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12월, 파이 이야기

D-29
제가 종종 울적할 때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힘이 남아도는 구나.. 별 것도 아닌 것들에 자꾸 연연하고... 아무 생각 못하게 굴려져야(?) 정신차리지 싶은 마음이요. '감정을 온전히 느낄 힘'이 있기에 더 힘들 수 있다는 점이 와닿았어요.
형을 잃는 것....... 함께 나이 드는 경험을 하고, 형수와 삶의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를 칠 조카들을 선사해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주고, 가지를 받쳐주는 기둥처럼 나를 든든히 받쳐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머리 위의 태양을 잃는다는 것.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나는 방수포에 누워서, 양팔에 얼굴을 묻고 밤새 슬퍼하며 울었다. 하이에나는 밤새 얼룩말을 먹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상황도 다르게 보이네요. 흡.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247,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연말이고 곧 새해를 맞이하면서 새겨둬야 할 문장이겠어요. 그냥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조난자로 사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만,, 저도 참 다크하네여...
서두르는 것은 전형적인 기독교의 풍경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는 급히 서두르는 종교다. 이레 만에 창조된 세상을 보라. 아무리 상징적이라고 하지만, 창조는 정신없이 이루어졌다. 한 영혼을 위한 싸움도 수세기 넘게 여러 대에 걸쳐서 계속될 수 있는 종교 속에서 태어난 사람에게, 기독교의 빠른 해결은 정신을 아찔하게 한다. 힌두교가 갠지스강처럼 표표히 흐른다면, 기독교는 토론토의 출퇴근 시간처럼 부산스럽다. 기독교는 제비처럼 날렵하고, 구급차처럼 급한 종교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이번에는 두려움 없이 교회에 들어갔다. 이제 내 집이었으니까. 살아 계신 예수님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언덕을 달려 내려가, 오른쪽에 있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이제 내 마음을 끄는 나사렛 예수를 내 앞길에 끼워준 크리슈나 신에게 감사할 차례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신은 ‘궁극적인 실체’이자 존재를 떠받치는 틀이건만, 마치 신의 힘이 약해서 자기가 도와야 된다는 듯 나서서 옹호하는 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자들은 정작 나병에 걸려 동전푼을 동냥하는 과부는 못 본 체 지나고, 누더기 차림으로 노숙하는 아이들 곁을 지나면서도 ‘늘 있는 일’로 치부한다. 하지만 신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점을 보면 난리라도 난 것처럼 군다. 얼굴을 붉히고 숨을 몰아쉬면서, 화를 내며 말을 쏟아낸다. 얼마나 분노하는지 놀라울 뿐이다. 그 단호함이 겁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제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면서 느꼈던 딜레마가 저거였는데, 이젠 제 맘대로 저꼴 보러 교회 안 가도 돼서 일요일 아침이 상쾌합니다. 일요일 아침만 되면 교회 가야 해서 마음이 무거웠거든요. 어쩜 제가 잘못된 교회들만 다녔던 걸 수도 있고요. 아버지가 코로나가 끝난지가 언젠데 교회는 언제 다시 올 거냐고 물으실 때마다 "다음달에 갈게요~"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요즘 성당 열심히 나가고 있습니다. ^^;;; 뼛속까지 무신론자인 줄 알았는데... 무신론도 저한테는 일종의 종교였네요. ㅎㅎ
근데 전 라이프오브파이 읽으니 불가지론자 쪽이더라고요. 파이가 절 되게 싫어하겠지만 어쩔 수 없네요. ㅎㅎ 나중에 일을 완전히 그만두면 혼자만의 새벽기도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분명 기도하다 쓰러져 자겠지만요. 성당 열심히 다니시는 거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소중한 존재를 위해 기도하는 건 가장 고귀한 행동 같아요. 교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불만은 많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중보기도의 힘은 믿으므로 요즘 팟캐스튼 들으면서 열심히 기도합니다~
어느 정도는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극좌에서 극우로 변신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은데, 그 분들은 좌우 방향이 아니라 극단주의 자체에 끌리는 거 같더라고요. 비슷하게, 무언가를 믿고 싶어 하는 기질 같은 게 저한테 늘 있었던 거 같습니다. 무신론 역시 종교라는 생각은 무신론자일 때도 하고 있었는데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보니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
화제로 지정된 대화
gentle reminder ; 다가오는 일요일(14일) 오후 4시, 동네책방 '수북강녕'에서 그믐클래식 2025 완독파티가 있습니다. 참석자 분들께서 따로 준비하실 것은 없어요. 한 해 동안 열심히 읽고 나눈 우리들을 스스로 격려하고 함께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다행히 일요일에는 눈비 소식이 아직까지 없네요. 그럼, 웃는 얼굴로 우리 곧 만나요.^^
아버지가 말했다. “우린 콜럼버스처럼 항해하는 거야!” “그는 인도를 찾아서 항해했는데요.”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엇. 저도 딱 같은 지점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이랑 영화가 상당히 분위기가 다르네요.
저희 집에서 같이 읽는 분은 도대체 언제 출항하냐며... 영화에선 금방 출항했는데 책 1/3을 읽는 동안 출항을 안해서 답답하다네요 전 출항 전 부분이 좋아서 듣고 또 들었어요. 지금은 배가 난파 당했습니다. ㅜㅜ "아빠! 엄마!"라고 정확한 발음으로 영화에서 파이가 부모님을 애타게 불렀던 게 생각나네요.
안녕하세요? GS아트센터에서 상연 중인 창작 초연 연극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고 왔습니다 책이나 영화 대비 아쉬운 점도 있고, 현장감 넘치는 무대 표현과 연출에 박수를 보낸 점도 있었습니다 아주 색다른 점이 많은 공연이었습니다 흠... 완독파티 때 많은 이야기 나누고 글도 또 남기겠습니다 :)
수북강녕 님의 후기 기대하고 있어요! 뮤지컬 넘 보고 싶거든요^^
오!! 부럽고 궁금합니다^^
어둠이 내렸다. 달이 뜨지 않았다. 구름이 별을 가렸다. 사물의 윤곽을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바다도, 구명보트도, 내 몸도 모든 게 사라졌다. 바다는 잔잔했고 바람마저 없어서, 소리에 의지해 배에 몸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다. 순수하고 추상적인 암흑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수평선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동물들이 움직이는 기미가 있는지 곁눈질했다. 그 밤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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