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크르케고르, ⟪순간/현대의 비판⟫ 읽기

D-29
크르케고르의 ⟪순간/현대의 비판⟫를 읽는 모임입니다. 권대식 목사와 함께 천천히 읽는 모임입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목은 오타입니다. '키르케고르'입니다. ⟪현대의 비판⟫만 읽습니다. 원문은 소제목으로 구분돼 있지 않은데, 여기서는 주제에 따라서 임의로 13개의 장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제가 읽기에는 한국어판 본문이 눈에 잘 안 들어와서 영역문과 비교해가면서 읽었습니다. ☀︎ 아래는 AI를 참고해서 옮겼으니 책의 본문과 비교하면서 읽기를 바랍니다. - Soren A. Kierkegaard. New York : Harper Torchbooks, 1962. ☀︎ 소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적해주면 수정하겠습니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1장: 성찰의 시대와 개인의 무력함(361-365쪽) 오늘날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성찰하기는 하나, 열정은 없는 시대를 산다. 순간적으로 열광하고 폭발하지만 교묘하게 평정심을 되찾는 시대를 산다. 만약 우리가 세대마다 얼마나 많은 지성을 소비하는지에 대한 통계표를 가지고 있다면, 증류주 소비 통계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경악할 것이다. 조용히 살아가는 작고 부유한 가정들이 얼마나 많이 주저하고 숙고하는지, 젊은이들이, 심지어 아이들까지 얼마나 많이 주저하고 숙고하는지를 보면 말이다. 소년 십자군(the children's crusade)이 중세(the Middle Ages)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듯이, 조숙한 아이들이야말로 현시대를 상징한다. 사실 한 번이라도 터무니없는 우행을 저지를 준비가 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이다.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조차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그 결단을 내리기 전에 그는 너무나 오래, 너무나 신중하게 숙고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사유 때문에 질식한다. 그를 자살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의문이다. 실제로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는 숙고하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숙고 때문에 죽는다. 그러므로 현세대를 기소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현세대는 법적 궤변들에 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세대는 능력이 있고 기교가 있으며 분별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까지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판단과 결정에 도달하려 애쓰는 데서 그친다. 만약 혁명의 시대에 대해 제멋대로 폭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현시대에 대해서는 절름거리며 나아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개인과 그의 세대는 서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결과 검사는 어떤 사실도 인정시키지 못한다.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한 징후들로 판단하자면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일이 막 일어났거나 일어나려 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론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징후들이야말로 실제로 이 시대의 유일한 성취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 시대는 매혹적인 환영들을 쌓아올리고, 열광으로 폭발하며, 앞으로 올 형식상의 변화를 내세워 기만적으로 도피한다. 이러한 일에 이 시대는 숙련되어 있고 독창적이다. 우리는 이 시대가 얼마나 영리한지, 힘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쓰는지를 기준으로 이 시대를 평가해야 한다. 혁명을 평가할 때 그 에너지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창조적인지를 기준으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세대는 환상적인 노력에 지쳐 완전한 나태로 되돌아간다. 현세대의 상태는 아침 무렵에야 잠든 사람의 상태와 같다. 먼저 거대한 꿈들이 오고, 그다음 나른함이 오며, 마침내 침대에 남아 있기 위한 재치 있거나 영리한 핑계가 온다. 개인이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강하더라도(만약 그가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는 여전히 열정을 갖지 못한다. 성찰이 유혹적이고 불확실한 굴레를 씌울 때, 그 굴레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낼 수 있는 열정을 말이다. 그의 주변 환경도 그를 자유롭게 하는 데 필요한 사건들을 제공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그를 돕는 대신, 그의 환경은 그 주위에 부정적이고 지적인 장벽을 짓는다. 그 장벽은 잠시 기만적인 전망을 제공하며 속임수를 부리다가, 결국 빛나는 탈출구를 보여주며 그를 기만한다. 가장 영리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여주면서 말이다. 현시대가 우유부단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밑바닥에는 관성의 힘(vis inertiae)이 있고, 열정 없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그것을 발견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축하하며, 그래서 더욱 영리해진다. 혁명 기간에 사람들은 무기를 자유롭게 분배받았고, 십자군(the Crusades) 기간에는 위업의 표식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규칙들과 판단을 돕는 계산표를 제공받는다. 만약 어떤 세대가 무언가 곧 일어날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든 행동을 미루는 외교적 임무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가 혁명의 시대만큼이나 놀라운 업적을 수행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누구든 상상해보라. 그 시대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익숙해진 탓에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도 잊어버리고,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책이나 신문 기사를 읽거나 단지 어떤 행인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이다. 그는 이런 인상을 밝힐 것이다. "맙소사, 오늘 밤 무언가 일어나려 하는구나. 아니면 어쩌면 그저께 밤에 무언가 일어났을지도 모르겠군." 혁명의 시대는 행동한다. 우리 시대는 광고하고 공시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곳에서 즉시 요란하게 공표된다. 현시대에 반란은 무엇보다도 가장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힘의 표현은 우리 시대에 이해 타산만 따지는 지성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일처럼 보일 것이다. 반면에 정치적 거장은 거의 그만큼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반란을 결정해야 하는 총회를 제안하는 선언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고, 너무나 신중하게 작성되어 검열관조차 그것을 통과시킬 것이다. 회의 자체에서 그는 청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매우 즐거운 저녁을 보낸 후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심오하고 경이로운 학식을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을 우스꽝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반면에 과학적 거장은 구독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집필할 포괄적 체계의 개요를 담은 신청서를 말이다. 더 나아가 독자가 이미 그 체계를 읽은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람들이 지칠 줄 모르는 고통으로 거대한 책들을 쓰던 백과전서파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가볍게(en passant) 모든 학문과 존재 전체를 다루는 그 경량급 백과전서파의 차례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날마다 자기부정을 실천하는 종교적 단념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반면에 거의 모든 신학생은 훨씬 더 놀라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는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협회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하고 선한 행위의 시대는 지나갔다. 현재는 미리 기대하고, 인정조차 미리 받는 시대이다. 누구도 무언가 구체적인 것을 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성찰하면서 자신을 우쭐대고 싶어 한다. 적어도 새로운 대륙 하나쯤은 발견했다는 착각을 품으면서 말이다. 마치 9월 1일부터 진지하게 시험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젊은이가 결심을 강화하기 위해 8월 동안 휴가를 가기로 결정하는 것처럼, 현세대는 다음 세대가 진지하게 일해야 한다는 엄숙한 결의를 한 것처럼 보인다(이것은 확실히 이해하기 더 어렵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지 않기 위해, 현세대는 연회에 참석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 젊은이는 청춘을 건너는 자 특유의 경솔함으로 자신을 이해하지만, 우리 세대는 연회에서조차 진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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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얼음 스케이터의 우화(367-370쪽) 오늘날 행동 없음이나 결단 없음은 마치 얕은 물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위태로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파도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는 어른이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을 부른다. "자, 빨리 뛰어들어!" 마찬가지로 존재 속의 결단은 (물론 그것은 개인 안에 있는 것이지만) 젊은이들을 부른다. 말하자면 아직 과도한 성찰적 사고에 지치지 않았거나 성찰적 사고의 환상에 짓눌리지 않은 그런 젊은이들을 말이다. "자, 가뿐하게 뛰어내려라. 비록 가벼운 마음의 도약일지라도 그것이 결단을 담고 있기만 하다면. 만약 네가 한 사람이 될 능력이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또 존재가 네 경솔함을 가혹하게 심판하는 것이, 너를 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도울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소유하기를 바라는 보석이 얼어붙은 호수 위 멀리, 얼음이 매우 얇은 곳에 놓여 있고 죽음의 위험이 그것을 지키고 있지만 더 가까운 곳에서는 얼음이 완벽하게 안전하다면, 열정적인 시대에 군중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감히 밖으로 모험하는 사람의 용기에 박수를 보낼 것이고, 그를 위해, 그와 함께 그가 감행하는 결단의 위험 앞에서 전율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익사한다면 그를 슬퍼할 것이고, 만약 그가 상을 얻는다면 그를 신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열정 없는 시대에, 성찰의 시대에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멀리 밖으로 모험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시도할 가치조차 없다고 동의하는 것이 서로 영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대담함과 열정을 일종의 기술적 묘기로 바꾸어놓을 것인데, 이는 그들이 뭐라도 해야한다고 느끼는 탓이다. 군중은 안전한 장소에서 관람하러 나갈 것이고, 감정가의 눈으로, 바로 그 가장자리까지 (즉, 얼음이 아직 안전하고 위험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곳까지) 스케이트를 타다가 되돌아올 수 있는, 숙련된 스케이터를 평가할 것이다. 가장 숙련된 스케이터는 가장 먼 지점까지 나가서 훨씬 더 위험해 보이는 질주를 수행할 것이니, 그리하여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말할 것이다. "맙소사! 얼마나 미친 짓인가,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다." 그러나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의 기술이 너무나 놀라워서 그가 제때 되돌아오는 데 성공했고, 그때 얼음은 완벽하게 안전했으며, 아직 위험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극장에 있는 듯 군중은 박수를 보내고 환호할 것이며, 영웅적인 예술가를 그들 한가운데 두고 집으로 몰려가서 그에게 장엄한 연회를 베풀어 영예롭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한 탓에 실제 과제를 비현실적인 속임수로 변형시키고 현실을 놀이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연회 동안 찬미는 그 정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찬미자와 찬미의 대상 사이의 적절한 관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찬미자가 자신도 영웅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고양되고, 자신은 그런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겸허해지지만, 종내에는 과연 자기 분수에 맞게 그를 모방하라는 도덕적 용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한 곳에서는 찬미의 성격조차 완전히 바뀐다. 연회의 절정에서조차, 박수갈채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질 때조차, 찬미하는 손님들은 모두 약삭빠른 생각을 가지고 말 것이다. 바로 모든 영예를 거머쥔 그 사람의 행위가 실제로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를 위한 지금 모임은 단지 우연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결국 누구나 약간의 연습만 있으면 그만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손님들은 그들의 분별력이 강화되고 선을 행하도록 격려받는 대신, 훨씬 더 강한 병인을 품고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그 병인이란 모든 질병 중에서 가장 위험하지만 또한 가장 체면치레가 되는 질병, 즉 공적으로는 찬미하지만 사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니, 왜냐하면 모든 것이 농담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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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행동의 상실과 변증법적 분석(370-376쪽) 과거에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한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반대다. 모두 빈둥거린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성찰로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완벽하게 알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대화할 때를 보라. 혹은 모임에서 연사들이 말할 때를 보라. 사람들은 사유나 관찰로 제시되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한다. 하지만 행동의 형태로 나타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사람들의 말을 우연히 듣고 아이러니의 정신으로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이유는 없이 오직 그 말대로만 행동한다면? 모두가 깜짝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동을 무모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논의하고 나면 곧바로 깨닫게 된다. 그 행동이야말로 정확히 해야만 하는, 바로 그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갑작스러운 열광 뒤에 무관심과 나태가 따라오는 현시대는 희극에 매우 가깝다. 그러나 희극을 이해하는 이들은 안다. 희극이 현시대가 상상하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풍자가 조금이라도 선을 행하고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면, 일관된 윤리적 삶의 관점에 확고히 기반해야 하며, 순간의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본질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료는 질병보다 무한히 나쁘다고 해야 한다. 정말로 희극적인 것은 이 시대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동시에 나름의 곡예법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찰과 사유의 시대가 유머로 도전할 것이 무엇인가? 열정이 없는 이 시대는 모든 감각을 잃었다. 정치와 종교에서의 에로스(eros)와 열정과 성실함의 가치들에 대한 감각을 잃었고, 일상 생활에서의 경건함과 찬탄과 가정생활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그러나 비록 속된 이들이 웃는다 해도 삶은 어떠한 가치도 알지 못하는 재치를 조롱할 뿐이다. 내면성의 풍요로움을 소유하지 못한 채 재치 있는 것은 사치품에 돈을 낭비하면서 필수품은 거부하는 것과 같다. 혹은 속담에서 말하듯 가발을 사기 위해 바지를 파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열정 없는 시대는 어떠한 가치도 갖지 못한다. 모든 것이 실재 없는 관념적 표상들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참되고 합리적이지만 생명력이 없는 언급들과 표현들이 통용된다. 다른 한편 어떠한 영웅도, 어떠한 연인도, 어떠한 사유자도, 어떠한 믿음의 기사도, 어떠한 자랑스러운 사람도, 어떠한 절망에 빠진 사람도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완전하고 개인적으로 경험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지폐의 바스락거림 뒤에 진짜 돈의 쨍그랑 소리를 갈망하듯 오늘날 사람들은 약간의 독창성을 갈망한다. 그런데 재치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재치는 봄의 첫 싹이나 곡식의 첫 새싹보다도 더 자연스럽고 더 놀랍다. 왜냐하면 봄은 정해진 시기에 와도 여전히 봄이지만 계획되고 예정된 재치는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열정적 열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나머지 일이 너무 지나쳐서 재치마저 타락한다고 가정해보라. 재치가 그 정반대인 하찮은 필연으로 변형된다고 가정해보라. 재치는 본래 신성한 우연이다. 예측할 수 없는 신비의 원천에서 나오는 신들의 선물이며, 추가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신호다. 가장 재치 있는 사람조차 감히 "내일 재치가 떠오를 것"이라 장담하지 못하고, 경외하며 "신들이 기뻐하실 때"라고만 말한다. 그런데 이제 재치를 공장에서 제조해내고, 낡은 재치와 새 재치를 사고파는 것이 수익성 있는 거래가 된다면? 재치 있다는 이 시대에 대한 무슨 풍자인가! 결국 돈이 사람들이 욕망할 유일한 것이 될 것이다. 돈은 더욱이 단지 표상적이며 추상일 뿐이다. 오늘날 젊은이는 누군가의 재능도, 예술도, 아름다운 소녀의 사랑도, 명성도 거의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돈만을 부러워한다. "나에게 돈을 달라. 그러면 나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는 방종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후회할 만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책망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상 속에서 죽을 것이다. 만일 돈만 있었더라면 진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테고, 심지어 위대한 무언가를 성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인상 말이다. 지금까지는 구체적 현상들을 관찰했다. 현시대를 혁명의 시대와 비교하기도 했다. 이제 현시대의 변증법적이고 범주적인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한 본질이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나타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관심사는 시대의 본질적 성격이다. 이 성격은 보편적 관점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그 최종 결론은 연역을 통해 '가능성으로부터 현실로'(a posse ad esse)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관찰과 경험을 통해 '현실로부터 가능성으로'(ab esse ad posse) 검증할 수 있다. 물론 성찰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궁극적으로 더 높은 형태의 실존에 도달할 수도 있다. 성찰은 현시대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성찰하는 개인도 결단을 내린 열정적인 사람만큼 선한 의도를 지닐 수 있다. 반대로 열정에 휩쓸린 사람에게도 성찰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변명의 여지는 있다. 행동하지 않기에 끝끝내 자신의 잘못은 드러나지 않을 테지만, 자신이 성찰이라는 핑계에 속아 넘어가고 있음을 교묘히 알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찰의 결과는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악을 피한 것이 진지한 고민 끝에 내린 올바른 결정 때문인지, 아니면 성찰에 지쳐서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를 기력조차 없어진 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성찰의 힘이 커질수록, 지식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고통만 더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개인에게나 세대에게나 성찰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점이다. 성찰은 매우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교묘한 하나의 발견이 문제 전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다. 어느 순간에라도 성찰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할 수 있다. 결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성찰은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 성격이 확고한 사람이라면 행동에 나서는 데 별 노력이 필요 없지만, 성찰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결국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찰이 내세우는 변명일 뿐이다. 성찰의 실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성찰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사유 속에서만 변할 뿐이다. 현시대를 완결된 과거 시대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불공정하다. 현시대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형성되는 중이며 온갖 어려움과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성찰이라는 본성 자체에서 오는 한계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미래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그 불확실성 속에 희망이 있다. 열정적이고 격동적인 시대는 모든 것을 전복하고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성찰적이면서 열정 없는 혁명의 시대는 다르다. 이 시대는 힘을 변증법적 기교로 바꾼다. 모든 것을 그대로 세워두지만 그 의미를 비워낸다. 반란으로 폭발하는 대신 이 시대는 모든 관계의 내적 내용을 성찰적 긴장으로 바꾼다. 이 긴장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삶 전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겉으로는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속임수를 통해 가장 은밀하게(privatissime) 그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스러운 해석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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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도덕성, 성격 그리고 내면성의 상실(376-381쪽) 도덕성은 성격(Character)이다. 성격은 새겨진 것(ἐγχαράττω)이다. 그러나 모래와 바다는 성격을 갖지 못한다. 추상적 지성도 마찬가지다. 성격은 실재하는 내면성이다. 비도덕성도 에너지로서 발휘될 때는 성격이다. 그러나 도덕적이지도 않고 비도덕적이지도 않은 것은 단지 모호할 뿐이다. 성찰이 계속 갉아먹어서 질적 구분들이 약해지면 모호성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 열정의 반란은 원초적이다. 모호성은 밤낮으로 조용히 해체를 진행시킨다. 점진적 궤변(sorites)처럼 말이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약화되는데, 악에 대한 피상적이고 우월하며 이론적인 지식 때문에 약화된다. 사람들은 거만하고도 영리하다. 그들은 안다. 선이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가치도 없으며 어리석음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이제 아무도 선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위대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악에 휩쓸려 끔찍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더 많이 수다를 떤다. 모호성은 엄청나게 자극적이다. 선에 대한 기쁨이나 악에 대한 회개보다 훨씬 더 말을 많이 하게 만든다. 삶의 원천들은 열정이 있을 때만 생명력을 갖는다. 열정은 질적으로 구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원천들이 생명력을 잃는다. 과거에는 하나의 사물과 그 반대 사이에 명확한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가 질적 구분이었고, 이것이 사물들의 내적 관계를 조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모든 내면성이 사라진다. 그 정도에 이르면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무색하게 뭉쳐진 덩어리를 이룰 뿐이다. 부정적 법칙은 이렇다. '반대자들은 서로 없이는 못 산다. 그러나 함께 있을 수도 없다.' 긍정적 법칙은 이렇다. '반대자들은 서로 없어도 되고 함께 있어도 된다.' 다시 말해 반대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관계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한 질(質)은 그 반대 질과 관계하지 않는다. 대신 양자가 서로 마주 서서 관찰할 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긴장 상태가 실제로는 관계의 종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과거에 찬미자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기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위대함을 인정했다. 즉각 자신의 찬사를 표현했다. 그러고는 그 위대함의 오만함과 거만함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관계가 완전히 적대적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찬미자와 찬미의 대상은 이제 두 명의 정중한 동등자처럼 서서 서로를 관찰할 뿐이다. 신하도 더 이상 자유롭게 왕을 영예롭게 하지 않는다. 왕의 야망에 분노하지도 않는다. 신하가 된다는 것은 이제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그것은 제3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신하는 관계 내에서 지위를 갖기를 멈춘다. 그는 왕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단지 관찰자가 되어 문제를 다룬다. 즉 신하와 왕의 관계라는 문제를 말이다. 한동안은 위원회가 계속 만들어진다. 아직 열정을 가지고 자기 역할을 하려는 사람들이 남아있는 한은 말이다. 그러나 결국 시대 전체가 하나의 위원회가 되어버린다. 아버지도 더 이상 분노 속에서 아들을 저주하지 않는다. 모든 부모의 권위를 동원하여 저주하지 않는다. 아들도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는다. 이런 갈등은 진심 어린 용서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관계는 흠잡을 데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기를 멈추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관계 내에서 서로와 관계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마치 놀이하듯 서로를 관찰한다. 서로에게 확고한 헌신을 보여주는 대신 서로의 발언을 기록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조용하고 소박한 과업들을 포기한다. 더 큰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다. 결국 세대 전체가 "대표자들"이 된다. 그런데 그들이 대체 누구를 대표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한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불순종하는 청년은 더 이상 교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관계는 오히려 무관심한 것이다. 그 안에서 교사와 학생은 좋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더 이상 교사를 두려워하거나 단지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 관계는 결코 대담하고 방종한 방식으로 깨지지 않는다. 예절은 지켜진다. 그래서 이런 무해한 경계선상의 연애 유희는 사소하다고밖에 묘사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관계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긴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힘들을 부러지는 지점까지 긴장시키는 긴장이 아니다. 오히려 삶 자체를 소진시키는 긴장이다. 그 열정과 내면성의 불을 소진시킨다. 그 열정과 내면성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의존의 족쇄가 가벼워진다. 지배의 왕관도 가벼워진다. 아이의 순종이 기쁨이 된다. 아버지의 권위도 기쁨이 된다. 신하는 두려움 없이 존경할 수 있고, 위대한 자는 두려움 없이 고양될 수 있다. 스승은 인정받는 중요성을 갖게 되고, 그래서 제자는 배울 기회를 얻는다. 여자의 약함과 남자의 강함이 헌신의 동등한 강함 속에서 결합된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관계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면성 속에서 하나로 결속시키고 조화롭게 만들 힘이 없다. 관계는 자신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표현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치 늘어지듯이, 반쯤 깨어 있는 듯 끊임없이 그렇게 표현한다. 이것을 아주 단순한 예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한때 조부 때부터 있었던 시계를 소유한 가족을 알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계의 기계장치가 고장 났다. 그러나 고장 나서 태엽이 갑자기 풀려버리거나 사슬이 끊어지거나 시계가 타종을 멈추지는 않았다. 반대로 시계는 계속 타종했다. 기묘하게 추상적인 방식으로, 혼란스럽게 타종했다. 정오에 열두 번 치거나 한 시에 한 번 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규칙적인 간격으로 한 번씩 쳤다. 하루 종일 타종했지만 결코 분명한 시간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소진된 긴장 상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무언가가 추상적 연속성을 가지고 표현된다. 이것은 실제 단절을 막는다. 그러나 관계의 표현이라고 묘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는 모호하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관계를 사실로서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바로 관계에서의 이러한 기만적 소강 상태이다. 위험한 점은 이것이 다시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찰은 교활하게 사람들의 힘을 빼앗는다. 반란이 일어나면 힘으로 진압할 수 있다. 명백한 위조품은 처벌하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복잡하게 뒤엉킨 것들은 뿌리 뽑기가 어렵다. 성찰이 은밀하고 모호한 길을 따라 암약한다. 이것을 추적하려면 매우 예민한 귀가 필요하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5장: 시기심과 르상티망(Ressentiment)(381-389쪽) 기성 질서는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질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 모호성이다. 우리의 성찰적이고 열정 없는 시대를 말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왕의 권력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조금씩 순전히 허구적인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면 모두가 기꺼이 그를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무도 저명한 자들의 몰락을 가져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 탁월함이 실제로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면 모두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이와 비슷하게 사람들은 기독교의 용어는 그대로 두려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실질적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고 몰래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강력한 왕을 원하지 않는다. 영웅적 해방자나 종교적 권위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기성 질서가 계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더 이상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찰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태도가 아이러니적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진정한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부정적 시대에 열정을 은폐한 것이다. 마치 긍정적 시대에 영웅이 열정을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아이러니는 희생을 수반한다. 아이러니의 최고 대가인 소크라테스가 죽임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성찰적 긴장은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하나의 원리로 구성한다. 열정적 시대에서 열정이 통합 원리인 것처럼, 매우 성찰적이고 열정 없는 시대에서는 시기심이 부정적 통합 원리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윤리적 비난이 아니다. 성찰의 본질이 시기심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기심은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개인 안에서 이기적으로 작용하고, 그를 둘러싼 사회도 이기적으로 만들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개인 안의 시기심은 그가 열정적으로 결단하지 못하게 막는다. 한순간 어떤 개인이 성찰의 속박을 벗어나려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즉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성찰이 그를 제지한다. 시기심이 사람의 의지와 힘을 가둔다. 먼저 개인은 자기 자신의 성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그는 광대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성찰이 만든 감옥이다. 자신의 성찰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성찰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이 두 번째 감옥에서 탈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종교의 내면성을 통하는 것이다. 개인이 성찰 감옥의 허위를 아무리 명확하게 깨닫는다 해도, 깨닫는 것만으로는 탈출할 수 없다. 종교를 통해서만 탈출할 수 있다. 성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막는다. 개인과 시대 모두가 폭군이나 사제나 귀족이나 비밀경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찰 자체에 의해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말이다. 성찰은 사람들에게 아첨하고, 오만한 생각을 불어넣는다. 성찰의 가능성이 단순한 결단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생각을 심어넣는 거시다. 시기심은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리하여 그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탐욕스러운 어머니가 자식을 망치듯이 말이다. 그 안의 시기심이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것을 막는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기심도 마찬가지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시기함으로써 그 속에 참여한다. 이 시기심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더 나아가면 시기심은 도덕적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원한이 된다. 밀폐된 공간의 공기가 유독해지듯이 말이다. 성찰이 사람들을 가두고, 어떤 행동이나 사건이 그 안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환기시켜주지 못하면 죄책감을 동반한 원한이 생겨난다. 성찰 속의 긴장 상태는 보다 더 높은 권능들을 모두 무력화한다. 그러면 저급하고 비열한 것들이 전면에 나온다. 그 철면피함 자체가 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그럴싸한 힘일 따름이다. 저급하고 비열한 것들은 그 저급함과 비열함 뒤에 숨어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원한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인간이 영구적으로 높은 곳에 머무를 수 없고, 계속해서 어떤 것이든 찬미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 진실이다. 인간 본성은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가장 열정적인 시대에도 사람들은 항상 자기보다 우월한 자들에 대해 시기어린 농담을 하기 좋아했다. 어떤 의미로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행동이었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정당하다고까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위대한 자들을 비웃은 뒤에 다시 그들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에서만 정당하다고 할 수 있으며, 만일 존경이 깔려 있지 않았다면 시기와 질투라는 놀이는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원한은 열정적 시대에서 자신의 배출구를 찾은 것이다. 설령 시대가 덜 열정적일지라도 사람들이 자신의 원한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 표현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나름대로 의미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원한은 비록 위험하지만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 원한이 취한 형태는 도편추방(ostracism)이었다. 이는 탁월한 자들의 뛰어난 자질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대중의 자기방어적 노력이었다. 뛰어난 사람은 추방되었지만 모두가 그 관계가 얼마나 변증법적인지 이해했다. 도편추방은 탁월함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정신으로 그 시대를 재현한다고 생각해보자. 완전히 하찮은 사람이 도편추방된다면? 그가 독재자가 되는 것보다 더 아이러니적일 것이다. 도편추방은 위대함의 부정적 표시이기 때문이다. 더욱 좋은 이야기는 이렇다. 사람들이 추방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 없이는 더 이상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망명지에서는 완전한 신비가 될 것이다. 망명지 사람들은 그에게서 어떤 주목할 만한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기사』(The Knights)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타락의 최종 상태를 그린다. 저속한 군중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말이다.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의 배설물을 숭배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찌꺼기를 숭배한다. 그들의 대표자들 속에서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이것은 군주제에서 왕관을 경매에 부치는 것만큼 심한 타락이다. 그러나 원한이 여전히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도편추방은 탁월함의 부정적 표시이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에게 투표했던 한 사람을 보라. 그는 말했다. "아리스티데스가 유일하게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추방에 투표했다고. 그는 아리스티데스의 탁월함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인정했다. 자신과 탁월함의 관계가 찬미의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시기심의 불행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탁월함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성찰이 점점 더 우위를 차지하고 사람들이 나태해지면 원한은 더욱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원한이 더 이상 명확한 형태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형태가 있어야 원한은 자기가 무엇인지 의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명확성이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비겁해지고 동요한다. 같은 일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처음에는 그저 농담이라고 한다.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모욕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안 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한다. 혹은 그저 재밌자고 하는 말이었다고 눙친다. 그것도 안 통하면 주의깊게 살펴봐야 하는 도덕적 풍자였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그마저 실패하면 이렇게 말한다. 사실 "애초부터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라고. 원한은 이제 무성격(want of character)의 원리가 된다. 무성격이란 무엇인가?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교활하게 지위를 차지하려 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인정함으로써 말이다. 이런 무성격에서 생기는 원한은 진정한 탁월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탁월함이 실제로 탁월하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것은 탁월함을 부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시기심을 자각하지도 못한다(도편추방의 경우처럼 말이다). 대신 탁월함을 끌어내리려 한다. 탁월함을 깎아내려 실제로 탁월하지 않게 만들려 한다. 원한은 기존의 모든 탁월함을 공격할 뿐 아니라 장차 나타날 탁월함의 싹마저 자른다. 원한이 자신의 지배력을 확립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평준화다. 열정적 시대가 새로운 것을 세우고 오래된 것을 무너뜨리며 앞으로 돌진하는 동안, 성찰적이고 열정 없는 시대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모든 행동을 방해하고 억누른다. 그것은 평준화한다. 평준화는 조용하게, 수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진행된다. 소란도 없고 격변도 없다. 사람들은 때때로 절망한다. 순간적 열정이 폭발한다. '불행이라도 일어났으면!'하고 갈망한다. 스스로 삶에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열정 뒤에 오는 무관심은 어떤 교란으로도 깨어나지 않는다. 토지를 평평하게 만드는 기술자처럼 그저 계속 평평하게 만들 뿐이다. 반란은 어떠한가. 가장 격렬할 때 반란은 화산 폭발과 같으며, 모든 소리를 덮는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이 최대에 이르면 죽음 같은 침묵이 찾아든다. 그 침묵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심장 박동을 들을 따름이다. 아무것도 그 침묵을 깨지 못한다. 모든 것이 그 속으로 삼켜진다. 사람들은 저항할 힘이 없다. 반란에는 지도자가 있다. 한 사람이 선두에 선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에는 지도자가 없다. 아무도 혼자 선두에 설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선두에 선다면 그는 지도자가 된다. 그러면 그는 평준화되지 않는데 이는 모순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작은 영역에서 평준화에 협력한다. 그러나 평준화 자체는 추상적 권력이다. 평준화 과정은 개인에 대한 추상의 승리이다. 고대에는 운명이 개인을 지배했다. 현대에는 평준화가 운명의 역할을 한다. 단, 평준화는 성찰을 통해 작용한며, 이것이 현대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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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평준화 과정과 종교적 개인주의(389-396쪽) 고대의 변증법은 지도력을 지향했다. (위대한 개인이 있고 대중이 있었다. 자유인이 있고 노예가 있었다.) 기독교 세계의 변증법은 대표를 지향했다. 다수가 자신의 대표자를 본다. '저 사람이 우리를 대표한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대표자를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지 의식하는 것이다. 현시대의 변증법은 평등을 지향한다. 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평준화이다. 비록 잘못된 귀결이지만 말이다. 즉 평준화란 모든 개인이 서로를 부정적으로 연결하여 부정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평준화 과정의 의미는 명백하다. '세대'라는 범주가 '개성'이라는 범주보다 우위에 선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개인들의 총수가 있었다. 그들은 뛰어난 한 개인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했다. 한 영웅이 만 명을 대표했다. 현시대는 가치의 표준이 바뀌었다. 이제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개인이 된다. 대략 열 명이 모이면 한 개인의 가치를 갖는다. 사람들은 중요해지려면 숫자만 모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고대에는 대중 속의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뛰어난 개인이 그들 모두를 의미했다. 현시대는 수학적 평등을 지향한다. 모든 계급에서 몇 사람이 모이면 한 개인이 된다. 과거에는 뛰어난 개인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었다. 대중 속의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모두가 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한 개인을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일관되게 자신을 더한다. '함께 모인다'고 정중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숫자를 더한다'는 뜻이다. 가장 사소한 목적을 위해서도 그렇게 한다. 잠깐 스치는 변덕을 실행하기 위해 몇 사람이 모인다. 그러면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감히 그렇게 한다. 매우 재능 있는 사람조차 성찰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어떤 사소한 문제에서 하나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의 무한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다만 몇몇 사람들이 연합한다. 죽음을 맞이할 용기를 갖는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것이 각 사람이 개별적으로 용기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죽음보다 더한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혼자 무언가를 감행하려 할 때 성찰이 내리는 판단과 항의를 두려워한다. 개인은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예술이나 학문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면에서 추상에 속한다는 것을 의식한다. 성찰이 그를 그 추상에 복종시킨다. 농노가 영지에 속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여든다. 심지어 한 명 이상이 되는 것이 절대적 모순인 경우에도 모여든다. 연합의 긍정적 원리는 요즘 탐욕스럽고 사기를 꺾는 원리가 되었다. 성찰의 노예제 속에서 미덕들마저 빛나는 악덕(vitia splendida)으로 만드는 원리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유는 하나뿐이다. 영원한 책임이 무시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각 개인이 고유한 존재로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이 무시되었다. 그 지점에서 타락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동료들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래서 성찰은 개인을 평생 붙잡는다. 이 위기의 시작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지 않고 성찰적 관계 속에 삼켜진다. 평준화 과정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다. 추상적 권력의 손에 있는 성찰의 작업이다. 따라서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계산할 수 있다. 마치 힘의 평행사변형에서 대각선을 계산하듯이 말이다. 평준화하는 개인은 자신도 그 과정에 삼켜지며, 거듭 이런 일이 반복된다. 평준화하는 개인은 이기적으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중 전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고. 왜냐하면 집단이 열정에 휩싸일 때는 개인들 각자가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힘이 생겨난다. 이것은 집단적 잉여다. 평준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잉여가 생겨난다. 평준화는 하나의 악마를 소환한다. 어떤 개인도 그 악마를 통제할 수 없다. 평준화라는 추상 자체가 개인에게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쾌감을 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을 파멸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하고 있다. 열정은 재앙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평준화는 바로 그 자체로(eo ipso) 개인의 파괴이다. 어떤 시대도, 따라서 현시대도 이 과정의 회의주의를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멈추려 하자마자 평준화 과정의 법칙이 다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지연될 수 있다. 개인이 종교적 용기를 얻는 것이다. 자신의 개별적 종교적 고립에서 나오는 종교적 용기 말이다. 나는 한번 거리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목격했다. 세 사람이 한 사람을 가장 수치스럽게 공격했다. 군중은 서서 분개하며 지켜보았다. 여기저기서 불만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경꾼들 중 몇몇이 세 공격자 중 한 명에게 달려들어 넘어뜨리고 때렸다. 복수자들은 공격자들과 똑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여러 명이 한 명을 공격한 것이다. 여기서 내 개인적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나는 복수자들 중 한 명에게 갔다. 논리적으로 그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와 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악당은 세 명이 달려들어서 혼내줌이 마땅하다.' 싸움의 시작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황이 더욱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들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지금 혼자 있는 사람)을 두고, '저놈은 셋이서 무리지어 하나를 때린 놈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그런데 정작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실제로는 여럿이 그 한 명을 때리고 있었다. 첫째로 이것은 모순 때문에 유머러스하다. 마치 경찰이 거리에 혼자 서 있는 사람에게 '순순히 흩어지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둘째로 이것은 자기모순이라는 유머 그 자체다. 자신이 바로 비난받는 그 짓을 하면서도 그 짓을 비난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이런 회의주의를 멈추려는 시도는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도리어 나를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일 개인도 평준화의 추상적 과정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뛰어난 개인을 뜻한다. 즉, 지도자로서 대중을 이끄는 개인, 고대의 변증법적 범주인 '운명'에 따라 이해되는 영웅적 개인을 말한다. 왜 막을 수 없는가? 평준화는 부정적으로 더 높은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사도의 시대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나 위원회도 그 추상적 권력을 막을 수 없다. 단순히 위원회, 연합 자체가 평준화 과정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들의 개성조차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평준화는 구체적 차이를 깡그리 제거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의미에서 순수하고 혼합되지 않은 인류만을 남긴다. 평준화의 추상적 과정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인간 종족의 자기연소는 무역풍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소비할 것이다. 무엇이 이 자기연소를 일으키는가? 마찰이다. 개인이 종교에 의해 구별된 존재로서 살기를 멈출 때 생기는 마찰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평준화 과정을 통해 각 개인은 자신을 위한 종교적 교육을 다시 한번 받을 수 있다. 평준화 과정의 엄격한 시험(examen rigorosum)이 그를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태도로 도와줄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젊은이들을 위해서다. 그들의 인격이 아무리 강하게 탁월한 것에 매달린다 해도, 그들이 탁월하다고 존경하는 것에 매달린다 해도, 처음부터 평준화 과정이 악이라는 것을 깨닫는 젊은이들 말이다. 이기적 개인에서도 악이고 이기적 세대에서도 악이라는 것을 깨닫는 젊은이들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어떻게 될 수 있는가를 깨닫는 젊은이들, 만약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이 가장 높은 삶을 위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젊은이들, 그들에게 평준화의 시대에 사는 것은 실제로 교육이 될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그들을 종교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다. 동시에 미학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교육할 것이다. 희극의 극치는 바로 이때 생겨난다. 개인이 '순수 인류'라는 무한한 추상 아래 직접 놓일 때 말이다. 중간 완충 장치 없이,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과거에는 다양한 조직과 구체적 특수성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인간된 상황의 유머를 완화하고 비애를 강화했다. 그런데 평준화 과정이 그 모든 중간 매개물들을 파괴했다. 이제 개인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추상 앞에 홀로 선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희극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한 가지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바로, 인간의 유일한 구원은 각 개인이 종교의 실재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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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평준화의 완성 그리고 신의 품으로 도약 (396-400쪽)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열정에 불을 지필 것이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오류를 통해서 개인이 가장 높은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용기 있게 그것을 추구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은 계속되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한다. 마치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마 18:7)라고 했듯이, 평준화는 불가피하게 와야 한다. 비록 그것을 가져오는 자들에게는 화가 미칠진저. 종종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개혁은 각 사람이 자신을 개혁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그러나 현실은 달리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개혁은 영웅을 낳았기 때문이다. 영웅은 자신의 지위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웅과 직접 연결됨으로써 그가 그토록 비싸게 치른 것을 헐값에, 실로 염가에 얻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가장 높은 것, 그것만은 살 수 없다. 반대로 평준화의 추상적 원리는 살을 에일듯한 돌풍처럼 어떠한 개인과도 개인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모두와 똑같이 추상적 관계를 가질 따름이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통받거나 그들을 돕는 영웅이 없다. 모두의 과업 감독은 평준화 과정이다. 그것이 그들의 교육을 맡는다. 그리고 평준화로부터 가장 많이 배우고 스스로 가장 위대하게 되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나 영웅이 되지 않는다(뛰어난 자나 영웅은 그 자체로 평준화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은 끝까지 철저하게 일관되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걸출함을 실천하거나 영웅이 되려고 하지 않고, 외려 그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는 평준화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사람일 따름이고, 그 자신 외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다. 완전히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종교의 관념이 바로 이러하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 아래 평등주의적 질서는 엄격하고, 겉보기에 이득은 매우 적다. 물론 겉보기에 말이다. 개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종교의 실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제로서 자신의 청중이 되고, 저자로서 자신의 독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가장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 이것이 가장 높은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이 이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는 성찰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한순간 착각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평준화에 주도적으로 가담하고 있다는 환상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평준화 과정 속으로 침몰할 것이다. 홀거 단스케(Holger Danske)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부르는 것은 소용없다. 그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사람들이 그런 영웅들을 다시 갈망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나태함이 때문이다. 세속적 조급함 때문이다. 가장 높은 것을 값비싸게 직접 사기보다는 무언가를 헐값에 중고로 사려는 조급함 말이다. 또 다른 위원회 따위를 설립하는 것은 무용하며 오히려 해롭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평준화에 대항하려고 위원회를 만들어도, 사실 모든 위원회 위에 평준화 과정이라는 더 높은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시안적인 위원회의 성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한다. 과거에 개성의 원리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형태로 나타났다. 한 세대는 뛰어나고 탁월한 개인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 그 개인 주위로 종속적 개성들이 집단을 이룬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 속에서 개성의 원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현시대가 가진 추상성과 평등을 이용하는 것이다. 평준화 과정을 통해 각 개인을 종교적으로 발전시켜 진정한 사람으로 만든다. 평준화 과정은 일시적인 것들에는 강력하지만 영원한 것들에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성찰은 사람들을 가두는 덫이다. 그러나 열정의 '도약'이 일어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성찰은 이제 사람을 영원으로 끌어당기는 올가미가 된다. 성찰은 존재하는 가장 강경한 채권자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성찰은 교활하게 움직여왔으며, 가능한 모든 삶의 관점들을 장악해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고 영원한 삶의 관점만은 장악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찰은 눈부신 광채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이끌고, 과거의 모든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사기를 꺾는다. 그러나 깊은 곳으로 도약함으로써 사람은 스스로 돕는 법을 배우고, 자기 자신만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비록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오만하고 자만스럽다고, 또한 사람들을 돕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교활하게 기만하지 않으려는 것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각자 홀로 서야 할 운명을 바로보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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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공중(公中), 평준화의 유령(400-408쪽) 내가 여기서 제시한 것을 두고 누군가 불평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모두에게 이미 알려져 있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불평할테면 그렇게 하라.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탁월하다는 인정을 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나의 의견을 알게 되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경우만 예외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의견이 나로부터 빼앗겨서 어떤 음험한 집단이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반대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경향은 계속 평준화를 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 자체가 모두 평준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변화들은 어느 것도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았고, 각각 어느 정도 구체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한 위대한 인물이 다른 위대한 인물을 공격하여 둘 다 약화될 때, 평준화 과정이 진행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무력화될 때, 혹은 그 자체로는 약한 사람들이 결사하여 탁월한 자보다 더 강해질 때도 마찬가지다. 평준화는 또한 특정한 계급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직자, 부르주아, 농민, 혹은 민중 자체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시작일 따름이다. 추상적 권력이 개별성이라는 구체적 영역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첫 걸음인 것이다. 모든 것을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면 먼저 하나의 유령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의 정신, 괴물 같은 추상,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 신기루 — 그 유령이 바로 공중(公衆, the public)이다. 오직 열정 없는 성찰의 시대에만 이러한 유령이 횡행할 수 있다. 언론(the Press)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언론 자체가 추상이 되기 때문이다. 열정과 소요와 열광의 시대에는 공중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무익한 이념을 실현하려 하고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고 파괴하려 할 때조차도 그렇다. 그런 시대에는 당파들이 있다. 당파들은 구체적이며 사람들은 실제로 모여서 행동한다. 그러한 시대에 언론 역시 당파에 따라 분열되어 있으므로 구체적 성격을 띤다. 반면에 열정 없이 앉아서 성찰만 하는 시대는 공중이라는 유령을 키워낸다. 마치 앉아서 일하는 전문인들이 자기 앞에 나타나는 환상적 착각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듯이 말이다. 공중이야말로 진정한 '평준화의 주인'(Levelling Master)이다. 실제로 '평준화를 수행하는 자'(leveller)가 아니다. 왜냐하면 평준화가 대략적으로나마 성취될 때는 항상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공중은 괴물 같은 무(無)이기 때문이다. 공중은 고대에는 있을 수 없었던 개념이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민중(the people)이 전체로서(en masse, in corpore) 발생하는 어떤 상황에든 참여했고, 개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졌으며, 더욱이 개인은 직접 그 자리에 현존하여 즉각 그의 결정에 대한 갈채나 비난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결속하려는 의지가 약해져서 구체적인 실재가 생명력을 잃는 바로 그때, '공중'이라는 추상을 창조한다. 공중은 비실재적 개인들로 구성되는데, 이 개인들은 결코 통합되지 않았고 통합될 수도 없으며, 실제 상황이나 조직 속에서 통합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이 전체로서 결합되어 있다고 여긴다. 공중은 모든 민중들을 합친 것보다 더 수가 많은 무리이지만, 결코 검열될 수 없는 집단이며, 심지어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성찰적이고 열정이 없어서 모든 구체적인 것을 파괴할 때, 공중은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개인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내동댕이 치는 방식을 보여준다. 개인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실재 시간 속의 실재 순간이다. 실재 사람들과 함께 동시에 일어나는 실재 상황이며, 그들 각자가 진짜로 무언가인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공중의 존재는 상황도 동시성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언론의 개별 독자는 공중이 아니며, 점차 많은 개인들이, 심지어 그들 모두가 언론지를 읽는다 해도 동시성은 결여되어 있다. 공중을 한데 모으는 데 수년이 걸릴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중은 거기 없을 것이다. 개인들은 공중을 형성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추상은 개인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밀쳐낸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순간에 아무 의견도 없는 사람은 다수의 의견을, 혹은 논쟁적이라면 소수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다수와 소수 모두 실재 사람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그들을 따름으로써 도움을 받는다. 반면에 공중은 추상이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의 의견을 채택한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위험에 노출될 것이며, 그 의견이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자신과 함께 잘못된 길로 인도될 것임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중과 같은 의견을 채택하는 것은 기만적인 위안이다. 왜냐하면 공중은 오직 추상적으로(in abstracto)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다수도 공중만큼 확신에 차서 옳고 승리할 것이라고 믿은 적이 없지만, 그것은 개인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중은 모든 개인적 접촉을 금지하는 유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오늘 공중의 의견을 채택하고 내일 야유를 받는다면, 그는 공중에 의해 야유를 받는 것이다. 한 세대나, 한 민족이나, 민중의 집회나, 모임이나, 한 개인은 책임을 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만약 그들이 변덕스럽고 불성실하다면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공중은 공중으로 남는다. 한 민족, 집회나 한 사람이 너무 크게 변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들은 이제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반면에 공중은 정반대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공중임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것이 개인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이 추상이, 이 추상적 훈련이 개인을 형성하는 것이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개인이 이미 자신의 내적 삶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어야 하고, 둘째, 그가 그 과정에서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 공중은 개인에게서 모든 외적 지지대를 제거함으로써, 그가 최고의 종교적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신과의 관계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도록 만든다. 공중과 합의를 추구하는 대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공중은 삶에서 상대적이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에 개인은 오직 절대적인 것, 즉 신 앞에 선 자기 자신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현대 세계와 고대 사이의 궁극적 차이다. 고대에서는 '전체'가 구체적이었다. 구체적인 '전체'는 개인을 지탱했고 교육했다(비록 그를 궁극적으로 완성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현대에서 '전체'는 추상이다. 추상으로서의 '전체'는 개인을 지탱할 수 없고, 오히려 추상적 평등에 의해 그를 밀쳐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밀쳐냄이 — 만약 그가 그 과정에서 무너지지 않는다면 — 개인을 궁극적으로 완성되도록 돕는다. 여기서 고대와 현대의 대비가 분명해진다. 고대인들은 삶에 대한 권태로움에 지독하게 시달렸다. 위대한 영웅이 있었지만 자신은 절대 그렇게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르며, 바로 여기에 현대의 히망이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종교적으로 말해서 '모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것'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위대함은 소수의 특권이 아니라 모두의 가능성이다.] 공중은 민족이 아니다. 세대가 아니며, 공동체도 사회도 아니다. 특정한 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구체적인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중에 속한 사람은 진정한 헌신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루 중 몇 시간 동안은 그가 공중에 속할 수도 있는데, 그 순간에 그는 아무도 아니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실제로 누군가일 때, 그는 공중의 일부를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들로,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의 개인들로 구성된 공중은 일종의 거대한 무언가이며, 추상적이고 황량한 공허이고, 모든 것이자 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 위에서 누구나 공중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공중은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로마 교회가 이교도 지역(in partibus infidelium)에 주교들을 임명하여 환상적으로 그 경계를 확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거리에서 싸구려 구경거리를 파는 술취한 수병조차도, 변증법적으로는 위대한 사람과 똑같이 공중을 주장할 권리를 가진다.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보잘것없는 1 뒤에 '공중'이라는 수많은 0을 갖다 붙여서 마치 큰 숫자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공중은 모든 것이자 무이며, 모든 권력 중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공중의 이름으로 한 민족 전체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공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단 한 사람의 실재하는 인간보다 사소할 것이다. '공중'이라는 개념은 성찰의 시대가 부리는 교묘한 속임수로 만들어진다. 이 속임수가 개인을 유혹한다. 개인은 이 괴물 같은 '공중'을 자기가 대변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고, 그러면 실제 사람들과 실제 집단들이 초라해 보이게 된다. 공중은 이해의 시대가 만들어낸 동화이다. 상상 속에서 개인을 그의 민중 위의 왕보다 위대한 무언가로 만든다. 그러나 공중은 또한 무시무시한 추상이기도 하다. 개인은 이를 통해 종교적으로 완성될 수도 있고, 그 과정에서 침몰해버릴 수도 있다. 언론은 추상이다(왜냐하면 신문은 민족의 구체적 부분이 아니며 오직 추상적 의미에서만 개인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시대의 열정 없고 성찰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그 추상적 유령을 만들어낸다. 공중이 바로 그것이며, 공중은 다시 실제로는 평준화의 권력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을 중요하다. 물론 언론이 평준화를 통해 — 부정적 방식으로 — 개인을 종교적 완성으로 몰아간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도 중요성을 지닌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9장: 공중의 개, 평준화의 실제 작동(408-413쪽) 어느 시대든 이념이 적을수록 그 시대는 더욱 나른해지며, 순간적 열정이 폭발한 뒤에는 무기력함만 남는다. 만약 언론이 점점 더 약해지는 것을 상상해본다면(어떤 사건이나 사상도 시대를 사로잡지 못하기 때문에) 평준화 과정은 더욱 쉽게 해로운 쾌락으로 변질된다. 감각적 도취가 순간적으로 불타올랐다가 사그라들면서, 악을 더욱 악화시키고 구원의 조건을 더욱 어렵게 만들며 쇠퇴를 더욱 확실하게 만든다. 독재정치가 가져온 도덕적 타락과 혁명 시기의 부패에 대해서는 많은 묘사가 있었다. 하지만 열정 없는 시대의 부패 역시 그만큼 해를 끼친다. 비록 그 모호성 때문에 덜 명백하게 드러날 뿐이지만 말이다. 다음을 고려해보는 것도 흥미롭지 않을까 싶다. 점점 더 많은 개인들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무기력함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를, 즉 공중이 되기를 열망할 것이다. 공중은 모든 참여자가 제3자(구경꾼)가 됨으로써 가장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추상적 전체를 형성한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 무기력한 대중, 이 관람객들은 기분 전환을 찾고 있으며, 곧 누군가가 하는 모든 일이 자기들(공중)에게 가십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행해진다는 생각에 빠져든다. 이 무기력한 대중은 다리를 꼬고 앉아 우월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일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누구든, 왕이든 공무원이든 학교 교사든 더 나은 부류의 언론인이든 시인이든 예술가든, 공중을 끌고 가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반면 공중은 자신이 [완고하고 깐깐한] 말(馬)이라도 된 양 우월감에 젖어 있다. 만약 내가 공중을 특정한 한 사람으로 상상해본다면 (비록 일부 더 나은 개인들이 순간적으로 공중에 속하긴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어서, 최고의 종교적 태도를 얻지 못했다 해도, 그것이 그들을 붙들고 있다), 나는 아마도 로마 황제들 중 한 명을 떠올릴 것이다. 잘 먹고 살쪄서 덩치가 큰 인물, 권태로움에 시달리다가 오직 웃음이라는 감각적 도취만을 찾는 사람을 말이다. 재치라는 것은 신의 선물이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육체적인 쾌락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분 전환을 위해 그는 배회하는데, 악하기보다는 무기력하지만 지배하려는 부정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 로마의 역사를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안다. 카이사르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시도할 수 있었는지 말이다. 같은 방식으로 공중도 자신을 즐겁게 해줄 개를 기른다. 그 개는 곧 문학계다.(키에르케고르는 여기서 자신을 조롱한 풍자 신문 ⟪The Corsair⟫를 염두에 두고 있다⏤옮긴이) 만약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어쩌면 심지어 위대한 사람이 있다면, 개가 그에게 풀려진다. 그러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 개는 그를 향해 달려들어 코트 자락을 물고 뜯으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버릇없는 친밀함을 보인다. 공중이 지루해해서 그만하라고 말할 때까지 말이다. 이것이 공중이 평준화하는 방식의 한 예다.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들, 힘에서 우월한 사람들이 학대당한다. 그리고 개는 여전히 개로 남는다. 공중조차 경멸하는 개로. 따라서 평준화는 제3자에 의해 이루어진다. 존재하지 않는 공중이 제3자의 도움을 받아 평준화를 한다. 그 제3자는 그 하찮음으로 인해 무보다 못한 존재로, 이미 평준화된 것 이상이다. 그래서 공중은 뉘우침이 없다. 왜냐하면 결국 행동한 것은 공중이 아니라 개였기 때문이다. 마치 아이들에게 누가 그랬냐고 물으면 "고양이가 그랬어요"라고 책임을 떠넘기는 것처럼 말이다. 공중은 뉘우침이 없는데, 사실 그들은 누구도 깎아내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약간의 오락을 원했을 뿐이다. 만약 평준화를 수행하는 도구가 대단히 활력 넘치고 눈에 띄었다면 오히려 무기력한 공중은 자신들의 계획에 실패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도구 자체가 너무 두드러져서 공중이 뒤에 숨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탁월한 사람들이 하찮은 존재에 의해 억눌리고, 그 하찮은 존재는 그 자체로 이미 하찮기에 누구도 진정으로 어떤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공중은 뉘우침이 없다. 왜냐하면 그 개를 소유한 것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신문을 구독할 뿐이다. 그들은 개를 누구에게도 직접 풀어놓지 않았고, 개를 불러들이지도 않았다. 만약 누군가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 개는 내 것이 아니야, 주인이 없어." 그리고 만약 그 개가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 성질 나쁜 개가 처분된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모두가 그게 죽기를 원했어. 우리 구독자들도 그랬다니까." 어쩌면 누군가는 이런 경우를 살펴보면서, 공중의 손에 고통받은 탁월한 개인에게 주목하고는, 그런 시련이 큰 불행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의견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정말로 최고의 것에 도달하기 위한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은 오히려 그런 불행을 겪음으로써 혜택을 받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될지라도, 오히려 그런 시련을 바라야 한다. 정말로 끔찍한 것은 낭비되거나 쉽게 낭비될 수 있는 모든 삶들에 대한 생각이다. 나는 길을 잃은 사람들이나 적어도 완전히 잘못된 길로 인도된 사람들은 언급하지 않겠다. 돈을 위해 개 역할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무력하고 생각 없고 감각적이며, 우월하고 게으른 삶을 살면서, 이 무의미한 비웃음 외에는 존재에 대한 어떤 더 깊은 인상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나쁜 사람들은 더 큰 유혹에 빠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어리석음 속에서 공격받는 사람을 동정함으로써 스스로를 중요하다고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런 위치에서는 공격받는 사람이 항상 더 강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경우 끔찍하고 아이러니한 진실이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 이것이 평준화 과정의 최저점이다. 평준화는 항상 가장 낮은 수준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사람을 그 아래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도 일종의 평준화처럼 보일 수 있다. 모든 사람 앞에 하나의 공통된 기준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이 제시하는 공통 기준은 근본적으로 다르며, 그것은 최저가 아니라 최고다. 모든 사람이 종교적 의미에서 진정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10장: 모호성, 성찰하는 시대의 일상(413- 지금까지 나는 현시대를 변증법적으로 분석해왔다. 범주들과 그 특성들, 그리고 그 결과들을 다루었다. 이것들이 실제로 현재 존재하는지 여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이제 나는 그 변증법적 분석을 떠나 일상생활 속에서 현시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살펴보려 한다. 여기서 어두운 면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찰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매우 성찰적인 시대에도 밝은 면이 있다. 성찰이 깊어질수록 즉각적 열정보다 더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열정이 개입하여 성찰의 힘들을 모아 결단으로 이끌 때, 그리고 성찰이 평균적으로 행동 능력을 증대시킬 때, 종교가 들어와 그 증대된 행동 능력을 지휘한다. 성찰은 악이 아니다. 그러나 성찰 상태와 그것이 초래하는 교착 상태는 다르다. 행동 능력을 행동으로부터의 도피 수단으로 바꾸어버림으로써 성찰은 차츰 부패하고 위험해지며, 종내에는 퇴행하게 된다. 현시대는 본질적으로 이해의 시대이며 열정이 결여되어 있다. 따라서 [A이면서 A가 아닐 수 없다는] 모순율(矛盾律)을 폐지했다. 열정적 시대와 비교할 때, 열정 없는 시대는 강렬함을 잃은 대신 폭넓음(scope)을 얻었다. 그러나 이 폭넓음은 더 높은 형태로 나아가기 위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만일 확장된 영역만큼 강렬함이 덩달아 커져서 그 모든 영역을 아우른다면 말이다. 실존의 관점에서 말하면, 모순율을 폐지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열정이 힘을 발휘하여 차이를 만들고 개인을 완전히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게 만들었다. 그 창조적 전능함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성찰적 이해가 표방하는 '확장된 영역'으로 변형되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모든 가능한 것을 알고 모든 가능한 것이 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과 모순된다. 즉, '아무것도 아닌'(無) 존재가 된다. 모순율은 개인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도록 강화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아름답게 말한 숫자 3처럼 그를 일관되게 만든다. 소크라테스는 말했다. "숫자 3은, 4가 되거나 더 큰 수가 되느니 차라리 무슨 일이든 견딜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개인도 자기 자신과 모순되어 이것저것이 되느니 차라리 고통받고 자기 자신에게 진실하려 한다. 수다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사이의 본질적 구분을 없애버린 결과다. 본질적으로 침묵할 줄 아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말할 수 있고, 본질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침묵은 내면성의 본질이며 내적 삶의 본질이다. 단순한 잡담은 진정한 대화를 앞질러가며, 아직 사유 과정에 있는 것을 표현하면 행동을 약화시킨다. 그러나 진정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은 본질적으로 침묵할 줄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리고 언제 말하고 언제 침묵해야 할지 안다. 단지 폭넓음만 따지면 수다가 승리한다. 수다는 모든 것과 아무것에 대해 끊임없이 지껄인다. 사람들의 주의가 더 이상 내면으로 향하지 않을 때,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내적 종교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타인과 외부 사물로 향할 때, 그곳에서 관계가 지적이며 만족을 추구할 때, 중요한 일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서 결정적 사건이 삶의 실타래를 하나로 묶어주지 못할 때, 그때가 바로 수다의 시간이다. 열정적 시대에는 큰 사건들이 사람들에게 말할 거리를 준다. 사건과 말할 거리는 서로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반면 수다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말할 거리가 풍부하다. 그리고 사건이 끝나고 침묵이 뒤따를 때, 여전히 기억하고 침묵 속에서 생각할 무언가가 있다. 그러나 수다는 그 공허함을 드러내는 침묵을 두려워한다. 예술적 생산을 지배하는 법칙은 더 작은 규모로 일상생활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 진정한 경험을 하는 모든 사람은 동시에 그 모든 가능성들을 이상적 의미에서 경험한다. 반대 가능성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미학적으로 이러한 가능성들은 그의 합법적 소유물이다. 그러나 그의 사적이고 개인적인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의 발언과 그의 작품 창작 둘 다 그의 침묵 위에 놓여 있다. 그의 발언과 창작이 이상적으로 완벽할수록 그의 침묵도 그만큼 깊어진다. 그 침묵이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상(Ideal)이란 질적으로 반대되는 가능성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가 자신의 사적 경험을 매춘시키는 즉시, 그는 더 이상 근본적으로 '창작한다'라고 칭해질 수 없다. 그의 시작에는 파국이 내재돼 있으며, 그가 첫 입을 떼는 순간부터 이미 이상적 의미에서의 절제를 거스르고 죄를 짓는 셈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유형의 예술적 생산은 미학적으로 말해도 일종의 사적 잡담이다. 이는 누구든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반대편에 의해 균형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상성(理想性)이란 반대편들의 균형이다. 예를 들어 고통 때문에 글을 쓰게 된 사람이 진정 이상적 영역으로 진입했다면, 그는 자신이 경험한 행복과 고통을 똑같은 애정으로 재현한다. 그가 이러한 이상에 도달하는 조건은 침묵이다. 자신의 진정한 인격마저 차단하는 침묵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야기의 배경을 아프리카로 바꾸는 것 같은 모든 예방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가 어느 한쪽만 편파적으로 그려낸다는 사실이 독자들에게 은밀히 알려진다. 작가는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사적 인격을 가져야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성소'(Holy of Holies)여야만 한다. 그리고 집의 입구가 교차한 총검으로 막혀 있듯이, 한 사람의 인격으로의 접근은 이상적 평형 속에서 질적으로 반대되는 것들이 변증법적으로 교차함으로써 가로막혀 있다. 예술가에게 참인 이 원리는 일상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위에서 예술가의 경우를 상세히 다룬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침묵 속에서 성찰하는 능력은 모든 교양 있는 사회적 교제의 필수 조건이다. 사람이 이상과 이념을 더 철저히 침묵 속에서 파악할수록, 그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재현하는 데 더 유능해진다. 그리하여 그가 특정 사물들에 대해서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과 멀어질수록 그의 발언은 피상적으로 되며, 그가 나누는 대화는 이름들의 무의미한 반복이 된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무엇을 말했는지(그들의 이름을 모두 언급하며)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적 정보가 오가고, 대화는 수다스럽고 친밀한 어조를 띠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할 것인지, 어떤 특정한 경우에 무엇을 말했을지, 어떤 특정한 소녀와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 그럼에도 왜 결혼하고 싶지 않은지 장광설을 펼친다. 침묵 속에서 성찰하는 능력은 모든 교양 있는 사회적 교제의 조건이지만, 저속함과 수다스러움은 진정한 내면성의 커리커처에 불과하다. 내가 언급하는 수다스러움의 훌륭한 예를 소설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소한 것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들의 이름이 항상 언급된다. 그들의 삶 자체는 사소하지만 그 이름 덕분에 흥미롭다.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분명히 무언가에 대해 지껄이며, 사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더 많은 잡담을 쏟아내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상적 관점에서 비추어 보면, 주제가 없다. 그것은 항상 마스든 씨가 약혼했고 약혼녀에게 페르시아 숄을 주었다거나, 시인 페테르센이 새로운 시를 쓸 것이라거나, 배우 마르쿠센이 어젯밤 어떤 단어를 잘못 발음했다는 식의 사소한 사실로 구성된다. 이제 우리가 다음과 같은 법을 가정해보자.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말해지는 모든 것이 마치 50년 전에 일어난 것처럼 다루어져야 한다고 명령한다. 그렇다면 잡담쟁이들은 끝장날 것이고, 절망할 것이다. 반면 진정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방해받지 않는다. 배우가 어떤 단어를 잘못 발음했다는 것이 흥미로운 것은 그 잘못된 발음 자체에 무언가 흥미로운 점이 있을 때뿐이며, 이런 경우에는 50년이 지났건 아니건 차이가 없다. 그러나 예를 들어 구스타 양은 절망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그날 저녁 극장에 있었다는 것, 시의원 발러의 부인과 함께 박스석에 있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실수를 알아차린 것이 바로 그녀가 아니었던가? 그리고 심지어 합창단원 한 명이 미소 짓는 것까지 알아차린 사람이 그녀가 아니었던가? 등등. 잡담쟁이들은 즉시성에만 관심을 보인다. "나도 거기 있었다", "나도 봤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50년이라는 시간은 이 즉시성을 앗아간다. 그러나 이런 어리석은 잡담쟁이들도 살아가야하므로, 그들에게 이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다. 그래서 이 법은 단지 사고실험으로 제시될 뿐이다. 따라서 잡담과 함께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의 본질적 구분이 지워진다. 모든 것이 일종의 사적-공적 잡담으로 축소되며, 이 잡담이야말로 그것이 형성하는 공중과 대략 일치한다. 공중이란 가장 사적인 일에 관심을 갖는 여론이다. 누구도 감히 모임에서 입 밖에 낼 수 없는 것, 누구도 대화에서 거론할 수 없는 것, 심지어 잡담쟁이들조차 자신이 잡담했다고 인정하기 싫어할 것들이 공중을 위해서는 글로 써질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공중의 일원이라는 자격으로 그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형식 없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식과 내용 사이의 본질적 구분을 없애버린 결과다. 따라서 형식 없음은 광기나 어리석음과 달리 참인 내용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담고 있는 진리는 결코 본질적으로 참일 수 없다. 형식 없음은 모든 것을 포함하거나 모든 것을 건드릴 수 있을 만큼 확장될 수 있다. 반면 진정한 내용은 그 강렬함과 자기 몰두 때문에 매우 좁은 영역에 국한된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딱하리만치 좁아' 보일 것이다. 열정은 없지만 성찰적인 시대에서 형식 없음의 보편성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서 드러난다. 하나는 가장 다양한 이념들이 한 무리를 이루어 어울린다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사람들이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최고의 동경과 즐거움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원칙(principle)은 그 단어가 가리키듯이 모든 것의 시작점이자 근원, 즉 첫 번째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실체이며 본질이다. 내면 깊숙한 곳의 충동과 열정의 형태로 존재하면서 그 자체의 내적 힘으로 개인을 추동한다. 열정 없는 개인에게는 이것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다. 그에게 '원칙'이란 순전히 외적인 무언가다. 그 원칙을 내세우면 그는 이 일을 저 일만큼 기꺼이 하고, 둘 다 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로 기꺼이 한다. 열정 없는 개인의 삶 속에서는 내적 원리가 스스로를 펼쳐 보이며 발전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의 내적 삶은 끊임없이 서두르고 움직인다. 항상 '원칙에 따라' 무언가를 하려고 서두른다. 그런 의미에서 원칙은 괴물 같은 무언가, 즉 추상이 된다. 마치 공중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공중은 너무나 괴물 같은 무언가여서, 세상의 모든 민족들과 영원 속의 모든 영혼들을 합쳐도 그만큼 많지 않다. 그럼에도 누구나, 심지어 취한 선원까지도 자신의 공중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원칙'도 마찬가지다. '원칙'이란 하찮기 그지없는 사람마저 자신의 하찮은 행동에 둘러댈 수 있는 그럴싸한 구실이며, 그렇게 해서 자신을 엄청나게 중요한 존재처럼 묘사한다. 정직하지만 하찮은 사람이 원칙 때문에 갑자기 영웅이 될 때, 그 결과는 마치 유행이 모든 사람에게 30피트 길이의 챙이 달린 모자를 쓰라고 명령한 것만큼 우스꽝스럽다. 만약 어떤 사람이 '원칙에 따라' 코트 안주머니에 작은 단추를 단다고 생각해보자. 그 자체로는 하찮고 실용적일 뿐인 행동이 거대한 중요성을 띠게 된다. 그리고 이를 위한 협회가 결성될지도 모른다.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품격을 구성하는 본질적 구분을 없애버린다. 품격은 즉각적이기 때문이다(그 즉각성이 본래적이든 습득된 것이든). 품격은 감정 속에, 그리고 내적 열정의 충동과 일관성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원칙에 따라' 하면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며, 그가 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무관심한 문제가 된다. 한 사람이 '원칙에 따라' 모든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고 지지한다 해도 그의 삶은 여전히 하찮다. 심지어 그가 벙어리로서, 그런 자격으로 '여론의 기관'으로서, 손에 접시를 든 채 앞으로 나아가고 절하는 손풍금 인형들만큼 유명하다 해도 말이다. '원칙에 따라'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에든 참여할 수 있지만, 자신만은 비인간적이고 불명확한 채로 남는다. '원칙에 따라' 사람은 매춘 업소 설립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보건 당국이 쓴 그 주제에 관한 사회 연구가 많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 '원칙에 따라' 새로운 찬송가집 출판을 도울 수 있다. 왜냐하면 시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번째 사실로부터 그가 방탕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부당한 것처럼, 두 번째로부터 그가 찬송가를 읽거나 불렀다고 결론 내리는 것도 부당하다. 이런 식으로 '원칙에 따라' 하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경찰은 '공무상' 누구도 갈 수 없는 특정 장소에 갈 수 있지만, '그들이 그 특정 장소에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다. 같은 방식으로 '원칙에 따라'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모든 개인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원칙에 따라' 개인적으로 찬탄하는 것마저 산산조각낼 수도 있다. 무의미하기 짝이 없다. 창조적인 모든 것은 잠재적으로 논쟁적이다. 장차 세상에 있게 될 새로운 것을 위한 자리를 창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의미있다. 그러나 순전히 파괴만 하는 과정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 원칙은 공허함일 따름이다. 자리를 창출할 이유 따위가 뭐란 말인가? 모든 것이 '원칙에 따라' 행해지는 토양에서는 겸손도, 회개도, 책임도 쉽게 뿌리내릴 수 없다. 피상성과 과시 욕구란 무엇인가? 피상성은 은폐와 드러남 사이의 본질적 구분을 없애버린 결과다. 그것은 공허함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폭넓음에서는 승리한다. 왜냐하면 그 화려한 속임수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이점을 갖기 때문이다. 진정한 드러남은 동질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으로 심오하기 때문이다. 반면 피상성은 다양하고 잡다한 외양을 갖는다. 피상성의 과시 욕구는 성찰 속에서 자신에게 도취된 허영이다. 내면성은 그 특성상 은폐되고 절제되기에 본질적 신비를 잉태할 시간을 보장받지 못한다. 신비는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데도, 내면성이 무르익기도 전에 방해를 받기 일쑤다. 성찰은 기다려주지 않고 자기애적인 시선을 끌어들이는데, 그리하여 눈길을 잡아끄는 허상을 보게 만든다. 희롱(flirtation)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진정한 사랑과 진정한 방탕 사이의 본질적 구분을 없애버린 결과다. 진정한 연인도 진정한 방탕자도 희롱하지 않는다. 희롱은 단지 가능성을 가지고 장난칠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악을 감히 건드리면서도 선을 실현하지 못하는 일종의 방종이다.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도 일종의 희롱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도덕적 행동을 추상으로 축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폭넓음에서 희롱은 모든 이점을 갖는다. 사람은 누구든 희롱할 수 있지만, 오직 한 소녀만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사랑의 대상을 늘리는 것은 사실상 사랑을 빼앗기는 것이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변덕스러운 사람이 쾌락에 눈멀 수는 있지만 그래도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대상이 더 많아질수록 사랑을 더 많이 빼앗긴다. 그렇다면 추론(reasoning)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주관성과 객관성을 분리하는 본질적 구분을 없애버린 결과다. 추상적 사유의 형태로서 추론은 변증법적으로 충분히 심오하지 않다. 의견이나 확신으로서 추론은 완전한 개별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단순한 폭넓음에서 추론은 모든 외관상의 이점을 갖는다. 진정한 사상가는 자신의 학문만을 다룰 수 있다. 진정한 의견은 특정 주제에만 해당한다. 진정한 확신은 특정한 삶의 관점에서만 나온다. 그러나 추론은 모든 것을 논평한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11장: 무기력한 이해, 행동 없는 지식 우리 시대에 익명성은 사람들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얻었다. 그것은 거의 경구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은 익명으로 글을 쓸 뿐만 아니라 익명의 작품에 서명한다. 심지어 익명으로 대화한다. 작가의 영혼이 그의 문체 속에 기입되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인격 전체를 대화의 문체 속에 집어넣는다.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 1740-1815)가 지적했듯이, 누군가 책의 정신을 소환한다면 그 정신이 나타나야 한다. 단, 그 책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말이다. 오늘날에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으며, 사람들의 의견이 매우 분별력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대화는 익명성과 대화했다는 인상을 남긴다. 정확히 똑같은 사람이 가장 모순되는 말을 서슴없이 뱉으며, 극도의 침착함으로 자신의 삶을 신랄하게 풍자하는 발언을 한다. 그 발언 자체는 충분히 분별력 있을 수 있다. 회의에서 잘 들리는 종류의 말일 수 있다. 결정에 이르는 논의에 유용할 수도 있다. 마치 누더기로 종이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의견들을 합쳐도 한 사람의 인간적이고 개인적인 의견을 만들지 못한다. 반면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도, 비록 주제는 적지만 진정성 있게 말한다면, 그런 인간적 의견을 들려줄 수 있다. 사람들의 발언은 너무나 객관적이고 포괄적이어서, 누가 그것을 표현하는지는 완전히 무관심한 문제가 된다. 인간의 말과 관련해서 그것은 '원칙에 따라'(on principle) 행동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는 공중처럼 순수한 추상이 된다. 더 이상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 대신에 객관적 사유가 모종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추상적 소리가 인간의 말을 불필요하게 만든다. 마치 기계가 인간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독일에서는 심지어 마부들이 사용할 구문집까지 있다. 결국에는 연인들도 함께 앉아서 익명으로 대화하게 될 것이다. 사실 모든 것에 대한 안내서가 있다. 머지않아 전 세계의 교육은 많건 적건 어떤 논평들을 암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인쇄공이 글자를 골라내듯이 다양한 사실들을 골라내는 능력에 따라 탁월함을 보인다. 그러나 무언가의 의미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한 채로 말이다. 따라서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이해의 시대다. 아마 평균적으로 본다면 이전의 어떤 세대보다 더 많이 알겠지만, 정작 열정은 없다. 모두 너무 많은 것을 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갈 수 있는 모든 다른 방법들을 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마침내 누군가가 자신 안의 성찰을 극복하고 우연히 행동한다면, 즉시 수천 개의 성찰이 외적 장애물을 형성한다. 오직 계획을 재고하자는 제안만이 열정적으로 환영받는다. 행동은 무기력으로 맞이한다. 일부 사람들은 우월한 자기 만족에 젖어서 행동하려는 사람의 열정을 우스꽝스럽게 여긴다. 어떤 이들은 시기하기까지 한다. 단지 그가 무언가를 시작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시기하는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들은 누군가가 행동했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수많은 비판적 논평을 생산하고 논증들을 쏟아낸다. 얼마나 더 분별력 있게 그 일을 할 수 있었는지를 증명하면서 말이다. 또 다른 이들은 결과를 추측하는 데 분주하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가설을 지지하도록 사건들에 약간의 영향을 미치려 한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두 영국 귀족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을 만났다. 그의 말이 도망치고 있었고, 그는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 사람은 도움을 청하며 소리쳤다. 한 귀족이 말했다. '저 사람 떨어진다에 100기니 어떻소?' '좋소, 걸었소.' 두 사람은 즉시 말을 달려 앞서 나갔다. 통행료 문을 열고 도망치는 말의 길을 말끔히 터주었다. 우리 시대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물론 영국 귀족들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거나 큰돈을 거는 배짱은 없다. 하지만 호기심 많고 비판적이며 세상 물정에는 밝은 구경꾼과 같다. 기껏해야 내기나 거는 정도의 활력만 있을 뿐이다. 삶의 실존적 과제들은 현실성이라는 흥미를 잃었다. 환상은 더 이상 내면성이 신적으로 성장하도록 성소를 지을 수 없다. 그 내면성은 결단으로 무르익어야 하는데 말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궁금해한다. 모두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들이 탈출하는 방법은 이렇다. 누군가가 와서 무언가를 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그에게 내기를 걸 따름이다. 공동체나 연합(association)의 이념으로는 우리 시대를 구할 수 없다. 완전히 불가능하다. 오히려 연합은 회의주의[였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별성이 균등하게 발전하려면 이것이 필요하며, 그리하여 개인은 상실되거나 아니면 이런 추상들에 의해 단련되어 종교적으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연합의 원리는 긍정적이지 않고 부정적이다. 물질적 이익과 관련해서만 기껏해야 유효할 뿐이다. 그것은 도피이며, 주의 분산이며, 환상이다. 변증법적으로 상황은 이렇다. 연합의 원리는 개인을 강화하지만 수적으로만 강화할 뿐 그를 약화시키며, 수적으로는 강화하지만 윤리적으로는 약화시킨다. 개인이 전 세계를 앞에 두고 윤리적 전망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진정으로 함께 결합한다는 논의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체로 약한 개인들의 연합은 어린이들의 결혼만큼이나 역겹고 해롭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제12장: 인식 불가능한 자, 종교적 구원의 길(끝) 과거에는 군주와 위대한 이들이 각자 자기 의견을 가졌다. 나머지 사람들은 만족했으며, 감히 의견을 가질 수 없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충분히 깨달았다. 이제는 누구나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의견을 갖기 위해서는 수적으로 뭉쳐야 한다. 스물다섯 명의 서명이 있으면 가장 끔찍한 어리석음도 하나의 의견이 되며, 일류 지성인의 심사숙고한 의견은 역설에 불과하다. 그러나 맥락이 무의미할 때는 폭넓게 조망하는 것이 쓸모없다. 할 수 있는 최선은 각 부분을 그 자체로 고려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입에서 헛소리만 나온다면, 일관된 말을 만들려고 애쓰는 것은 무익하다. 각 단어를 따로따로 다루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들도 마찬가지다. 다가올 변화는 이러하다. 구질서(개인과 세대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에서는 장교들, 장군들, 영웅들(즉 탁월한 인물, 자기 영역 내의 지도자)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 권위에 비례하여, 자기를 따르는 작은 무리와 함께, 전체 속에 그림같이 유기적으로 들어맞았다. 전체를 떠받치면서 동시에 전체에 의해 떠받쳐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부터 위대한 사람, 지도자(그의 위치에 따라)는 권위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평준화 과정(the levelling process)의 악마적 원리를 신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식 불가능할(unrecognizable) 것이다. 그는 사복 경찰처럼 자신의 탁월함을 숨길 것이다. 그의 도움은 오직 부정적인 방식으로만 주어질 것이다. 즉 그는 사람들을 밀쳐낸다. 반면 추상은 무한히 무관심한 채로 모든 개인을 홀로 심판하고 고립된 상태에서 시험한다. 이 질서는 변증법적으로 예언자들과 사사들(士師, Judges)의 질서와 정반대다. 예언자와 사사에게 위험은 그 권위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반면 오늘날 인식 불가능한 자에게 위험은 인정받는 것이다. 권위로서 인정과 중요성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당하는 것 말이다. 이것은 최고의 발전을 방해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인식 불가능한 자들은 비밀 요원처럼 일하기 때문이다. 신으로부터 사적 지시를 받아서가 아니다. 사적 지시를 받는 자들은 예언자와 사사일 따름이다. 그들이 인식 불가능한 이유는 모두 신 앞에서 평등하다는 보편성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서, 자신의 책임을 매 순간 되새긴다. 그래서 이 일관된 통찰을 비일관적 형태로 무분별하게 실현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된다. 이 질서는 변증법적으로는 조직 질서의 정반대다. 조직 질서에서는 걸출한 인격이 세대를 개인의 지지대로 만들었다. 반면 이제 세대는 추상처럼 인식 불가능한 자에 의해 부정적으로 떠받쳐지며, 개인에 맞서 논쟁적으로 대립한다. 왜인가? 바로 모든 개인을 종교적으로 구원하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세대는 스스로 평준화를 원했고 해방되기를 원했으며, 권위를 파괴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파괴하려 했다. 세대는 연합 원리(the principle of association)의 회의주의를 통해, 추상이라는 희망 없는 산불을 일으켰다. 이 회의주의와 함께 평준화한 결과, 세대는 개인과 모든 유기적이고 구체적인 것들을 없애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인류'와 인간과 인간의 수적 평등을 놓았다. 세대는 잠시 동안 이 무제한적 파노라마를 즐긴다. 추상적 무한의 파노라마를. 조금의 솟아오름도 없어 평탄하고, 조금의 흥밋거리도 없어 방해받지 않는, 사막 같은 바다를. 그러면 일할 시간이 도래한다. 그때가 되면 모든 개인이 스스로 일해야 한다. 각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더 이상 개인은 과거처럼 혼란스러울 때 위대한 이에게 도움을 구할 수 없다.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그는 끝없는 추상의 현기증 속에서 상실되거나, 종교의 실재 속에서 영원히 구원받거나 둘 중 하나다. 아마도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외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었고,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할 것이다. 과거에는 사실상 권위와 권력이 오용되어 혁명이라는 복수를 자초했다. 하지만 오늘날 최후의 복수를 자초한 것은 약함과 무능함이었다. 홀로 서기를 바라면서도 그럴 힘이 없었던 약함과 무능함 말이다. '인식 불가능한 자'들 중 누구도 대중의 선두에서 직접적으로 돕거나 직접적으로 말하거나 직접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결정을 지시하고 돕지 않는다. 그 대신 그의 부정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지지하고, 그렇게 해서 개인이 스스로 도달한 결정을 내리도록 돕는다. 이 방법 외에는 없다. 다른 방법은 종말적이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을 쓰면, 그는 인간의 근시안적 동정심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신성의 명령에 복종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분노하지만 그토록 자비로운 신성의 명령 말이다. 왜냐하면 이 발전은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진보이기 때문이다. 구원받는 모든 개인들이 종교의 특정한 무게를, 그 본질을 직접 신으로부터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렇게 말해질 것이다. '보라,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추상의 잔혹함이 세속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영원의 심연이 네 앞에 열린다. 평준화의 날카로운 낫이 모든 이로 하여금 그 칼날 위로 뛰어오르게 한다. 그리하여 보라, 저편에서 기다리는 이는 신이다. 그러니 뛰어들라, 신의 품으로.' 그러나 '인식 불가능한 자'는 인간을 도울 수도 없고 감히 도울 수도 없다. 그의 가장 충실한 제자도, 그의 어머니도, 그가 기꺼이 목숨을 바칠 소녀도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 도약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의 사랑은 중고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식 불가능한 자는 (그 정도에 따라) 같은 정도의 걸출한 인물에 비해 두 배로 일한다. 끊임없이 일해야 할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일을 감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의 황량한 추상은 그 하인들에 의해 계속될 것이다. 구질서로 되돌아가지 않도록 말이다. 평준화 과정을 섬기는 자들은 악의 권능을 섬기는 자들이다. 평준화 자체는 신성에서 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선한 사람은 때때로 이 황폐함을 슬퍼한다. 그러나 신성은 평준화를 허용한다. 최고의 것을 개인과 관계 맺게 하기 위해서다. 즉 각자 모든 사람과 말이다. 평준화를 섬기는 자들은 인식 불가능한 자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인식 불가능한 자는 감히 그들에 맞서 권력이나 권위를 사용할 수 없다. 권력을 사용하는 순간 발전을 되돌리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인식 불가능한 자가 권위라는 사실이 제3자에게 즉시 드러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제3자는 최고에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직 고통을 통해서만 인식 불가능한 자는 평준화 과정을 도울 수 있으며, 그 고통스러움으로써 그 도구들을 심판할 수 있다. 그는 평준화를 직접 극복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그의 종말이 될 것이니, 그것은 권위를 참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고통 속에서 평준화를 극복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법칙을 다시 한번 표현한다. 그 법칙은 지배하지 않고, 인도하지 않고, 이끌지 않고, 고통 속에서 섬기며 간접적으로 돕는 것이다. 도약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행동을, 그의 고통을 실패로 여길 것이다. 근원적으로 인식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약한 사람들은 그것이 승리였다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다. 오직 그에게서만 확신을 얻을 수 있는데, 만약 그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그 확신을 준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그의 종말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권위자 노릇을 하기 바랄 때 그는 신성에 불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패다. 단지 권위를 사용하려 하여 신에게 불충한 것뿐 아니라, 신에게 복종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강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도록 가르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간청한다 해도 그는 권위를 행사하여 그들을 속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멈춘다. 이 모든 것은 단지 농담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의 미래'에 대한 모든 예언은 오직 오락이나 농담으로서만 가치가 있고 허용된다. 볼링이나 카드놀이처럼 말이다. 그러나 성찰(reflection) 자체가 해로운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반대다. 사람의 행동이 더 강렬해지려면(intensive) 성찰을 거쳐야 한다. 열정(enthusiasm)으로 수행되는 모든 행동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먼저 즉각적 열정이 온다. 다음에 영리함(cleverness)의 단계가 따라온다. 즉각적 열정은 계산하지 않으므로, 영리함은 계산하면서 자신이 더 높은 것처럼 가장한다. 그리고 마침내 최고이자 가장 강렬한 열정이 온다. 이 최고의 열정은 영리함의 단계를 거친 후에 오므로, 가장 약삭빠른 행동 계획을 볼 수 있지만 그 계획을 경멸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열정의 강렬함을 얻는다. 그러나 당분간, 그리고 앞으로 한동안, 이 진정으로 강렬한 열정은 완전히 오해받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과연 대중적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즉 평범한 사람이 그 정도의 영리함에 도달하여 영리함이 더 이상 그를 유혹하고 매혹하지 않을 수 있는가, 그리고 최고 형태의 열정을 얻어 영리함을 지배하되 말하자면 그것을 낭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정적 행동은 항상 약삭빠름의 반대이므로 결코 명백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열정은 즉각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도피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볼 만큼 충분히 영리했다. 하지만 그 의견대로 행동하기를 경멸했고, 제공된 연설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의 영웅적 죽음에는 명백한 것이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는 아이러니한 채로 남았다. 약삭빠르고 영리한 이들에게 이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반대로 행동했는데도 정말로 영리하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이 영리함이 공중에 매달린 지점이다. 자신의 성찰적 판단과 세상의 판단에 의해 들어 올려진 채, 영리함에 맞서 수행된 행동이 영리함 없이 수행된 행동과 혼동될까봐 두려워하면서 말이다. 즉각적 열정은 그런 위험을 모른다. 그래서 인생을 헤쳐나가려면 가장 강렬한 열정의 추진력이 필요하다. 그런 열정은 단순한 수사적 헛소리가 아니다. '높은 진지함', '더 높은 진지함', '가장 높은 진지함'에 대한 공허한 말이 아니다. 그 열정의 표지는 명확하다. 이해에 맞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각적 선함도 성찰의 위험을 모른다. 선함과 약함이 혼동되고 뒤섞이는 위험을 모른다. 바로 그 이유로, 성찰 후에는 선함을 다시 부력하기 위해 종교적 추진력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에는 행해지는 것이 너무 적은데도, 비정상적으로 많은 예언과 묵시록, 미래에 대한 일별과 연구가 나타난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거기에 동참하여 다른 이들과 함께 떠드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점이 있다. 예언하고 경고할 때 무거운 책임을 지는 많은 이들에 비해서 말이다. 나는 아무도 나를 믿지 않으리라는 것을 완벽하게 확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에게도 달력에 표시해두거나 내 말이 들어맞는지 지켜보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만약 성취된다면 사람들은 나 같은 하찮은 존재보다 더 중요한 일을 생각할 것이고, 성취되지 않는다면 나는 그저 현대적 의미의 예언자가—즉 예측이나 하는 사람이—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예언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옛 예언자들의 말을 성취시킨 것은 섭리였다. 그러나 우리 현대의 예언자들에게는 섭리의 도움이 없으므로, 아마도 탈레스와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예측하는 것은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예언이라는 선물을 허락하시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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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다른 시인의 릴레이가 어느덧 12달을 채웠어요.
[날 수를 세는 책 읽기ㅡ 12월] '오늘부터 일일'[날 수를 세는 책 읽기ㅡ11월] '물끄러미' 〔날 수를 세는 책 읽기- 10월 ‘핸드백에 술을 숨긴 적이 있다’〕
어두운 달빛 아래, 셰익스피어를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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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편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수림문학상 수상작들 🏆
[📚수북탐독]9. 버드캐칭_수림문학상 작가와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8. 쇼는 없다⭐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기(첫 시즌 마지막 모임!)[📕수북탐독] 7. 이 별이 마음에 들⭐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수북탐독] 6. 열광금지 에바로드⭐수림문학상 수상작 함께 읽어요
책을 직접 번역한 번역가와 함께~
[도서증정][번역가와 함께 읽기] <꿈꾸는 도서관> <번역가의 인생책> 이평춘 번역가와 『엔도 슈사쿠 단편선집』 함께 읽기<번역가의 인생책> 윤석헌 번역가와 [젊은 남자] 함께 읽기[브릭스 북클럽]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커다란 초록 천막》 1, 2권 함께 읽기[도서증정][번역가와 함께 읽기] <전차 B의 혼잡>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이 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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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증정][1938 타이완 여행기] 12월 18일 오후 8시 라이브채팅 예정! 스토리 수련회 : 첫번째 수련회 <호러의 모든 것> (with 김봉석)[책증정] 저자와 함께 읽기 <브루클린 책방은 커피를 팔지 않는다> +오프라인북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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