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역설적으로 푸코의 낙관은 실패합니다. 이게 정말 핵심 같아서 조금 길게 정리했습니다. 여기에는 제가 아래 링크로 연결할 한국의 푸코주의자(였던) 서동진 선생님, 영국의 푸코주의자였던 니컬라스 로즈 같은 사회학자와 제가 인터뷰했던 내용까지 참고해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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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가 사르트르를 “박물관의 유물”이라 조롱하며 지성사의 왕좌에 올랐던 1966년, 그 승리의 축제 한가운데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 인물은 장 마리 도메나크였습니다. 그는 푸코에게 물었습니다. “체계의 강제를 도입하는 것은 진보주의적 정치가 개입할 토대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 이 짧은 질문은 푸코주의가 거둔 거대한 지적 승리 뒤에 드리워진 짙은 그림자를 예고합니다.
푸코는 이 질문에 대해 진보란 관념적 열정이 아니라 ‘역사적 조건과 규칙을 인식하는 것’이라 답하며 비켜갔습니다. 그러나 반세기가 흐른 뒤, 푸코를 따랐던 후대의 학자들은 도메나크가 우려했던 그 ‘지적 무력감’의 심연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푸코의 도구가 세상을 설명하는 데는 완벽했을지 모르나, 세상을 바꾸는 동력이 되기에는 너무나 차가웠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푸코를 따랐던 니컬러스 로즈와 서동진이라는 두 지식인의 목소리를 살펴야 합니다.
영국의 사회학자 니컬러스 로즈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신자유주의 분석의 도구로 극한까지 밀어붙였습니다. 그는 신자유주의가 우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자유로울 것’을 강요함으로써 지배한다는 역설을 명쾌하게 규명했습니다. 자유가 해방의 무기가 아닌 통치의 수단으로 전락했다는 그의 분석은 탁월했습니다. 하지만 분석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돌연 연구 중단을 선언합니다. 통치성 연구가 “창의성을 잃고 반복적 분석에 빠졌다”는 그의 토로는, 설계도를 다 파악한 뒤에도 탈출구를 찾지 못한 지식인의 피로감이었습니다.
한국의 지식인 서동진의 궤적은 이 딜레마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1980~90년대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어떻게 자본이 원하는 ‘자기 계발하는 주체’로 포섭되었는지를 푸코의 언어로 해부했습니다. 그는 민주화가 사실은 신자유주의를 준비하는 과정이었으며, 우리가 추구한 자유가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동력이 되었다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냉철한 분석의 끝에서 그는 깊은 우울증을 고백합니다. “왜 지배받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그의 탄식은 도메나크의 질문에 대한 40년 만의 고통스러운 응답이었습니다.
서동진이 결국 “다시 사르트르를 읽는다”고 말하며 ‘주체의 의지’를 소환하는 인터뷰의 한 대목은 지성사의 반전입니다. 푸코가 1966년에 그토록 경멸하며 묻어버렸던 ‘주체’, ‘결단’, ‘열정’이라는 단어들이 아니고서는 이 완벽한 체계의 감옥을 깰 방법이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푸코의 분석적 메스는 암세포를 정확히 찾아냈지만, 환자가 다시 일어설 생명력까지는 주지 못했던 셈입니다. 이것은 구조주의가 거둔 ‘설명의 승리’이자 ‘실천의 패배’를 상징합니다.
1966년의 푸코와 사르트르 논쟁을 다시 읽을 필요가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푸코가 준 정교한 ‘체계의 지도’는 우리를 옭아매는 권력의 작동 방식을 여전히 가장 잘 설명해 줍니다. 하지만 그 지도를 들고 이 억압의 감옥을 탈출하려면, 푸코가 비웃었던 사르트르의 ‘무모한 자유’와 ‘주체적 결단’이 다시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책걸상 '벽돌 책' 함께 읽기] #29. <미셸 푸코, 1926~1984>
D-29

YG

YG
마르크스를 버렸다! 푸코를 따랐다! 생명을 말하다!
[인터뷰] 사회학자 니컬라스 로즈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1987714

YG
노무현·이명박 낳은 '괴물'은 어떻게 탄생했나?
[인터뷰]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 계발의 의지>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1957174

dobedo
가끔 번역자 '서동욱'의 이름을 볼 때마다 서동진 씨는 뭐 하나, 왜 안 보이나 생각했는데 반갑네요. 며칠 전에도 그랬는데, 근황이라기엔 꽤 시간이 지난 기사긴 하지만 왜 안 보였는지는 미루어 짐작해 보기에 충분하네요. 아팠다고 들어서 투병을 길게 하나 생각했는데 무기력이었던 거군요.
aida
아.. 챗GPT보다 천배 만매 훌륭하신 @YG 님의 글에 감동받았습니다...시체를 해부해 내린 푸코의 진단는 냉정함 뿐이고 나아갈 동력도 방향도 잃어버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1968년 주체의 열정이 없었다면 제 삶은 많이 달랐을 것 같습니다.

꽃의요정
소위 말하는 '지성인의 딜레마'?에 빠져 슬퍼하는 푸코/니컬라스/서동진 님이 떠오르네요.
니컬러스 로즈가 "창의성을 잃고 반복적 분석에 빠졌다."며 연구 중단을 한 것도 왜 그런지 알 거 같고요. ^^;;
'자유'에 대해 부정적으로 논하는 책들을 요즘 많이 보게 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를 따지면 저 또한 수렁에 빠 져 버리거든요.
그럼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냐?라고 생각해도 인류가 항상 좋은 쪽으로만 진행해 가는 것도 아니고요. 특히 요즘 세계 상황을 보면...에휴....
하지만, 변하지 않는다고 침묵하고 있는 것이 가장 안 좋은 '실천' 같아요. (저 말입니까? ㅎㅎ)
큰글자책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 아직 100쪽 정도밖에 못 읽었지만, 아주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도롱
‘딜레마’가 어울리는 단어인 거 같아요. 체계에 대한 분석연구에만 집중하면 타성에 갇히기도 쉽겠어요.

향팔
고맙습니다. YG님의 정리가 오늘 독서에 정말로 도움이 많이 됐어요 ㅠ 공유해주신 인터뷰 두 꼭지는 쭈욱 훑어봤는데 이따 밤에 다시 정독해보겠습니다. 서동진 선생님 책은 꼭 읽어보고 싶어서 담아뒀습니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 -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탄생한국사회의 다양한 층위, 구체적인 맥락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주체 형성의 논리가 어떻게 스며들고 작동하는지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를 사회, 정치, 행정, 교육, 문화 등 자본주의 사회의 전 분야를 총체적으로 조직하는 '새로운 합리성'으로 바라보고 근본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것. 이 책은 1980년대 산업구조조정에서부터 20년간의 흐름이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새로운 주체화 방식에 있음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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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해
와... 저도 다른 분들 말씀처럼 @YG 님이 정리해주신 내용과 기사까지 읽고 나니 그나마(?)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근데 이번 모임은 남겨주신 글을 읽을 때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읽곤 합니다(아 이건 집중할 때 제 습관이에요. 하하하). 그만큼 몰입도가 높다는 뜻이겠죠? 아니면 제 이해력이 부족해서 재차 읽거나...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기사를 읽다가 문득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가 떠오르기도 했는데요(왜 자유를 줬는데 누리지를 못하니...). 자유라는 명목하에 결국은 또 어딘가에 종속되어가는 인간의 모습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저도 @꽃의요정 님 말씀처럼 계속해서 열심히 따라가겠습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등을 통해, 수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주저가 번역가 김석희의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새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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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
YG님 설명으로 도움이 많이 됐어요!
“왜 지배받는지는 알겠는데,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이 부분이 푸코의 약한 점이었네요.
저도 좀 찾아보니 푸코 이론의 아쉬운 것이 대안이 강하지 못한 것이었더라구요. 푸코는 어떠한 방향을 제시하고 싶지는 않았나봐요.

borumis
설명 감사합니다. 저는 여태껏 푸코가 탈구조주의(해체주의)인지 구조주의인지도 헷갈렸던 것 같아요. '푸코의 분석적 메스는 암세포를 정확히 찾아냈지만, 환자가 다시 일어설 생명력까지는 주지 못했던 셈입니다. ' 이 설명으로 조금 더 명확해진 것 같 네요..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 반대로 구조에 오히려 갇힌 아이러니가 이전에 '광기와 비이성'이 정신의학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다가 나중에 오히려 반정신의학에서 호응을 보이면서 반대로 비난받은 것처럼 푸코의 사상은 양날의 검처럼 자기 자신을 다치게 하는 메스가 될 수도 있겠어요..

YG
우선 이 인터뷰의 맥락을 살펴보겠습니다.
1. 도메나크는 가톨릭 좌파 잡지인 <에스프리(Esprit)>의 편집장이었습니다. 이 잡지는 사르트르와 결이 다르지만 역시나 ‘인간의 존엄성, 의지, 윤리적 결단’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걱정합니다. ‘푸코 당신 말대로라면, 인간은 거대한 체계의 부속품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는(진보 정치) 게 무슨 소용인가?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면, 혁명은 불가능한 것 아닌가?’
도메나크가 던진 질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구조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두 가지밖에 없다는 비판입니다. 순응하거나(“어차피 구조가 다 결정해”라며 체계를 받아들이고 체념하거나), 야만(이성적인 대화나 노력은 통하지 않으니, 체계를 부수기 위해 테러와 같은 맹목적인 외부의 폭력)을 불러오거나.
즉, 푸코의 철학에는 합리적인 진보 정치가 설 땅이 없다고 보는 것이죠.
3. 여기서 푸코의 대답은 매우 냉철하고 전략적입니다. 그는 사르트르식의 ‘뜨거운 진보’를 ‘차가운 진보’로 대체합니다. 사르트르와 도메나크가 ‘우리가 꿈을 꾸고, 자유롭게 상상하고, 열정을 가지면 세상은 바뀐다’고 보았다면, 푸코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역사적 조건과 규칙을 정밀하게 분석해야 한다’고 대꾸한 것이죠.
즉, 푸코에게 진정한 정치는 거리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작동하는 미세한 규칙(담론의 질서)을 해부하는 것입니다.
4. 이 대목에서 에리봉이 마지막에 덧붙인 “1968년 5월 호에 실렸던가”라는 문장도 의미심장합니다. 푸코가 “주체의 열정은 중요하지 않다, 냉철한 규칙 분석이 중요하다”고 말한 인터뷰가 실린 바로 1968년 5월에, 파리의 거리에서는 68 혁명이 터졌습니다. 학생들은 사르트르식의 ‘주체의 열정과 상상력(“상상력에게 권력을!”)’으로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죠.

연해
“ 그러니까 푸코는 매 단계마다 연속적인 수정작업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나서는 그것을 모두 바꾼다. 『지식의 고고학』에서 그는 그럴 권리를 요구했다. "수많은 고통과 희열 속에서 글을 쓰고, 머리를 숙인 채 고집스럽게 일에 전념하는 한편으로 나는-약간 허약한 손으로-내가 그 안에서 모험을 감행할 미로를 하나 마련한다. 그 미로 안에서 나는 내 가설을 이리저리 옮기고, 그 가설에 지하통 로를 파 주기도 하고, 원래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그것을 깊숙이 땅에 박기도 하고, 그 가설의 경로를 요약해 주거나 또는 왜곡하는 돌출물을 가설하기도 한다. 거기서 나는 길을 잃고, 결코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될 시선들 앞에 내 자신을 노출시킨다. 이렇게 얼굴을 갖지 않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나 말고도 더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누구인지 묻지 말고, 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기를 강요하지 말라. 그것은 호적 관리의 도덕일 뿐이다. 그 도덕은 우리의 서류를 지배한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만은 우리를 제발 좀 자유롭게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 ”
『미셸 푸코, 1926~1984』 p.306, 디디에 에리봉 지음, 박정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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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로 지정된 대화

YG
오늘 12월 19일 금요일에는 2부 마지막 장(6장) '광활한 바다'를 읽습니다. 『말과 사물』로 스타가 된 푸코는 1966년 9월부터 2년간 프랑스를 떠나 튀니지의 튀니스 대학에서 일합니다. 그렇게 튀니스에 있을 때, 프랑스는 1968년 5월 혁명의 격랑에 휩쓸리게 됩니다. (푸코도 그 후속탄을 맞는데, 그건 3부 1장에 나옵니다.)
튀니지는 이탈리아 남서쪽 건너편의 아프리카 북부에 있는 나라입니다. 튀니지와 이탈리아 사이에 그 유명한 휴양지 섬 몰타가 있습니다. 알제리와 리비아 사이에 있는 나라이고, 오랫동안 프랑스의 식민지였습니다(1882~1956년).
하지만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죠. 로마와 세 차례 전쟁(포에니 전쟁)을 했던 명장 한니발의 카르타고가 바로 튀니지의 옛 이름입니다.

YG
푸코는 튀니스 인근의 시디 부 사이드에서 살았는데,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한국 광고에도 나올 정도로 해변이 아름다운 휴양지라고 합니다. 푸코가 부럽네요. :)

연해
시디 부 사이드는 찾아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아름답고 예쁘네요. 튀니지의 산토리니라 불릴 정도라고. 파랑파랑 포카리스웨트 광고가 떠오릅니다:)

향팔
정말 멋진 곳이네요. 길냥이 천국인 것도 좋고요.

연해
오, 길냥이 말씀하시니까 오늘 아침에 공원 산책하다가 만났던 길냥이가 떠오릅니다. 저를 보고 날렵하게 도망을 가버렸지만(힝...) 날이 추운데도 여전히 많이 보이더라고요.

향팔
아 너무 귀여운 (힝…)에 웃음이 나오네요. 맞아요, 이나라 도시의 길냥이들은 인간을 보면 날렵하게 도망치기 바쁘죠. 간혹 손을 많이 탄 듯한 아이들(거의 유기묘가 아닐까 싶어요)도 있긴 하지만요. 튀르키예 여행 갔을 때 보니까 거기도 길냥이와 길댕이들의 천국이더라고요. 이슬람권 국가들이 특히 그런가봅니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고양이 집사라서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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