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12월, 파이 이야기

D-29
동물에게 인간의 특징과 감정을 투사하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브라질 밀림에서 고개를 들다가 쉬고 있는 나무늘보를 볼 때면, 물구나무서서 명상하는 요가 수행자나 기도에 몰두한 은자 앞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 과학적인 접근법으로는 닿을 수 없는 상상력 넘치는 삶을 사는 현자 앞에 있는 느낌이랄까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그때 노신사가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으면, 젊은이는 신을 믿게 될 거요.”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작가 노트 중에서,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직장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그저 넥타이가 올가미고, 거꾸로이긴 해도 조심하지 않으면 목이 졸릴 거라는 것밖에.
파이 이야기 - 개정판 1부 토론토와 폰디체리 중에서,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사람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변할 수 있다. 때론 아주 많이 변해서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심지어 이름까지 바뀔 수 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40,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모든 생물은 광기가 있어서, 때론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방식으로 행동한다. 이런 미치광이 기질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것이 적응의 원천이기도 하니까. 그런 기질이 없으면 어떤 종도 생존하지 못할 것이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69-70,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이제 아시겠지. 사람이 동물원의 사자 굴에 떨어졌을 때, 사자가 몸을 찢는 것은 허기 때문이 아니고 -동물원에는 먹이가 풍부하다- 피에 굶주려서도 아니고, 자기 영역을 침범당했기 때문임을.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72,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제가 위아래 사이에 있는 둘째라서 그런지 영역 침범에 무척 예민한데요. 이 부분 공감했어요.
그는 수줍은 사람이다. 그는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배웠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27,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서커스단의 사자들은 지도자가 힘없는 인간이라는 걸 알아도 상관하지 않는다. 새끼 사자는 어미가 개란 걸 알면 겁이 나서 졸도할 것이다. 어미가 없어질까 봐. 어리고 피가 따뜻한 것들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란 어미가 없는 것이니까.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35,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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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동물들은 가차 없는 서열체계의 지배를 받는다. 언제나 공포를 느끼고, 먹잇감은 부족하고, 영역을 사수해야 하고, 기생충을 참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야생동물들은 공간도 시간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론적으로는 — 즉 단순한 물리적인 가능성 면에서 — 동물은 인습과 자기 종족에게 지워진 경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인간도 마찬가지 아닌가. 예컨대 평범한 관계 — 가족, 친구, 사회 — 속에 살던 상점 주인이, 주머니에 든 잔돈푼만 갖고 모든 걸 버리고 입은 그대로 자기 인생에서 걸어 나간다고 가정해보자. 굉장히 대담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도 낯선 곳을 배회하지는 않는다. 하물며 인간보다 기질이 더 보수적인 동물이 그럴 수 있을까?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동물은 원래 그렇게 보수적이다. 심지어 ‘반동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동물은 아주 작은 변화에도 당황한다. 동물은 며칠이고 몇 달이고 똑같기를 바란다. 놀라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자유롭게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막 움직일 거 같은 동물들이 더 보수적이라고 말하는 부분, 저도 인상적이었어요!
모든 동물원을 폐쇄한다 해도 난 상관없다(황폐한 자연에서 야생동물이 살아남을 수 있기를 소망할밖에). 이제는 동물원이 사람들에게 은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종교도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자유에 대한 어떤 환상이 그 둘을 오염시킨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안녕하세요~오늘부터 참여할게요 (맥주님 밑에 댓글이라니 영광입니다! :))
1996년 봄, 내 두 번째 책인 장편소설이 캐나다에서 출간됐다. 성공하지 못했다. 비평가들은 당황하거나, 썰렁한 칭찬을 하는 정도였다. 또 독자들은 이 책을 무시했다. 어릿광대나 곡예사 노릇까지 불사하며 언론 홍보에 주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책은 꿈쩍하지 않았다. 내 책은 동네 야구에 출장을 기다리는 후보 선수 아이처럼 서점 서가에 덩그러니 꽂혀 있었다. 내 책은 키만 껑충할 뿐 운동은 못하는 어린이 선수 같았다. 책은 곧 조용히 자취를 감췄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지금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는 대단한 성공작이다 영화로도 뮤지컬로도 재창조되어 세계 곳곳의 사람들과 만난다 그런 그조차 어릿광대나 곡예사처럼 언론 홍보를 불사함에도 출장을 기다리는 후보선수처럼 그의 책은 서점의 서가에 덩그라니 꽂혀있다 조용히 사라지는 경험이 있었다니 왠지 더 친숙하게 느껴진다
내게 그곳은 지상낙원이었다. 동물원에서 자라면서 좋은 기억밖에 없다. 난 왕자같이 살았다. 어느 토후국 왕의 아들이 이렇게 넓은 땅에서 뛰어놀았을까? 어느 궁전에 그런 동물원이 있었을까? 어린 시절, 내 자명종은 당당한 사자들이었다. 사자들은 스위스 시계같이 정확하진 않아도 새벽 5시 반에서 6시 사이에 반드시 포효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야생동물들은 가차 없는 서열체계의 지배를 받는다. 언제나 공포를 느끼고, 먹잇감은 부족하고, 영역을 사수해야 하고, 기생충을 참아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야생동물들은 공간도 시간도 자유롭지 못하고, 관계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이론적으로는—즉 단순한 물리적인 가능성 면에서—동물은 인습과 자기 종족에게 지워진 경계를 무시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내 이름은 피신 몰리토 파텔입니다 이름의 철자 밑에 두 줄을 그었다. 간단히 부르면 파이 파텔 인심 쓰는 셈 치고, 이렇게 덧붙였다. π = 3.14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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