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에도 이어서 읽는 보르헤스의 아홉 번째 책입니다. 민음사 논픽션 전집판으로는 네 번째 책을 읽습니다. 함께 읽을 분들은 참여해주세요. 극단적으로 느리게 읽는 모임입니다😀
『또 다른 심문들』는 총 2부로 나뉘어 있으며, 이 모임에서는 1부의 산문들을 이어서 읽겠습니다. 번역도 찬찬히 살펴보면서 매우 천천히 읽겠습니다. 참고로 1부는 오역이 이루 말하기 어렵게 많습니다. 원문을 제공하는 사이트(https://borgestodoelanio.blogspot.com/)를 참조하세요. 추천드리는 방법은 AI 챗봇을 이용해서 원문 번역을 시켜본 다음, 한국어 판본과 나란히 펼쳐놓고 읽는 것입니다. 이 모임은 오역을 일일이 지적하는 모임도 아니고 지적하기에는 너무 많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만 말하겠습니다.
⏤맨 처음의 웰스 153
⏤『비아타나토스』 159
⏤파스칼 167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174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 181
⏤도서 예찬에 대하여 186
⏤키츠의 나이팅게일 195
⏤수수께끼들의 거울 202
⏤두 권의 책 209
⏤1944년 8월 23일 자 기사 217
※ 한 편을 열고 닫을 때마다 제 짤막한 감상을 남기겠습니다. 대화하실 때는 단편별로 [이 대화에 답하기] 기능을 활용해서 대화 타래를 엮어가요.
※ 지나간 글꼭지에 대한 언급도 얼마든 가능합니다. 나눠놓은 기간에 구애하지 마시고 [게시판] 기능을 활용해서 언제든 대화 타래에 동참해주세요.
※ 제 아이디를 탭 하고 [만든 모임]을 보시면 이전에 열렸던 모임의 성격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대략적인 방향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모임에 대한 의견도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18) [보르헤스 읽기] 『또 다른 심문들』 1부 같이 읽어요
D-29

russist모임지기의 말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맨 처음의 웰스] 언젠가 오스카 와일드는 H.G 웰스를 두고 "과학적인 쥘 베른"이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위트와 통찰이 묻어나는 짧고 간결한 평가입니다. 그런데 쥘 베른은 오늘날 우리에게 과학 소설 분야를 개척한 소설가로 여겨집니다. 그 의미에서 '과학적인 쥘 베른'이란 동어반복처럼 느껴집니다. 추측컨대 와일드에게는 그렇지 않았나 봅니다. 웰스를 '과학적인 쥘 베른'이라고 평함으로써, 그는 웰스야말로 인류의 가능성을 깊이 탐구하고 사색하는 진정 '과학적'인 작품을 썼다고 칭송하는 한편, 쥘 베른은 그저 있을 법한 가능성을 부풀려서 썼다는 의미에서 '공상적'일 따름이라고 지적한 것입니다. 언젠가 쥘 베른이 웰스의 소설을 읽고서 그 자유로운 상상력에 충격을 받아서 분개하면서 "그는 발명을 한다!"(Il invente!)라고 말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웰스가 진정 뛰어난 이유는 단순히 그의 플롯이 뛰어나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가 제시하는 플롯은 하나같이 인간 운명에 내재한 과정들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작품 속의 투명 인간에게 눈꺼풀은 빛을 차단해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누구나 느낄 법한 군중 속의 인간된 외로움과 두려움과 공포를 은연중에 드러냅니다. 한편 밤이 되면 자신들의 노예근성을 한탄하는 괴물들의 비밀집회도 묘사됩니다. 이것은 가톨릭 권위주의의 상징인 바티칸과 신정정치의 상징인 포탈라궁을 연상케 합니다. 그의 작품은 "무한하고 유동적인 모호성"을 지니며, "독자의 면모를 드러내는 거울임과 동시에 세계 지도"입니다. 여기서 '거울'은 주관적인 인상을, '세계 지도'는 객관적인 인상을 담보합니다. 보르헤스는 초창기 웰스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경향성을 높이 삽니다. 흥미로운 상상력을 풀어놓으면서도 작가의 의도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초창기 웰스는 모든 상징주의에 무지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모든 것을 완벽하게 암시합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웰스의 작품에서는 교리가 도드라집니다. 교리 자체는 전혀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20세기 오웰도 말했듯,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한다는 주장이야말로 이미 충분히 정치적이니까요. 보르헤스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예술이 교리를 전파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아무말도 아니며, 그저 자신이 그 교리에 반대하고 있음을 드러낼 뿐입니다. 물론 이때 웰스가 주장한 철학적∙정치적 비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소설에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조금 다른 문제입니다. 왜 소설은 다를까요?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 그 '있음'을 설득하기 때문입니다. 풀어서 설명하겠습니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한 세계를 온전히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누림이란 일종의 종교적 경험에 가까우며, 엄밀한 의미로는 이성적인 추론보다는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신이 그저 존재할 뿐 자신의 존재 원리를 설득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성적인 추론을 거치는 설득은 신의 영역이 아니며, 이는 "신은 신학을 하지 않는다"는 말로 함축됩니다.
다시, '추론은 어떤 식으로든 불완전합니다. 추론은 인간된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자신의 교리를 끊임없이 설득하려고 하는 순간 독자는 그 세계에서 튕겨져 나온 듯한 느낌을 받고, 소설이라는 세계를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설득하고자 하는 목소리를 신의 그것으로 느끼기보다는 (인간인 자신처럼) 불완전하다고 느낍니다. 한 시절 완벽했던 추론도 시간이 흘러가면, 그 논증 과정을 되밟아서 논파할 또 다른 이론가를 배태합니다. "금에는 금박을 두르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에는 존재론적 통찰이 함축돼 있습니다. 비슷하게, 신은 존재이며 유일한 실재일 따름입니다("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애굽기 3:14). 신의 믿음이 절대적이지 않은 시대가 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소설이라는 세계를 찾아내기 시작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설이란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세계에 찾아든 일시적이고 변덕적이며 불완전한 하나의 세계이며, 그것은 간밤의 악몽 같은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russist
“ 케베도나 볼테르, 괴테를 비롯해 다른 많은 이들처럼, 웰스는 문학가라기보다는 문학 그 자체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찰스 디킨스 식의 크나큰 행복감을 창출하는 수다로 가득한 책들을 썼으며, 사회학적 비유를 남발했고, 백과사전을 편찬했다. 소설의 가능성을 확장시켰고, 플라톤의 대화편의 위대한 히브리식 모방인 ⟪욥기⟫를 우리 시대를 위해 다시 썼고, 교만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어조로 유쾌한 자서전을 써냈다. 공산주의와 나치즘, 기독교 제일주의에 대항해 싸웠고, (예의 바르지만 날카롭게) 벨록과 논쟁을 벌였고, 과거를 정리했으며, 미래를 기술했고, 현실의 삶과 상상의 삶을 기록했다. ”
『또 다른 심문들』 158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문장모음 보기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비아타나토스] 영국 시인 존 던의 ⟪비아타나토스⟫(Biathanatos, 1608)라는 책을 다룹니다. 내용이 내용인만큼 스포일러로 진행하겠습니다.

russist
이 책은 흔히 자살론이라고도 불립니다. 비아타나토스는 그리스어 'Βιαθανατος'에서 유래하였으며, '폭력적인 죽음'을 의미합니다. 16-17세기에는 '자살'을 의미하는 단어였다고 합니다. 이 책은 자살의 여러 사례를 (신학적으로) 면밀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한국에는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온라인상에서는 퍼블릭 도메인으로 열려 있으니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상했다시피 이 책은 극단적인 염세주의 철학관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이란, 종내에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열망에 휩싸인 신의 파편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이 에세이의 말미에서, 비슷하게 자살을 옹호했던 마인랜더를 언급합니다. 마인랜더는 자신의 책 ⟪구원의 철학⟫에서, 세계사는 죽음의 과정이며 세상 모든 고통과 투쟁은 의지화된 죽음으로서 인간의 고뇌이며 우리는 결국 완전한 소멸로 회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책이 출간과 동시에 마인랜더는 자살했습니다. 후술하겠지만 존 던은 자살론을 썼지만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존 던은 책에서 말합니다. "모든 살인 행위가 범죄로써의 살인 행위가 아니듯이 모든 자살 행위가 구원받을 수 없는 죄악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는 자살을 옹호했던 에픽테토스와 쇼펜하우어의 책과 별반 다르지 않게 존 던의 작품을 읽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점차 읽어갈수록 이 책에는 숨겨진 논증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 '숨겨진 논증'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문학가로서 존 던 특유의 직관, 즉 "찰나의 황혼 같은 예감"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책은 크게 '자연'(Nature), '이성'(Reason), '신'(God)라는 3개의 주제로 구성돼 있으며, 첫번째 주제에서 그는 자연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자살 사례를 살펴봅니다. 이를테면 그리스 최고의 지성이었던 호메로스는 고작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살했습니다. 펠리컨은 자신의 가슴을 쪼아 피를 내어 새끼를 먹이는 자기희생의 상징입니다. 꿀벌은 여왕벌의 법을 어기는 즉시 자살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이 책의 목적은 다양한 자살 사례를 수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르헤스는 오늘날 우리가 존 던의 책에서 그리스도가 자살했음을 논증하고자 애쓴 흔적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앞선 예시들은 그리스도가 자살했음을 논증하려는 진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은밀한 징검다리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비아타나토스⟫의 마지막 3부는 성경에 기록된 자의적인 죽음을 고찰합니다. 던은 구약의 사사기에 등장하는 삼손의 죽음을 공들여서 설명합니다. 삼손은 하느님이 주신 괴력의 소유자이지만, 훗날 연인 들릴라에게 배신당합니다. 괴력의 원천인 머리카락이 잘린 채 블레셋인들의 손에 넘겨져 조롱당합니다. 복수심과 굴욕감에 사로잡힌 삼손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사사기 16:30)라고 말하며, 기둥을 밀어 신전을 무너뜨려서 자신과 수천 명의 블레셋인들을 생매장하여 죽입니다. 던은 여기서 삼손이 선택한 죽음이 하나의 상징으로서 훗날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를 예견한다고 해석합니다.
존 던은 구약의 인물이나 사건을 신약 그리스도의 그림자이거나 예고편으로 해석하는 타이폴로지(Typology), 즉 예표론에 근거해서 해석합니다. 던에게 삼손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에 불과했고, 진짜 그가 설득하고자 한 바는 예수가 자살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부에게 이 세계란 성자에게 죽음을 허락하기 위해 마련한 거대한 교수대라는 것입니다. 이말인즉 하느님 아버지는 그의 외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될 것임을 알면서도 천지를 창조하였고, 유대인을 비롯한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예수를 죽게 만들기 위해서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며, 쇠는 예수를 박을 못을 만들기 위해, 가시는 모욕의 면류관을 위해, 피와 물은 예수의 상처를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던은 모순이 극단적으로 가면 결합되는 바로크적인 것에 이끌렸으며, 그에게 있어서 '창조와 파괴', '사랑과 죽음'은 동시에 드러납니다. 나아가 존 던의 ⟪비아타나토스⟫는, 보르헤스가 말미에 언급한 필리프 마인렌더의 ⟪구원의 철학⟫과 주제적으로 공명하면서도 그를 자살에 이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참 아이러니한 결론입니다.

russist
기독교도 입장에서는 예수의 탄생과 죽음이야말로 세계사의 중심 사건으로, 그 이전부터 수세기 동 안 준비되어 온 일이며,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은 이 사건의 반영일 뿐이다.
『또 다른 심문들』 165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문장모음 보기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파스칼]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그야말로 전인(全人)이었습니다. 신학과 철학은 물론이고 수학과 과학에서도 대단한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파스칼의 대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팡세⟫(Pensées)는 제목 그대로 인간과 신에 대한 '단상'을 모은 파편집입니다. "인간은 사유하는 갈대"라는 유명한 구절도 이 책에 나옵니다. 하지만 이 에세이에서 파스칼과 ⟪팡세⟫를 향한 보르헤스의 평가는 결코 곱지 않습니다. 파스칼은 17세기 신앙과 이성 사이에 놓인 한 인간의 혼란을 체현한 인물일 따름이며, 그가 책에서 드러낸 종교적 감동이나 철학적 고뇌는 다분히 연극적이라는 점에서 문학가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팡세⟫를 비롯한 그의 저작은 17세기의 "신학자적 현기증"이라는 것이 보르헤스의 주장입니다.
"내가 알기로, 발레리는 파스칼의 의도적인 연극성을 비난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파스칼의 저작은 어떤 학설 혹은 변증법적 절차를 보여주기보다는, 시공간 속에서 길을 잃고 만 시인의 이미지를 투영하고 있다."
⏤본문 167-168쪽
신앙인으로서 파스칼의 현기증은 그가 살았던 17세기라는 과도기적 시대를 반영합니다. 이성이 대두되었고 여러 학문이 발전하면서 이전까지 신앙이 제공하던 안전하고 확고한 믿음이 도전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파스칼은 신앙인으로서 ⟪알마게스트⟫에서 말하는 지동설을 믿어야 했지만 그의 날카로운 이성은 '무한하고 중심이 없는 우주'를, 즉 천동설을 직면하고 있었습니다. 파스칼은 루크레티우스의 '무한한 우주'에 심취했고 매혹되었으나 '무한' 자체는 신학적으로 그에게 공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당시 천동설이란 '신의 계획된 의지'를 깡그리 부정하는 이단적인 주장이었고 신적인 세계를 살아가던 사람을 일거에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천동설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 세계는 우주의 중심이 아닌 변두리로 즉각 밀려나며, 인간은 신이 빚어낸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의 먼지와 다를 바없는 우연한 피조물 신세를 면하지 못합니다. 파스칼의 "신학자적 현기증"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학자로서 케플러와 브루노의 코페르니쿠스적 우주관을 거부해야 했지만 정작 ⟪팡세⟫에서 그가 경험하고 토로한 우주는 완전히 근대적인 것이었습니다("얼마나 많은 왕국이 우리를 모르는가!", "나는 무한하고 광대한 공간을 알지 못하고, 그 공간들 또한 나를 모르니").
보르헤스는 무엇보다 파스칼이 신앙인으로서 '이성'에 천착했음을 지적합니다. 그는 철저한 이성에 따라 신학적 논변을 펼치면서도 그것이 되레 자신의 신학적 믿음을 뒤흔드는 것임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파스칼은 ⟪팡세⟫의 단상 72번에서 "도처에 중심이 있고 그 어느 곳에도 언저리가 없는 그런 무한 구체"를 말합니다. 이 '무한 구체' 개념은 라블레(Rabelais)의 책에서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정작 라블레는 해당 개념의 출처를 헤르메스 트리메기스토스(Hermes Trimegisto)라고 밝힙니다. 더 거슬러가면 플라톤도 있습니다. 이쯤되면 무한 구체라는 개념의 출처와 연원을 따지는 것은 중요치 않아 보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파스칼이 많은 책을 섭렵했고 저도 모르게 선대의 작가들에게서 무한하고 광대한 우주, 즉 '무한한 구'의 은유를 읽고 감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파스칼을 괴롭게 만든 것은 조물주의 위대함이 아닌 피조물의 위대함이었던 것"(170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보르헤스가 단순한 신앙이 아닌 파스칼의 '이성에 의존하는 신앙'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스칼의 ⟪팡세⟫가 미완성인데다가 어수선하다고 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파스칼은 신학자였음에도 신과의 관계에서 기쁨을 얻지 않았습니다. 그는 불신자를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회의론자를 논파해서 자신의 신앙을 방어하는 데서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파스칼의 열정은 신을 아낌없이 흠앙하기보다는 무신론자를 이기는 데 있었고, 기도와 명상보다는 지적 논쟁과 변증에 있었습니다. 일찍이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세속적 셈법으로 전락시킨 이들을 비판했는데 파스칼이 꼭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는 천국을 보상 기관으로 지옥을 형벌의 공간으로 묘사해서 신앙을 손익 계산인 것처럼 호도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파스칼을 신학자로 이해하기보다는 문학가로 이해해야 합니다. 17세기라는 과도기에, 표면적으로는 신앙을 견지하였으나 기실 자신의 문학적 자질은 모르고 있었던 불행한 '시인'으로서 파스칼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파스칼의 업적은 그 표리부동함에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스스로 신학자라고 믿었지만 너무나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분명 그가 ⟪팡세⟫에서 보여주는 인식은 미완성이기는 하나 근대적인 우주를, 훗날 보르헤스적인 '알레프'를 예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결론입니다.

russist
“ 데모크리스토스는 무한 속에서 동일한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동일한 인간들은 변화없이 동일한 운명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만물 속에 만물이 포함되어 있다고 했던 아낙고라스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파스칼은 그런 동일한 세계를 서로의 내부에 포함시켰다. 따라서 우주라는 공간에 우주를 담지 않은 원자가 없고, 원자가 아닌 우주도 없다. (물론 파스칼이 이렇게 말한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이 그 세계들 안에서 끝없이 복제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
『또 다른 심문들』 173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문장모음 보기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 독특하게도 읽지 못한 책에 대한 서평입니다. 여기서 보르헤스가 구하지 못해서 '읽지 못한 책'이란, 존 윌킨스(John Wilkins)의 ⟪진정한 문자와 철학적 언어에 대한 소고⟫(An Essay Towards a Real Character and a Philosophical Language)(600페이지, 4절판, 1668년)입니다. 보르헤스는 그 책을 읽으려고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을 찾았지만 소장본을 구할 수 없었고, 하는 수없이 존 윌킨스를 다룬 다른 저술가의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책의 내용을 유추해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글은 서구 지식 체계의 권위를 담보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4권에서 '존 윌킨스'라는 항목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시작합니다. 윌킨스는 당시에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양쪽에서 모두 학장을 지낼 정도로 저명한 인물이었고, 성직자이자 자연철학자(당시에는 '과학'이라는 용어가 정립되어 있지 않았고, 대신 '자연철학'이라는 말을 주로 썼습니다)로서 다양한 저술을 썼습니다. 훗날 아이작 뉴턴 경도 속하게 되는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창립자 중 한 명이었으며, 다방면의 호기심을 바탕으로 거대한 백과사전을 편찬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그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누락된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전적인 분류 체계를 만든 창시자가 되레 분류 체계에서 제외된 셈이지요.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물음을 간직한 채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가겠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그리 다르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은 어느 한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표현력 면에서 더욱 뛰어나다고 믿었습니다. 이를테면 스페인어 학자들은 스페인어의 '루나(luna)'가 영어의 '문(moon)'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스페인어 사용자들의 주장일 뿐이며, 언어마다 합성어와 파생어를 만들기에 용이하냐 아니냐의 차이 정도는 있겠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어느 한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더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근거는 희박합니다. 왜냐면 모든 언어는 동등하게 자의적(arbitrary)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노란 원반 모양의 구체가 영미권에서는 '문'으로 불리고 스페인어권에서는 '루나'여야 할 이유는 어디도 없습니다.
17세기 중반 존 윌킨스는 이러한 언어의 자의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류의 사고 전체를 조직하고 담아낼 수 있는 보편∙유사 언어를 고안하고자 했습니다. 언젠가 데카르트가 수학처럼 정확한 언어를 고안하고자 했던 이상을 이어받은 것이었습니다. 윌킨스는 완벽한 언어를 위하여 가장 먼저 세계를 40개의 범주로 나누어서 속(屬)으로 삼고, 그 안에 다시 세세한 차이를 두어 다시 종(種)으로 분류했습니다. 여기서 각 글자는 논리적인 의미가 있으며 그 표현은 전혀 우연적이지 않았습니다. 전화번호나 화학식처럼 한 글자 한 글자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를테면 02-123-1234라는 전화번호를 보면, 우리는 즉각 서울에서 걸려온 번호임을 알아챕니다. 나아가 123가 지역을 나타내며 1234는 개별번호임을 알아챕니다. H2O라는 화학식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화학식만 봐도 그 원자의 성분과 구조를 단번에 특정할 수 있습니다. 윌킨스가 고안한 분석적인 언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세계를 40개의 범주로 나눠서, 각 글자만 보고도 그 의미와 구성을 추측할 수 있는 체계적이고 분석적인 언어를 고안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 분석적인 언어는 일견 성공을 거두는 듯했습니다. 성경의 자구 하나하나를 상징으로 여기는 유대교의 신비주의적인 카발라적 언어관과도 만날 것만 같았습니다. 언젠가 찰스 모스너는 윌킨스가 고안한 분석적인 언어를 두고, "우주의 열쇠이며 비밀의 백과사전"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눈치챘겠지만 '우주의 열쇠'가 되기를 바라며 분석적 언어를 고안했던 윌킨스의 기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왜냐하면 언어에 있어서 자의성이란 극복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언어의 밑바닥에 있는 기본적인 구성 원리이며, 자의성은 언어를 넘어 우리 인식 자체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분명 윌킨스가 고안한 언어의 사례에서도 보듯(전화번호 체계나 화학식을 보세요), 언어의 구조 자체는 자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윌킨스가 분석적 언어를 고안하면서 최초에 40개의 범주를 정할 때 그 기준은 무엇이었을까요? 40개의 범주를 정하는 자체가 이미 자의적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리 앞에 압도적인 규모로 놓인 세계를 분절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인간된 인식의 한계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보르헤스는 세상을 분류하려는 일체의 시도 자체가 불완전함을 상기시킵니다. 분류는 오직 사람의 일인데, 이런 분류 행위에는 한 인간이 살아갔던 시대적 편견과 한계가 녹아 있을 수밖에 없는 탓입니다. 흔히들 인간은 통제하고 싶으면 통제하고 있다고 믿어버리는 종족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편집(編輯)한다고 믿으면서 편집증(偏執症)에 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어 자체가 쉼없이 자르고 떼고 잇고 붙이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무지'한 채로 분류를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전체'라는 단어를 말할 뿐, 전체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지도를 예로 들어볼까요. 우리는 흔히 세상을 지도의 형태로 내려다볼 수 있다고 믿지만, 지도는 3차원의 모든 면을 한번에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2차원의 평면으로 내려앉혀서 바라보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3차원의 세계는 2차원의 지도로 내려오면서 일종의 '단절'을 겪게 되는데, 그 증거로 우리는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이 양극단으로 벌어져 있다는 이상한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된 관점에서 편집된 산물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일이 이렇게 왕왕 벌어집니다. 어찌보면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의미하는 '우주'(Uni-verse) 자체가 불가해한 세계를 인간의 한시적인 이해로 끌어안는 수단일지도 모릅니다. 지도가 현실에서 효용이 있는 것과 세상이 지도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죠.
존 윌킨스가 고안하고자 했던 분석적인 언어가 실패했음을 안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첫 번째 문단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결국 보르헤스가 이 에세이에서 말하고자 한 바는 뭘까요? 모르긴 몰라도 '언어는 어쩔 수 없이 자의적이다' 정도로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결론적으로 윌킨스는 언어 자체로 보면 자의성을 극복한 듯 했지만, 그러한 언어의 토대가 되는 40가지 범주 자체가 이미 자의적이라는 함정에 빠져 있었던 셈입니다. 나아가 윌킨스는 언어가 '통합'적일 수 있다고 전제했으나, 정작 분류의 대상인 '우주'는 전혀 통합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간과했습니다. 설령 우주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Universe'로 칭해질 수 있다고 하더라도 지극히 불완전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그 '신의 관점'을 알지 못하며, 우리는 우주를 영영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윌킨스가 극복하려던 문제는 이렇듯 이중삼중의 불가능함으로 감싸인 복잡한 문제였음이 드러납니다.
그런 점에서 마지막 체스터턴의 인용구는 결정타이기까지 합니다. 체스터턴은 언어가 모종의 질서와 체계를 품고 있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회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흔히들 인간은 자신의 "영혼 속에 가을 숲 속의 색깔들보다 더욱 다채롭고 훨씬 무한하며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색깔들이 들어 있음"을 믿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언어로 표현되어 나오고 있다는 보장은 어디도 없습니다. 그런 식이라면 주식 중개인의 장광설에서도 우리는 모종의 인간된 고뇌와 세계의 의미를 궁구하는 철학자의 진리가 들어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물었을 때 누구도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의 자의성은 비극만은 아닙니다. 이 에세이가 담긴 책은 1952년에 출간되었고, 훗날의 기호론을 예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호론이야말로 언어의 자의성을 극단으로 밀고 간 한 가지 예일 것입니다.


russist
“ 한 걸음 더 나아가자면, 단일 유기체란 의미에서 볼 때 ‘우주’라는 야심찬 이름을 붙여도 될 만한 세상이란 없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설사 그런 것이 존재한다 해도 그 존재의 목적을 짐작할 수가 없다. 신이 만든 비밀 사전 속 어휘들과 그 뜻, 어원과 동의어 등도 짐작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
『또 다른 심문들』 179쪽,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정경원 외 옮김
문장모음 보기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 말 그대로, 카프카의 정신적 선구자들을 고찰합니다.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거대한 체계 속을 배회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는 목적지에 가야한다는 모종의 의무감은 있지만, 나중에 가면 자신이 왜 법원 속을, 왜 성 주변을 배회하는지 알지 못한 채 이리저리 서성입니다. 인물들은 어떤 시스템 주변을 멤돌며 살아 있지만, 감히 '살아간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카프카의 이야기는 알레고리 구조를 띠고 있는 것 같지만, 알레고리 소설에서 암시하는 '진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 아니다. 다른 무언가를 말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다른 무언가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이런 인상으로 가득합니다. 미궁의 중심처럼 텅 빈 중심, 안팎이 까뒤집어진 공간인 것입니다.
보르헤스는 첫번째로 카프카를 읽으면서 제논의 역설을 떠올립니다. 결코 성(城)에 도달하지 못하는 측량사 K, 그리고 거북이를 따라가고 그 꽁무니를 뛰쫓지만 결코 추월할 수 없는 아킬레우스처럼 말입니다. 두번째는 한유의 우화에 등장하는 전설의 일각수 기린(麒麟)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나 '기린'이 전설 속의 일각수인 것을 압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정확히 본 적이 없기에 '기린'을 눈 앞에서 보면 누군가는 뿔을 보고서 '이상하게 생긴 사슴'이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발굽을 보고서 '이상하게 생긴 말'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꼬리를 보고서 '이상하게 생긴 소'라고 말합니다. 기린을 보면 다들 자신이 아는 동물의 이름을 하나쯤 댈 수는 있지만 그것이 '기린'임은 모릅니다.
세번째는 카프카의 정신적 쌍둥이였던 크르케고르입니다. 그는 현대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주제를 종교적 우화로 풀어냈습니다. 예컨대 카프카의 인물들은 모종의 '죄의식' 속에서 자기가 속한 질서를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질서를 배반하고 있다는 죄의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질서를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이는 '위폐범으로서 키르케고르'와 같습니다. 신은 키르케고르가 위폐범임을 알면서, 외려 그가 위폐범이기에 그를 조폐국에서 일하도록 시킵니다. 마지막 사례는 브라우닝의 시 ⟨두려움과 양심의 가책⟩입니다. 이 시에서 화자는 유명한 친구가 있다고 믿지만, 어쩐 일인지 화자는 그 친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도움을 받은 기억도 없습니다. 친구가 썼다는 편지가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한 필적학자가 그 편지가 위조되었음을 밝히고, 화자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친구가 혹시 신은 아니었을까?" 이 짧은 이야기는 카프카의 단편 ⟨판결⟩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습니다.
갑자기 결론을 말하자면, 보르헤스는 앞서 다섯 사례에서 카프카에게 영향을 미친 과거의 선구자를 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영향 관계는 그렇게 역사적 시계열의 순서를 따르지만 않습니다. 오히려 카프카의 작품으로 말미암아 카프카적인 과거의 작품을 발굴했던 것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합니다. 여기서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모든 작가는 그들의 선구자를 창조한다." 이 말은 조금 고쳐 써야 옳습니다. 이 시대의 훌륭한 작가는 그들의 선구자를 창조한다고요. 왜냐하면 오늘날 걸출함은 그 연원을 추적하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되고, 그 욕구는 역사적 시계열을 거슬러서 그와 비슷한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그 작품의 관점에서 다시 발견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인과관계가 사후적으로 창조됩니다. 그래서 한 시대의 뛰어난 창작자들은 자기 이전의 작가들을 자신의 작품으로 소급해버립니다. 현재로써 과거를 단번에 규정합니다.
카프카가 ⟪성⟫을 썼기 때문에 카프카적이라고 불리는, 제자리를 서성이고 악몽 같은 미로를 배회하는 이전 시대의 모든 작품이 열거되고 발굴되기에 이릅니다. 과거가 현재로 이어지는 것만이 아닙니다. 과거가 현재를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가 과거를 역동적으로 재구성하고 구원합니다. 따라서 오늘 뛰어난 작품을 쓰는 행위는 과거의 선구자를 사후적으로 창조하는 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뒤집어진 봉우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가장 위에는 두꺼운 과거가 시시각각 적층되고 있고, 그 아랫 부분은 보다 좁고 연약한 현재가 지탱하고 있으며, 가장 아래에 깔려 있는 미래는 점처럼 있는 듯 없는 듯합니다. 이 뒤집어진 봉우리의 풍경은 우리가 한 권의 책을 앞에 둔 풍경, 그리하여 책을 '읽어내려가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책의 첫 장을 펼친 사람은 자기 앞에 내려가야 할 계단이 적층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는 장차 책을 읽어가면서, 그 계단을 한 칸씩 밟아 내려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단을 밟아 내려가서 가장 아래층에 도달하더라도, 독자로서 그가 절대로 알 수 없는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 어떻게 처음에 맨 위층에 있었던가, 하는 사실입니다. 한 권의 책을 읽기 시작한다는 것은, 지금에 이르는 원인을 궁금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을 자각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저도 모르게 법원을 헤메고 성 주위를 끝없이 배회하는 모종의 질서 속으로 들어온 카프카의 인물처럼, 혹은 책의 첫 쪽이라는 '최초의 높이를 확보하게 된 사건'을 설명할 최초의 원인 따위는 묘연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자신의 선구자를 창조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지금껏 말한 것은 에드몽 자베스는 ⟨고독, 문체의 공간⟩에 나온 탁월한 은유를 카프카적으로 풀어쓴 것입니다. 에드몽 자베스는 한 권의 책을 계단에 비유할 수 있다면 낱장들은 하나의 계단이라고 말합니다. 첫 쪽에서 가장 마지막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 시의 말미에서 그가 놀라워하며 뱉은 말도 이러합니다. “나를 궁금케 하는 것은 결코 한 장 한 장 넘기며 책의 모든 계단을 내려갔다는 점이 아니라, 애초에 어떻게 내가 가장 높이 위치한, 맨 첫 장에 이르렀느냐는 점이오.”

예상 밖의 전복의 서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8권.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에드몽 자베스의 작품. 그동안 국내 작가나 평론가들의 글이나 입으로만 전해져 국내 문단에 풍문처럼 떠돌던 에드몽 자베스. 시집 <예상 밖의 전복의 서>는 작가 생전 마지막으로 출간한 책이다.
책장 바로가기
작성
게시판
글타래
화제 모음
지정된 화제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