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증정][번역가와 함께 읽기] <전차 B의 혼잡>

D-29
온갖 분야에서 모인 재료가 한 가마솥에서 뒤섞이고 이겨져 하나의 새로운 물건으로 태어나는 과정은,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제작되는 예술 작품에도 존재한다. (...) "가치 있는 독창성은 남과 다르다는 뜻이 아니다." "최고의 천재는 부채가 가장 많은 사람이다." (...) 아무리 위대한 작가가 쓴 걸작이라도, 아니 오히려 대가의 작품일수록 다른 문헌에서 나온 재료가 잔뜩 섞여 있는 법이다. 그 재료를 속속들이 탐색하는 작업은 흥미롭고 유익한 일이지, 작품과 작가의 가치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다. 요컨대 재료를 얼마나 잘 삭혔느냐, 부정한 성분을 얼만큼 씻어냈느냐가 중요하다.
전차 B의 혼잡 170-171,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어떤 사상 혹은 어떤 발명의 기원을 찾으려는 노력은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허무한 결론으로 끝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진짜로 위대한 모든 것이 다 차용물은 아니다. 여하튼 남이 주는 것이 무엇이든 좋은 것이라면 굳이 쓸데없이 따지지 말고 흔쾌히 받아 든 채 감사 인사를 전하는 쪽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자 행복한 사람일 테다.
전차 B의 혼잡 172,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대부분 요즘 모기장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푸념을 늘어놓지 않은 채 밤마다 치고 들어가 자는 이유는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 아버지와 어머니도 치고 잤기 때문이다. 모기장이란 원래 이런 거야, 하며 체념했을 뿐이다. 결코 이상적 모기장은 아니다.
전차 B의 혼잡 176-177,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꺼림칙하고 불안한 전조가 애매하게 오래 이어지는 동안 점점 뭔가가 다가온다. 그것이 돌연 터지는 순간 위험은 이미 코앞이다. 막상 위험이 현실이 되면 더는 꺼림칙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전차 B의 혼잡 182,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증기 난방기처럼 내 병도 왠지 전조, 파열, 평온이라는 세 단계를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것 같다. ... 가장 싫은 것은 '전조'의 길고 불안한 간격이다. '파열'은 가장 무서운 순간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이다. ... 불안의 압박에서 풀려나 귀중한 '평온'으로 넘어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어두운 그림자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만물이 일제히 아름다운 빛을 받으며 오래도록 바라 마지않던 평온한 천국이 찾아온다. 설령 그 평온이 죽음을 뜻할지라도 오히려 그 편이 몇 배는 더 아름답지 않을까.
전차 B의 혼잡 182-183,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선천적 뇌혈관 질환으로 뇌출혈이 일어나 중환자실에서 정신은 말짱한데 꼼짝도 않고 침대 위에서만 절대 안정을 취하고 몇일을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여러가지 신기한 소리에 귀를 쫑긋하고 시간의 흐름을 가늠해보며 지냈는데 그 후 두번째 출혈이 일어나서 응급수술에 들어갔죠. 저도 실은 선천적인 질환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이 질병에 관한 사전지식도 충분히 얻은 상태라 '파열'의 순간이 오자 사람들이 신기해할 정도로 차분했습니다. 저도 그래서 '전조'가 제일 불안한 시기라는 것, 하지만.. 번역가분 말대로 평온의 순간이 조금은 더 나중에 오길 바라는 마음도 공감이 가네요..
마지막 짧고 인상적인 작품 '빨강'을 읽고서는 저는 아, 그건 closed eye visualization (CEV)같은데.. 눈꺼풀 위의 혈관을 통한 빛이 남기는 잔상인데 빨강색이 가장 긴 파장이어서..라는 식으로 자동적으로 해석 모드에 들어가는 걸 보구 저도 어김없이 이과생이라는 실감이 오네요;; T라 미숙해~
데라다가 좋아했을 법한 감상이네요. 전 당시 세계를 휩쓸던 열강들의 제국주의가 떠올랐는데.
고양이가 앉아서 졸다니 신기했다.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양 남들에게 말했더니 익히 알던 사람은 다 웃었고 모르던 사람은 아무도 재미있어하지 않았다. 고양이의 이런 행동에 비친 인간의 자태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익살과 비애가 섞인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전차 B의 혼잡 43쪽,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별사탕은 제조 과정이 실로 신비롭다. 일단 정제된 설탕에 물 소량을 더해 냄비 안에서 녹인다. 걸쭉한 액체가 되면 별사탕의 핵인 양귀비씨를 넣고 주걱으로 휘젓는다. 그렇게 퍼 올리듯 계속 젓다 보면 저절로 별사탕 형태가 완성된다. 안에 심핵이 있고 그 주변에 설탕이 엉겨 붙어 점점 성장하는 현상 자체는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왜 저렇게 뿔이 솟아나며 자라나는지는 의문이다.
전차 B의 혼잡 162쪽,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또 숫자로 된 기록에서 우승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숫자가 대표하는 양 즉 크고 작은 점 외에서도 뛰어나다는 증거가 되지 않는다. 자명한 일이지만, 왕왕 잊히기 쉬운 사실이다.
전차 B의 혼잡 153,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우리도 왕왕 잊기 쉬운 일이지요.
맞아요. "공간 속에 정지한 점 하나의 위치를 결정할 때조차 수치 세 개(x, y, z)가 필요하다"는 말이 공감가는 이유겠죠.
│p.133│ 과연 커피는 무서운 독약이구나! 감탄하는 동시에 인간이란 존재가 실로 아주 적은 약물에도 한껏 지배당하는 가련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p.134│ 종교는 때때로 사람을 취하게 해서 감각과 이성을 마비시킨다는 점에서 술과 비슷하고, 커피는 감각을 예민하게 해서 통찰과 인식을 투명하게 한다는 점에서 철학과 비슷하다. 다만 술이나 종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경우는 많아도 커피나 철학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는 드물다. 전자는 신앙적이고 주관적이지만, 후자는 회의적이고 객관적이기 때문이리라.
커피 한잔에서 시작해 사상사까지 아우르는 데라다의 글맛이 살아 있는 문장이네요.
별사탕에 양귀비씨가...? 이 책을 읽으면서 몰랐던 사실들 많이 알아가는 것 같아요 ㅋㅋㅋ
옛날 방식이지요. 요즘은 거의 그렇게 안 만든데요.
행상인 소리는 어째서 스러져가는 걸까.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분명 점점 사라져가는 중이다. 보통교육을 받은 사람은 이제 대낮 길거리에서 소리치며 걸어 다니는 게 창피해서 못 하는 걸까. 아니면 목소리로 자기 존재를 알리고 얌전히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수동적 자세로는 장사가 안 되는 세상이 된 걸까. 혹은 행상이라는 일 자체가 요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경제 방식이 되어버린 걸까.
전차 B의 혼잡 145쪽, 데라다 도라히코 지음, 안은미 옮김
저흰 동네엔 여름이면 막걸리 파는 할아버지가 리어커를 끌고 다니시지요. 소리 치진 않으시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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