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12월, 파이 이야기

D-29
이렇게 공포심은 우리 몸에 깃들고, 몸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이미 인식한다. 벌써 폐는 새처럼 날아갔고, 창자는 뱀처럼 스멀스멀 빠져나갔다. 이제 혀가 주머니쥐처럼 축 늘어지고, 턱은 그 자리에서 덜컹댄다. 귀는 들리지 않는다. 근육이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처럼 떨리고, 무릎은 춤추듯 흔들린다. 심장은 지나치게 경직된 반면 괄약근은 지나치게 이완된다. 몸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분이 서로 떨어진다. 눈만 제대로 작용한다. 눈은 언제나 공포심에 쏠려 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무지는 최악의 의사인 반면, 휴식과 잠은 최고의 간호사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불필요한 노력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게으른 마음은 주저 앉게 할 수 있으므로, 뭐든 가벼운 것으로 정신을 분산시켜야 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었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불쌍한 죽은 영혼을 기리며 마구 흐느꼈다. 감각이 있는 것을 죽이기는 처음이었다. 이제 난 살생을 저질렀다. 이제 카인 같은 죄인이었다. 책벌레에 신앙심 깊던 열여섯 살 순진한 소년이 이제 손에 피를 묻혔다.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짐이다. 감각을 느끼는 것은 미물이라도 신성하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이 날치를 잊지 않는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한데 사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아주 단순하고 잔혹하다. 인간은 무슨 일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살해행위라 할지라도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날이 밝았다. 아주 빠르게. 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동이 텄다. 하늘 구석에서부터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공기에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다가 주위에 커다란 책처럼 펼쳐졌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80,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표현이 너무 예뻐서 좋았어요. 잔잔한 바다를 펼친 책으로 비유하다니...!
내 안에서 충격과 혐오와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하이에나에게 강한 증오심을 느꼈다. 녀석을 죽일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동정심도 가려져버린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81,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하지만 바다에서의 두 번째 밤은 내 기억에 유독 고통스럽게 남아 있다. 평범한 아픔도 더 심하게 느껴졌고, 흐느낌과 슬픔과 정신의 고통으로 낙심했던 그 밤은 첫날의 초조감과는 달랐다. 감정을 온전히 느낄 힘이 남아 있었기에 후에 맞은 밤들과도 달랐다. 무시무시한 저녁이 가고 무시무시한 밤이 이어졌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86,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제가 종종 울적할 때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힘이 남아도는 구나.. 별 것도 아닌 것들에 자꾸 연연하고... 아무 생각 못하게 굴려져야(?) 정신차리지 싶은 마음이요. '감정을 온전히 느낄 힘'이 있기에 더 힘들 수 있다는 점이 와닿았어요.
형을 잃는 것....... 함께 나이 드는 경험을 하고, 형수와 삶의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를 칠 조카들을 선사해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주고, 가지를 받쳐주는 기둥처럼 나를 든든히 받쳐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머리 위의 태양을 잃는다는 것.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나는 방수포에 누워서, 양팔에 얼굴을 묻고 밤새 슬퍼하며 울었다. 하이에나는 밤새 얼룩말을 먹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상황도 다르게 보이네요. 흡.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247,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연말이고 곧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겨둬야 할 문장이겠어요. 그냥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조난자로 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만,, 저도 참 다크하네여...
서두르는 것은 전형적인 기독교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급히 서두르는 종교다. 이레 만에 창조된 세상을 보라. 아무리 상징적이라고 하지만, 창조는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한 영혼을 위한 싸움도 수세기 넘게 여러 대에 걸쳐서 계속될 수 있는 종교 속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기독교의 빠른 해결은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힌두교가 갠지스강처럼 표표히 흐른다면, 기독교는 토론토의 출퇴근 시간처럼 부산스럽다. 기독교는 제비처럼 날렵하고, 구급차처럼 급한 종교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이번에는 두려움 없이 교회에 들어갔다. 이제 내 집이었으니까. 살아 계신 예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언덕을 달려 내려가, 오른쪽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제 내 마음을 끄는 나사렛 예수를 내 앞길에 끼워준 크리슈나 신에게 감사할 차례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신은 ‘궁극적인 실체’이자 존재를 떠받치는 틀이건만, 마치 신의 힘이 약해서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듯 나서서 옹호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자들은 정작 나병에 걸려 동전푼을 동냥하는 과부는 못 본 체 지나고, 누더기 차림으로 노숙하는 아이들 곁을 지나면서도 ‘늘 있는 일’로 치부한다. 하지만 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점을 보면 난리라도 난 것처럼 군다. 얼굴을 붉히고 숨을 몰아쉬면서, 화를 내며 말을 쏟아낸다. 얼마나 분노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 단호함이 겁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제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느꼈던 딜레마가 저거였는데, 이젠 제 맘대로 저꼴 보러 교회 안 가도 돼서 일요일 아침이 상쾌합니다. 일요일 아침만 되면 교회 가야 해서 마음이 무거웠거든요. 어쩜 제가 잘못된 교회들만 다녔던 걸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코로나가 끝난지가 언젠데 교회는 언제 다시 올 거냐고 물으실 때마다 "다음달에 갈게요~"라고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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