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할 책

D-29
[8] 블랑쇼 선집 3 도래할 책 Maurice Blanchot
세이렌은 비현실의(하늘에서 온) 힘과 언제나 아무런 위험 없이 유희하고자 하는 기술의 힘에 의해 타파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는 그녀들의 힘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들은 그를 그가 도망치고 싶지 않아 하는 곳으로 끌고 갔다. 그녀들의 무덤이 된 [오디세이아] 안에 몸을 숨기고, 그나 혹은 다른 많은 사람들을 저 행복하면서도 불행한 항해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 즉 이미 직접적이지 않고 이야기된 것이며, 그로 인해 얼핏 아무 위험도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 노래의 항해이다. 에페이소디온이 된 오드의 항해이다.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이것은 여기서 알레고리가 아니다. 모든 이야기와 세이렌의 만남, 즉 그 결함 때문에 강력한 강력한 저 수수께끼 같은 노래 사이에는 아주 은밀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이 싸움에서는 오디세우스의 신중함, 그 안에 있는 인간적 진리나 신비화, 결코 신들처럼 굴지 않겠다는 집요한 태도 등의 것이 언제나 이용되고 개량되어 왔다. 사람들이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싸움으로부터 태어난 것이다. 소설의 경우, 전경에 있는 것은 예비적 항해, 즉 오디세우스를 만남의 지점까지 이끌어 가는 항해이다. 이 항해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며, 인간들의 시간에 관심을 갖고 인간들의 정념과 연결되면서 실제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화자의 모든 힘과 주의력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풍성하며 다양하다. 이야기가 소설이 되었을 때, 그것은 빈곤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탐색의 풍부함과 충만함이 된다. 때로 이 탐색은 내가 항해해 가는 끝없는 전개를 둘러싸고, 때로는 배다리 위의 작은 방에 한정된다. 또 때로는 여태까지 바다의 희망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배의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항해자들이 잊지 말고 명심해야 할 바는 결코 목표라든지 목적을 암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이것은 당연한 말이다. 카프리 섬으로 가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출항하는 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다. 누구도 이 섬으로 향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러한 결심을 했다 하더라도 그는 그저 우연히 가게 될 뿐이다. 이해하기 곤란한 교감을 통해 연결된 우연을 통해서 이르게 될 뿐인 것이다. 이리하여 명령어가 되는 것은 침묵, 신중, 망각이다. 운명이 예정된 이 겸양,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어떤 것에도 다다르려 하지 않는 이 욕망, 이것들이 많은 소설을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책으로 만들고, 소설이라는 장르를 모든 장르 중에서도 가장 호감이 가는 장르로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기분 전환이야말로 소설의 깊은 내면의 노래이다.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고, 마치 아무 생각이 없는 것처럼 나아가며 어떤 불안한 움직임, 행복한 방심으로 변형되는 움직임을 통해 모든 목표를 피해 가는 것, 이것이 소설이 소설임을 정당화하는 첫번째로 확실한 증거였다. 인간적 시간을 어떤 유희로 만드는 것, 그 유희를 모든 직접적인 이해관계나 모든 유용성으로부터 해방된, 본질적으로 표면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표면의 움직임을 통해서 존재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운 작업으로 만드는 것,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소설이 오늘날 이와 같은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분명히 그것은 기술이 인간의 시간과 그 시간으로부터 기분 전환을 하는 수단들을 변형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왜 시간 바깥에 있는 것이 순수시간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는 것일까? 베네치아에서의 한 걸음과 게르망트 가에서의 한 걸음, 과거의 그때와 현재의 지금을, 서로 겹쳐 놓아야 할 두 개의 지금으로 묶어 내는 이 동시성을 통해서, 시간을 소거시키는 두 현재의 이러한 결합을 통해서, 시간을 소거시키는 두 현재의 이러한 결합을 통해서, 프루스트는 시간의 황홀경에 대한 독특하고 탁월한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시간의 소멸을 체험하는 것, 한없이 멀리 떨어진 두 순간(“곧장이긴 하지만 차차”)이 서로 만나기에 이르는 이 운동, 욕망의 변신을 통해서 마침내 서로 동일화되는 두 현존으로 결합되는 이 운동을 체험하는 것, 이것은 시간의 모든 현실을 편력함으로써 시간을 공허한 공간 혹은 장소로서, 요컨대 항시 평소에 그것을 채우는 여러 사건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 혹은 장소로서 체험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도 없는 순수한 시간, 운동하는 공백,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 거리, 시간의 여러 가지 황홀경이 어떤 매혹적인 동시성 속에서 배열되고 생성하는 내적 시간, 이것들 모두는 대체 무엇일까?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하지만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시간 그 자체이며, 이 시간은 시간의 바깥에는 없지만, 어떤 공간의 형태로 예술이 그곳에서 자신의 수단들을 이끌어 내고 배열하는 이 상상적 공간의 형태하에서 바깥으로서 체험되는 것이다.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 비시간적인 것이 빛나고 있는 이 순간들이 한편으로는 어느 회귀를 단언함으로써 시간의 변신 가운데 가장 내밀한 움직임을 표현하고 있었다는 것과 그것이야말로 ‘순수한 시간’이라는 것을 예감하였다. … 작품의 공간은 당연히 지속을 갖는 모든 힘을 동시에 지탱하게 된다는 것을. 그것은 작품이 작품 자체로 향하는 움직임, 자신의 근원에 대한 본래적인 탐구에 다름 아닌 것이 된다는 것을. 요컨대 저 상상적인 것의 장이 된다는 것을.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본질적인 것은 그러나 늘 어둡고 모호하다.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그것은 하나의 위탁인 것입니다. 나는 나의 본성대로 누군가 나에게 행하지도 않은 위탁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모순 속에서, 언제나 어떤 모순 속에서만, 나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카프카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낭만주의에 이르기까지 놀랍고도 많은 경우 숭고하기까지 한 노력이 계속되어 왔다. 이것은 예술을 천재로 환원하고, 시를 주관적인 것으로 환원하려는 노력이다. 시인이 표현하는 것은 자기자신이고 그의 가장 본래적인 내밀성이며 그의 인격 가운데 숨겨진 심연이고, 분명히 말해서 나타나지 않고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멀리 떨어진 나라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하는 노력이다. 화가는 회화를 통해 자신을 실현하고, 소설가는 자신이 명시될 수 있는 하나의 비전을 작중인물이라는 형태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작품의 요청은 표현해야 하는 내밀성의 요청이 된다. 요컨대 시인은 들려주어야 하는 자신의 노래를 갖고 있고, 작가는 전해야 하는 자신의 메시지를 갖고 있다. ‘나에게는 말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국 예술과 작품의 요청과의 여러 관계 속에서 가장 낮은 단계이고, 그 가장 높은 단계는 아무런 이유도 발견할 수 없는 격렬한 창조의 폭풍인 것 같다.
도래할 책 모리스 블랑쇼 지음, 심세광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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