을 만났다. 패리가 만난 첫 서사시 시인이었던 그는 젊었을 때 전사였고, 적군 여섯 명의 목을 친 경험이 있다고 주장하는 노인이었다. 노인은 오후 내내 그들에게 자신이 치렀던 전투에 관한 노래를 불러주었다. 해 질 무렵 그가 거슬을 내려놓자, 필경사들은 상당 부분을 다시 해달라고 부탁했다. 지친 패리는 사과를 씹으면서 헤르체고비나에서 온 가인 니콜라의 어깨 위로 시인의 희끗희끗한 머리와 지저분한 목이 아래위로 까딱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하루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눈을 반쯤 감은 채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그 일을 떠올리며 말했을 것이다. “여태껏 다닌 중에 호메로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경험이었을 거네.” ]
[ 이 순간은 호메로스 이해의 역사에서 키츠와 카우든 클라크가 채프먼의 호메로스를 들여다본 그 저녁이나, 칼 블레겐이 1939년 여름에 3,000년 전 화재로 무너져 조각조각 부서져버린 시인 벽화를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강렬한 순간이다. 패리는 이들이 악기를 연주하면서 운율에 맞춰 노래하는 목소리에서 수천 년간 세대와 세대를 가로질러 시가 전달되는 소리를 들은 것이었다. 그것은 문자세계 이전에 진공으로 존재했던 인간의 삶이 불현듯 어떤 물질성을 획득한 순간이었다. 헤르체고비나 가인 니콜라 부예노비츠를 통해서 패리는 할릴 바예고리츠에게 어디에서 그 노래를 배웠냐고 물었다. 그는 전부 아버지한테서 배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그가 대체 어떤 방식으로 노래와 연주를 배웠을까? 할릴은 자기 아버지가 잠든 사이, 아버지의 거슬을 몰래 훔쳐내서 다른 방에서 조금씩 흉내를 내곤 했던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
[ 산악 지대의 음유시인들은 검정 술이 달린 스카프를 걸치고 무릎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는 패리의 말에 따라 노토풀로스가 기대했던 바대로 정형화되고 반복적인 가사를 이용해 즉흥적으로 노래를 만들어 불렀고, 아침에는 밤에 들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불렀다. 노토풀로스는 그 모든 것을 녹음했다. 시인들 중 한 사람은 안드레아스 카프칼라스Andreas Kafkalas라는 이름의 39세밖에 안 된 젊은 남자로, 노토풀로스가 “자연스런 즉흥연주”라고 부른, 예비연습 없이 처음으로 이야기를 노래하는 재능이 탁월한 사람이었다. 독일 침략과 점령에 관한 서사시 하나가 끝나자, 노토풀로스는 카프칼라스에게 크레타 섬의 독일 주둔군 사령관 크라이프Kreipe 장군과 관련된 것은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데 대해 놀랐다고 말했다. 그래요, 하고 대답한 카프칼라스는 이 미국인이 권유하자 곧바로 지금 그에 관한 노래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노토풀로스는 레코드 장비를 켰고, 카프칼라스는 노래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오디세이아』의 짧은 챕터 하나 길이였다. 그가 만들어낸 정형화된 표현이 노래 전체를 채웠는데, 전부 크레타 섬의 전통적인 열다섯 음절의 시행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노토풀로스는 나중에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열다섯 음절로 된 행을 만들 줄 아는 거요? “한 줄에 열다섯 음절이 들어가는 건 줄은 몰랐어요.” 그가 대답했다. “음절을 세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느낌으로 하는 거거든요. 선율에 맞춰서 행을 만드는 거죠.” 전통이 그를 통해 노래하고 있었다. ]
[ 그는 자신이 아테네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다른 크레타인에게서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노토풀로스에게 자신이 ‘크레타의 환대 정신으로’ 특별히 이야기해주고 있는 거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카프칼라스가 부른 노래는 무척이나 이색적이고 흥미로웠다. 본래 이야기에서 남은 게 거의 하나도 없었으니까. 영웅적인 사건들이 넘치는 가운데 진실은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영국 장교(사실이 아니다) 한 명이(사실이 아니다) 크레타 섬에 도착해서 스파키아에서 온 영웅인 레프터리스 탐바키스Lefteris Tambakis를 만나자고 불렀다(탐바키스는 실존 인물이긴 하나 이런 기관 근처에도 간 일이 없으므로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국 장교는 비장한 태도로 몸을 꼿꼿이 세우고 서서, 독일인들이 ‘적막한 크레타’ 사람들에게 행한 잔혹한 일들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그 스파키아 용사에게 죽여서든 살려서든 크라이프를 잡아와야 한다는 명령을 낭독했다(그런 명령은 내려진 적이 없으므로 이 역시 전부 사실이 아니다). ]
[ 크레타 군인의 명예를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탐바키스는 알고 있다. 그는 변장을 하고 헤라클레이온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아름다운 소녀를 찾는다.(그는 그런 적이 없다.) 소녀는 독일 장군의 비서다.(독일 장군에게는 비서가 없었다.) 그는 소녀에게 만약에 그녀가 그를 돕는다면 그녀의 이름이 크레타인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남게 될 거라고 말해준다. 그녀는 영웅의 반열에 오르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이에 동의하고 독일 장군과 동침함으로써 여자로서의 자신의 명예를 희생시킨다. 크라이프―이 노래에서는 카이저리라고 부른다―는 베갯머리에서 그녀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해준다.(물론 그는 그런 적이 없다.) 그녀는 그것을 탐바키스에게 전하고, 탐바키스는 크노소스에 있는 영국 장교를 만나러 간다.(그런 만남은 없었다.) ]
[ 그녀는 그것을 탐바키스에게 전하고, 탐바키스는 크노소스에 있는 영국 장교를 만나러 간다.(그런 만남은 없었다.) 복병이 매복해서 기다렸다. ‘안다르테스’ 조직이 ‘긴 자동차’를 세워두어 길을 막아두었고(그런 적이 없다) 탐바키스 자신은 아름다운 말을 타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말은 이용된 적이 없지만 크레타의 옛날 노래에 늘 등장한다). 영국 장교는 지금까지 이 이야기에서 매우 주변적인 인물에 불과하다. 크레타인들은 카이저리의 차를 세운 뒤 그를 발가벗겼고(그러지 않았다), 카이저리는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애걸했으며(그는 그런 적이 없고, 이것은 크레타 시에서 이와 같은 순간에 주로 등장하는 주제다), 그들은 이다 산 위로 기나긴 행군을 시작한다. 여러 마리의 개(동원된 적이 없다)와 ‘전장의 새’라는 이름의 비행기가 납치범들을 찾으러 다녔으나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파키아에 도착해서(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곳에서 카이저리를 죽이려고 했으나(그러지 않았다) 잠수함 하나가(실은 군함 보트였다) 그를 이집트로 싣고 갔다. 히틀러는 절망에 빠져서(1944년에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유는 달랐겠지만.) 이렇게 말했다. “세계 역사상,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
[ 사건이 벌어진 뒤 그것이 이야기로 만들어진 것은 9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였다. ‘크라이피아드Kreipiad’ 이야기에서 장군을 납치해서 이집트로 데려간 것 외에는 어떤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등장인물과 스파키아 지리, 그리고 마타 하리 유의 첩자에 관한 달콤한 환상적 서사까지 역사적 진실 위에 마구 덧입혀졌다. 만약 이것이 9년 만에 현대판 이야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대체 어떻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진실이 한 조각이라도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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