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르케고르의 ⟪순간/현대의 비판⟫를 읽는 모임입니다.
권대식 목사와 함께 천천히 읽는 모임입니다.
(1) 크르케고르, ⟪순간/현대의 비판⟫ 읽기
D-29

russist모임지기의 말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제목은 오타입니다. '키르케고르'입니다.
⟪현대의 비판⟫만 읽습니다. 원문은 소제목으로 구분돼 있지 않은데, 여기서는 주제에 따라서 임의로 13개의 장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제가 읽기에는 한국어판 본문이 눈에 잘 안 들어와서 영역문과 비교해가면서 읽었습니다.
☀︎ 아래는 AI를 참고해서 영역본을 옮겼으니 책의 본문과 비교하면서 읽기를 바랍니다.
- Soren A. Kierkegaard. New York : Harper Torchbooks, 1962.
☀︎ 소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적해주면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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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russist님의 대화: 제목은 오타입니다. '키르케고르'입니다.
⟪현대의 비판⟫만 읽습니다. 원문은 소제목으로 구분돼 있지 않은데, 여기서는 주제에 따라서 임의로 13개의 장으로 나눠서 살펴봅니다. 제가 읽기에는 한국어판 본문이 눈에 잘 안 들어와서 영역문과 비교해가면서 읽었습니다.
☀︎ 아래는 AI를 참고해서 영역본을 옮겼으니 책의 본문과 비교하면서 읽기를 바랍니다.
- Soren A. Kierkegaard. New York : Harper Torchbooks, 1962.
☀︎ 소제목은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지적해주면 수정하겠습니다)
제1장: 성찰의 시대와 개인의 무력함(361-365쪽)
오늘날 근본적으로 우리는 이해하고 성찰하기는 하나, 열정은 없는 시대를 산다. 순간적으로 열광하고 폭발하지만 교묘하게 평정심을 되찾는 시대를 산다.
만약 우리가 세대마다 얼마나 많은 지성을 소비하는지에 대한 통계표를 가지고 있다면, 증류주 소비 통계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경악할 것이다. 조용히 살아가는 작고 부유한 가정들이 얼마나 많이 주저하고 숙고하는지, 젊은이들이, 심지어 아이들까지 얼마나 많이 주저하고 숙고하는지를 보면 말이다. 소년 십자군(the children's crusade)이 중세(the Middle Ages)를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듯이, 조숙한 아이들이야말로 현시대를 상징한다. 사실 한 번이라도 터무니없는 우행을 저지를 준비가 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는지 묻고 싶을 정도이다.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조차 절망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는다. 그 결단을 내리기 전에 그는 너무나 오래, 너무나 신중하게 숙고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사유 때문에 질식한다. 그를 자살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의문이다. 실제로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은 사유이기 때문이다. 그는 숙고하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숙고 때문에 죽는다.
그러므로 현세대를 기소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현세대는 법적 궤변들에 능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세대는 능력이 있고 기교가 있으며 분별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행동까지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판단과 결정에 도달하려 애쓰는 데서 그친다. 만약 혁명의 시대에 대해 제멋대로 폭주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현시대에 대해서는 절름거리며 나아간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개인과 그의 세대는 서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결과 검사는 어떤 사실도 인정시키지 못한다. 실제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한 징후들로 판단하자면 무언가 대단히 특별한 일이 막 일어났거나 일어나려 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론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징후들이야말로 실제로 이 시대의 유일한 성취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대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 시대는 매혹적인 환영들을 쌓아올리고, 열광으로 폭발하며, 앞으로 올 형식상의 변화를 내세워 기만적으로 도피한다. 이러한 일에 이 시대는 숙련되어 있고 독창적이다. 우리는 이 시대가 얼마나 영리한지, 힘을 얼마나 부정적으로 쓰는지를 기준으로 이 시대를 평가해야 한다. 혁명을 평가할 때 그 에너지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창조적인지를 기준으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세대는 환상적인 노력에 지쳐 완전한 나태로 되돌아간다. 현세대의 상태는 아침 무렵에야 잠든 사람의 상태와 같다. 먼저 거대한 꿈들이 오고, 그다음 나른함이 오며, 마침내 침대에 남아 있기 위한 재치 있거나 영리한 핑계가 온다.
개인이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강하더라도(만약 그가 자신의 힘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는 여전히 열정을 갖지 못한다. 성찰이 유혹적이고 불확실한 굴레를 씌울 때, 그 굴레로부터 스스로를 떼어낼 수 있는 열정을 말이다. 그의 주변 환경도 그를 자유롭게 하는 데 필요한 사건들을 제공하지 못하고, 일반적인 열광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한다. 그를 돕는 대신, 그의 환경은 그 주위에 부정적이고 지적인 장벽을 짓는다. 그 장벽은 잠시 기만적인 전망을 제공하며 속임수를 부리다가, 결국 빛나는 탈출구를 보여주며 그를 기만한다. 가장 영리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보여주면서 말이다. 현시대가 우유부단한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밑바닥에는 관성의 힘(vis inertiae)이 있고, 열정 없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그것을 발견한 첫 번째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축하하며, 그래서 더욱 영리해진다. 혁명 기간에 사람들은 무기를 자유롭게 분배받았고, 십자군(the Crusades) 기간에는 위업의 표식을 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규칙들과 판단을 돕는 계산표를 제공받는다. 만약 어떤 세대가 무언가 곧 일어날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든 행동을 미루는 외교적 임무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가 혁명의 시대만큼이나 놀라운 업적을 수행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누구든 상상해보라. 그 시대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익숙해진 탓에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시각도 잊어버리고,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것처럼 책이나 신문 기사를 읽거나 단지 어떤 행인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말이다. 그는 이런 인상을 밝힐 것이다. "맙소사, 오늘 밤 무언가 일어나려 하는구나. 아니면 어쩌면 그저께 밤에 무언가 일어났을지도 모르겠군."
혁명의 시대는 행동한다. 우리 시대는 광고하고 공시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곳에서 즉시 요란하게 공표된다. 현시대에 반란은 무엇보다도 가장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한 힘의 표현은 우리 시대에 이해 타산만 따지는 지성인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일처럼 보일 것이다. 반면에 정치적 거장은 거의 그만큼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반란을 결정해야 하는 총회를 제안하는 선언문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고, 너무나 신중하게 작성되어 검열관조차 그것을 통과시킬 것이다. 회의 자체에서 그는 청중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모두 조용히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매우 즐거운 저녁을 보낸 후에.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심오하고 경이로운 학식을 거의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그것을 우스꽝스럽다고 여길 것이다. 반면에 과학적 거장은 구독 신청서를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집필할 포괄적 체계의 개요를 담은 신청서를 말이다. 더 나아가 독자가 이미 그 체계를 읽은 것처럼 느끼도록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사람들이 지칠 줄 모르는 고통으로 거대한 책들을 쓰던 백과전서파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는 가볍게(en passant) 모든 학문과 존재 전체를 다루는 그 경량급 백과전서파의 차례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날마다 자기부정을 실천하는 종교적 단념을 떠올릴 수조차 없다. 반면에 거의 모든 신학생은 훨씬 더 놀라운 무언가를 할 수 있다. 그는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협회를 설립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하고 선한 행위의 시대는 지나갔다. 현재는 미리 기대하고, 인정조차 미리 받는 시대이다. 누구도 무언가 구체적인 것을 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은 성찰하면서 자신을 우쭐대고 싶어 한다. 적어도 새로운 대륙 하나쯤은 발견했다는 착각을 품으면서 말이다. 마치 9월 1일부터 진지하게 시험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젊은이가 결심을 강화하기 위해 8월 동안 휴가를 가기로 결정하는 것처럼, 현세대는 다음 세대가 진지하게 일해야 한다는 엄숙한 결의를 한 것처럼 보인다(이것은 확실히 이해하기 더 어렵지만 말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방해하거나 지연시키지 않기 위해, 현세대는 연회에 참석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 젊은이는 청춘을 건너는 자 특유의 경솔함으로 자신을 이해하지만, 우리 세대는 연회에서조차 진지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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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얼음 스케이터의 우화(367-370쪽)
오늘날 행동 없음이나 결단 없음은 마치 얕은 물에서 수영하는 사람이 위태로운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파도 속에서 즐겁게 헤엄치는 어른이 자신보다 어린 사람들을 부른다. "자, 빨리 뛰어들어!" 마찬가지로 존재 속의 결단은 (물론 그것은 개인 안에 있는 것이지만) 젊은이들을 부른다. 말하자면 아직 과도한 성찰적 사고에 지치지 않았거나 성찰적 사고의 환상에 짓눌리지 않은 그런 젊은이들을 말이다. "자, 가뿐하게 뛰어내려라. 비록 가벼운 마음의 도약일지라도 그것이 결단을 담고 있기만 하다면. 만약 네가 한 사람이 될 능력이 있다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 또 존재가 네 경솔함을 가혹하게 심판하는 것이, 너를 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을 도울 것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소유하기를 바라는 보석이 얼어붙은 호수 위 멀리, 얼음이 매우 얇은 곳에 놓여 있고 죽음의 위험이 그것을 지키고 있지만 더 가까운 곳에서는 얼음이 완벽하게 안전하다면, 열정적인 시대에 군중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감히 밖으로 모험하는 사람의 용기에 박수를 보낼 것이고, 그를 위해, 그와 함께 그가 감행하는 결단의 위험 앞에서 전율할 것이다. 만약 그가 익사한다면 그를 슬퍼할 것이고, 만약 그가 상을 얻는다면 그를 신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열정 없는 시대에, 성찰의 시대에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멀리 밖으로 모험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시도할 가치조차 없다고 동의하는 것이 서로 영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은 대담함과 열정을 일종의 기술적 묘기로 바꾸어놓을 것인데, 이는 그들이 뭐라도 해야한다고 느끼는 탓이다.
군중은 안전한 장소에서 관람하러 나갈 것이고, 감정가의 눈으로, 바로 그 가장자리까지 (즉, 얼음이 아직 안전하고 위험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곳까지) 스케이트를 타다가 되돌아올 수 있는, 숙련된 스케이터를 평가할 것이다. 가장 숙련된 스케이터는 가장 먼 지점까지 나가서 훨씬 더 위험해 보이는 질주를 수행할 것이니, 그리하여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말할 것이다. "맙소사! 얼마나 미친 짓인가,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있다." 그러나 보라, 그러면 당신은 그의 기술이 너무나 놀라워서 그가 제때 되돌아오는 데 성공했고, 그때 얼음은 완벽하게 안전했으며, 아직 위험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극장에 있는 듯 군중은 박수를 보내고 환호할 것이며, 영웅적인 예술가를 그들 한가운데 두고 집으로 몰려가서 그에게 장엄한 연회를 베풀어 영예롭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성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한 탓에 실제 과제를 비현실적인 속임수로 변형시키고 현실을 놀이로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연회 동안 찬미는 그 정점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찬미자와 찬미의 대상 사이의 적절한 관계란 무엇인가? 그것은 찬미자가 자신도 영웅과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고양되고, 자신은 그런 위대한 행동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겸허해지지만, 종내에는 과연 자기 분수에 맞게 그를 모방하라는 도덕적 용기를 얻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이 완전히 우위를 차지한 곳에서는 찬미의 성격조차 완전히 바뀐다. 연회의 절정에서조차, 박수갈채가 가장 크게 울려 퍼질 때조차, 찬미하는 손님들은 모두 약삭빠른 생각을 가지고 말 것이다. 바로 모든 영예를 거머쥔 그 사람의 행위가 실제로는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었으며, 그를 위한 지금 모임은 단지 우연일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결국 누구나 약간의 연습만 있으면 그만큼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손님들은 그들의 분별력이 강화되고 선을 행하도록 격려받는 대신, 훨씬 더 강한 병인을 품고 집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더 높다. 그 병인이란 모든 질병 중에서 가장 위험하지만 또한 가장 체면치레가 되는 질병, 즉 공적으로는 찬미하지만 사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니, 왜냐하면 모든 것이 농담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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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행동의 상실과 변증법적 분석(370-376쪽)
과거에는 사람이 자신의 행동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한다는 데 모두 동의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반대다. 모두 빈둥거린다. 그러면서도 약간의 성찰로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완벽하게 알면서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함께 대화할 때를 보라. 혹은 모임에서 연사들이 말할 때를 보라. 사람들은 사유나 관찰로 제시되는 것은 완벽하게 이해한다. 하지만 행동의 형태로 나타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만약 누군가가 사람들의 말을 우연히 듣고 아이러니의 정신으로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른 이유는 없이 오직 그 말대로만 행동한다면? 모두가 깜짝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그 행동을 무모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논의하고 나면 곧바로 깨닫게 된다. 그 행동이야말로 정확히 해야 할 일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갑작스러운 열광 뒤에 무관심과 나태가 따라오는 현시대는 희극에 매우 가깝다. 그러나 희극을 이해하는 이들은 안다. 희극이 현시대가 상상하는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풍자가 조금이라도 선을 행하고 헤아릴 수 없는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면, 일관된 윤리적 삶의 관점에 확고히 기반해야 하며, 순간의 성공을 추구하지 않는 본질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치료는 질병보다 무한히 나쁘다고 해야 한다.
정말로 희극적인 것은 이 시대가 재치 있고 유머러스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처한 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동시에 나름의 곡예법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성찰과 사유의 시대가 유머로 도전할 것이 무엇인가? 열정이 없는 이 시대는 모든 감각을 잃었다. 정치와 종교에서의 에로스(eros)와 열정과 성실함의 가치들에 대한 감각을 잃었고, 일상 생활에서의 경건함과 찬탄과 가정생활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그러나 비록 속된 이들이 웃는다 해도 삶은 어떠한 가치도 알지 못하는 재치를 조롱할 뿐이다. 내면성의 풍요로움을 소유하지 못한 채 재치 있는 것은 사치품에 돈을 낭비하면서 필수품은 거부하는 것과 같다. 혹은 속담에서 말하듯 가발을 사기 위해 바지를 파는 것과 같다. 그러나 열정 없는 시대는 어떠한 가치도 갖지 못한다. 모든 것이 실재 없는 관념적 표상들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까지는 참되고 합리적이지만 생명력이 없는 언급들과 표현들이 통용된다. 다른 한편 어떠한 영웅도, 어떠한 연인도, 어떠한 사유자도, 어떠한 믿음의 기사도, 어떠한 자랑스러운 사람도, 어떠한 절망에 빠진 사람도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완전하고 개인적으로 경험했다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마치 지폐의 바스락거림 뒤에 진짜 돈의 쨍그랑 소리를 갈망하듯 오늘날 사람들은 약간의 독창성을 갈망한다. 그런데 재치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이 무엇인가? 재치는 봄의 첫 싹이나 곡식의 첫 새싹보다도 더 자연스럽고 더 놀랍다. 왜냐하면 봄은 정해진 시기에 와도 여전히 봄이지만 계획되고 예정된 재치는 혐오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열정적 열광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나머지 일이 너무 지나쳐서 재치마저 타락한다고 가정해보라. 재치가 그 정반대인 하찮은 필연으로 변형된다고 가정해보라. 재치는 본래 신성한 우연이다. 예측할 수 없는 신비의 원천에서 나오는 신들의 선물이며, 추가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신호다. 가장 재치 있는 사람조차 감히 "내일 재치가 떠오를 것"이라 장담하지 못하고, 경외하며 "신들이 기뻐하실 때"라고만 말한다. 그런데 이제 재치를 공장에서 제조해내고, 낡은 재치와 새 재치를 사고파는 것이 수익성 있는 거래가 된다면? 재치 있다는 이 시대에 대한 무슨 풍자인가! 결국 돈이 사람들이 욕망할 유일한 것이 될 것이다. 돈은 더욱이 단지 표상적이며 추상일 뿐이다. 오늘날 젊은이는 누군가의 재능도, 예술도, 아름다운 소녀의 사랑도, 명성도 거의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돈만을 부러워한다. "나에게 돈을 달라. 그러면 나는 구원받을 것이다." 그가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이는 방종하게 살지 않을 것이다. 후회할 만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책망할 것이 아무것도 없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상 속에서 죽을 것이다. 만약 오직 돈만 가졌더라면 진정으로 살 수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위대한 무언가를 성취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인상 말이다.
이러한 일반적 관찰 뒤에, 그리고 현시대를 혁명의 시대와 비교한 뒤에, 이제 현시대에 대한 변증법적이고 범주적인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한 특성들이 지금 이 순간 실제로 나타나는지와는 무관하게 말이다.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시대의 본질적 성격이다. 이 본질적 성격은 보편적 관점에서 정의되어야 한다. 그 최종 결론은 연역을 통해 가능성으로부터 현실로(a posse ad esse) 도달할 수 있으며, 관찰과 경험을 통해 현실로부터 가능성으로(ab esse ad posse) 검증할 수 있다. 성찰이 궁극적으로 더 높은 형태의 실존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물론 있다. 성찰은 현시대의 과제이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성찰하는 개인도 결단을 내린 열정적인 사람만큼 선한 의도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반대로 열정에 휩쓸린 사람도 성찰하는 사람만큼 변명의 여지가 있다. 자신의 잘못은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이 성찰의 속임수에 넘어가도록 내버려둔다는 것을 교묘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찰의 결과는 위험하고 예측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악을 피한 것이 진지한 고민 끝에 내린 올바른 결정 때문인지, 아니면 성찰에 지쳐서 더 이상 잘못을 저지를 기력조차 없어진 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는 확실하다. 성찰의 힘이 커질수록, 지식이 늘어날수록, 인간의 고통만 더해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개인에게나 세대에게나 성찰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는 점이다. 성찰은 매우 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교묘한 하나의 발견이 문제 전체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 수 있다. 어느 순간에라도 성찰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하며 새로운 탈출구를 제시할 수 있다. 결정의 마지막 순간에도 성찰은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 성격이 확고한 사람이라면 행동에 나서는 데 별 노력이 필요 없지만, 성찰하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결국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성찰이 내세우는 변명일 뿐이다. 성찰의 실제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성찰은 오직 머릿속에서만, 사유 속에서만 변할 뿐이다. 현시대를 완결된 과거 시대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불공정하다. 현시대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고 여전히 형성되는 중이며 온갖 어려움과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계는 성찰이라는 본성 자체에서 오는 한계일 뿐이다. 그러나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미래가 열려 있다는 뜻이다. 그 불확실성 속에 희망이 있다. 열정적이고 격동적인 시대는 모든 것을 전복하고 모든 것을 무너뜨린다. 그러나 성찰적이면서 열정 없는 혁명의 시대는 다르다. 이 시대는 힘을 변증법적 기교로 바꾼다. 모든 것을 그대로 세워두지만 그 의미를 비워낸다. 반란으로 폭발하는 대신 이 시대는 모든 관계의 내적 내용을 성찰적 긴장으로 바꾼다. 이 긴장은 모든 것을 그대로 둔 채 삶 전체를 모호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겉으로는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변증법적 속임수를 통해 가장 은밀하게(privatissime) 그것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밀스러운 해석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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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도덕성, 성격 그리고 내면성의 상실(376쪽)
도덕성은 성격(Character)이다. 성격은 새겨진 것(ἐγχαράττω)이다. 그러나 모래와 바다는 성격을 갖지 못한다. 추상적 지성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성격은 실재하는 내면성이기 때문이다. 비도덕성도, 에너지인 한, 역시 성격이다. 그러나 도덕적이지도 않고 비도덕적이지도 않은 것은 단지 모호할 뿐이다. 성찰이 계속 갉아먹어서 질적 구분들이 약해지면 모호성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 열정의 반란은 원초적이다. 모호성은 밤낮으로 조용히 해체를 진행시킨다. 점진적 궤변(sorites)처럼 말이다. 선과 악의 구분이 약화되는데, 악에 대한 피상적이고 우월하며 이론적인 지식 때문에 약화된다. 사람들은 거만하고도 영리하다. 그들은 안다. 선이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도 못하고 가치도 없으며 어리석음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이제 아무도 선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위대한 일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악에 휩쓸려 끔찍한 죄를 범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더 많이 수다를 떤다. 모호성은 엄청나게 자극적이다. 선에 대한 기쁨이나 악에 대한 회개보다 훨씬 더 말을 많이 하게 만든다.
삶의 원천들은 열정이 있을 때만 생명력을 갖는다. 열정은 질적으로 구분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제 그 원천들이 생명력을 잃는다. 과거에는 하나의 사물과 그 반대 사이에 명확한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가 질적 구분이었고, 이것이 사물들의 내적 관계를 조절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모든 내면성이 사라진다. 그 정도에 이르면 관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무색하게 뭉쳐진 덩어리를 이룰 뿐이다. 부정적 법칙은 이렇다. '반대자들은 서로 없이는 못 산다. 그러나 함께 있을 수도 없다.' 긍정적 법칙은 이렇다. '반대자들은 서로 없어도 되고 함께 있어도 된다.' 다시 말해 반대자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 없이는 못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적 관계가 사라지면 다른 것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제 한 질(質)은 그 반대 질과 관계하지 않는다. 대신 양자가 서로 마주 서서 관찰할 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긴장 상태가 실제로는 관계의 종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과거에 찬미자는 어떻게 했는가? 그는 기쁘게 그리고 행복하게 위대함을 인정했다. 즉각 자신의 찬사를 표현했다. 그러고는 그 위대함의 오만함과 거만함에 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관계가 완전히 적대적으로 변한 것도 아니다. 찬미자와 찬미의 대상은 이제 두 명의 정중한 동등자처럼 서서 서로를 관찰할 뿐이다. 신하도 더 이상 자유롭게 왕을 영예롭게 하지 않는다. 왕의 야망에 분노하지도 않는다. 신하가 된다는 것은 이제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그것은 제3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신하는 관계 내에서 지위를 갖기를 멈춘다. 그는 왕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단지 관찰자가 되어 문제를 다룬다. 즉 신하와 왕의 관계라는 문제를 말이다. 한동안 위원회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사람들이 여전히 열정적으로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 되기를 원하는 한 그렇게 된다. 그러나 결국 시대 전체가 하나의 위원회가 된다.
아버지도 더 이상 분노 속에서 아들을 저주하지 않는다. 모든 부모의 권위를 동원하여 저주하지 않는다. 아들도 아버지를 거역하지 않는다. 이런 갈등은 진심 어린 용서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관계는 흠잡을 데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기를 멈추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관계 내에서 서로와 관계하지 않는다. 사실 그것은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그 안에서 두 사람은 마치 놀이하듯 서로를 관찰한다. 서로에게 확고한 헌신을 보여주는 대신 서로의 발언을 기록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조용하고 소박한 삶의 일들을 포기한다. 그들은 더 위대한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은 삶의 관계들을 더 높은 관계 속에서 생각하려 한다. 결국 세대 전체가 재현자(再現者)가 된다. 그들이 누구를 재현하는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한 관계들에 대해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불순종하는 청년은 더 이상 교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관계는 오히려 무관심한 것이다. 그 안에서 교사와 학생은 좋은 학교가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학교에 간다는 것은 더 이상 교사를 두려워하거나 단지 배우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남자와 여자의 질적 관계도 결코 노골적이고 문란하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품위는 유지된다. 그런 방식으로 이런 무해한 경계선상의 가벼운 연애를 사소한 것이라고밖에 묘사할 수 없을 정도이다.
사실 이러한 관계들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긴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나 힘들을 부러지는 지점까지 긴장시키는 긴장이 아니다. 오히려 삶 자체를 소진시키는 긴장이다. 그 열정과 내면성의 불을 소진시킨다. 그 열정과 내면성이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의존의 족쇄가 가벼워진다. 지배의 왕관도 가벼워진다. 아이의 순종이 기쁨이 된다. 아버지의 권위도 기쁨이 된다. 신하는 두려움 없이 존경할 수 있고, 위대한 자는 두려움 없이 고양될 수 있다. 스승은 인정받는 중요성을 갖게 되고, 그래서 제자는 배울 기회를 얻는다. 여자의 약함과 남자의 강함이 헌신의 동등한 강함 속에서 결합된다. 그러나 현재는 어떠한가? 관계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내면성 속에서 하나로 결속시키고 조화롭게 만들 힘이 없다. 관계는 자신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표현한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치 늘어지듯이, 반쯤 깨어 있는 듯 끊임없이 그렇게 표현한다.
이것을 아주 단순한 예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한때 조부 때부터 있었던 시계를 소유한 가족을 알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계의 기계장치가 고장 났다. 그러나 고장 나서 태엽이 갑자기 풀려버리거나 사슬이 끊어지거나 시계가 타종을 멈추지는 않았다. 반대로 시계는 계속 타종했다. 기묘하게 추상적인 방식으로, 혼란스럽게 타종했다. 정오에 열두 번 치거나 한 시에 한 번 치는 것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규칙적인 간격으로 한 번씩 쳤다. 하루 종일 타종했지만 결코 분명한 시간을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소진된 긴장 상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무언가가 추상적 연속성을 가지고 표현된다. 이것은 실제 단절을 막는다. 그러나 관계의 표현이라고 묘사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관계는 모호하게 표현될 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기까지 하다. 관계를 사실로서 계속 유지시키는 것은 바로 관계에서의 이러한 기만적 소강 상태이다. 위험한 점은 이것이 다시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성찰은 교활하게 사람들의 힘을 빼앗는다. 반란이 일어나면 힘으로 진압할 수 있다. 명백한 위조품은 처벌하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변증법적으로 복잡하게 뒤엉킨 것들은 뿌리 뽑기가 어렵다. 성찰이 은밀하고 모호한 길을 따라 암약한다. 이것을 추적하려면 매우 예민한 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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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시기심과 르상티망(Ressentiment)
기성 질서는 계속 존재한다. 그러나 그 질서를 뒷받침하는 것은 그 모호성이다. 우리의 성찰적이고 열정 없는 시대를 말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왕의 권력을 없애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조금씩 순전히 허구적인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면 모두가 기꺼이 그를 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무도 저명한 자들의 몰락을 가져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 탁월함이 실제로는 허구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면 모두가 기꺼이 찬사를 보낸다. 같은 방식으로 사람들은 기독교의 용어는 그대로 두려 하지만 그것이 아무런 실질적 의미도 담고 있지 않다고 몰래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강력한 왕을 원하지 않는다. 영웅적 해방자나 종교적 권위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기성 질서가 계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더 이상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찰을 통해 알고 있다. 그러고는 자신들의 태도가 아이러니적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착각하고 있다. 진정한 아이러니란 무엇인가? 부정적 시대에 열정을 은폐한 것이다. 마치 긍정적 시대에 영웅이 열정을 드러낸 것처럼 말이다. 진정한 아이러니는 희생을 수반한다. 아이러니의 최고 대가인 소크라테스가 죽임을 당한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성찰적 긴장은 궁극적으로 스스로를 하나의 원리로 구성한다. 열정적 시대에서 열정이 통합 원리인 것처럼, 매우 성찰적이고 열정 없는 시대에서는 시기심이 부정적 통합 원리이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윤리적 비난이 아니다. 성찰의 본질이 시기심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시기심은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개인 안에서 이기적으로 작용하고, 그를 둘러싼 사회도 이기적으로 만들어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개인 안의 시기심은 그가 열정적으로 결단하지 못하게 막는다. 한순간 어떤 개인이 성찰의 속박을 벗어나려 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즉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성찰이 그를 제지한다. 시기심이 사람의 의지와 힘을 가둔다. 먼저 개인은 자기 자신의 성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 그는 광대한 감옥에 갇혀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성찰이 만든 감옥이다. 자신의 성찰과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들의 성찰과도 관계를 맺게 된다. 이 두 번째 감옥에서 탈출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종교의 내면성을 통하는 것이다. 개인이 성찰 감옥의 허위를 아무리 명확하게 깨닫는다 해도, 깨닫는 것만으로는 탈출할 수 없다. 종교를 통해서만 탈출할 수 있다. 성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사람들이 이 진실을 깨닫지 못하게 막는다. 개인과 시대 모두가 폭군이나 사제나 귀족이나 비밀경찰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찰 자체에 의해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말이다. 성찰은 사람들에게 아첨하고 자만스러운 생각을 불어넣는다. 성찰의 가능성이 단순한 결단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생각을 말이다. 시기심은 개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탐욕스러운 어머니가 자식을 망치듯이 말이다. 그 안의 시기심이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것을 막는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시기심도 마찬가지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시기함으로써 그 속에 참여한다. 이 시기심은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다.
더 나아가면 시기심은 도덕적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원한이 된다. 밀폐된 공간의 공기가 유독해지듯이 말이다. 성찰이 사람들을 가두고, 어떤 행동이나 사건이 그 안으로 공기를 불어넣어 환기시켜주지 못하면 죄책감을 동반한 원한이 생겨난다. 성찰 속의 긴장 상태는 보다 더 높은 권능들을 모두 무력화한다. 그러면 저급하고 비열한 것들이 전면에 나온다. 그것들의 철면피함 자체가 힘처럼 보인다. 가짜 효과이다. 한편 저급하고 비열한 것들은 그 비열함 자체에 의해 보호받는다. 사람들의 시기심은 너무 비열해서 주목받지 않는다.
인간이 영구적으로 높은 곳에 머무를 수 없고, 계속해서 어떤 것이든 찬미할 수 없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근본적 진실이다. 인간 본성은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가장 열정적인 시대에도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의 우월자에 대해 시기어린 농담을 하기 좋아했다. 그것은 완전히 정상이고 전적으로 정당화된다. 위대한 자들을 비웃은 후에 다시 그들을 존경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놀이는 가치가 없다. 그런 방식으로 원한은 열정적 시대에도 배출구를 찾는다. 시대가 덜 열정적이라 해도, 사람들이 여전히 원한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 표현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러면 원한은 비록 위험하지만 어느 정도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에서 원한이 취한 형태는 도편추방(ostracism)이었다. 이는 탁월한 자들의 뛰어난 자질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대중의 자기방어적 노력이었다. 뛰어난 사람은 추방되었지만 모두가 그 관계가 얼마나 변증법적인지 이해했다. 도편추방은 탁월함의 표시였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정신으로 그 시대를 재현한다고 생각해보자. 완전히 하찮은 사람이 도편추방된다면? 그가 독재자가 되는 것보다 더 아이러니적일 것이다. 도편추방은 위대함의 부정적 표시이기 때문이다. 더욱 좋은 이야기는 이렇다. 사람들이 추방했던 그 사람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 없이는 더 이상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는 망명지에서는 완전한 신비가 될 것이다. 망명지 사람들은 그에게서 어떤 주목할 만한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기사』(The Knights)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타락의 최종 상태를 그린다. 저속한 군중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말이다. 티베트에서 달라이 라마의 배설물을 숭배하듯이, 그들은 자신들의 찌꺼기를 숭배한다. 그들의 대표자들 속에서 말이다. 민주주의에서 이것은 군주제에서 왕관을 경매에 부치는 것만큼 심한 타락이다. 그러나 원한이 여전히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한, 도편추방은 탁월함의 부정적 표시이다. 아리스티데스(Aristides)에게 투표했던 한 사람을 보라. 그는 말했다. "아리스티데스가 유일하게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리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추방에 투표했다고. 그는 아리스티데스의 탁월함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인정했다. 자신과 탁월함의 관계가 찬미의 행복한 사랑이 아니라 시기심의 불행한 사랑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탁월함을 깎아내리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성찰이 점점 더 우위를 차지하고 사람들이 나태해지면 원한은 더욱 위험해진다. 왜냐하면 원한이 더 이상 명확한 형태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확한 형태가 있어야 원한은 자기가 무엇인지 의식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명확성이 없다. 그러면 사람들은 비겁해지고 동요한다. 같은 일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한다. 처음에는 그저 농담이라고 한다. 그것이 통하지 않으면 모욕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안 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무시한다. 또 다른 방식도 있다. 재치 있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안 먹히면 주목할 만한 도덕적 풍자였다고 말한다. 그것도 실패하면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인다. 사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고.
원한은 이제 무성격(want of character)의 원리가 된다. 무성격이란 무엇인가? 극도의 비참함 속에서 교활하게 지위를 차지하려 하면서, 동시에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인정함으로써 말이다. 이런 무성격에서 생기는 원한은 진정한 탁월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탁월함이 실제로 탁월하다는 것을 말이다. 또한 그것은 탁월함을 부정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시기심을 자각하지도 못한다(도편추방의 경우처럼 말이다). 대신 탁월함을 끌어내리려 한다. 탁월함을 깎아내려 실제로 탁월하지 않게 만들려 한다. 원한은 기존의 모든 탁월함을 공격할 뿐 아니라 장차 나타날 탁월함의 싹마저 자른다.
원한이 자신의 지배력을 확립하는 과정, 그것이 바로 평준화다. 열정적 시대가 새로운 것을 세우고 오래된 것을 무너뜨리며 앞으로 돌진하는 동안, 성찰적이고 열정 없는 시대는 정반대로 행동한다. 모든 행동을 방해하고 억누른다. 그것은 평준화한다. 평준화는 조용하게, 수학적으로, 추상적으로 진행된다. 소란도 없고 격변도 없다. 사람들은 때때로 절망한다. 순간적 열정이 폭발한다. '불행이라도 일어났으면!'하고 갈망한다. 삶이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열정 뒤에 오는 무관심은 어떤 교란으로도 깨어나지 않는다. 토지를 평평하게 만드는 기술자처럼 그저 계속 평평하게 만들 뿐이다. 반란은 어떠한가. 가장 격렬할 때 반란은 화산 폭발과 같으며, 모든 소리를 덮는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이 최대에 이르면 죽음 같은 침묵이 찾아든다. 그 침묵 속에서 사람은 자신의 심장 박동을 들을 따름이다. 아무것도 그 침묵을 깨지 못한다. 모든 것이 그 속으로 삼켜진다. 사람들은 저항할 힘이 없다. 반란에는 지도자가 있다. 한 사람이 선두에 선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에는 지도자가 없다. 아무도 혼자 선두에 설 수 없다. 만약 누군가 선두에 선다면 그는 지도자가 된다. 그러면 그는 평준화되지 않는데 이는 모순이다. 각 개인은 자신의 작은 영역에서 평준화에 협력한다. 그러나 평준화 자체는 추상적 권력이다. 평준화 과정은 개인에 대한 추상의 승리이다. 고대에는 운명이 개인을 지배했다. 현대에는 평준화가 운명의 역할을 한다. 단, 평준화는 성찰을 통해 작용한다. 이것이 현대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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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평준화 과정과 종교적 개인주의
고대의 변증법은 지도력을 지향했다. (위대한 개인이 있고 대중이 있었다. 자유인이 있고 노예가 있었다.) 기독교 세계의 변증법은 재현을 지향했다. 다수가 자신의 대표자를 본다. '저 사람이 우리를 대표한다.' 이렇게 생각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대표자를 통해 자신들이 누구인지 의식하는 것이다. 현시대의 변증법은 평등을 지향한다. 그것의 논리적 귀결은 평준화이다. 비록 잘못된 귀결이지만 말이다. 즉 평준화란 모든 개인이 서로를 부정적으로 연결하여 부정적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평준화 과정의 의미는 명백하다. '세대'라는 범주가 '개성'이라는 범주보다 우위에 선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개인들의 총수가 있었다. 그들은 뛰어난 한 개인의 가치를 표현하기 위해 존재했다. 한 영웅이 만 명을 대표했다. 현시대는 가치의 표준이 바뀌었다. 이제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한 개인이 된다. 대략 열 명이 모이면 한 개인의 가치를 갖는다. 사람들은 중요해지려면 숫자만 모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고대에는 대중 속의 개인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뛰어난 개인이 그들 모두를 의미했다. 현시대는 수학적 평등을 지향한다. 모든 계급에서 몇 사람이 모이면 한 개인이 된다. 과거에는 뛰어난 개인은 자신에게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었다. 대중 속의 개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모두가 안다. 여러 사람이 모이면 한 개인을 만든다는 것을. 그래서 사람들은 일관되게 자신을 더한다. '함께 모인다'고 정중하게 말하지만 사실은 '숫자를 더한다'는 뜻이다. 가장 사소한 목적을 위해서도 그렇게 한다. 잠깐 스치는 변덕을 실행하기 위해 몇 사람이 모인다. 그러면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감히 그렇게 한다. 매우 재능 있는 사람조차 성찰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도 어떤 사소한 문제에서 하나의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종교의 무한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 다만 몇몇 사람들이 연합한다. 죽음을 맞이할 용기를 갖는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것이 각 사람이 개별적으로 용기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죽음보다 더한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혼자 무언가를 감행하려 할 때 성찰이 내리는 판단과 항의를 두려워한다. 개인은 더 이상 하나님께 속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자신의 예술이나 학문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면에서 추상에 속한다는 것을 의식한다. 성찰이 그를 그 추상에 복종시킨다. 농노가 영지에 속하듯이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여든다. 심지어 한 명 이상이 되는 것이 절대적 모순인 경우에도 모여든다. 연합의 긍정적 원리는 요즘 탐욕스럽고 사기를 꺾는 원리가 되었다. 성찰의 노예제 속에서 미덕들마저 빛나는 악덕(vitia splendida)으로 만드는 원리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이유는 하나뿐이다. 영원한 책임이 무시되었다. 하나님 앞에서 각 개인이 고유한 존재로 홀로 서야 한다는 것이 무시되었다. 그 지점에서 타락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동료들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 그래서 성찰은 개인을 평생 붙잡는다. 이 위기의 시작조차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 나아가지 않고 성찰적 관계 속에 삼켜진다.
평준화 과정은 개인의 행동이 아니다. 추상적 권력의 손에 있는 성찰의 작업이다. 따라서 그것을 지배하는 법칙을 계산할 수 있다. 마치 힘의 평행사변형에서 대각선을 계산하듯이 말이다. 평준화하는 개인은 자신도 그 과정에 삼켜진다. 그리고 계속 그렇게 된다. 평준화하는 개인은 이기적으로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대중 전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고. 왜냐하면 집단이 열정에 휩싸일 때는 개인들 각자가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힘이 생겨난다. 이것은 집단적 잉여다. 평준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잉여가 생겨난다. 평준화는 하나의 악마를 소환한다. 어떤 개인도 그 악마를 통제할 수 없다. 평준화라는 추상 자체가 개인에게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쾌감을 준다.
왜냐하면 집단이 열정에 휩싸일 때 개인 각자가 가진 것보다 더 큰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것이 잉여다. 평준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잉여가 있다. 어떤 악마가 소환된다. 어떤 개인도 그 악마를 통제할 수 없다. 평준화라는 추상 자체가 개인에게 순간적이고 이기적인 향유를 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을 파멸하겠다는 서류에 서명하고 있다. 열정은 재앙으로 끝날 수 있다. 그러나 평준화는 바로 그 자체로(eo ipso) 개인의 파괴이다. 어떤 시대도, 따라서 현시대도 이 과정의 회의주의를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멈추려 하자마자 평준화 과정의 법칙이 다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방법으로만 지연될 수 있다. 개인이 종교적 용기를 얻는 것이다. 자신의 개별적 종교적 고립에서 나오는 종교적 용기 말이다.
나는 한번 거리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목격했다. 세 사람이 한 사람을 가장 수치스럽게 공격했다. 군중은 서서 분개하며 지켜보았다. 여기저기서 불만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경꾼들 중 몇몇이 세 공격자 중 한 명에게 달려들어 넘어뜨리고 때렸다. 복수자들은 공격자들과 똑같은 방식을 사용했다. 여러 명이 한 명을 공격한 것이다. 여기서 내 개인적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나는 복수자들 중 한 명에게 갔다. 논리적으로 그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그와 그 문제를 논의하는 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그는 단지 이렇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런 악당은 세 명이 달려들어서 혼내줌이 마땅하다.' 싸움의 시작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상황이 더욱 우스꽝스럽게 보였을 것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들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지금 혼자 있는 사람)을 두고, '저놈은 셋이서 무리지어 하나를 때린 놈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그런데 정작 그 말을 하는 순간에는 상황이 정반대였다. 실제로는 여럿이 그 한 명을 때리고 있었다. 첫째로 이것은 모순 때문에 유머러스하다. 마치 경찰이 거리에 혼자 서 있는 사람에게 '순순히 흩어지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둘째로 이것은 자기모순이라는 유머 그 자체다. 자신이 바로 비난받는 그 짓을 하면서도 그 짓을 비난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인가? 이런 회의주의를 멈추려는 시도는 쓸모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도리어 나를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단일 개인도 평준화의 추상적 과정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개인이란 뛰어난 개인을 뜻한다. 즉, 지도자로서 대중을 이끄는 개인, 고대의 변증법적 범주인 '운명'에 따라 이해되는 영웅적 개인을 말한다. 왜 막을 수 없는가? 평준화는 부정적으로 더 높은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사도의 시대는 지나갔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나 연합도 그 추상적 권력을 막을 수 없다. 단순히 연합 자체가 평준화 과정에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들의 개성조차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왜냐하면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평준화는 구체적 차이를 깡그리 제거하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혼합되지 않은 인류만을 남긴다. 부정적 방식으로 말이다. 평준화의 추상적 과정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인간 종족의 자기연소처럼 말이다. 무역풍처럼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소비할 것이다. 무엇이 이 자기연소를 일으키는가? 마찰이다. 개인이 종교에 의해 구별된 존재로서 살기를 멈출 때 생기는 마찰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평준화 과정을 통해 각 개인은 자신을 위한 종교적 교육을 다시 한번 받을 수 있다. 평준화 과정의 엄격한 시험(examen rigorosum)이 그를 가장 높은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종교적인 태도로 도와줄 것이다. 누구를 위해서인가? 젊은이들을 위해서다. 그들의 인격이 아무리 강하게 탁월한 것에 매달린다 해도, 그들이 탁월하다고 존경하는 것에 매달린다 해도, 처음부터 평준화 과정이 악이라는 것을 깨닫는 젊은이들 말이다. 이기적 개인에서도 악이고 이기적 세대에서도 악이라는 것을 깨닫는 젊은이들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어떻게 될 수 있는가를 깨닫는 젊은이들, 만약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그것을 원한다면, 그것이 가장 높은 삶을 위한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젊은이들 — 그들에게 평준화의 시대에 사는 것은 실제로 교육이 될 것이다. 그들의 시대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그들을 종교적으로 발전시킬 것이다. 동시에 미학적으로 그리고 지적으로 교육할 것이다. 희극의 극치는 바로 이때 생겨난다. 개인이 '순수 인류'라는 무한한 추상 아래 직접 놓일 때 말이다. 중간 완충 장치 없이, 벌거벗은 채로 말이다. 과거에는 다양한 조직과 구체적 특수성들이 있었다. 그것들이 인간된 상황의 유머를 완화하고 비애를 강화했다. 그런데 평준화 과정이 그 모든 중간 매개물들을 파괴했다. 이제 개인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로 추상 앞에 홀로 선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희극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한 가지 사실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이다. 바로, 인간의 유일한 구원은 각 개인이 종교의 실재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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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평준화의 완성 그리고 신의 품으로 도약
이러한 깨달음은 그들의 열정에 불을 지필 것이다. 왜냐하면 역설적이게도 오류를 통해서 개인이 가장 높은 것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용기 있게 그것을 추구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은 계속되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한다. 마치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마 18:7)라고 했듯이, 평준화는 불가피하게 와야 한다. 비록 그것을 가져오는 자들에게는 화가 미친다고 해도 말이다.
종종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개혁은 각 사람이 자신을 개혁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그러나 현실은 달리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개혁은 영웅을 낳았기 때문이다. 영웅은 자신의 지위를 얻기 위해 하나님께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와 직접 연결됨으로써 그가 그토록 비싸게 치른 것을 헐값에, 실로 염가에 얻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얻지 못하는 것이 있다. 가장 높은 것, 그것만은 살 수 없다. 반대로 평준화의 추상적 원리는 살을 에일듯한 돌풍처럼 어떠한 개인과도 개인적 관계를 맺지 않는다. 모두와 똑같이 추상적 관계를 가질 따름이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고통받거나 그들을 돕는 영웅이 없다. 모두의 과업 감독은 평준화 과정이다. 그것이 그들의 교육을 맡는다. 그리고 평준화로부터 가장 많이 배우고 스스로 가장 위대하게 되는 사람은 뛰어난 사람이나 영웅이 되지 않는다(뛰어난 자나 영웅은 그 자체로 평준화를 가로막는다. 그러나 평준화 과정은 끝까지 철저하게 일관되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걸출함을 실천하거나 영웅이 되려고 하지 않고, 외려 그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그는 평준화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사람일 따름이고, 그 자신 외에 다른 누구도 아닌 자다. 완전히 평등하다는 의미에서.
종교의 관념이 바로 이러하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 아래 평등주의적 질서는 엄격하고., 겉보기에 이득은 매우 적다. 물론 겉보기에 말이다. 개인은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종교의 실재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제로서 자신의 청중이 되고, 저자로서 자신의 독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가장 높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 이것이 가장 높은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 우리 모두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만약 개인이 이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는 성찰의 감옥에서 탈출하지 못할 것이다. 한순간 착각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재능으로 인해 자신이 평준화를 주도하고 있다는 착각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평준화 과정 속으로 침몰할 것이다. 홀거 단스케(Holger Danske)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부르는 것은 소용없다. 그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사람들이 그런 영웅들을 다시 갈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적으로 나태함이 때문이다. 세속적 조급함 때문이다. 가장 높은 것을 값비싸게 직접 사기보다는 무언가를 헐값에 중고로 사려는 조급함 말이다. 한 사회 뒤에 나타날 또 다른 사회를 설립하는 것은 무용하다. 오히려 해롭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평준화에 대항하려고 사회를 만들지만, 사실 모든 사회 위에 평준화 과정이라는 더 높은 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근시안적인 사회 구성원들은 이것을 보지 못한다.
과거에 개성의 원리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형태로 나타났다. 한 세대는 뛰어나고 탁월한 개인을 통해 자신을 표현했다. 그 개인 주위로 종속적 개성들이 집단을 이룬다. 그러나 영원한 진리 속에서 개성의 원리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다. 현시대가 가진 추상성과 평등을 이용하는 것이다. 평준화 과정을 통해 각 개인을 종교적으로 발전시켜 진정한 사람으로 만든다. 평준화 과정은 일시적인 것들에는 강력하지만 영원한 것들에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성찰은 덫이다. 사람들을 가둔다. 그러나 열정의 '도약'이 일어나고 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성찰은 이제 사람을 영원으로 끌어당기는 올가미가 된다. 성찰은 존재하는 가장 강경한 채권자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성찰은 교활하게 움직여왔다. 가능한 모든 삶의 관점들을 장악해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종교적이고 영원한 삶의 관점만은 장악할 수 없다. 반대로 성찰은 눈부신 광채로 사람들을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이끌고, 과거의 모든 것을 상기시킴으로써 사기를 꺾는다. 그러나 깊은 곳으로 도약함으로써 사람은 스스로 돕는 법을 배우고, 자기 자신만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비록 사람들은 그를 비난한다고 해도 말이다. 사람들은 그가 도움을 받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오만하고 자만스럽다고, 또한 사람들을 돕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이기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사실 그는 사람들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교활하게 기만하지 않으려는 것일 따름이다. 다시 말해 그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각자 홀로 서야 할 운명을 바로보게 하는 것이다.
화제로 지정된 대화

russist
제8장: 공중(公中), 평준화의 유령
내가 여기서 제시한 것을 두고 누군가 불평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모두에게 이미 알려져 있고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나의 대답은 이렇다. 불평할테면 그렇게 하라. 그런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는 탁월하다는 인정을 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나의 의견을 알게 되는 것에도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경우만 예외다. 어떤 의미에서 나의 의견이 나로부터 빼앗겨서 어떤 음험한 집단이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는 반대한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 경향은 계속 평준화를 향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 자체가 모두 평준화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변화들은 어느 것도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았고, 각각 어느 정도 구체적 실재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한 위대한 인물이 다른 위대한 인물을 공격하여 둘 다 약화될 때, 평준화 과정이 진행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 의해 무력화될 때, 혹은 그 자체로는 약한 사람들이 결사하여 탁월한 자보다 더 강해질 때도 마찬가지다. 평준화는 또한 특정한 계급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성직자, 부르주아, 농민, 혹은 민중 자체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시작일 따름이다. 추상적 권력이 개별성이라는 구체적 영역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첫 걸음인 것이다.
모든 것을 똑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리려면 먼저 하나의 유령을 확보해야 한다. 그것의 정신, 괴물 같은 추상,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도 아무것도 아닌 무언가, 신기루 — 그 유령이 바로 공중(公衆, the public)이다. 오직 열정 없는 성찰의 시대에만 이러한 유령이 횡행할 수 있다. 언론(the Press)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언론 자체가 추상이 되기 때문이다. 열정과 소요와 열광의 시대에는 공중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이 무익한 이념을 실현하려 하고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고 파괴하려 할 때조차도 그렇다. 그런 시대에는 당파들이 있다. 당파들은 구체적이며 사람들은 실제로 모여서 행동한다. 그러한 시대에 언론 역시 당파에 따라 분열되어 있으므로 구체적 성격을 띤다. 반면에 열정 없이 앉아서 성찰만 하는 시대는 공중이라는 유령을 키워낸다. 마치 앉아서 일하는 전문인들이 자기 앞에 나타나는 환상적 착각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듯이 말이다. 공중이야말로 진정한 '평준화의 주인'(Levelling Master)이다. 실제로 '평준화를 수행하는 자'(leveller)가 아니다. 왜냐하면 평준화가 대략적으로나마 성취될 때는 항상 무언가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공중은 괴물 같은 무(無)이기 때문이다. 공중은 고대에는 있을 수 없었던 개념이다. 왜냐하면 고대에는 민중(the people)이 전체로서(en masse, in corpore) 발생하는 어떤 상황에든 참여했고, 개인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졌으며, 더욱이 개인은 직접 그 자리에 현존하여 즉각 그의 결정에 대한 갈채나 비난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언론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결속하려는 의지가 약해져서 구체적인 실재가 생명력을 잃는 바로 그때, '공중'이라는 추상을 창조한다. 공중은 비실재적 개인들로 구성되는데, 이 개인들은 결코 통합되지 않았고 통합될 수도 없으며, 실제 상황이나 조직 속에서 통합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들이 전체로서 결합되어 있다고 여긴다.
공중은 모든 민중들을 합친 것보다 더 수가 많은 무리이지만, 결코 검열될 수 없는 집단이며, 심지어 아무것도 대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가 성찰적이고 열정이 없어서 모든 구체적인 것을 파괴할 때, 공중은 모든 것이 되고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개인을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내동댕이 치는 방식을 보여준다.
개인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실재 시간 속의 실재 순간이다. 실재 사람들과 함께 동시에 일어나는 실재 상황이며, 그들 각자가 진짜로 무언가인 바로 그 사람들이다. 그러나 공중의 존재는 상황도 동시성도 만들어내지 않는다. 언론의 개별 독자는 공중이 아니며, 점차 많은 개인들이, 심지어 그들 모두가 언론지를 읽는다 해도 동시성은 결여되어 있다. 공중을 한데 모으는 데 수년이 걸릴 수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공중은 거기 없을 것이다. 개인들은 공중을 형성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 자체가 비논리적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추상은 개인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밀쳐낸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순간에 아무 의견도 없는 사람은 다수의 의견을, 혹은 논쟁적이라면 소수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다수와 소수 모두 실재 사람들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그들을 따름으로써 도움을 받는다. 반면에 공중은 추상이다.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의 의견을 채택한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과 같은 위험에 노출될 것이며, 그 의견이 잘못된 길로 인도한다면 자신과 함께 잘못된 길로 인도될 것임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공중과 같은 의견을 채택하는 것은 기만적인 위안이다. 왜냐하면 공중은 오직 추상적으로(in abstracto)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다수도 공중만큼 확신에 차서 옳고 승리할 것이라고 믿은 적이 없지만, 그것은 개인에게 큰 위안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중은 모든 개인적 접촉을 금지하는 유령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오늘 공중의 의견을 채택하고 내일 야유를 받는다면, 그는 공중에 의해 야유를 받는 것이다.
한 세대나, 한 민족이나, 민중의 집회나, 모임이나, 한 개인은 책임을 진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만약 그들이 변덕스럽고 불성실하다면 수치심을 느낀다. 그러나 공중은 공중으로 남는다. 한 민족, 집회나 한 사람이 너무 크게 변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들은 이제 예전의 그 사람들이 아니다." 반면에 공중은 정반대의 의견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같은 공중임을 주장할 수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바로 이것이 개인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이 추상이, 이 추상적 훈련이 개인을 형성하는 것이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 개인이 이미 자신의 내적 삶을 통해 형성되지 않았어야 하고, 둘째, 그가 그 과정에서 무너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는가? 공중은 개인에게서 모든 외적 지지대를 제거함으로써, 그가 최고의 종교적 의미에서 자기 자신과 신과의 관계만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도록 만든다. 공중과 합의를 추구하는 대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공중은 삶에서 상대적이고 구체적이고 특수한 모든 것을 파괴하기 때문에 개인은 오직 절대적인 것, 즉 신 앞에 선 자기 자신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현대 세계와 고대 사이의 궁극적 차이다. 고대에서는 '전체'가 구체적이었다. 구체적인 '전체'는 개인을 지탱했고 교육했다(비록 그를 궁극적으로 완성시키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현대에서 '전체'는 추상이다. 추상으로서의 '전체'는 개인을 지탱할 수 없고, 오히려 추상적 평등에 의해 그를 밀쳐낸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이 밀쳐냄이 — 만약 그가 그 과정에서 무너지지 않는다면 — 개인을 궁극적으로 완성되도록 돕는다. 여기서 고대와 현대의 대비가 분명해진다. 고대에 그토록 지속되었던 삶에 대한 권태(taedium vitae)는 탁월한 개인이 존재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처럼 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현대의 희망은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누구나, 종교적으로 말해서, 모든 사람이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성취한 것이다.
공중은 민족이 아니다. 세대가 아니며, 공동체도 사회도 아니다. 특정한 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들은 구체적인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공중에 속한 사람은 진정한 헌신을 하지 않는다. 어쩌면 하루 중 몇 시간 동안은 그가 공중에 속할 수도 있는데, 그 순간에 그는 아무도 아니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실제로 누군가일 때, 그는 공중의 일부를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들로,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의 개인들로 구성된 공중은 일종의 거대한 무언가이며, 추상적이고 황량한 공허이고, 모든 것이자 무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초 위에서 누구나 공중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공중은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로마 교회가 이교도 지역(in partibus infidelium)에 주교들을 임명하여 환상적으로 그 경계를 확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지어 거리에서 싸구려 구경거리를 파는 술취한 수병조차도, 변증법적으로는 위대한 사람과 똑같이 공중을 주장할 권리를 가진다.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보잘것없는 1 뒤에 '공중'이라는 수많은 0을 갖다 붙여서 마치 큰 숫자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공중은 모든 것이자 무이며, 모든 권력 중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무의미하다. 사람들은 공중의 이름으로 한 민족 전체에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도 공중은, 아무리 하찮은 사람일지라도 단 한 사람의 실재하는 인간보다 사소할 것이다. '공중'이라는 자격은 성찰의 시대가 벌이는 기만적인 곡예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 곡예는 개인에게 아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식으로 그가 이 괴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하고, 그와 비교하면 구체적 실재들이 빈약해 보이게 만든다. 공중은 이해의 시대가 만들어낸 동화이다. 상상 속에서 개인을 그의 민중 위의 왕보다 위대한 무언가로 만든다. 그러나 공중은 또한 무시무시한 추상이기도 하다. 그것을 통해 개인이 종교적으로 형성되거나 — 아니면 침몰할 것이다.
언론은 추상이다(왜냐하면 신문은 민족의 구체적 부분이 아니며 오직 추상적 의미에서만 개인이기 때문이다). 언론은 시대의 열정 없고 성찰적인 성격과 결합하여 그 추상적 유령을 만들어낸다. 공중이 바로 그것이며, 공중은 다시 실제로는 평준화의 권력이다. 결과적으로 언론은 중요하다. 물론 언론이 평준화를 통해 개인을 종교로 몰아간다는 부정적인 종교적 의미에서도 중요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도 중요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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