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클래식 2025] 12월, 파이 이야기

D-29
나는 하이에나에게 강한 증오심을 느꼈다. 녀석을 죽일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동정심도 가려져버린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해가 수평선 밑으로 들어가면서, 하루라는 시간과 가여운 얼룩말만 죽은 게 아니었다. 내 가족도 죽었다. 해가 지는 순간, 믿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고통과 슬픔으로 바뀌었다. 가족은 죽었다. 나는 그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었다. 가슴에 품기에는 얼마나 지독한 일인가! 형을 잃는 것……. 함께 나이 드는 경험을 하고, 형수와 삶의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를 칠 조카들을 선사해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주고, 가지를 받쳐주는 기둥처럼 나를 든든히 받쳐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머리 위의 태양을 잃는다는 것.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나는 방수포에 누워서, 양팔에 얼굴을 묻고 밤새 슬퍼하며 울었다. 하이에나는 밤새 얼룩말을 먹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우리는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운다. 어떤 대가를 치르든 싸우고, 빼앗기며, 성공의 불확실성도 받아들인다. 우리는 끝까지 싸운다. 그것은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놓아버리지 않는 것은 타고난 것이다. 그것은 생에 대한 허기로 뭉쳐진 아둔함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이것은 말로 옮기기가 어렵다. 근본을 흔드는 공포, 생명의 끝에 다가서서 느끼는 진짜 공포는 욕창처럼 기억에 둥지를 튼다. 그것은 모든 것을 썩게 한다. 그것에 대한 말까지도 썩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힘껏 싸워야 한다. 거기에 말의 빛이 비추도록 열심히 싸워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가 피하려 하고 심지어는 잊으려 하는 고요한 어둠으로 다가오면 우리는 더 심한 공포의 공격에 노출된다. 우리를 패배시킨 적과 진정으로 싸우지 않았으므로.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곧 우리는 무모한 결정을 내린다. 마지막 연합군인 희망과 신뢰를 버린다. 이제 스스로 패배한 것이다. 인상에 불과한 공포심이 승리를 거둔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이렇게 공포심은 우리 몸에 깃들고, 몸은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이미 인식한다. 벌써 폐는 새처럼 날아갔고, 창자는 뱀처럼 스멀스멀 빠져나갔다. 이제 혀가 주머니쥐처럼 축 늘어지고, 턱은 그 자리에서 덜컹댄다. 귀는 들리지 않는다. 근육이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처럼 떨리고, 무릎은 춤추듯 흔들린다. 심장은 지나치게 경직된 반면 괄약근은 지나치게 이완된다. 몸의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다. 모든 부분이 서로 떨어진다. 눈만 제대로 작용한다. 눈은 언제나 공포심에 쏠려 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나를 진정시킨 것은 바로 리처드 파커였다. 이 이야기의 아이러니가 바로 그 대목이다. 무서워 죽을 지경으로 만든 바로 그 장본인이 내게 평온함과 목적의식과 심지어 온전함까지 안겨주다니.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무지는 최악의 의사인 반면, 휴식과 잠은 최고의 간호사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불필요한 노력은 피해야 한다. 하지만 게으른 마음은 주저 앉게 할 수 있으므로, 뭐든 가벼운 것으로 정신을 분산시켜야 한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었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불쌍한 죽은 영혼을 기리며 마구 흐느꼈다. 감각이 있는 것을 죽이기는 처음이었다. 이제 난 살생을 저질렀다. 이제 카인 같은 죄인이었다. 책벌레에 신앙심 깊던 열여섯 살 순진한 소년이 이제 손에 피를 묻혔다. 짊어지기에는 너무나 끔찍한 짐이다. 감각을 느끼는 것은 미물이라도 신성하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이 날치를 잊지 않는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한데 사실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아주 단순하고 잔혹하다. 인간은 무슨 일에든 익숙해질 수 있다. 살해행위라 할지라도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날이 밝았다. 아주 빠르게. 하지만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동이 텄다. 하늘 구석에서부터 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공기에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잔잔한 바다가 주위에 커다란 책처럼 펼쳐졌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80,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표현이 너무 예뻐서 좋았어요. 잔잔한 바다를 펼친 책으로 비유하다니...!
내 안에서 충격과 혐오와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하이에나에게 강한 증오심을 느꼈다. 녀석을 죽일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분노도 오래가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솔직해져야겠다. 얼룩말에 대한 연민도 오래가지 않았다. 내 목숨이 위협받을 때는, 생존을 향한 이기적이고 무시무시한 갈망에 동정심도 가려져버린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81,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하지만 바다에서의 두 번째 밤은 내 기억에 유독 고통스럽게 남아 있다. 평범한 아픔도 더 심하게 느껴졌고, 흐느낌과 슬픔과 정신의 고통으로 낙심했던 그 밤은 첫날의 초조감과는 달랐다. 감정을 온전히 느낄 힘이 남아 있었기에 후에 맞은 밤들과도 달랐다. 무시무시한 저녁이 가고 무시무시한 밤이 이어졌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186,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제가 종종 울적할 때면 이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힘이 남아도는 구나.. 별 것도 아닌 것들에 자꾸 연연하고... 아무 생각 못하게 굴려져야(?) 정신차리지 싶은 마음이요. '감정을 온전히 느낄 힘'이 있기에 더 힘들 수 있다는 점이 와닿았어요.
형을 잃는 것....... 함께 나이 드는 경험을 하고, 형수와 삶의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를 칠 조카들을 선사해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아버지를 잃는다는 것....... 길잡이가 되어 도움을 주고, 가지를 받쳐주는 기둥처럼 나를 든든히 받쳐줄 사람을 잃는다는 것. 어머니를 잃는다는 것....... 머리 위의 태양을 잃는다는 것. 미안하지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못하겠다. 나는 방수포에 누워서, 양팔에 얼굴을 묻고 밤새 슬퍼하며 울었다. 하이에나는 밤새 얼룩말을 먹었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책을 다 읽고 나니 이 상황도 다르게 보이네요. 흡.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파이 이야기 - 개정판 p.247, 얀 마텔 지음, 공경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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