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12월, 파이 이야기

D-29
“아저씨의 종교는 어떤 건가요?” 내가 물었다. 그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사랑받는 사람들에 대한 종교지.”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왜 사람들은 이동할까? 무엇 때문에 뿌리를 내리고, 모르는 게 없던 곳을 떠나 수평선 너머 미지의 세계로 향할까? 왜 스스로를 거지처럼 느끼게 만드는 겉치레투성이인 곳에 오르려 할까? 왜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고 힘겨운 이국의 정글로 들어갈까? 어디서나 대답은 하나겠지. 사람들은 더 나은 삶을 소망하며 이주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대리인으로 미국인 세 사람이 왔다. 진짜 미국인을 본 적이 없어 아주 궁금해했었다. 그들은 분홍색 피부에 뚱뚱하고 다정했다. 능력도 뛰어날 뿐 아니라 땀도 비 오듯 흘렸다. 그들은 우리 동물을 검사했다. 동물들을 잠재워놓고, 심장에 청진기를 대보고, 소변과 배설물을 별점이라도 보는 듯이 재보곤 했다. 주사기로 피를 뽑아 분석하고, 등에 난 혹을 만져보고, 이빨을 두드려보고, 손전등을 눈에 비춰보았다. 살을 꼬집어보고, 털을 쓰다듬고 당겨봤다. 불쌍한 동물들. 미군으로 징병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미국인들은 우리에게 활짝 웃으며, 손이 으스러져라 악수를 했다. 그 결과 동물들도 우리처럼 서류 작업에 착수했다. 그들은 미래의 ‘미국 놈’이, 우린 미래의 ‘캐나다 놈’이 될 터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그는 ‘프티 세미네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었다. 토론토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와 형제애를 느꼈다. 무신론자들이 다른 신앙을 가진 형제자매임을, 그들의 말이 모두 믿음의 말임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도 선생님 때문이었다. 나처럼 그들 역시 이성이 이끄는 곳까지 간다. 거기서 뛰어오른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정직하게 말해야겠다.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무신론자가 아니라 불가지론자다. 한때는 의심도 쓸모 있는 법. 우리 모두 겟세마네 동산(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 마지막으로 기도했던 곳 — 옮긴이)을 거쳐야 한다. 예수가 의심했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예수가 기도하며 분노에 찬 밤을 보냈으니, 십자가 매달려 ‘주여, 주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울부짖었으니, 우리도 의심해도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나아가야 한다. 의심을 인생철학으로 선택하는 것은, 운송수단으로 ‘정지’를 선택하는 것과 비슷하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분위기보다는, 그가 거기 있다는 -열린 마음으로 인내심 있게 -사실이 본능적으로 이해된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그와 대화하고 싶을 경우에 대비해서 거기 있다는 것. 영혼의 문제든, 무거운 마음이든, 어두운 양심이든, 무슨 말을 해도 그가 사랑으로 들어주리라는 것. 그가 맡은 일은 사랑하는 일이었고, 그는 최선을 다해서 위로해주고 길잡이가 되어줄 터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내 마음을 훔쳤고, 전율하게 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저도 그래서 교회는 더 이상 가지 않지만, 하늘에 계실 것만 같은 그 분께는 항상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무언가를 붙잡지 않고, 온전히 혼자 선다는 건 저에겐 너무 힘든 일이거든요. 그것이 종교가 됐든 뭐가 됐든 그것을 버팀목으로 버텨야 제가 오~래오래 잘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분의 답을 기다리지 않아요. 그냥 들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
이게 제가 생각한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믿는 이유랑 빅비슷해 더 인상깊게 다가왔어요. 길잡이로 여겨지는 누군가 나의 말을 사랑으로 들어준다는 것.
죽음은 생물학적인 필요 때문에 꼭 달라붙는 것이 아니다ㅡ시기심 때문에 달라붙는다. 삶이 워낙 아름다워서 죽음은 삶과 사랑에 빠졌다. 죽음은 시샘 많고 강박적인 사랑을 거머쥔다. 하지만 삶은 망각 위로 가볍게 뛰어오르고, 중요하지 않안 한두 가지를 놓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20-21,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동물원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동물은 '다른 곳으로'가 아니라 '뭔가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이다. 자기 영역 내 두려움을 주는 게 있으면 ...도망칠 태세를 취한다. ...동물이 무엇보다 꺼리는 게 있다면 바로 '미지의 세계'다. 달아난 동물은 처음으로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은 곳에 숨게 마련이다. 그 동물들은 그들과 안전지대로 여기는 곳 사이에 끼어드는 대상에게만 위험할 뿐, 다른 것은 해치지 않는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70,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내 아랍어 실력은 별로 뛰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소리를 좋아했다. 이해는 못 해도, 연구개음이 터져 나오고 길게 늘어지는 모음이 고운 시냇물처럼 흘러갔다. 나는 시간의 마법에 걸린 채 오래오래 이 시냇물을 들여다보았다. 한 사람의 목소리라 넓지는 않았지만, 우주처럼 깊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98-99,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달아나고 싶은 이유가 뭐든, 미쳤든 아니든, 동물원을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점이 있다. 동물은 ‘다른 곳으로’가 아니라 ‘뭔가로부터’ 달아난다는 사실이다. 자기 영역 안에 두려움을 주는 게 있으면 — 적의 침입, 우두머리인 동물의 공격, 놀라게 하는 소음 — 도망칠 태세를 취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서열은 동물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서열은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하는지 알게 해준다. 언제 먹을 수 있는지, 어디서 쉴 수 있는지, 어디서 마셔야 하는지도 서열로 파악된다. 동물은 서열을 파악할 때까지는 불안한 무정부 상태의 삶을 산다. 초조하고 위험한 상태로 남는다. 서커스 조련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동물들끼리의 서열은 격렬한 힘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다. 헤디거는 “두 생물체가 만나면, 상대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이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인식된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서열은 싸움으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환경에서의 만남만으로도 충분히 서열이 정해진다”라고 했다. 현명한 동물학자의 견해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화제로 지정된 대화
■■■■<파이 이야기> 12월 2주차 (2부. 태평양) ■■■■ 함께 읽기 기간: 12월 8일(월) ~ 12월 14일(일) 지난주, 우리는 주인공 파이의 특별한 유년 시절이 펼쳐진 폰디체리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이제 12월 2주차에는 이야기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2부, 태평양를 함께 읽습니다. 2부 길이가 긴 만큼 한 주에 다 읽지 못하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요, 3주차까지 조금 넉넉히 시간을 배분해 놓았습니다. 2주 정도면 아무래도 조금 여유있는 독서를 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부가 파이가 세상에 맞설 내면의 무장을 하는 과정이었다면, 2부는 그 모든 신념과 지식이 가장 극한의 환경에서 시험대에 오르는 장입니다.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향하던 배가 침몰하고, 파이는 벵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단둘이 구명보트에 남겨집니다. 이번 주 독서는 극한의 고립 속에서 생존 본능이 어떻게 신념의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파이가 물고기를 잡고, 호랑이를 길들이고, 폭풍우를 견뎌내는 모든 과정은 단순한 '버티기'를 넘어섭니다. 강렬하고 매혹적인 이 모험의 바다로 깊숙이 뛰어들어 봅시다. 📢 참고: <파이 이야기>의 경이로운 모험은 2012년 영화로 제작되어 아카데미 감독상 등을 수상하며 시각적인 명작으로 평가받았으며, 최근에는 섬세하고 역동적인 무대 연출을 통해 뮤지컬로도 성공적으로 재탄생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독서 후 다른 장르로의 변주를 함께 감상해 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2-1. 어떤 점이 인상 깊으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자유롭게 들려 주세요. 책 내용과 상관은 없지만 연관되어 떠오른 다른 생각들도 좋습니다.
영화도 볼 때마다 신비롭고, 환상적이고, 배우들도 연기를 잘하고, 느낄 만한 점이 많았지만 책만큼은 아니었습니다. 재독하고, 여러분이 수집해 주신 문장도 읽으면서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무인도에서(먹을 건 제발 존재하길...) 누워서 이 책 읽다 상상했다가, 다시 몇 페이지 읽다가 종교에 대해 생각했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졌습니다.
파이 이야기의 2부 태평양은 너무 무섭고 답답하고 슬픈 상황입니다 열여섯살 파이 파텔이 혼자 이 현실을 겪어내는 모습이 많이 힘드네요 초반부 하이에나의 묘사. 하이에나가 얼룩말을 잡아먹는 장면은 너무 잔인하고 끔찍해서 잔상이 자꾸 떠올라 어린 아이들이 이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신기했습니다
2-2. 제가 개인적으로 모험적인 이야기 보다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로빈슨 크루소나 톰 소여의 모험보다 비밀의 화원이나 키다리 아저씨 같은 (관계지향적이랄까요) 이야기를 좋아했는데요. 2부를 읽으면서 모험 이야기가 주는 매력을 느꼈답니다! 특히 제가 바닷가 지역에서 살았던 터라 바다에서 생존하는 모습이 무척 생동감 있었어요. 바다와 하늘을 표현한 문장들도 멋졌구요.
화제로 지정된 대화
2-2.마음에 남은 문장을 적어주세요.(댓글창 아래 있는 문장수집 기능을 이용해 주시면 더욱 좋습니다.)
하이에나가 먹지 않는 게 뭘까라는 의문이 생길 지경이다. 그들은 같은 종족이 죽으면, 혐오감이 가시기를 하루쯤 기다렸다가 그 사체도(귀와 코는 애피타이저로 물어뜯고, 그 나머지를) 먹는다. 심지어 자동차에도 달려든다—전조등, 배기관, 사이드미러 할 것 없이. 하이에나가 먹지 못한다면, 그것은 위액 분비가 안 돼서가 아니라 씹는 힘 때문이다. 하이에나는 가공할 턱의 힘을 가졌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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