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읽는 SF소설] 09.우주 순양함 무적호 - 스타니스와프 렘

D-29
화제로 지정된 대화
<구름>부터 레기스 행성이 가리고 있던 존재들이 점점 드러나지만 그럴수록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늘어나기만 하는 전개가 흥미로운데요. 안개를 뚫고 나가려고 전진하면 할수록 더 깊은 안개에 휩싸이는 기분입니다. 이번 주차의 일정에서 아래의 내용들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이번 일정의 내용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이나 감상을 공유해주세요. 2) 라우다 박사의 가설에서 그에 대해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3) 라우다 박사는 함선의 분위기를 알고 있을 법 한데도 왜 먼저 단독으로 선장에게 자신의 가설을 직보고 했을까요? 이후 라우다 박사와 다른 과학자들 간의 토론을 어떻게 보셨나요? 4) 라우다 박사가 말한 가설들(행성에 일어난 일, 기계들의 발전과정, 기계의 지각 유무)에 대해서 동의하시나요? 또는 납득할 수 없거나 그와 다르게 생각거나 반대하는 내용들이 있으신가요?
1) <구름>의 초반부에 더 이상 이렇다 할 사건이 없어지자 승무원들과 로한 모두 긴장이 사라지고 무덤덤해하는 묘사가 기억에 남았어요.(137~140p) 아무리 비극적인 사건이라도,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환경이라도 그 조건에 장기간 노출되면 그걸 당연시하게 되는 인간의 인식을 잘 묘사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슬픈 일이나 힘든 순간이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잊거나, 또는 그땐 그랬지 하며 돌아볼 수 있게 되죠. 레기스 행성의 환경과 그 곳에서 일어난 사건은 지구와 전혀 다르지만 그럼에도 무적호 승무원들은 일상을 유지하죠.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별개의 문제 같습니다. 뒷장에서 라우다 박사가 가설을 설명하면서 구름도 자연의 일부가 되었고, 자연은 인간의 가치판단과 무관하게 존재하므로 적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하죠. 우리가 자연의 풍경이나 동식물을 보며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 그런 환경에 이미 오래도록 노출되고 적응이 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지구 밖의 세계도 나름의 자연법칙이 존재하고, 또 거기서 살아가는 존재들이 있다면 특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네요. 우리의 입장에서는 외계이지만, 외계에서 봤을 때는 지구나 지구에서 온 우리가 '외계'일 테니까요. 무적호의 승무원들이 콘도르호 사태에 익숙해지고 점차 위기의식도 없어지고, 기억에서 잊는다고 하여 그들이 공감능력이 없거나 본성이 냉혹한 사람들은 아니죠. 그들에게는 그 환경이 일상이 되어간 겁니다. 구름이 자연물이 되었듯, 인간도 자신의 주변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 거죠. 우리에게 당연한 것, 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가치판단이 굉장히 자의적인 개념임을 말한 것 같습니다.
2,3) 라우다 박사의 가설의 설득력도 흥미롭지만 함선 안에서 과학자들끼리 가설을 갑론을박 하는 구도도 인상 깊었습니다. 마치 가설을 무기처럼 이용하여 서로 대결을 하는 느낌이거든요. 볼민 박사가 항의를 하자 대학원생도 못할 거라고 면박을 주는 라우다의 태도나, 라우다 박사의 보고 이후 그에게 유독 비판을 집중하는 회의 장면도 그렇죠. 가설 자체의 설득력이나 과학적 논거와는 별개로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언변을 일종의 신분이나 계급처럼 서로 자랑하며 구별 짓는 모습입니다. 아마 라우다 박사가 호르파흐에게 먼저 직보고 한 이유도 이런 의도이지 않았을까 싶었어요. 본인이 과학자들 집단 내에서도 가장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공식적으로 함장에게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가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고 틀린 부분이 있더라도 호르파흐의 의견에 영향력을 주길 원했던 게 아닐까요? 그렇게 본다면 라우다 박사는 가설을 과학자로서 접근하고 사용했다기 보다는 한 명의 권위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같고요. 그 전까지 미묘하게 유지하던 힘의 균형을 라우다 박사가 먼저 깨버렸기에 다른 과학자들도 더 민감하게 반응한 것 같습니다. 객관적이고 논리적일 것 같은 사람들도 결국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달까요. 과학이라는 객관적인 영역이 얼마나 주관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지 교묘한 정치극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라우다 박사의 가설을 읽으면서 이전 대화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제임스 P. 호건의 <생명창조자의 율법>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호건의 작품에서도 내용과 방향성이나 주제는 전혀 다르지만 기계에 의한 진화를 다루고 있는데요. 먼저 이 작품을 따로 읽어보셨거나, 아니면 제 과거 모임에 참여하셨던 분들은 두 작품에서의 진화의 조건과 방향이 다르게 흘러가는 데서 흥미를 느꼈을 듯 합니다. 호건의 작품 초반부에서는 전지적인 시점에서 불시착한 기계들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문장들을 일부 가져와 봅니다. 두 작품의 상황 모두 자원이 희소한 환경임에도 한 쪽은 환경에 실시간으로 대응하기 위한 자율적 의사결정과 판단의 방향성으로 움직인 반면, 레기스에서는 다른 경쟁 개체들을 제거하면서 자가복제와 대응이 쉬운 방향으로 발전하는 차이가 재밌네요.
생명창조자의 율법미래의 문학 8권. 장편소설 <별의 계승자>로 이름을 알린 작가 제임스 P. 호건의 1983년 작품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의 시대상과 과학적 상상력을 절묘하게 융합시킨 제임스 P. 호건의 초기 명작이다.
바위투성이 해안 절벽에서 내륙 지방으로 공장들이 계속 퍼져 나갔다. 부모 소프트웨어의 원본이 가지는 불안정성은 자식 세대의 사본들에서도 계속 발견되었고, 새로운 공장과 다양한 종이 섞인 로봇 후손들은 갈수록 형태와 역할 모두가 분화해나갔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0,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대부분의 장소에서 원자재가 부족했으며, 그로 인해 선택압이 발생했다. 공장과 로봇으로 구성된 공동체에는 탐색, 조달, 공장의 필요에 따른 제각각의 '입맛'을 가진 청소부 로봇이 일정 비율로 존재했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0~21,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청소부 로봇과 부품 회수 로봇이 앞으로 찾아올 기묘한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공장의 작업 관리자들이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와는 관계없이, 당장 생산에 들어갈 수 있는 로봇은 결국 필요한 부품이 존재하는 로봇 뿐이었다. 그리고 부품의 재고 여부는 결국 부품을 탐지해내는 청소부 로봇의 능력, 또는 다른 로봇을 분해 즉 '소화'시켜서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부품을 만드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1,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그곳의 모든 로봇은 백업 모드만을 사용했으며, 해당 공장에서 파생한 다른 모든 공장들도 같은 전통을 따랐다. 그러나 이는 곧 그런 공장들의 가동 거리가 극도로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런 '결함'은 결국 결함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채집 부대는 더 멀리 떨어진 곳까지 움직이며 보다 넓은 영역을 통괄하기 시작했고, 종종 지리적으로 외딴곳에 있어서 손이 닿지 않던 사냥감을 회수해 돌아왔다. 선택압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로봇의 구조를 천천히 개량해나갔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4,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비교적 작은 개별 연산 장치에 의존하는 자율 제어 형식의 로봇은 눈앞의 문제에 대해 단순한 해결책 밖에 사용할 수 없었지만, 동시에 주변 환경과 직접 교류하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 따라서 자율 제어 형식의 로봇이 우점종이 되어 점차 표준 형태가 되었고, 무선 제어 형식은 쇠락하여 고립된 일부 지역에서만 살아남게 되었다.
생명창조자의 율법 p.24~25, 제임스 P. 호건 지음, 조호근 옮김
정확하게 대응되지는 않지만 호건의 소설에서는 진화가 인간의 진화(인류 문명의 진화?)를 따르는 듯한 느낌이고 렘의 소설에서는 그야말로 자연의 진화를 따르는 듯한 느낌이에요. 호건 소설 읽은지가 꽤 되어 가물가물하네요. ㅋㅎ
두 작품 모두에서 궁금한 점이 '과연 기계가 외부환경의 상태에 맞춰 자신을 개량/적응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였어요. 단지 장애물을 우회하거나, 위험에 대처하는 수동적인 반응을 넘어 자기자신 또는 후대의 복제개체들의 외형과 기능성을 능동적으로 변화해가는 것이 가능할지 말이죠. 그러려면 결국 모든 생명의 제1목표인 '생존본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기계도 과연 자기 스스로를 보존하려고 노력할지가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현재 생활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계와 프로그램들은 자기보존의 목적이 없죠. 생성형AI도 대화가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스스로의 작동을 계속 유지하는게 목표는 아니라고 보고요. 물론 미래에 기계에게 '자기자신을 지켜라/보존하라' 같은 명령을 입력하고 작동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서 전 지성이나 지능보다도 생에 대한 본능이 기계의 의식여부를 가름하는 기준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뿐 아니라 자신의 금속 ‘형제’인 지적 오토마톤들과 동시에 전투를 벌이는 환경에서도 진화를 이루었습니다. 다시 말해, 모든 생체 대응 기제와 더불어 지적 기계의 모든 지능 형태와 투쟁하며 양측 전선에서 전쟁을 치렀던 것입니다. 100만 년에 걸친 분투의 결과가 바로 탁월한 보편성과 완벽함을 갖춘 그들의 파괴력입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p.181~182,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온통 사막인 이유는 그들이 아무것도 짓지 않고, 아무 문명도 형성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가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가치 있는 것도 만들어 내지 않지요. 따라서 우리는 자연력을 대하듯 그들을 마주해야 합니다. 자연 역시 어떤 판단이다 가치를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 형성물들은 존재하기 위해 실존하고, 지속적으로 존재를 이어 가기 위해 작동하는, 그냥 그들 자체인 것입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p.185~186,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1) 구름의 공격들이 가장 인상 깊게 남으면서도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고 전혀 겪어보지 못한 공격에서 예측 불가한 상황이 더욱 두렵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2) AI를 만나고 있는 요즘의 시각으론 그럴 가능성이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생물체와 반대되는 본능에만 충실한 단순 진화라는 것이 독특하면서도 더욱 그럴싸하게 느껴졌습니다. 3) 위험에 대한 경고가 먼저라고 생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어쩌면 너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되어 보고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생각에 선수를 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후에 다수의 박사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는 걸 읽고 놀랐고 한편으로 서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해서 공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설을 읽는 동안 잠시 다르게 진화했지만 기계의 진화를 다룬 ‘종의 기원담’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4) 에이 설마? 뭔가 본체가 있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뒤로 갈수록 탄탄한 논리들에 납득이 되어 갔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고 본능만 남은 기계가 남았자는 설정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비이성적인 그 존재가 더욱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들에게 사람이란 단지 대뇌 피질 전위를 통해서 존재를 드러내는, 일종의 움직이는 물체일 뿐이었다.
우주 순양함 무적호 p260,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정인.필리프 다네츠키 옮김
https://youtu.be/Dtcn0AuFHfo 와 이거 게임이 있었네요... 에픽스토어에서 2만원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게임이 있을거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못했는데 잘 찾으셨네요.
저도 구글로 검색하다가 게임 영상이 많이 뜨길래 봤는데 색감이 굉장히 강렬하더라고요. 특히 초반의 유적을 묘사한 듯한 기계들의 흔적을 굉장히 다채롭게 표현해서 인상깊네요. 처음에 솔 모양이나 벌집 구멍라고 할 때는 상상이 쉽게 안떠올랐거든요
와~ 영상 자체도 엄청 멋있는 영화같은 게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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