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여러 가닥의 가지들이 중앙에서 교차하는, 복잡하게 생긴 구조물 옆에 멈춰 섰다. … 그곳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혼란 그 자체라는 인상을 받았다. 구조물 정면은 와이어 형태의 ‘솔’로 뒤덮인 삼각판으로 구성되었고, 두꺼운 나뭇가지같이 보이는 막대 골조가 판의 안쪽을 떠받치고 있었다. … 전체적인 모습은 무수히 많은 케이블이 사방으로 엉킨, 거대한 코일 매트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안쪽에서 전류나 극성, 잔류 자기, 방사능의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 (p.65)
…
“박사님은 이게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p.66)
…
“… 내가 보기에는 ….”
…
“… 어떤 생명체가 머물다가 폐허가 된 곳 같지는 않아요. … 굳이 비교할 대상을 찾는다면, 아마 어떤 기계가 아닐까 합니다.”(p.67) ”
이제 ‘폐허 속에서’까지 읽었습니다. 저는 하드코어 SF의 경우에 특히 도입부에서 이해 속도가 느려서 책장이 빨리 넘어가지는 않는 편인데요. 지난번에 읽었던 『솔라리스』와 갑자기 비교가 되면서 정신이 번쩍 드네요. 책이 새롭게 보이면서 조금 속도가 났습니다. ^^;
『솔라리스』를 읽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는데요, 혹시 작가가 사이버네틱스를 계속 실험하고 있는 건가 싶어요. 『솔라리스』가 1961년, 『우주 순양함 무적호』가 1964년이고, 렘이 철학 에세이로 썼다고 하는 『대화(Dialogues)』r가 1957년, 사이버네틱스를 본격적으로 논했다고 하는 『기술학 대전(Summa Technologiae)』이 1964년이더라고요. 둘 다 기술, 사이버네틱스, 항상성, 진화, 인식, 인간의 지성 등에 대한 것이라고 하고요.
재밌는 것은 『솔라리스』는 유기물로, 『우주 순양함 무적호』는 무기물(기계)로 사이버네틱스를 실험한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노버트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 동물과 기계의 제어와 커뮤니케이션』(2023. 읻다에서 출판)은 1948년에 나왔지만, 검색해보니 렘은 폴란드 사람이고 당시 냉전 시기라 위너나 미국의 연구 그룹(메이시 회의 등)과는 교류가 없었다고 하네요.
렘 혼자서 위너의 책 등을 보며 혼자 공부하고 비판적으로 소화해서 에세이, 논픽션, 소설 등 자기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고 실험을 한 게 아닐까요? 렘은 사이버네틱스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고 하네요.
밥심
사이버네틱스, 외계 존재와의 조우 등에 대해 작가가 관심이 많았고 이를 소설이나 에세이로 쓴 것 같아요. 테드 창 같은 작 가는 비록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외계 존재와의 의사소통에 성공하는 이야기(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썼지만 램은 우리와 전혀 다른 외계 존재들을 등장시켜 의사소통이 어렵네요.
은화
솔라리스도 그렇고 이 작품에서도 렘 작가는 대상을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계속 질문을 던지네요. 외계와의 접촉을 다룬 SF작품들 중에는 인간과 다르면서도 여전히 인간의 면모가 담긴 문명을 원하는 소망이 자주 보이죠.
같은 사람끼리도 국적과 이해관계와 신념에 따라 서로의 입장과 주의, 사상이 다르고 이해하지 못해 갈등하고 해코지를 하죠. 하물며 물리적인 환경이 다른 행성에서 기원한 생명이 있다면 인간의 기존 관념과 지식으로 이해한다는 건 인간 중심적인 바람 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감각기관으로 보는 세상은 아주 제한적이라죠? 인간은 가시광선과 가청영역의 시각/청각으로 세계를 이해하지만 빛은 자외선과 적외선도 존재하고, 동물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진동과 초음파로도 세상을 인식하죠. 동일한 물리적 환경에 있음에도 각자의 특성에 따라 세계를 다르게 받아들인다면 과연 '대상을 온전히 이해한다'라는 게 가능한지, 인간의 지식이 인간 밖의 세상에 의미가 있는지 계속 물음을 던지는 것 같습니다.
borori
솔라리스에서도 느꼈지만 진정한 외계와의 만남을 책으로 진하게 만나보는 기분이 들어 흥미로우면서도 정교하게 느껴져 빠져드네요. 대체 어떤 행성인가?? 물음표를 달고 계속 읽게 됩니다. 👍
은화
물음표 하나를 넘기면 또 다른 물음표가 생겨서 다음 장을 읽을 수밖에 없게 만드네요. 오늘 거의 반절을 후딱 읽어버렸습니다. 솔라리스에서는 바다를 연구해온 연구이론들과 사상의 흐름을 앞단에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비해 여기서는 행성과 유적의 정체가 무엇일지 계속 꼬리를 물고 쫓게 돼요. 렘 작가가 장마다 이야기를 끊는 솜씨가 훌륭하네요 😁
밥심
그래서 이 책은 여러번 나눠서 읽기 힘든 것 같아요. 저도 이미 다 읽었습니다. ㅎㅎ
은화
구조물이 파괴되어 혼란스러운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인공적일 만큼 규칙적인 형태를 이루는 그 가지들은 결코 생명체일 수 없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p.61,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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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여긴 도시가 아니었어…….”
로한은 자신이 목격한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서 정리하듯 갑자기 외쳤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p.68,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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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 “사실상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이라서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던 겁니다. 마치 육지로 생물체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무엇인가가 막고 있는 것 같이 보입니다…….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듯이요…….” ”
『우주 순양함 무 적호』 p.69,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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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뭔가가 그것들을 아예 바닷속으로 밀어냈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에는 현재까지 육지로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p.70,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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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화
“그렇다면 박사님은 그것들이 이미 탐사기를 봤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뭘 봤는지는 나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장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은 왜 가지고 있는 걸까요?”
『우주 순양함 무적호』 p.70,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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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erry
“ 가장 무서운 사실은 아마도 콘도르호와 무적호의 선내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우주선은 쌍둥이 함선이었다. 로한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기억 속에 깊게 박힌 광란의 이미지들이 되살아났다. ”
『우주 순양함 무적호』 p101,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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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merry
콘도르호까지 읽었습니다. 와. 읽을수록 긴장도가 확 올라가면서 다음 장까지 연이어 읽고 싶게 하네요. 올해 상반기에 러브크래프트 소설을 몇 개 조금씩 읽어봤는데요. 호러까지는 아니더라도 정체불명의 미지의 무언가로부터 공포감이 로한이 느끼는 공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저런 추측과 여러 분야 과학자들이 싸우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네요.
밥심
저 역시 이 소설을 읽다가 러브크래프트의 코즈믹 호러와 유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은화
렘 작가가 공포 소설을 썼다면 굉장히 인기를 끌었을 것 같아요. 저도 수집 문장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콘도르호에서 겪은 공포와 미지의 감정을 전혀 다른 공간임에도 다시 느끼는 기시감.. 살면서 데자뷰를 겪을 때가 종종 있죠.
생각해보면 재밌는 게 콘도르호와 무적호는 제원이 같긴 해도 별개의 함선이죠. 그곳에 있던 사람들과 그들이 겪었던 시공간의 사건과 경험은 무적호가 동일하게 재현할 수 없으니까요.
로한과 무적호 선원들은 콘도르호를 쫓아 행성에 도착했고, 동일한 함선의 내부를 마주하게 되는데 마치 자신들이 밟게 될 미래를 먼저 맛보는 기분이었을 것 같습니다. 차라리 콘도르호의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라도 했지, 무적호의 사람들은 사건의 원인과 진실을 알지 못한채 '다가올 결과'의 단편을 봐버렸으니까요.
결과가 정해져 있지만 그곳에 이르는 과정은 전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포는 굉장히 가혹하게 느껴지기도 했어요. 로한이 그토록 공포에 질린 것도 이해가 갔습니다.
예전에 공포영화 중에 거울에 대한 작품을 본 적이 있어요. 거울에 깃든 귀신? 또는 악마?로 인해 사람들이 파멸하는 내용이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보지도 않았는데도 한동안 거울을 못 본 적이 있어요. 특히 밤이 되면 더더욱 그랬고요. 화장실이나 엘리베이터를 가기가 싫었습니다. 가상의 작품에서 일어난 일임에도, 사건이 일어난 장소들이 제가 가는 곳과 겹쳐 보이는 '익숙함'이 소름 끼쳤거든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되지만, 동일한 상황과 장소에서 자신도 그런 일을 겪을 것 같은 불안감을 단 세 문장으로 잡아내는 렘 작가의 표현이 좋았습니다. 공포를 주는 대상도, 구체적인 주변 묘사 없이도 상황과 분위기만으로 공포감을 끌어올리는 게 대단하네요.
김사과
저도 러브크래프트가 떠올랐어요!
은화
러브크래프트의 작품을 읽은 분들이 꽤 많네요. 전 대학생 때 학교 도서관에서 단편집을 읽었는데 어느 외딴 집의 식인 할아버지가 나오는 내용과 '그 집의 마녀' (제목이 정확하지 않네요) 가 기억에 남더라고요.
제게 러브크래프트 작가는 스멀스멀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한 공포감이었는데 렘 작가는 마치 텅 빈 방에 홀로 놓인채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공포감이랄까요.
김탱
안녕하세요~ 이번 시즌 처음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인사드려요.. 조금 늦었지만 ‘폐허 속에서 ‘까지 읽은 소감 주절주절 적어보았습니다.
1960년대에 발표된 작품이라는 점이 믿기지 않을 만큼, 우주선의 작동 방식이나 로봇, 기계장치의 움직임이 매우 자연스럽고 기술적으로도 설득력 있게 느껴졌습니다. 미지의 행성에 대한 묘사가 너무 디테일하고 사실적이어서 마치 내가 직접 행성을 탐험하는 것과 같은 몰입감을 주었습니다. 사막의 풍경 묘사는 프랭크 허버트의 ‘듄’이 떠오를 만큼 광할하지만, 치워도 다시 쌓이는 모래의 찜찜함과 집요함은 약간 결이 다르지만 일본 작가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연상시키기도 했습니다.
읽는 동안 몇가지 과학적 팩트와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 설정들이 약간은 거슬리긴 했지만 작품을 즐기는 데 크게 방해되진 않았습니다.
사실 이 작품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독서를 시작했습니다. 흥미진진한 SF 영화를 처음 접할 때처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르는 상태의 긴장감과 흥미진진함을 느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전개가 어떤 식으로 흘러갈지, 미지의 행성에서 미지의 존재와의 조우는 어떻게 이루어질지, 콘도르호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무적호의 미래는 어떻게 될지.. 이 모든 궁금즘을 품고 앞으로 천천히 즐겨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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